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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보
나의 옆집에는 조금 이상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무도 몰랐다. 나는 그를 편의상 ‘털보’라고 정의했다. 그는 어디에서나 돋보이는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키는 작았다. 얼굴엔 몇 달 동안 면도하지 않았는지 기간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덥수룩한 수염과 턱 까지 내려뻗은 긴 머리로 그의 얼굴은 뒤덮여 있었다. 그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 없었다. 그에게는 말주변이 없었다. 면밀하게 표현하자면 그럴 기회가 없었다. 여기 사람들은 그에게 무관심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일과는 매일 아침 문 앞에 놓여있는 택배를 집 안으로 들이고선 부스럭대는 것이 전부였다. 택배를 옮기는 그의 뒷모습은 늘 복도의 형광등이 비치지 않았다.나는 그가 궁금했다.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는 그의 모습이 궁금했다. 특히, 매일 아침마다 오는 택배의 정체가 궁금했다. 나는 그를 관찰했다. 내 방에 있을 때조차 나의 신경은 털보를 가리켰다. 무언갈 하고 있다는 기류 외에는 아무것도 감각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하루 중 유일하게 외부와 접촉하는 시간인 아침의 택배를 들일 때. 그때를 주목하기로 계획했다. 이른 새벽에 나는 눈을 떴다. 창밖으로 자동차들이 탈탈거리며 주행했다. 차체의 문을 거칠게 닫는 소리도 들렸다. 멀리서 종소리가 짧게 아른거렸다. 발걸음이 가까워진다. 가볍게 바닥과 상자가 충돌하는 소리가 옆집에서 들렸다. 털보네 집이었다.발걸음이 멀어져갔다. 종소리는 은밀하게 속삭였다. 나는 우리 집 문 오른편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끼익거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긁었다. 털보가 택배를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굉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까치발을 하고 이번엔 오른편 벽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종이 찢는 소리가 들린다. 택배를 개봉했나. 택배의 완충제를 벗겼다. 그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과자를 먹는 소리가 들린다. 아주 얇은 판 형태의 과자 같다. 이번엔 김부각인가 보다. 아까보다 바삭거리는 소리의 두께가 굵어졌다. 소리가 멎었다.그 이후에 어떤 것도 감각되지 않았다. 그의 하루 생애는 이게 전부인가 보다. 나는 더욱 궁금해졌다. 그는 과자를 먹은 이후에 무엇을 할까? 직업은 무엇일까? 등등의 것으로 하루를 지새웠다. 방 안이 어두워졌다. 내 머릿속은 더욱 명쾌하게 보였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내일, 택배가 오는 그 시간에, 묻는 것이다. 그 택배가 뭐냐고. 이런 생각을 하다가 의식에서 꿈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내 꿈에서 그는 작가였다. 자판을 치며, 간간히 봉투 속 과자를 주워 먹는 그런 작가. 꿈에서 의식으로 돌아왔다. 그 어느 때 보다 거부반응이 덜하였다. 오히려 어서 일어나라고 등을 떠밀린 듯했다. 오늘도 귀를 긁으며 철제문이 열렸다. 나도 문을 열어젖혔다. 그는 약간 주춤했고 방 안으로 도망치는 숨어들었다. 이게 나와 털보가 서로를 처음으로 동시에 감각한 일이었다.그 날, 그는 과자를 먹지 않았다. 나를 의식한 탓일까. 나는 당분간 그에게서 표현적인 관심을 접어두었다. 그것이 나의 관찰에 이익이 되기도 하고, 그에게도 이로울 것이므로. 대신 나는 매일 그가 택배를 방 안에 들여놓을 때마다 산책을 갔다. 산책이 목적인 것처럼, 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그를 무의식의 영역으로 밀어 넣었다. 초반에는 전처럼 방 안으로 숨어들었다. 과자도 먹지 않았다. 이후, 내가 익숙해졌는지 아니면 저가 무의식으로 밀려남을 알아차렸는지 과자를 먹기 시작했고, 이윽고 그도 나를 하나의 배경으로써 여기기 시작했다.이제 때가 왔다. 