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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문학조류(5)_‘섭 장르소설 Sub-Genre Fiction’의 부상
추리소설, 과학소설, 판타지의 재조명
순수문학과 고급문화를 중시했던 20세기 초 모더니즘 시대에는 추리소설, 판타지, SF, 스파이소설, 스릴러같은 것들은 주요 문학 장르가 아니라는 뜻에서 ‘섭 장르 소설 sub-genre fiction ’로 분류되었고, 값싼 누런 종이에 인쇄해서 10센트에 판매했기 때문에, ‘펄프픽션’ 또는 ‘다임 노블’이라고 불렸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신분이 있는 사람은 혹시라도 남이 볼까 창피해서 밤에 커튼을 내리고 몰래 숨어서 추리소설이나 판타지를 읽었다.
그러나 난해한 예술소설의 죽음을 선언하고,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를 해체하며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도래하자, 갑자기 그런 ‘섭장르’ 소설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으며, 수준 또한 높아지게 되었다. 그 결과, 지금은 추리소설이나 스파이 소설, 또는 SF나 판타지가 고급종이에호화양장으로 인쇄되고, 순수문학보다 오히려 훨씬 더 많이 팔리며, 누구나 떳떳하게 드러 내놓고 읽는 시대가 되었다.
판타지 분야에서는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과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를 시작으로, 필립 풀먼의 “검은 물질” 삼부작인 《황금나침반》, 《마법의 검》, 《호박색 망원경》과 J.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 등 수준 높은 베스트셀러들이 등장했고, SF 분야에서는 아서 클락의 《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와 아이작 아시모프의 《바이센테니얼맨》같은 격조 높은 과학소설이 산출되었으며, 필 립 K. 딕의 《블레이드 러너》와 《마이너리티 리포트》 같은 문제작들이 그 뒤를 이었다.
추리소설계에서는 존 그리샴의 《의뢰인》, 제프리 디버의 《본 콜렉터》, 마이클 코넬리의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할렌 코벤의 《단 한번의 시선》, 데니스 루헤인의 《미스틱 리버》, 다카노 가즈야키의 《제노사 이드》같은 작품들이 화려하게 등장했으며, 스파이소설 분야에서는 존 르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시리 즈”, 프레드릭 포사이트의 《어벤저》, 톰 클랜시의 《붉은 10월호》, 빈스 플린의 《권력의 이동》, 그리고 요 네스뵈의 《배트맨》과 《아들》 등이 각광을 받고 있다.
의학 추리소설로는 테스 게리첸의 《외과의사》와 파트리샤 콘웰의 ‘스카페타’ 시리즈와 로빈 쿡의 《인베이전》이 있고, 역사추리소설 분야에서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매슈 펄의 《단테클럽》, 그리고 로버트 해리스의 《당신들의 조국》 등이 크게 주목을 받았다. 과학 스릴러로는 마이클 크라이튼의 《넥스트》를 빼놓을 수 없고, 호러픽션의 경우에는, 스티븐 킹의 최신작 《닥터 슬립》과 《언더 더 돔》이 각광받고 있다.
최근 소설과 영화 둘 다에서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수잔 콜린스의 《헝거 게임》 3부작은 내용과 형식과 제목 모두에서 컴퓨터 게임을 소설화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헝거 게임’ 3부작은 영화로도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과 영화의 성공은 앞으로 문학이 영화 및 컴퓨터 게임과 서로 협업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시해주고 있다. 문학의 본질은 변하지 않겠지만, 문학을 담는 그릇이나 매체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고, 문학 또한 다른 매체와 융합하면 활자매체 때보다 그 영향력이 훨씬 더 막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섭 장르 소설 sub-genre fiction’의 문학적 가치에 대한 논의
그렇다면 우리가 소위 대중소설 또는 ‘섭 장르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과연 문학적 가치가 약하거나 없는 것일까?
일본작가 다카노 가주아키의 《제노사이드》는 우리가 추리소설 또는 대중소설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작품을 폄하하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좋은 예다. 우선 이 소설은 너무나 재미있어서, 마지막 페이지가 끝날 때까지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 소설이 재미가 있으면 대중소설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제노사이드》처럼 재미있으면서도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를 갖춘 좋은 소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작가 서머셋 모옴은 20세기 초에 이미 “소설은 모름지기 재미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재미있는 소설을 폄하하는 사람들은 서머셋 모옴의 시대 이전, 즉 19세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아무리 훌륭한 고급소설이라 해도 재미가 없으면 누가 그걸 읽으려 하겠는가? 그리고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레이브 디거 》에서 이미 증명되었지만, 다카노 소설의 재미는 우선 탁월한 문장력과 엄청난 스피드에 있다. 그런데 《제노사이드 》는 거기에 더해, 국제적인 무대(일본 과 미국과 아프리카와 포르 투갈), 추리소설・스릴러・과 학소설 기법, 그리고 타자에 대한 인간의 인종적・종교적・문화적 편견 비판이라는 중후한 주제까지 갖춤으로써, 작품성과 매력을 배가시켜 주고 있다.
