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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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살아있다
살아있다 류인서 완고한 흰빛 일색의 근조화환에 섞인 몇 송이 분홍백합 도드라진 꽃빛 위에 흑백으로 멎어있는 영정의 얼굴을 겹쳐본다 오가는 검은 양복차림의 조문객들의 뒷모습 위에 시간을 훔쳐간다는 이상한, 잿빛 목소리의 회색신사들*의 실루엣을 겹쳐본다 초겨울 하오를 낮게 날던 까마귀 떼가 일사불란 몸을 뒤집으며 방향을 트는 한 순간 먹청빛 날개면에서 타는 햇살의 유리비늘 황홀한 떨림 위에 죽음의 날개옷을 겹쳐본다 죽음이라는 실재 위에 가볍게 덧입혀지는 죽음이라는 추상 기실 저 꽃이나 새들이 닿지 않는 어딘가에 죽음은 살아있다 늦게 온 바람이 한 변명 많은 유족처럼 안치실 푸른 유리문 밖을 얼쩡대는 지금 * 미하엘 엔데, 『모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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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비평 시와 비평의 관계에 대한 질문-2020년대 시의 좌표계
지금 이곳의 비평은 질 들뢰즈의 “현대 회화를 구상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해서는 추상 회화의 힘든 작업이 필요했다. 하지만 추상 회화와는 다른 훨씬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다른 길이 없을까?”라는 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들뢰즈의 사유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평은 전통적 서정시를 포기하면 안 된다. 또한 새로운 서정시도 견인해야 한다. 이 어려운 지점을 딛고 비평가는 새로운 시의 물결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일급의 비평은 피투 된 시를 선택해 창조적 의미를 밝혀내는 지난한 작업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3) 앨빈 토플러, 『제3의물결』, 홍신문화사, 1994,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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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훈장 (3) 영감땡감
어디 감히 한데로 나앉으라는 말이냐고 추상 같던 영감땡감이 아니다. 파카 괴춤에 손을 찔러 넣고 너무도 순한 양처럼 앉아 있다. 짐이 내려진다. 덩치 큰 짐 말고는 뭐가 뭔지 모르게 뒤섞여 내려진다. 박스를 지키고 앉아있던 영감땡감은 딸년 차에 올라타 있다. 당신 차라면 박스 두 개는 당신 차에 따로 싣고 가자 했을 것을 아무 말도 못하고 몸만 얻어 탔다. 영감 할망구 되어 남의 집 전세로 전전하려니 기분도 찹찹하고 인부들 보기도 창피하다. 좁으나마 지금 집은 그런 대로 쓸 만했다. 새로 이사갈 집은 더 비좁고 허름하다. 아직 집을 보지 못한 영감땡감은 가슴이 부풀어 있지만 곧 실망하게 될 거다. 박스 두 개는 영감땡감 품에 안고 살거나 밑자리에 깔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다 해도 영감땡감은 유구무언으로 할 말이 없을 게다. 이 모든 게 장하게도 영감땡감 덕분이 아니겠는가. 영감땡감이 뇌물수수죄로 옥살이를 하기 전 지방자치제 선거 공천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