여느 때처럼 복도를 천천히 걷다가 그의 앞에서 멈춰 서곤 몸을 돌렸다. 나는 택배가 뭐냐고 물었다. 그는 나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그리고 말했다.“이건 제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물건입니다”그는 이렇게 말하고서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재빠르게 방 안으로 숨어들었다. 나는 그 날밤 궁리에 빠졌다. 한낱 과자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 정도로 허기짐이 그에게는 큰 죽음의 공포로 다가왔던 것일까. 오늘도 그에 관한 꿈을 꾸었다. 그의 양손에는 과자가 가득했다. 허겁지겁 과자를 먹어 치우고 입을 씰룩 웃어 보였다. 만족스러워 보였다.이제는 그와 대화하고 싶었다. 문이 열리면 나는 말했다. 택배는 어디에 쓰는지, 평소에 무얼하며 지내는지, 과자가 그렇게 좋냐는 둥 여러 질문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베시시 웃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답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매번 친절했고, 매번 웃어줬다. 세상에 거리를 둔 소박한 어린아이 같았다.여느 때처럼 털보와의 소통을 목적으로 한 산책 할 때였다. 털보는 그날따라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봐야 몇 분 정도지만 아주 이상했다. 보통은 초 단위로 나와서 재빠르게 들어가는데. 택배를 응시했다-. 상자 안에서 부우웅 거리며 외벽과 얇은 껍질이 빠르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흠칫 놀랐다. 소리가 멎자 나는 그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이끌림을 따랐다. 상자를 집어들자, 외벽을 긁는 얄팍한 진동이 내 손을 타고 전해졌다. 송장을 확인해봤다. 이것은 벌레였다. 그것도 살아있는, 벽을 긁는 벌레였다. 나의 근육은 경화되었다.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털보는 매일 벌레를 먹었나?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자 소름끼치는 개방음과 털보가 나왔다.털보도 섬짓 놀랐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맞았다. 그는 고개를 가볍게 떨궜다. 그가 뒤돌았다.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아직 움직일 수 없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봤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눈에 담긴 건 슬픔이었다. 분노나 적의가 아니었다. 그는 해명하고 싶었다. 그제서야 나는 움직일 수 있었다. 그의 뒤를 따라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철제문이 요란하게 닫혔다. 문에 걸린 종들이 손님 대하듯 딸랑거렸다.방 안에는 눌러 터진 벌레 사체가 쌓여있었다. 나는 차마 들어갈 수 없었다. 그가 손수 사체를 치워서야 나는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털보는 앉았다. 나도 앉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의 무거운 대기가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털보의 뒤 브라운관 티브이에서 앵커가 말하고 있었다. 앵커가 말을 마칠 때쯤 털보는 입을 열었다. 목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났다. 털보는 목을 가다듬고 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털보는 정말 슬픈 사람이었다. 그의 어미는 그의 기억의 시작점에서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아해에게 생명만을 잔인하게 내던져두고 멀리 사라졌다. 그는 아비와 함께 살았다. 그는 아비의 직업을 몰랐다. 그에게 아비란 저녁에 들어와 상을 펴놓고 그 위에서 술만 홀짝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직도 털보는 못 박는 소리를 무서워했다. 아비가 술을 한 잔, 두 잔, 잔, 잔, 잔 마셔대면 무의식과 의식의 섞인 상태가 되었다. 