《제노사이드》에서 저자는, 인간은 원래 자기가 잘 모르는 것이나 자기와 다른 존재에 대해서 본능적인 두려움을 갖게 되고, 그 두려움은 곧 편견으로 이어지며 편견은 결국 제노사이드(인종대학살)로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다카노는 그 예로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스탈린의 모스크바 재판 학살, 폴 포트의 킬링필드 학살, 보스니아의 인종청소, 르완다의 인종 학 살에 이어, 일본군의 남경대학살과 관동대지진 때의 재일한국인 학살까지 거론하는 용기를 보여준다. 이 모든 인종 학살이 타자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과 편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다카노는 한국인을 좋게 묘사하고 있다. 예컨대 일본인 주인공 고가 겐토는 한국인 친구 정훈과 힘을 합해 국제적 위기를 해결하며, 그 과정에서 동경 지하철에서 일본인을 구하고 죽은 이수현 씨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이수현 씨 같은 사람이야말로 타인종에 대한 편견이 없고, 오히려 타인종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소설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아프리카의 한 피그미 부부가 초인적인 지능을 가져서 미국 정부의 컴퓨터도 해킹할 수 있고, 사건들을 조종해 세상을 바꾸어놓을 수도 있는 초능력을 가진 남매를 낳아서 키운다. 이 새로운 변종의 출현이 미국과 인류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미국 대통령은 비정하게도 그 두 아이의 살해명령을 내린다. 저자는 국가안보를 구실로 이처럼 비밀암살 작전을 승인하는 정치가들의 편견을 고발하며, 그러한 살해명령을 소규모의 제노사이드로 보고 비판한다. 다카노는 “무서운 것은 군사 무기가 아니라, 그걸 사용하는 사람들의 편견과 인간성이다.” 라고 말한다. 그는 이 소설에서,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고 타자를 증오하는 일본의 최근 우파정치가들과, 부시 행정부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티븐 킹은 2003년 미국 순수문학에 공헌이 큰 원로작가에게 주는 최상의 명예인 “내셔널 북 어워드” 메달을 수여받았다. 그것은 곧 스티븐 킹 의 문학세계를 미국문단과 학계에서 정식으로 인정해주었다는 것을 의미 했다. 과연 스티븐 킹의 호러소설은 모두 사회적 정치적 비판이 담겨 있는 진지한 문학이라는 평을 받는다. 예컨대 《캐리》는 미국사회의 문제점 중 하나인 극단적 청교도주의와 극단적 자유주의의 갈등과 충돌을 그린 작품이며, 《세일럼스 랏》은 미국 뉴잉글랜드 시골의 닫힌 마을에서 일어나는 은밀한 사건을 통해, 닉슨 행정부의 부패를 비판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때로 그들은 돌아온다》도 선거 때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써 결국 워터 게이트 사건을 맞게 된 미국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어린 시절인 1952년 형과 같이 도서관에 가면서 잘못된 길을 선택해 깡패들과 만난 주인공은 형이 깡패들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악몽에 시달린다. 그 깡패들은 경찰의 추격에 쫓기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20년 후인 1972에 교사가 된 주인공은 그때 죽은 깡패들이 전혀 자라지 않은 상태로 자기 학교에 전학 와서 자기 반 교실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공포에 휩싸인다. 1952년은 미국인들이 평등사회를 주장했던 민주당 후보인 애들라이 스티븐스 대신, 평화와 번영을 약속한 공화당 후보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뽑은 해이며, 1972년은 미국인들의 그러한 선택의 결과로 인해 닉슨행정부의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진 해이다. 이 소설에서 스티븐 킹은 과거의 잘못된 선택은 필연적으로 악몽이 되어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 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소설 《펫 공동묘지》 역시 우리가 선택을 잘못했을 때, 우리의 소중한 존재들이 어떻게 악몽이 되어 다시 돌아오며, 그 돌아온 악몽이 어떻게 우리를 파멸시키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스티븐 킹의 《셀》은 ‘셀 폰’ 즉 휴대폰을 지칭하면서, 동시에 정 치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고 조종하는 ‘세포조직’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소설의 배경은 보스턴이다. 걸려온 휴대폰을 받는 순간, 사람들이 갑자기 좀비가 되어 전화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공격해서 죽이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펄스’를 활성화시켜서 전화 받는 사람들을 조종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는 ‘전화를 가진자들 phoners ’이 떼 지어 다니며 전화를 갖지 않은 ‘정상인들normals’을 죽인다.
