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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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시간의 그늘
시간의 그늘 이용헌 초사흘 달빛과 초나흘 달빛의 차이 열여드레 별빛과 열아흐레 별빛의 차이 달 내돋은 자리와 별 비낀 자리, 그 하루만큼의 변이 혹은 달빛과 별빛, 빛깔과 색깔, 그 한 낱내만큼의 간극 그 간극에 담겨 있는 티끌만큼의 순간 순간은 시간이 되고 시간은 빛이 되고 빛은 또 색이라는 무량수불 같은 묘법 하여 색은 공이요 공은 다시 한줌의 빈 그늘 끝내는 비울 것도 없고 지울 것도 없는 저 시공의 눈자위는 얼마나 깊은 것이냐 누천 밤의 달빛으로 허공을 이고 서 있는 청평사(淸平寺) 앞마당 잣나무 일주문 아래 시간은 생각의 잎바늘만큼 촘촘하게 슬픔의 그늘을 늘려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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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묵지(墨池)
묵지(墨池)* 이용헌 벼루의 가운데가 닳아 있다 움푹진 바닥에 먹물이 고여 있다 바람을 가르던 붓끝은 문밖을 향해 누웠고 막 피어난 풍란 한 그루 날숨에도 하늑인다 고요가 묵향을 문틈으로 나른다 문살에 비친 거미가 가부좌를 푼다 격자무늬 창문을 살며시 잦힌다 달을 품은 하늘은 한 장의 묵화 어둠 갈아 바른 허공에도 묵향이 퍼진다 지상의 화공이 붓을 들어 꽃을 그릴 때 천상의 화공은 여백만 칠했을 뿐 달을 그린 화공은 어디에 있는가 길 건너 미루나무 먹빛으로 촉촉하고 검푸른 들판위에 연못이 잠잠하다 갈필(渴筆)로 그리다 만 한 생애만이 마음속 늪지에서 거친 숨 적시고 있다 * 벼루의 오목한 부분으로 물이나 먹물을 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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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검은 밥그릇
검은 밥그릇 이용헌 늙은 거지가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갈퀴질을 하고 있네 늙은 거지가 검은 비닐봉지를 끌며 길가의 화단을 손으로 박박 긁고 있네 늙은 거지의 손에서 담배꽁초가 딸려 나오고 껌 종이가 딸려 나오고 썩은 나무이파리가 딸려 나오네 늙은 거지는 왜, 땅강아지도 쳐다보지 않을 쓰레기들을 마냥 긁어모으는 걸까 늙은 거지는 비닐봉지 가득 쓰레기들을 채우고 버릇처럼 꼭꼭 묶네 늙은 거지의 벙거지 아래 삐져 나온 머리카락도 꼭꼭 묶여 있네 아무리 쓸어 담아도 밥이 될 수 없는 지천의 햇살들 날이 기울어 그림자마저 벗고 끼니마저 벗어버린 실성의 순간에도 늙은 거지의 허기만은 한술의 허비도 없이 정신 속으로 흘러 들어갔으리 늙은 거지의 허기로 가득 찬 검은 몸뚱이가 어둠에 끌려가네 늙은 거지를 꼭꼭 묶은 도시의 어둠이 먹이를 박박 끌고 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