탕탕거리는 소리가 누적될수록 그의 무의식은 세상을 향해 기어 나왔다. 기어 나온 무의식은 아들에게 아비에게 있어서 불수의적 폭력을 행사토록 강요했다. 아해는 아팠다. 주먹이, 발길이 무서웠다. 그에게 무의식의 아비는 너무 거대했다. 저항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긍했다.아비가 아해를 부른 날, 아비의 목소리에 숨기고자 하는 의식적인 떨림이 있었다. 어린 아해는 아비의 떨림을 알아채지 못했다. 아비는 아해에게 술심부름을 시켰다. 가게 주인은 아해의 온몸이 새파란 삽살개 같은 외형을 보고 한숨을 푸욱, 내쉬고 술을 내주었다. 아해는 무서웠다. 집으로 가는 걸음걸음이 무거웠다. 아예 술병을 깨버릴까 생각도 했었다. 그에게 집은 자신을 밀어내는 무언가의 공간이었다. 아해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은 메스껍게 낄낄거렸다.문 너머 계단을 내려갔다. 아해는 떨고 있었다. 소름 끼치는 적막 사이 아해의 발소리만 메아리쳤다. 늘 아비는 상을 펴고 적적한 술판을 벌이던 그 장소에 떠있었다. 털보는 주저앉았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 한 가닥 얇은 노끈에 매달린 아비를 그저 응시했다. 털보는 자신의 멍 자국을 쓰다듬었다. 천천히, 천천히, 그는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날 털보는 완성됐다. 완벽하게 잉태되었다. 계단을 밟고 달빛이 내리쬐는 길 위로 올라섰다.털보는 굶주렸다. 그래서 털보는 무작정 시장으로 내달렸다. 실제로는 탈진해 느린 걸음일지라도, 그에겐 질주였다. 털보는 그곳에서 반찬가게 아주머니 아래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지냈다. 털보를 심부름꾼으로 쓴 건 일말의 동정 때문이 아닌 더 싼 값에 사람을 부릴 수 있겠다는 주인아주머니의 셈이었다. 아주머니는 셈을 정말 잘했다. 자기네 이윤에서 정확히 정해진 만큼의 지분만을 털보에게 일당으로 지급하고선 내쫓았다. 털보는 매일 그 돈으로 살았다. 그에게서 나는 특유의 향은 이때부터 났다.주인 아주머니가 돈이 빈다고 말했다. 털보는 어리둥절했다. 주인 아주머니는 자신의 완벽한 셈대로라면 200원이 더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털보는 그 돈의 행방을 알 수 없었지만, 주인 아주머니의 생각은 달랐나 보다.“이놈이!”주인 아주머니가 털보에게 내질렀다. 그 소리에 시장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에 털보와 아주머니에게 꽂혔다. 아주머니는 뒷배라도 생긴 듯 더욱 소리내어 말했다.“이놈이 불쌍하고 딱해서, 거둬줬드만 은혜를 이딴식으로 값어? 이 도둑놈이?!”도둑놈. 그게 털보에게 붙은 첫 명칭이었다.그날부로 털보는 쫓겨났다. 시장바닥 어디를 가도 그를 도둑놈이라며 받아주지 않았다. 털보는 배고팠다. 그래서 그는 진짜 도둑이 되었다. 낮이면 구멍가게에서 잠든 주인의 눈치를 보고 자질구레한 과자 등을 서리했고, 밤이면 근처 논밭에서 과채를 서리했다. 시장바닥을 넘어 이 동네에서 털보는 이제 도둑놈으로 일컬어졌다. 털보는 수긍했다.털보는 구멍가게에 들어갔다. 주인은 어리숙한 할머니였다. 때마침 졸고 있어 능숙하게 음식을 집었다. 주인 할머니는 바스락 소리에 눈을 떴다. 그러곤 털보에게 자상하게 말해주었다.“먹고 싶은게 있거든 나에게로 오려무나, 여기엔 널린게 먹을거이니.”털보는 주춤거리며 문밖으로 빠져나왔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부끄러움이었다. 그리고 고마움이었다. 털보는 종종 할머니네 구멍가게에 드나들곤 했다. 처음에는 잘 때 몰래 음식을 서리했지만 점차 구걸하는 쪽으로 경로를 바꿨다. 그럴때마다 할머니는 웃으며 주전부리를 한 손 가득 털보에게 들려줬다.구멍가게 할머니는 자식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 할머니에게 아해는 마치 친자식과 같이 정감이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의고 세상에게 던져진 아해가 더욱이 애절해 보였다.“아가야 갈 데 없으면 그냥 나랑 같이 살지 않으련?”아해의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며 할머니는 말했다. 아해는 할머니를 응시했다. 아해는 끄덕였다.“그래, 오늘부터 네가 내 자식하려무나.”할머니의 집은 따뜻했다. 방에서 창살로 보이는 가로등마저 따뜻했다. 아해는 이곳에서 생애 가장 큰 행복을 누렸다. 덥수룩하고 더러운 머리는 할머니가 직접 잘라주었다. 