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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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중간이라는 말에 모였다
중간이라는 말에 모였다 이서화 중간은 쉽게 도출된다 쉽게 뭉쳐지고 수월하게 흩어진다 각자 끌고 온 거리를 버리는 일은 늘 중간에서 일어난다 다 같이 앞으로, 달려온 곳이 중간이라면 그보다 더 긍정적일 수 없다 우리는 모여서 앞과 뒤를 이야기했다 소리에도 중간이 있다면 고요가 앞일 것이다 누구는 옆으로 끼어들었지만 금방 앞이나 뒤가 되었다 누구는 앞을 목전에 두고 또 누구는 뒤에 퇴로를 두고 있지만 중간이라는 말에 모여선 하나같이 저 뒤쪽에 숨겨 놓고 있다 우리는 모여서 중간을 나누었지만 깜빡하고 중간을 두고 간 사람과 제 것인 양 들고 간 사람을 흉보기 바빴다 앞으로 달려온 중간에서 각자 뒤돌아갔다 그곳 또한 각자에겐 앞이었다 앞은 어디를 향해도 앞이었고 또 어디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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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장마
장마 이서화 십여 년째 혼자 사는 춘목할머니 빗물 떨어지는 처마 밑에 깨진 고무대야 찌그러진 양동이 몇 년 씻지 않은 개밥그릇 죽 늘어놓고 있다 왜냐고 물으니 저렇게 해놓으면 문밖에 꼭 누가 온 것 같아 좋으시단다 비가 올 때마다 퇴행성관절염을 앓는 미닫이문과 마루 엉덩이걸음으로 문턱을 넘는 춘목할머니, 처마 밑에 앉아 소란스럽게 떨어져 납작하게 흐르는 빗물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게 낙이다 오고 또 오는 비 온다는 말만 줄 서 있는 장마 그저 온다는 말만 들어도 반가운데 세숫대야에 물이 튀고 요란함으로 들썩거려 좋기도 하겠지만 비 그치고 그득그득 고여 있는 문밖을 어떻게 감당하시려는가 한사코 들어오라는 사십 년 된 방 한 칸 눅눅한 며칠이 이미 먼저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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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거울이 하는 일
거울이 하는 일 이서화 옷을 입어 볼 때마다 거울은 나랑 어울리지 않는다 옷들의 얼굴을 기억하는 일로 외출은 늘 늦어지기 일쑤다 분명 어디선가 입어 본 옷인데 어느 생에서는 예복으로도 혹은 상복으로도 입었던 것이 분명한 고르고도 골라 입는 옷 내 몸에 많은 옷이 살고 있다 기시감을 앓고 있다 옷에 몸을 맞추던 시절을 지나 다시 옷에 몸을 맞추는 이 계절의 나무들, 옷들은 그 주인의 품을 기억한다는데 내 몸에 딱 맞는, 맘에 드는 옷들이란 어떤 생의 한 벌 또는 단벌들이었을까 모르는 옷이 날마다 나무를 빠져나온다 나를 오래 입지 않았던 사람들은 구겨지고 기억하기 싫은 유행들이 봄을 지나서 다시 거울 속으로 사라진다 보이는 옷과 입어 보는 옷은 더 이상 내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거울이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