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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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그레이하운드의 기원
기원보다 더 기원 같은, 아니 더 그레이하운드 같은 아기 그레이하운드. 새끼를 보고 부모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을 넘어 개로 확장되던 순간이었다. 내가 증오하고 질투하던, 흉물스러운 암컷에게서 나온 이 잡종 강아지는 내 품을 파고들었다. 나는 두부 같았고, 그 강아지는 미꾸라지 같았다. 그 강아지를 보면서 깨달은 게 있다. 기원이 변했던 그 개는 그레이하운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내 머릿속의 그레이하운드는 귀가 아주 커서 얼굴을 덮을 정도로 늘어져 있고 그 귀에는 털이 수북해야 했다. 개로 변한 기원에게는 털이 덥수룩한 귀 대신 경쾌하게 말려 올라간 귀가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한 번도 그레이하운드라는 개를 본 적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그레이하운드’라는 견종을 좋아하지만 실제의 그레이하운드가 아닌 내가 상상하는 그레이하운드를 좋아한 것이었다. 분명한 것은, 기원보다는 이 강아지가 더 내가 상상한 그레이하운드에 가깝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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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발포정
정운이라는 이름의 키 작은 친구인데 매일 등하교를 같이하던 사이였다. 전학 오기 전까지는 그랬으나 이후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꿈속에서 마주쳐서야 ‘아, 이런 친구도 있었지?’ 하고 상기할 만큼 나는 그를 완전히 잊고 지냈다. 정운은 초등학교 3학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눈을 깜박일 때마다 기묘하게 위화감이 들었다. 왜 그런지 나중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눈을 깜박거릴 때 감은 눈 위에 흐릿한 영상이 어른거리는 것이다. 다음 순간 꿈이라서 가능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정운의 눈동자가 되었다. 정운의 눈동자가 되고 보니 눈 깜박임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 있다. 한 번 깜박거릴 때마다 눈꺼풀 안쪽으로 광고 화면이 지나가고 있던 것이다. “이걸로 용돈을 벌고 있어. 좀 피곤하지만.” 정운이 천진하게 말하면서 틱 장애를 가진 사람처럼 눈을 마구 감았다 떴다. 무수한 깜박임, 무수히 지나가는 상품 광고들. 나는 진저리를 치며 정운의 눈에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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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당신들의 광장
이하 쪽수만 표기한다. (…) 그래도 누나, 너무 엄마가 하자는 대로 하지는 마. 그런 거 아냐. 너무 효도하려고 무리할 필요는 없어. 효?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답했다.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할아버지한테 이제 인사하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권하는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언제나 다만 그거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192~193쪽) 장남 한만수는 엄마의 마지막 성묫길을 동행한 누나 한세진에게 "엄마가 하자는 대로" "너무 효도하려고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충고한다. 한국을 떠나 뉴질랜드에 정착하려는 그는 자신이 행할 수 없거나, 행하지 않은 일련의 일들을 '효'라는 유습(謬習)으로 치부함으로써 한세진의 행위에 담긴 의미를 폄훼하고, 잠시나마 느꼈을 정서적 부담감에서 손쉽게 벗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