아해의 큰 눈망울을 할머니는 유독 좋아했다. 아해답다고 좋아했다. 할머니는 어느새 ‘내 새끼’라는 말이 입에 붙었다. 내 새끼가 행복하면 할머니도 행복했다. 할머니 덕에 아해는 학교에 갔고, 글도 배웠다. 더 이상 그는 도둑놈이 아니게 되었다. 아해는 이 행복이 영원할 줄 알았더라.학교를 다녀온 털보가 발견한 건 소란스러운 할머니의 집이었다. 구급차가 빨간 사이렌을 울려댔고, 이동식 침대 위엔 할머니가 누워 있었고, 그 위에 흰 천이 포개어 누워있었다. 털보는 질주했다. 속이 울렁거리고, 세상이 회전했다. 자신은 그 회전축으로 빨려들고 있었고. 끝을 힘없이 내리는 사이렌도 그 중심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털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병실이었다. 간호수가 옆에서 무정하게 말했다. 같이 실려온 할머니께서 별세하셨다고. 혹시 보호자느냐고. 털보는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다시 할머니의 집으로 가기를, 꿈에서 깨기를 기다렸다. 다음날 정오 즈음이 되어서야 그는 이미 꿈에서 깨어났음을 알았다고 한다.그는 다시 털보로 조각되었다. 교내에선 그를 고아라며, 냄새가 난다며, 기분 나쁘게 생겼다며, 줄곧 밟았다. 그들은 누구보다 거대했다. 감히 올려다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래서 털보는 바닥만을 바라보고 살아왔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대개 털보를 향했다.털보는 마지막 남은 할머니의 유산인 초등학교를 끝마쳤다. 할머니가 좋아하던 큰 눈망울은 길게 내려뻗은 털보의 머리카락에 가려졌다. 이제 그는 그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웃으면 자신을 향하는 웃음으로 받아들였다. 왜소한 체구의 털보는 더욱 작아졌다. 어깨는 안쪽으로 말렸고, 등은 굽었다. 한 마리 공벌레 같았다.그는 생계를 위해 공장에 뛰어들었다. 작은 체구를 활용해 좁은 방 안에서 재봉틀을 다뤘다. 재봉틀은 다각거렸다. 털보의 손에는 상처가 많았다. 모두 이 때 생긴 것이랬다. 날카로운 바늘이 손을 파고들 때마다 통증은 혈액 속에 녹아들었다. 녹아든 통증은 다른 통증과 섞여 털보의 온몸에 퍼졌다. 그의 신체는 이 통증을 배출하려 시도 했다만 그의 눈에선 핏기 없는 눈물만 흘러나왔다.이곳에서는 작업능률이 높으면 돈을 더 받았고, 그 돈들은 서열로써 작용했다. 할 줄 아는게 도둑질뿐인 털보는 재봉틀을 잘 다루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능률은 공장 최하위였다. 털보의 자리는 공장의 가장 안쪽, 창가 없는 곳이었다. 공장에는 실밥과 먼지, 그리고 시멘트 가루가 뒤섞여 허공에서 나풀거렸다. 빠져나갈 곳이 없는 그들은 털보에 쌓였다. 잊혀진 장식품 같았다. 노동자들은 실적이 저조하면 늘상 털보를 꺼내곤 했다. 노리개 가지고 놀 듯 입에 올려 굴렸다.털보의 옆 재봉틀은 사람이 없어 항상 비어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는 그곳은 털보처럼 먼지가 쌓여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 때는 분진이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그 자리를 연청이 대신했다. 연청은 털보보다 작았고 왜소했으며 그녀의 낯 곳곳에는 고된 생활의 상흔이 거뭇거뭇 묻어있었다. 그녀는 재봉틀을 잘 다루지 못했다. 털보와 비슷하거나 어쩌면 더 못 다뤘다. 연청은 털보와 같이 자주 입에 오르내렸다. 그녀의 손에는 날카로운 딱지 여러 개 앉아있었다.연청은 줄곧 털보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그 덕에 둘은 싸잡혀서 입에 올려졌지만 털보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들은 서로 점심을 나눠 먹기도 하며, 다치면 치료해줬다. 노동자들이 하층 부부라며 멸시해도 괜찮았다. 서로는 서로에게 기꺼이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들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지금 털보의 기억에서는 모두 휘발되었지만 그 당시에도 대화의 내용이 중요한게 아니랬다.그런 연청은 어느 날 기별도 없이 사라졌다. 공식적인 사유는 알려주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그녀가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잘렸다고 추측했다. 