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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눈이 따갑다. 두껍게 바른 비비크림이 눈에 들어간 탓이었다. 손가락으로 눈가를 슥슥 문지르는 그의 뒤에서 그녀가, 매서운 눈빛으로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 그녀는 미처 다 하지 못했던 설거지를 다시 시작했다. 박박 접시 문지르고 식기대에 깡깡 우겨넣는 소리가 그의 귀에 콕콕 박혔다. 괜히 제 어깨를 움찔 떠는 그였다. 남자는 자신이 앉아있는 화장대 의자가 엉덩이에 닿는 감촉이 너무 낯설었다.화장 지우는 동안 그는 어젯밤 아내와 다툰 것을 다시 떠올렸다. 무력하게도 그는 말다툼 내내 침묵을 유지했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서는 베개를 막 두드렸다. 도저히, 그녀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회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결정된 ‘남성’을 거부하는 남편이 미웠다. 언제나 그렇듯 그의 일관된 침묵으로 말다툼은 얼마가지 않아 그녀의 항복으로 끝났다. 남자의 속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그녀의 고성과 신경질적인 말은 남자의 입을 굳게 다물게 만들었다. 이런 말다툼이 수 년 내내 이어졌다. 그에게 이제는 침실의 푹신한 침대가 따가운 가시방석이다.남자는 우울했다. 십대 때 애써 무시했던 그 마음이 다시 피어났다. 30대부터 피어난 그 마음을 부정하는 것은 어려웠다. 티브이에 나오는 여배우들을 보면 그의 마음은 설렜다. 그들의 외모에 설렌 것이 아니다. 그들처럼, ‘여성’으로 인정받아 예뻐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주민등록증은 그를 남자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그의 염색체도 그를 ‘남성’으로 성장시켰다. 대한민국의 ‘남성’으로 태어나 이제 50대를 지나고 있는 그는 자신의 다리 사이를 바꿀 수는 없었다. 또 집에서나 일터에서나, 어디든 그는 자유롭지 않았다. 몸이 구속됐다는 뜻이 아니다. 알음알음, 사람들에게 그가 ‘게이’라는 풍문이 퍼졌다. 말씨도 곱고, 몸가짐도 남자처럼 딱딱하지 않고 나긋나긋하고, 더러는 그가 여자 옷만 산다는 말도 돌았다. 천천히, 그와 교류를 지속했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그에게 내밀었던 손을 거두기 시작했다. 일터에서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고립되었다. 외딴 섬이 되어가는 자신을 보며, 그는 고립감이 제 마음에 침식해 점점 무기력하게 변하는 자신을 원망하였다.그런 그가 유일하게 자유로운 순간은 립스틱을 들고 화장대 앞에 앉을 때이다. 매년 열리는 마을 잔치는 그가 해방을 맞이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하얀 비비크림 발라 제 피부를 윤기 나게 만들면 벌써부터 그의 마음이 들뜬다. 마을 축제가 열리면 꼭 다들 여장 대회에 참가한 그를 칭찬하였다. 빈말 섞인 칭찬으로 그를 여인 취급해줄 때 그는 묘하게 짜릿한 기분을 느낀다. 숨긴 여성성을 발현해 ‘아름답다’는 칭찬을 듣는 동안 그는 묘한 기쁨에 젖는다. 그리고 그 뒤에서 그의 아내는, 심한 부끄러움이 밀려들어 마을 잔치에서 얼굴을 내비치지 못했다. 매년, 매번, 그리고 오늘도.화장을 지우는 그, 축제의 흥분이 천천히 씻겨난다. 하얀 크림이 없어지고 남은 거뭇한 피부처럼 그의 눈가엔 아쉬움이 드리워졌다. 화장을 말끔하게 지우면 다시 고독한 사나이로 돌아왔다. 사람들 섞여 있으면서도 그 누구와 섞이지 않는, 수많은 물방울 사이의 기름방울 같은 ‘그’로 되돌아왔다. 다시 밀려오는 외로움에 그는 가발을 벗고, 저 방문 사이로 흘러드는 어스름한 빛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당신, 재밌었나봐? 그렇게 꾸미고 다니는 거, 나보다 잘하던데.냉소 담은 말을 툭 던진 그의 아내.- 그만하자. 대체 몇 년 동안 당신 여자된 걸 잔치 때마다 봐야 돼?오늘도 벌어질 저녁 토크쇼도 그에겐 험난할 듯하다.- 상민상회에서 동네 사람들 얘기하는 것들, 당신은 들어봤나? 당신 이상해. 진짜야. 