《셀》은 누군가가 “펄스”를 이용해 휴대폰에 응답하는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다는 섬뜩한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치적 목적으로 휴대폰이 이용된 사례가 있었다. 예컨대 정몽준 의원의 대통령 후보 사퇴 발표가 있던 날 밤, 수많은 청년들에게 나라를 구해야한다는 긴급 휴대폰 문자를 보내 노무현 정부를 탄생시킨 경우가 있었고, 이명박 정부 초기에 휴 대폰 문자를 이용해 젊은이들을 시청 앞 광장으로 불러 모아 광우병 소고기 데모를 조종했던 경우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셀》은 단순히 미국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구 5천만에 스마트폰 가입자가 4천만 명이 넘어서 휴대폰의 왕국이라 불리는 우리나라에도 해당되는 보편적인 주제와 내용을 담고 있다.
킹의 최근 소설 《 11/22/62》는 과거에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으며, 그걸 바꾸려고 하면 더 큰 재난을 초래한다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소설 의 주인공 제이콥 에핑은 우연히 과거로 돌아가는 포털을 발견한다. 그는 1958년 술 취한 아버지에게 맞아서 불구가 된 학교의 잡역관리인 해리 더닝을 동정해서, 과거로 돌아가 그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다. 그러나 다시 현재로 돌아온 그는 해리가 불구가 아니었기 때문에 베트남전에 징집되어 전사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스티븐 킹은 과거에 너무 집착해 과거를 바꾸려고 하면 더 큰 재난이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이콥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 이번에는 존 F. 케네디의 암살을 막으려 한다. 만일 케네디가 안 죽었으면 미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해리도 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오스월드의 케네디 암살을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오스월드가 오발한 총탄에 자기 애인이 죽 고, 캘리포니아에서는 대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게 된다. 케네디는 살았지만, 그 결과로 다른 사람들이 죽게 된 것이다. 현재로 돌아 온 제이콥은 케네디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취임 하지 않았고, 따라서 1964년에 민권법도 통과되지 못했으며, 강경론자 조지 월리스가 대통령이 된 후, 핵전쟁을 일으켜 세계를 파멸에 빠뜨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제이콥은 “케네디가 죽지 않았더라면 세상이 훨씬 더 좋아졌을 것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사실 그러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과거에 너무 집착하거나, 과거에 일어난 일을 바꾸려고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역사에는 “만일 그 때 이랬더라면”이라는 가정이 있을 수 없다. 한 번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이 왜 우리가 어두운 과거에서 벗어나,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가 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킹의 이 소설은 과거에만 매달리고 있는 우리의 상황에 도 절실하게 다가오는 보편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맥스 브룩스의 《좀비전쟁 Word War Z: An Oral History of Zombie War》은 전 세계로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악몽 같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저자는 각 나라가 그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그 나라의 부정적 특징에 비유해 재미있게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은 포기하고 자기들만 살아남기 위해 벽을 쌓고, 핵 보유국가인 이란은 피난민의 유입을 막으려고 파키스탄과 핵전쟁을 벌이며, 전체주의 사회인 북한은 전 인민의 이를 다 뽑아서 남을 물지 못하게 하고 수많은 땅굴을 파서 숨는다. 그러나 이들의 방법은 모두 실패한다. 그와 동시에 저자는 이 소설에서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과 중국의 장기밀매와 미국의 오만함도 신랄하게 비판한다.
브룩스는 “좀비가 무서운 이유는, 그것들이 이성과 정신이 부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한 인터뷰에서 브룩스는, “좀비는 이성이 없기 때문에 무섭다. 그것들에게는 중용도 타협도 없기 때문이다. 정신이 부재한 극단주의는 언제나 우리를 무섭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극단주의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사회에도 중도나 협상의 여지가 없는 극단적 사고방식을 가진 또는 무조건 본능에 따르거나 누군가에게 조종되는 좀비 같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 소설은 우리에게도 강렬한 호소력을 갖고 다가온다.