털보의 표정은 예전처럼 낯가죽 뒤로 숨어들었다. 노동자들은 저만치서 낄낄거렸다.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털보는 가늠할 수 있었다. 털보는 아무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 속에서 연청의 빈자리에 놓인 그녀의 손목에서 은밀히 빛을 발하던 철제 사슬 팔찌만을 바라봤다. 털보의 혈액 속 통증은 다시 몸을 순환했다.털보도 머지않아 그 공장에서 떠났다. 그는 이곳저곳을 방랑하며 살았다. 그에게 집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공간은 매번 바뀌었으나 환경은 아니었다. 누구든 낄낄거렸고, 온정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종종 집 안으로 숨어들었다. 돈을 모으고, 돈이 떨어지면 일하고, 모으고, 일했다.이 생활에서 털보는 한 가지 유희를 발견했다. 그건 털보의 퇴근길에서 일이었다. 털보의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발 앞에서 개미무리가 줄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털보는 그들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개미들은 털보를 피하고 있었다. 털보는 부아가 치밀었다.‘너희들 마저도 날 피하는거냐?’털보가 개미의 행렬을 밟았다. 속이 후련했더랬다. 지금 그의 눈은 번뜩였다. 물론 머리카락에 가려서 보이진 않았다. 털보의 발을 피해 개미가 움직였다. 털보는 희열에 뒤덮였다. 그의 생애에서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개미를 밟았다. 행렬을 밟았다. 군단을 밟았다.‘나를 무서워하고 있어..’털보는 그날 공포에 휩싸인 개미의 표정을 봤더라. 그 자리에서 모든 개미를 밟아 죽인 이날부터 벌레를 사들여 눌러 죽이는걸 재미삼고 있었다. 그의 유희의 대상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개미, 그 다음은 귀뚜라미, 그 다음은 작은 딱정벌레, 풍뎅이까지.털보는 말을 마쳤다. 나를 보고 입꼬리를 천천히 끌어올렸다.“당신도 해보시렵니까?”나는 도망쳤다. 털보가 징그러웠다. 매일 내 옆 방에서 부스럭대는 거동이, 엄지손가락으로 벌레를 누르는 손놀림이, 쪼개진 등껍질을 보며 히죽대는 표정이, 죽은 벌레의 얼굴을 관찰하는 시선이 보였다. 소름이 끼쳤다. 나는 문을 걸어잠궜다.그날 이후, 나는 산책을 가지 않았다. 밖에 나가면 그의 이죽거리는 표정을 언제든 마주할 것 같았다. 나는 나갈 필요가 있다면 꼭 오후나 밤에 나가는 습관을 들였다. 오늘은 친구와의 약속이 있었기에 나가야 했다. 털보를 경계하며 나는 문을 열었다. 문이 고막을 거칠게 긁었다. 달밤의 푸른 빛이 우리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문에 무언가 가볍게 닿았다. 문에 가볍게 밀려난 그것을 나는 확인했다. 작은 택배 상자. 그 위에는 투박한 글씨로 적힌 쪽지가 붙어 있었다.‘아직 처음이라 무서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은 것부터 시작한다면 반드시 이 포기할 수 없는 쾌감에 중독되어 빠져나오지 못할 겁니다. 이 쾌감을 끊임없이 갈구할 겁니다. 당신을 위한 제 작은 선물이랍니다. 편하게 받아주십시오.’개미다. 나는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비명과 함께 중심을 잃었다. 바닥이 미끄러워 몸을 제대로 일으킬 수 없었다. 허우적대며 출구로 향했다. 옆집 문이 열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던 것 같다. 털보에게 가졌던 조금의 연민마저 털어버렸다.친구와의 약속을 파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호흡을 조절했다. 나는 조심히 집 문 앞으로 걸어갔다.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저 멀리서 들리는 아스팔트와 신발 밑창이 서로 마찰하는 소리에도 나는 흠칫거렸다. 문 앞에 섰다.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돌렸다. 철제 손잡이의 서늘한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감돌았다. 문고리가 절걱거렸다. 내가 문을 잠궜는 지 의문이 스칠 때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내 손목을 잡고선 집안으로 끌고 들어갔다.