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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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용사
용사 박연 쌀떡 한 덩어리가 언덕에서 굴러떨어진다 횃불을 감추고 빈 항아리를 들고 떨어지는 쌀떡을 줍기 위해 뛰었다 발을 헛디뎌 똥통에 발이 빠질 때마다 잇새로 웃음이 샜다 불씨를 만들기 위해 나뭇가지 끝을 뾰족하게 깎다가 손바닥에 잔가시가 박혔다 발 앞에 빛나는 바늘이 쌓인다 바늘을 들어 쓴다 나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라1) 초가집에 아기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어른들은 태연했다 오래전 죽은 네 언니가 있어 살아있는 아를 질투하나 보다 깎은 나뭇가지를 나무판에 대고 비벼 재를 만들었다 불씨가 생기기도 전에 기침이 새어 나왔다 저녁 풀숲 사이 개구리 울기 시작하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점점 커다래지는 파문 날카롭게 벼른 선단을 발톱으로 두른 채 뚫린 창호지에 귀를 댔다 나를 위협하는 건 오직 나의 빛나는 이빨뿐이니 오만만이 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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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풍경을 건너가는 풍경
따뜻한 적막, 풍경을 건너가는 시간 김행숙 2005년에 나온 『파문』이라는 시집이 선생님이 출간한 마지막 시집인데, 이제 또 시집 나올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김명인 시집 원고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출판사에 시집 문의를 하기도 했고요. 작년부터 내가 이상하게 좀 흐트러져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절반쯤 정리를 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다 정리가 되면 올해 안에 시집을 낼까 해요. 그렇게 된다면 4년 만에 나오는 시집이죠. 김행숙 『파문』은 시간에 대한 사유와 이미지가 유난히 많이 드러나는 시집이었습니다. 『파문』이라는 시집의 맨 마지막 시가 ?따뜻한 적막?인데요, 이것은 2006년에 간행된 시선집의 제목이기도 하지요. ‘적막’이나 ‘적요’는 선생님 시에 특별히 빈도수가 높은 어휘이기도 하면서, 특별한 세계이며 시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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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글틴캠프 참가후기] 너희가 죽인 내세에서, 내가 죽은 중세까지
총에 맞아 파문(波紋)하는 물. 해가 있던 하늘의 언저리에서 그림자의 무늬를 수소문하는 달이 나를 어슴푸레하게 비춘다. 거대한 가로등처럼. ―가져가. 내가 너희에게 총을 건네며 말한다. 너희는 아무도 선뜻 총을 받아들려 하지 않는다. ―어서. 나는 너희 중 누군가의 손에 총을 쥐어준다. 그 애는 총을 쥐려 하지 않지만 총을 쥔다. 풀린 손. ―지금 너희 손끝에 장전되어 있는 건 총이 아니라 나야. 나는 이마 한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짚어 보인다. ―여기야. 너희는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당겨봐. 나는 총구에 이마를 대고 총신에 한 손을 얹는다. ―자. 나는 방아쇠에서 망설이고 있는 아이의 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얹는다. ―자. 너희는 눈을 감는다. 세계는 맑다. 나무는 몸 안에 생물들을 기르며 자신도 생물임을 증명했고, 꽃과 잎이 그 증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