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 > 감상&비평
[강아지똥] - 전체주의 아동을
이런 위로들이 있다. 주위를 한번 둘러본다,시덥잖은 소리들이 내 귀를 찌른다. 더한 경우가 없는 줄 아니. 너보다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한번만 더 생각해봐. 너보다 훨씬 못한 저런 사람도 살아가는데, 너는 겨우 그 정도로 죽겠다고 난리를 치니. 넌 불행한 게 아니야. 투정 좀 부리지마. 그런 이야기들에 고개를 끄덕일만한 부분이 조금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만 갈증을 느끼며 괴로워 하니까. 마치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걸 가질 자격이 있는데, 어째서?!"하며 화를 내는 식이지. 자신말고 다른이들은 모두가 행복해 보일테니까.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 위로 동시통역 방송을 듣는 것처럼 또 다른 목소리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포개져서 들려오곤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너는 적어도 누구보다는 돈이 많으니까, 누구보다는 재능이 뛰어나니까, 누구보다는 몸이 건강하니까, 그러니까 너는 그 사람보다는 행복한 거야."하는 이야기가 "너는 누구보다 돈이 없으니까, 너는 누구보다 재능이 부족하니까, 너는 누구보다 몸이 불편하니까, 그러니까 네가 그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건 말도 안 돼."하는 이야기로 해석되어 들리는 식이다. '누구나 남보다 잘 하는 것이 한 가지는 있다'는 것이 인간의 존재 가치라고 한다면, 남보다 잘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거잖아. '나보다 더 나쁜 환경과 조건의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내가 행복하다고 느껴야할 이유가 된다면, 자신보다 더 나쁜 환경과 조건을 가진 사람이 없는, 그러니까 세상에서 가장 나쁜 환경과 조건의 사람은 행복하다고 느낄 수 없다는 거잖아. 나보다 불행한 사람들이 행복해 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결국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이야기잖아.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된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살아야할 이유가 없다는 말 같잖아. 그런 사람이 목숨을 끊게 된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는 이야기잖아. 그런데, 그거 알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죽게 된다면, 세상에서 두 번째로 불행했던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지. 그리고, 그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기 때문에 목숨을 끊고 나면, 다음엔 세상에서 세 번째로 불행했던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는 거야. 그 다음엔 세상에서 네 번째로 불행했던 사람, 또 그 다음엔 세상에서 다섯 번째로 불행했던 사람, 이런 식으로 왕좌를 대물림하다 언젠가는 나의 차례도 너의 차례도 오게 되는 거야. 결국 나도 당신도 삶을 포기하는 것이 당연하게 되는 거야. 그게 바로 비교와 경쟁의 비참한 종말이지. 하고 어딘지 모르게 삐딱하고 뒤틀린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누구보다 나은 점이 있기 때문에 행복한 거라니. 행복하다는 위안을 얻기 위해 나보다 불행한 사람을 찾아야 하다니. 그건 정말 아닌 것 같아. 그냥 행복하면 안되나. 내가 가진 것들이 전부 누구나 가지고 있는 평범하고 하찮은 것들 뿐이라 해도, 그것들이 내게 있어 좋고, 또 필요한 것들이라면, 나는 그만큼 행복한 거 아닌가. 내가 남들보다 나은 것 하나 없어도, 세상에 나보다 못한 이가 단 한 명도 없다고 해도, 별 상관없는 거 아닌가. Bullshit! 바로 그거였다. [강아지똥]을 보다가 느닷없이 황소똥을 외치게 된 이유도. 조건 없는 자기희생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견하는 강아지똥의 이야기를 통해 아무리 하찮은 존재일지라도 세상의 모든 것들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교훈과 감동을 선사한다는 그 작품이 이상한 그의 눈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로 보였다고 한다. "내가 거름이 되다니, 그것도 예쁜 꽃을 피우기 위해 거름이 된다구?" 