문장웹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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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세뇌(洗腦)
세뇌(洗腦) 양정자 11월의 북한산은 너무 아름다워 처연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곱게 물든 잎새들이 바람에 흩날려 어느새 발밑에 수북수북 쌓이고 있었다 바스락바스락 미끄러운 잎새들을 헤쳐 나가며 우리 장난스런 여러 산악회원들 입에서 자연스레 구르몽의 싯구절이 쏟아져 나왔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언제 어디서 우리는 이 시를 익혔던가 교과서에서였던가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이 싯귀에 오랫동안 점령당해 버렸던 우리들 낙엽 진 숲속에선 늘 아무 다른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마음속이 온통 이 싯귀로 법석임은 한편 즐겁고도 한편 무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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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시인 양정자 넓은 평수의 서울 아파트에 살고 있고 경기도 근교에 큰 밭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아마도 부자이리라. 잘 가꿔진 화단의 모란처럼 희희낙락 편히 살 수도 있는 그녀. 그런데도 그녀는 틈만 나면 밭으로 달려갔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자본에 철저히 물든 이 혼탁한 세상, 나름대로 순수함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자기 훈련,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아니었을까? 땡볕에 앉아 호미질을 하면서 그녀는 농약 없이 무섭게 자라 오르는 잡풀들과 싸웠다. 고추꽃 한가운데 엉겨 붙는 진딧물을 손으로 잡아내고, 아이구머니나, 밭에 숨어 있는 뱀들을 쫓아내기도 했고, 호르르호르르 지렁이 우는 소리도 들었다. 한여름 넓은 밭에는 그녀가 가꾼 콩과 팥, 온갖 야채가 풍성하고, 정원에는 벚나무, 때죽나무, 마가목, 주목, 향나무, 온갖 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꽃밭에는 온갖 야생초들, 원추리, 금강초롱, 금불초, 기름나물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