우리 집 안에 있는 털보였다.“선물은 어쩌셨나요? 제가 당신께 잊을 수 없는 희열을 선사해드리리다.”털보의 두꺼운 목소리가 방에 맴돌았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비명소리는 나의 기도를 날카롭게 쓸어 지나갔다. 변화는 없었다. 나는 누군가 나의 비명을 듣고 신고라도 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털보가 왼손을 자신의 상의 주머니에 가져갔다. 잠시 뒤적이더니 손을 꺼냈다. 그 손에는 벌레가 들려있었다. 살아있었다. 얇은 여섯 개의 다리를 허공에 휘젓고 있었다. 내 손목을 잡은 털보의 오른손이 나의 손을 감쌌다. 나는 움직이려 했다. 아무리 작은 털보라도 무게가 꽤 나갔다. 털보의 손이 나의 엄지손가락을 감쌌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왼손에 들린 벌레를 바닥에 놓았다. 그 위에 털보는 나의 엄지손가락을 포개었다. 등껍질은 단단하고 매끈거렸다. 나는 계속 비명을 질렀다. 숨이 찼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의식을 잃을 것같았다. 털보가 힘을 줘 누른다. 벌레는 생존 욕구에서 비롯된 몸부림을 처절하게 해대었다. 손가락이 점점 바닥에 가까워짐이 느껴진다. 손이 떨렸다. 떨리는 것이 털보의 것인지 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벌레처럼 몸부림쳤다.얇지만 단단한 껍질이 부서지는 소리와 철문을 강하게 때리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곧장 털보는 방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내 손가락에는 벌레의 사체 조각, 점액, 그리고 버석거림이 묻어있다. 털보는 경찰 아래에서 낄낄거렸다.“너도 이제 희열할 것이다! 너는 이제 금단증상에 시달릴 것이다!”털보는 이런 말을 내뱉으며 연행되었다. 다른 경찰이 내게 괜찮냐고 물어왔다. 나의 목에 들어간 힘 때문에 내 머리는 좌우로 미약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나는 빠르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경찰이 나를 부축하고 일으켰다. 경찰이 말했다. 알 수 없었다. 내 정신상태는 온전하지 않다. 경찰에 매달려 나도 경찰서에 갔다. 손을 씻었다. 아무리 닦아내도 아직 껍질이, 체액이 묻어있었다. 눈에 잡히지 않는 체액이 묻어있다. 나는 조사를 받았다. 밤이 지나서 털보는 처리되었다. 내 근처에 털보는 접근할 수 없을거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물리적인 차원이었다. 그는 밤마다 내 무의식 속에 침투했다. 죽어버린 벌레와 함께.털보는 점차 꿈을 넘어 현실의 무의식에도 침범했다. 털보의 내 뺨에서 살랑이던 긴 머리카락, 그건 곧잘 나의 머리카락에서 촉발되었고 즉시 벌레의 기어오름으로 변화했다. 혐오스러웠다. 나는 간지러움을 참을 수 없었다. 온몸을 긁어댔다.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의료용 테이프를 감아뒀다. 털보의 낄낄거리는 웃음은 나에게 붙어 좀처럼 떨어지지를 않았다. 귀를 막아도 들렸다. 그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희열이 느껴지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머리카락이 내 뺨에서 살랑거렸다. 아직도 벌레의 체액도 엄지손가락 끝에서 살랑거렸다.나는 날붙이를 들고 거울에 섰다. 거울 속에는 털보의 머리카락과 닮은 머리카락이 나에게 매달려 있었다. 잘라내야 했다. 나는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서걱거리며 떨어져 나가는 머리카락이 개운했다. 오래 묵은 때를 벗기는 기분이었다.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었다. 아직 머리카락이 살아있었다. 면도기로 완전하게 다듬었다. 여전히 머리카락이 자라날 경향성이 있었지만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더 이상 털보의 살랑거림이 나를 쫓지 않았으니 괜찮았었다.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말소했음에도 내 몸에 조금이라도 털이 닿는 순간 살랑거림이 촉발됐다. 나중에는 머리카락과 유사한 걸 목격하기만 하더라도 살랑임이 느껴졌다. 그래서 내 몸에 난 모든 털과 같은 것을 밀어버렸다. 아직 부족했다. 