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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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토마토를 끓이는 밤
토마토를 끓이는 밤 한지혜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었던 거 같아. 아니, 소련이었나.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 냄비를 천천히 저으며 남편이 말했다. 냄비 안에서는 토마토가 끓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저그도 아니고, 애니팡도 아니고, 삼팔광땡도 아니고, 떨이도 우수리도 아니고, 일수도 아니고, 러시아라니. 소설이라니. 남편이 책을 읽은 적이 있었나. 본 적은 없지만 그런 말을 하는 남편의 모습은 마음을 뭔가 이상하게 만들었다. 오래 입어 늘어진 트레이닝 바지가 다 쓸쓸해 보였다. 좁은 싱크대 앞에 구부정하게 서서 냄비를 젓고 있는 저 남자는 어쩌면 나의 남편이 아니라 남편의 모습으로 변신한 마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읽은 마지막 책은, 마녀가 나오는 동화였다. 그 책이 내가 읽은 유일한 책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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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물그림 엄마
물그림 엄마 한지혜 엄마는 극장에서 죽었다. 객석에 앉은 채로 발견되었다. 영화를 보다가 지루했는지 재미있었는지 웃었는지 울었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호흡이 멎었다. 그 날 상영된 영화는 <안개 속의 풍경>이었다. 예술영화였고 관객이 많지 않았다. 엄마가 앉은 자리는 스크린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맨 앞자리였다. 굳이 그 자리에 앉기 위해 엄마에게 일어나 달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므로 엄마가 언제 그 자리에 앉았고, 언제 죽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엄마가 영화를 보기는 했을까. 그 날 상영된 영화는 엄마가 절대 보지 않을 영화도 아니었지만, 엄마가 일부러 볼 만한 영화도 아니었다. 때문에 장례를 치르는 동안 엄마의 동료들은 엄마가 영화를 보다 죽었는지 아무도 몰래 쉬기 위해 잠시 객석에 앉았다가 죽었는지 여부를 놓고 팽팽하게 맞섰다. 엄마는 그 극장의 청소부였다. 논쟁을 종식시킨 건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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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
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 한지혜 2년 만에 하이힐을 신는다. 7센티미터 높이의 힐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높이이기도 하다. 이 높이의 구두를 신을 때, 가장 경쾌한 굽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발끝에서 똑똑똑 경쾌한 소리가 울린다. 그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가볍다. 딱 이만큼의 높이에서 바라볼 때의 세상도 마음에 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시선과 같거나 낮게 지나간다. 그럴 때면 척추의 뼈마디가 모두 하늘을 향해 곧추선다. 누구를 만나도 두렵지 않다. 긴장감이 내 몸 속으로 찌르르 흘러내리고, 세상을 향한 의지가 맹렬히 끓어오른다.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바람조차 싱그럽다. 남편은 내가 힐을 신고 다니는 걸 무척 싫어했다. 연애할 때는 그저 싫은 내색만 하더니, 결혼 후에는 아예 구두를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그래도 한동안은 남편 몰래 구두를 신었다. 그러다 들키면 큰소리가 오고갔지만 그도 나도 단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