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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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소유와 집착
소유와 집착 이서화 후줄근하고 가벼운 남자가 지하철 바닥에 앉아 무소유를 읽고 있다 책 속에 눈을 묻고 도시의 바닥은 남자의 자유로운 도서관인 듯 집착과 소유와 덜컹거리는 속도와 레일의 간격을 행을 바꿔 가며 읽고 있다 책에 대한 집착이 지문처럼 남아 있고 책에 대한 소유로 표정은 진지하지만 소유의 겉장쯤은 버린 지 오래인 듯 저 책과 남자는 적어도 한 삼만 광년은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욕심과 집착이 없었다면 수소문 끝에 사층의 계단을 오르고 단과반 과외를 찾아 남자의 아내는 나머지 학원을 뒤지지 못했을 것이다 도시의 변두리 끝, 낡은 빌라 한 칸마저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저 남자에게 욕심과 집착은 최저 생활비고 마이너스 통장이다 남자의 왼쪽으로 천천히 들어오던 전철이 오른쪽으로 빠르게 지나가고 전철 진동에 남자는 조여졌다 다시 풀어지기를 반복하지만 더 이상 소유물이 없는 저 책에서 지친 문구의 광고 한 구절이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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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언덕배기 소나무
언덕배기 소나무 박형권 천 년을 걸고 소나무가 가고 있다 소나무의 아이들이 한 걸음 가고 아이들의 아이들이 또 한 걸음 가고 소의 걸음으로 가고 있다 물푸레나무가 물을 길어 주면 한 모금 마시고 가고 있다 어떨 때는 한 오백 년쯤 그윽해졌다가 땔감이 되었다가 집이 되었다가 팔만대장경이 되었다가 멈춘 듯하여서 보면 가고 있고 가는 듯하여서 보면 멈추어 있다 나의 초여름, 마을 앞 언덕배기의 해송이 가면서 한 번씩 사람 사는 마을을 보아 주었다 가다가 나를 만나면 그냥 백 년만 바라봐 주었다 백 년 그것 아침인사 드리기에도 짧은 순간이지만 천 년인 듯 나를 바라봐 주었다 소나무에게 나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공즉시색(空卽是色): 집착 없는 눈으로 보았을 때 모든 것이 저마다 작동하여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반야심경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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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시·시조 「꽃점은 끈끈이주걱으로」외 6편
문자메시지로 그 입금자명을 보내라 한다 당신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1원의 입금자명을 보내도 될까 아직 살아 있는 당신의 계좌 어딘가에서 통장 정리 중이라면 드르륵드르륵 찍히는 소리, 들을 수 있을까 누구나 태어나게 되면 하나의 평생계좌를 개설하게 된다 그 통장에서 감정을 인출하거나 관심을 입금 받는다 텅 비었다고 들여다볼 때도 있지만 통장과 혈연의 ATM이 맞닿기 전의 기록일 뿐이다 나는 입출금이 자유로운 당신의 통장에 종종 입금을 한다 밥은 먹었나요 잠은 잘 잤나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한 면이 넘어가면 다음 장에 차곡차곡 쌓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소정의 이자도 불어난다고 끝내 당신의 통장을 해지하고 온 날, 내 통장도 갱신해야 할 텐데 나를 확인하기 위해 1원의 입금자명을 누구에게 보내야 할까 매운 마음 달콤한 집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