《헝거 게임》 3부작과 문학의 기능
미국작가 수잔 콜린스 Suzanne Collins의 “헝거 게임 3부작”은 해리포터 시리즈 다음으로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이자, 영화로도 크게 성공한 주목 할만한 작품이다. 《헝거 게임 The Hunger Games(2008)》, 《캣칭 파이어 Catching Fire(2009)》, 《마킹제이 Mockingjay(2010)》로 이루어진 이 3부작 소설은 청소년 소설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작가 자신은 아이와 어른 모두를 독자로 생각하고 이 작품을 썼다고 말한다.
《헝거 게임》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폐허가 된 미국에 세워진 파넴이라는 독재국가에 대한 이야기다. 스노우 대통령이 지배하는 파넴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캐피톨이 있고, 12개의 가난한 구역이 있다. 열여섯 살인 주인공 캣니스 에버딘 Katniss Everdeen 은 엄마와 여동생 프림과 함께 가장 가난한 광산촌인 12구역에 살고 있다. 광부인 아버지가 광산폭발사고로 죽자, 엄마는 그 충격으로 폐인이 되고, 캣니스는 불법 사냥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소녀가장이 된다. 마을 빵집 주인의 아들 피타는 남몰래 그녀 를 짝사랑한다
오래 전, 13개의 가난한 구역이 캐피톨에 대항해 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그 결과 13번째 구역은 파괴되며, 나머지 구역은 독재자 스노우 의 정치적 억압 속에 더욱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경고로 스노우 대통령은 매해 각 구역에서 “조공 tributes ”이라고 불리는 청춘남녀 한 쌍을 뽑아 “헝거 게임”이라는, 단 한 사 람의 승자만 살아남는 죽음의 게임을 시키고, 그 과정을 텔레 비전에 중계한다. 그 게임에 출연한 사람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서는 다른 게임 참가 자들을 모두 죽여야만 한다
1부작 《헝거 게임》에서는 어린 여동생 프림이 조공으로 뽑히자, 캣니스가 프림 대신 자원한 후, 같이 뽑힌 피타와 함께 헝거 게임에 나간다. 그녀의 저항적인 모습을 보며, 관중들은 캐피톨에 대한 저항과 단결의 표시로 가운데 세 손가락을 붙여서 들어 올리는 침묵의 제스처를 한다. 파넴 시민들의 영향을 받아, 2014년 태국의 반정부 시위대들도 저항과 단결의 표시로 세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소설의 마지막에 캣니스는 피타와 더불어 최후의 승리자로 살아남는다. 두 사람이 연인이라고 생각한 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무시할 수 없는 캐피톨이 예외를 두어 캣니스와 피타 두 사람을 승자로 인정했기 때문 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승자가 된 캣니스와 그녀가 찼던 마킹제이 버튼은 캐피톨에 저항하는 혁명의 상징이 되고, 그녀는 혁명의 불꽃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된다. 2부작인 《캐칭 파이어》에서는 독재자 스노우가 반란을 막으려고 캣니스를 각 구역으로 캐피톨 홍보여행을 보내지만,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혁명을 부추기게 된다. 그렇게 되자, 스노우 대통령은 캣니스를 죽이기 위한 음모를 꾸민다. 스노우는 헝거 게임 75주년 기념행사로 이전 승자들만으로 이루어진 “헝거 게임”을 치르겠다고 발표한다. 이제는 그런 비인간적인 게임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고 좋아하던 캣니스도 또다시 게임에 출전하게 된다. 캣니스와 다른 플레이어들이 겪는 과정은 실제 컴퓨터 게임과 아주 흡사해서 젊은이들은 쉽게 이 소설의 서사구조에 빠져 들어가게 된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 캣니스는 헝거 게임이 벌어지는 장소를 파괴하고, 13구역의 반군 호버크레프트에 의해 구조된다. 13구역은 파괴 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지하로 숨어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3부작 《마킹제이》에서 캣니스는 13구역의 반군 지도자 코인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 공식적으로 혁명의 상징인 마킹제이가 되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캣니스는 반군들을 이끄는 13구역이 캐피톨과 닮았고, 여성 지도자 코인 역시 독재자 스노우를 닮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예컨대 캣니스는 13구역에도 개인의 자유가 없고, 모든 것이 통제되어 있으며, 사람들 은 엄중한 감시 하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또 지도자 코인도 스노우처럼 독선적이고 자신만 옳다는 경직된 정의감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드디어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고 반군은 캐피톨을 점령해 독재자 스노우를 체포한다. 반군이 스노우가 있는 곳 가까이에 도착하자, 갑자기 캐피 톨의 호버크래프트가 나타나 보급품으로 위장한 폭탄을 떨어뜨려 수많은 어린아이들을 죽인다. 아이들을 치료하러 달려간 캣니스의 여동생 프림도 속임수 폭탄에 의해 살해된다. 캣니스는 나중에야 그 사건이 스노우가 아니라, 여론을 조작하기 위한 코인의 음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코인은 또 스노우의 손녀와 캐피톨 시민들의 자녀들을 죽이기 위해 또 다른 헝거 게임을 시작하겠다고 말한다. 자기네가 당한 만큼 똑같이 되갚아주겠 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노우를 죽이기 위해 활을 집어든 캣니스는 스노우 대신 코인을 쏘아 죽인다. 코인이 또 다른 스노우가 되어 아이들을 죽이고, 파넴을 억압하는 또 다른 독재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캣니스는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풀려나 12구역으로 돌아온다. 20년 후, 캣니스와 피타 사이에는 두 아이가 생긴다. 헝거 게임과 전쟁을 겪은 부모세대의 희생과 투쟁 덕분 에 후세의 젊은이들은 희망과 번영 속에서 성장한다.