요즘엔 옷만 입더라도 살랑거린다. 나는 털보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살랑거림은 점점 나를 잠식했다.나는 매일 털을 깎았다. 단 한오라기조차 시야에 잡히지 않도록 깎았다. 아침이 되면 털보의 잔재는 나의 몸에서 조금씩 피어올랐다. 아침이 두려웠다. 나는 기회만 된다면 나의 모근마저 뽑아 태우고 싶었다. 나는 털보에게 죄짓지 않았다. 그는 왜 나를 따라다니며 공포에 떨게 하는 걸까?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나의 공포는 점점 분노로 변환되었다. 그의 웃음이 들릴 때마다 나의 턱아귀에는 힘이 들어갔다. 웃음소리를 씹어 삼키고 싶었다. 소화해 세상에서 없애고 싶었다. 점점 털보에 대한 혐오감이 내면에서 싹틔우고 있었다. 털보가 혐오스러웠다. 털보가 징그러웠다. 한 마리의 벌레였다. 꾸물거리는 벌레였다.나의 혐오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나는 이불을 찢어버렸다. 실밥이 내 발에서 살랑이는 기분이 불쾌해 찢어버렸다. 찢으면 찢을수록 숨어 있는 털보의 머리카락이 모습을 보였다. 나는 집에 있는 모든 이불이 그럴 것 같았다. 그래서 모두 찢어버렸다. 검은색이 있으면 그곳에서 털보는 빠져나와 나에게 말을 걸어왔기 때문에 모든 검은색을 다른 색으로 칠해버렸다. 나는 갑각류를 먹지 못하게 되었다. 딱딱한 껍질을 보고 있자니 버석거림이 엄지손가락 끝에서 살랑거렸기 때문이다. 결국 털보와 그날의 일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제거하고서야 나는 자유롭게 생활을 할 수 있었다.나는 오랜만에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갔다. 태양이 내 살을 기분 좋게 태웠다. 모근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때 내 눈에 사람이 눈에 잡혔다. 그의 머리엔 털보의 것과 같은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기생하고 있었다. 혐오스러웠다. 저것을 모두 뽑아버려야 했다. 자세히 보니 저 사람의 얼굴에서 털보가 보였다. 그건 분명히 털보가 아니였지만 털보였다. 잠시 잊고 지냈던 털보와 털보의 일과 털보를 향한 혐오감이 다시 싹텄다.나는 다시 내 집으로, 문을 열었고, 신발을 벗고, 화장실로, 날붙이를 발견, 날붙이를 감싸쥐고, 다시 거실로, 현관을 열고, 아차 신발, 복도를 걸어서 아까 그곳으로, 아까 그 사람, 그 털보에게로.나는 털보의 어깨를 잡았다. 털보는 움찔 놀랐다. 내 형색을 보고 놀란듯 싶었다.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놀라다니 약이 올랐다. 내 손에 들린 날붙이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털보의 비명이 내 귀를 찔렀다. 아팠다. 머리칼을 잡았다. 털보가 도망치려고 한다. 바닥에 눕히고 머리카락을 팽팽하게 잡는다. 서걱하고 잘라낸다. 털보가 발버둥 친다. 털보가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한때 나의 공포의 표상이자 혐오의 종착지였던 털보가 버둥거렸다. 비명에 귀가 따가웠다. 또 잘라낸다. 털보가 허공에 팔다리를 휘저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아스팔트 위에 뒹굴었다. 나의 낯에 웃음이 미끄러지듯 드리웠다. 흩어지는 머리카락을 보고 있자니 전과 같은 개운함이 느껴졌다. 나는 털보에게 공포를 선사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오는 감정은 희열이었다. 나는 희열에 휩싸였다.머리카락을 마구 잘라대다가 등에서 묵직한 충격을 느꼈다. 나는 바닥에 나자빠졌다. 누군가 나의 팔을 잡고 제압했다. 아직 머리카락을 다 자르지 못했다. 저 혐오스러운 걸 모두 없애버려야 한다. 나는 꿈틀거리며 저 털보에게 가려고 애썼다. 날붙이를 놓쳤지만 손으로 뽑으면 된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나를 제압한 사람을 응시했다. 이 사람도 털보였다. 이 사람의 머리카락도 뽑아버리고 싶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모두들 털보였다. 내 손목에는 쇠고랑이 채워졌다.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꿈틀거렸다. 팔과 다리를 허공에 휘저었다. 내 귓바퀴에는 끔찍한 버석거림과 서걱거림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