밤새 다툴 때마다 꾹꾹 참아왔던 말인데, 당신 정말 이상하다고.- 나도 아니까 그만 얘기하면 안 돼? 그리고, 사실 그날만 그렇게 즐기는 건데.그러나 그의 말엔 무기력이 진하게 묻어났다. 오랜 갈등으로 그는 그의 패배를 직감했다. 그녀는 오늘 잔치에서 막걸리를 마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의 힘 빠진 말이 그녀의 역린을 건드렸다. 그 역린엔 그녀가 축적한 불만과 답답함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녀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손에 들린 접시를 높게 쳐들어 바닥에 내던졌다. 와장창! 그녀의 낮게 깔린 목소리엔 아슬아슬한 차분함이 담겼다.- 제발. 나도 변태, 게이, 여장남자랑 결혼한 불쌍한 여자라는 소리 좀 그만 듣고 싶어. 정해진 성별을 따르는 게 그렇게 어려워? 다리 사이의 그 거시기가 그렇게 싫나 봐? 차라리 그거 떼고 살지 그랬어.그가 벌떡 일어났다. 분이 아직 다 지워지지 않아 볼이 발그스름한 그 모습은 광인과도 같았다. 웬일로 그가 벌컥, 입을 뗀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야! 그렇게 떼고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 이미 난 늦은 놈이야. 계집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 제발 닥쳐줬으면 좋겠다. 나도 대한민국의 한 남자로 살기 진짜 힘드니까.그의 아내,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제 스스로 여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 남편을 보며, 제 목에서 힘이 스르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한순간에 힘이 빠진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곤 의자에 털썩 앉는다. 그녀는 물 한 잔 성급하게 들이키곤, 깨진 접시조각을 손에 꽈악 쥐며 남자를 가리켰다.- 당신, 내 앞에서 계집이 되겠다고 하면. 콱 물에 빠져 죽을 거야.그녀의 죽음을 암시라도 하듯 핏방울이 손가락 타고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남자는 그것을 보고도, 몸을 떨며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나는 게이가 아니다. 나는 변태가 아니며, 그저 남성의 ‘정체성’을 잊고픈, 여성으로 태어났어야 할 놈이라는 말이 그의 입안을 맴돌았다. 할 말은 많았다. 하지는 않았다. 그는 입술을 못 뗐다. 이미 세상은 그의 말을 ‘대꾸’로 보았다. 아내와 단둘이 얘기하는데도 그는 그녀를 포함한 세상과 자기의 발 사이에 놓인 널찍한 균열을 직감했다. 그는 참으로 비루하고 고독한 사나이였다.서너 해가 지나자 그녀는 거짓말처럼 숨을 거두었다. 죽기 전 그녀는 몇 개월 동안 보건소와 종합병원을 제 집 드나들 듯이 다녔다. 스트레스성 위궤양, 스트레스성 과호흡증, 스트레스성 편두통. 꼭 그녀가 가져온 처방전에는 ‘스트레스성’이라는 단어가 접두사처럼 따라다녔다. 아내가 떠나고 집에 홀로 남은 그는 그녀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에 눈물을 흘렸다. 그런 풍문은 무시하고 여자가 되고픈 내 속 좀 알아달라는, 차마 말 못한 간곡한 부탁이 그의 속을 쓰라리게 만들었다.그 한은 정말로 그를 여자로 만들었다. 아내가 죽은 후 그는 아내의 옷을 깨끗하게 빨고 다리미로 다렸다. 일이 끝난 밤이면 그녀의 옷을 입고 연지를 제 볼에 찍었다. 그녀가 결혼식 날 머리에 썼던 족두리도 쓰고, 수줍은 손길로 색동저고리의 옷자락을 조심히 만졌다. 하얀 버선까지 신으면 그는 마침내 ‘그녀’가 되었다. 밤마다 창문을 커튼으로 가리고 문을 잠가, 치맛자락 휘날리며 춤을 추었다. 색동저고리에 달린 고름이 제 몸을 휘감고 저고리 소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즐기면서 춤을 추었다. 춤이 끝나면 그는, 수명 다한 형광등빛 밑에 나앉아 호젓한 집의 어둑어둑한 구석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고독한 사나이는 외딴 밤에 남자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