‘헝거 게임’ 삼부작은 오늘날 한국의 부모세대와 젊은 세대의 모습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부모세대는 전쟁과 군사 독재정권의 억압을 겪었고, 침략자들과 독재자들에게 목숨을 걸고 저항해서 조국과 자유를 지켜냈다. 음식에 굶주렸고 자유에 목말랐던 부모세대가 겪었던 것은 문자 그대로 “헝거 게임”이었다(“파넴”은 라틴어로 ‘빵’을 의미한다). 그들 의 투쟁 덕분에 오늘날 젊은 세대는 자유와 번영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젊은이들이 어떻게 일제 강점기의 설움을, 한국전쟁의 비참함을, 그리고 군사독재정권 탄압의 끔찍함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말을 다음대로 하고 살며, 값비싼 레스토랑과 카페에서 평화스럽게 외식하고 담소하는 그들이 어찌 부모세대의 배고픔을, 그리고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헝거 게임의 절박함을 알 수 있겠는가?
문학이 과거를 성찰하게 해주고, 당대를 반영하며, 미래의 비전을 제공 해주는 것이라면, 《헝거 게임》은 그 어느 명작에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문학작품이다. 《헝거 게임》은 검투사들에게 죽음의 게임을 시키고 관람을 즐기던 로마제국을 비롯한 모든 억압적 사회체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다. 20년후, 이 작품의 마지막에 캣니스는 자신의 아이들이 아무 것도 모 른 채,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가 죽은 사람들의 무덤 위에서 놀고 있다고 독백한다. 마찬가지로,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있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독재에 저항하고 죽음의 “헝거 게임”에서 살아남은 부모세대의 고초를 어떻게 이해하고 또 알 수 있겠는가?
삼부작 중에서 《마킹제이》는 단연 최고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이 작품은 단순히 독재정권의 붕괴와 독재자의 말로를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구원자라고 자처하고 나서는,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반군 지도자도 또 다른 독재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재타도와 정의의 투사를 자처하고 나서는 사람들 또한 결국은 똑같은 독재자였을 뿐이라는 것은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무능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를 무너뜨렸지만, 그 자신도 폭군이 되어 결국은 청나라에 나라를 빼앗긴 중국의 이자성 (틈왕)이 그랬고, 샤(팔라비) 국왕의 독재를 무너뜨렸으나, 자신은 훨씬 더 잔혹한 독재자가 된 이란의 호메이니가 그랬다.
니체는 독재자와 싸우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기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어두운 심연(深淵)을 오래 들여다보면, 어두운 심연이 너를 들여다보게 된다.” 과연 우리 역시 독재정권과 싸운 민주화 투사들의 일부가 권력을 잡았을 때, 얼마나 독선적이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반군지도자 코인처 럼 대의를 위해서라면 소를 희생하는데 익숙하기 때문에, 필요하면 아이들도 이용하고, 또 다른 헝거 게임을 만들기도 한다. 독자들로 하여금 그런 복합적인 시각과 성찰을 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헝거 게임》 삼부작은 우리 모두가 읽어야할 훌륭한 문학작품이다.
문학의 역할 중 하나가 인간의 인식을 바꾸어주는 것이라면, 많은 섭 장르 소설들도 훌륭하게 그 일을 해내고 있다. 모든 것의 경계가 와해되고 있는 이 시대에 굳이 이분법적 가치판단인 순수소설과 대중소설로 문학을 구분할 필요가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만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