감격에 겨워 눈물까지 흘리던 강아지 똥의 모습이 눈에는 "천황폐하 만세! 대 일본제국 만세!"를 외치며 적진을 향해 돌진하던 가미가제 특공대의 마지막처럼, "난 민들레란다. 나중에 예쁜 꽃을 피우지. 세상의 어떤 꽃보다도 곱지. 너의 도움이 필요해. 네가 나의 거름이 되 줘야 해."하던 민들레의 이야기가 "나를 위해 죽어줘야겠어. 그게 너의 존재이유지. 너 같은 하찮고 못난 것이 이토록 아름답고 고귀한 나를 위해 죽을 수 있다니 정말 영광스럽지 않니?"하는 오만불손한 사이비 교주의 설교처럼,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너도 꼭 무엇인가 귀하게 쓰일꺼야."하던 흙덩이의 메시지 역시 너는 그저 하나의 부품일 뿐이지. 아무 곳에도 쓸모가 없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는 거야."하는 전체주의자의 무서운 다그침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너 자체로는 의미 없는 거야? 민들레의 거름이 될 수 없다면 가치 없는 거야? 너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기 위해 존재하는 거야? 왜 너는 민들레의 거름이 되는 것이 기뻤던 거야? 왜 민들레가 너를 희생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거야? 악취가 나지 않으니까? 온 세상에 자신의 씨를 사정없이 뿌려대니까? 별처럼 고운 꽃을 가졌으니까? 왜 꽃은 예쁘고 곱지만, 너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검고 꽃은 희니까? 다른 애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래서, 그렇게 죽으니까 좋디? 응? 죽으니까 좋아? 응? 좋아? 응? 응? 응? 응? 응? 길가에서 발견한 강아지 똥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미친놈처럼 말을 걸고 있었다. "너의 도움이 필요해. 꼭 필요해." 민들레는 마치 네가 간절히 필요한 것처럼 속삭였지만, 정확히 말해서 그녀가 필요로 했던 건 거름이 되어 줄 존재이지, 네가 아니야. 거름이 되어 줄 수만 있다면, 그녀는 개똥이든 소똥이든 화학비료든 아무 상관없을 걸. 그냥 그때 그 자리에 네가 있었을 뿐이지. 만일 네가 거름이 될 수 없는 존재였다면 혹은 거름이 되기를 거부했다면, 그녀는 냄새나는 네 얼굴에 침을 뱉고, 어느 샌가 너의 역할을 대신할 누군가를 찾아내서, 그의 귓가에 네게 했던 달콤한 이야기들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똑같이 속삭이고 있을 껄. 네가 대단한 존재인 줄 알고 기쁘게 몸을 바쳤던 민들레도 사실은 별거 아니야. 어쩌면 너보다 더 쓸모 없는 존재인지도 모르지. (똥이나 꽃이나 못 먹기는 마찬가지고. 민들레는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조차 없으니깐.) 강아지 똥이나 민들레나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기는 마찬가지란 말이야. 구태여 거기에 순위를 매긴다는 건... 영구와 맹구 중에 누가 더 바보 같은가, 지렁이와 달팽이 중에 어느 게 더 빠른가를 따지는 일이랑 비슷하다고나 할까. 뭐, 사실 쓸모 없고 필요 없기로 따지자면, 민들레나 너나 나나 이꼬르 쌤쌤이겠지만 말야 그래, 오늘날 내가 누리고 있는 행복이라는 것이 과거 누군가의 희생에 기초했다는 걸, 그렇기에 그 희생들이 정말이지 소중하고 감사한 것이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희생이라는 건, '자기보다 나은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보다 가치 있는 무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것을 위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그렇기에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어. 그리고, 인생이라는 건 '결국 무엇을 이루어 냈는가'보다는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나도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 거라고. 세상 모든 것들은 '무언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거라고. 함께 살아가는 거라고. 거기에 대단한 이유 같은 것은 없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