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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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좌담] 우리, 시 이야기 할까요?
앞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최승철 시인도 시집을 묶으면서 초기 시를 많이 버리셨죠. 임현정 시인과 최정진 시인도 그렇고요. 이혜미 시인은 등단작 이후로 거의 그대로 온 건가요? ▶ 이혜미 : 거른 것이 많았지만, 앞의 시를 버리는 식으로 걸렀다기보다는 제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기준으로 걸렀습니다. ▶ 장은정 : 최승철 시인께서 가장 많이 덜어내서 큰 변화를 겪으신 것 같아요. 이건 앞에서 이야기했던 지향점의 변화를 더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겠네요. ▶ 최승철 : 저 같은 경우는 시를 처음 쓸 때부터 그랬는데 옛날에는 시가 아름다워야 한다, 감동이 있어야 한다, 서정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작을 했습니다. 비유를 들어 얘기하자면, 손바닥 같은 거라고 생각을 해요. 손바닥은 항상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고, 우리가 손을 내밀 때 손을 잡는 것이 손바닥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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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종이상자
종이상자 최승철 (종이는 불씨의 나이테)(태양은 A4용지 속에서 물비늘로 반짝임)(상자를 열면 밀봉되었던 어둠이 발화함)(대지를 뚫고 나온 배추 한 포기)(기억하려는 순간 잊어버린 만큼의 내부가 있음)(본능은 재크의 콩나무를 타고 끊임없이 타오르는 向日性)(죽은 병아리를 묻으면 사과나무가 자랄 것 같아 나는 박철수 싸인볼과 함께 흙으로 덮어줌)(봄이 와도 날개는 허공을 향해 자라나지 않음) (태양은 천정에서 자라는 나이테)(폭약의 심지에 붙은 불꽃이 그리움의 입술에서 빛남)(유리창은 불씨를 품고 투명해짐)(쓰레기 수거차가 언덕길 오르며 오수를 흘림)(부지불식간에 내뱉는 어머니의 한숨은 스스로를 쓰다듬는 애무)(상자를 닫으려 하자 안간힘으로 버티는 노을)(갈비뼈가 심장을 향해 굽어져 대지는 태양을 감싸며 휘어짐)(병아리를 묻은 자리에서 매일 저녁 흙냄새가 피어남)(어둠이 불씨처럼 차곡차곡 내부에 쌓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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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들판에 놓인 변기
들판에 놓인 변기 최승철 다알리아 구근이 빨려 들어간다. 변기가 고장 났다. 변기의 구멍에 대고 펌프질을 해도 애인은 돌아오지 않는다. 온 힘을 다해 눌러도 뭉게구름이 흘러갈 뿐 아무것도 뚫리지 않는다. 애인이 두고 간 세탁소의 철 옷걸이를 펴서 변기 구멍을 쑤셔본다. 강물은 앞과 뒤가 없다. 소외도 언젠가 흘러갈 것임을 안다. 하루 분의 비타민 권장량을 입 속에 털어 넣는다. 변기의 손잡이를 돌려 물을 내린다. 비가 오기 전에 서둘러 변기 구멍을 뚫어야겠는데 박쥐는 거꾸로 매달린 채 새끼를 낳는다. 이번엔 드릴 용액을 퍼붓고 기다린다. 어느 하류를 다알리아 구근이 막고 있는지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지루한 시간이 돌 속을 흘러 다닌다. 인터넷 지식 검색을 찾아보니 막힌 변기에 양동이 가득 뜨거운 물을 펄펄 끓여 부으면 공기 몇 방울이 올라와 뚫린다고 한다. 도처가 풀잎인 계절 나는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비정(非情)을 손바닥에 놓고 후?, 불어 녹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