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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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거대한 환상 - 전국에 비 외 1편
거대한 환상 황유원 가벼운 새는 풀숲에 풀잎 엮어 집을 짓고 무거운 새는 나무 위에 나뭇가지 엮어 집을 짓는다 그것은 섭리 집은 자기 집주인을 닮았다 그러므로 자기 집이 없는 사람 이를테면 자이나(Jaina) 수행자들은 누운 곳이 곧 자기 집이므로 이 세상이 다 그와 닮고 노숙자들이 한참을 배회하다 잠드는 지하철역과 골목은 점점 노숙자들을 닮아 간다 집을 버린 사람과 집에서 버려진 사람은 아무래도 서로 다른 걸 닮아 가는데 오늘은 텅 빈 뱁새 집 하날 조심스레 따다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건 버린 집이 아니라 다 써서 버려진 집 잠시 맑고 포근한 시절의 너를 떠올렸다 물결은 오늘 모든 바다에서 잔잔하게 일겠고 이윽고 식탁에서 없는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투명하게 무음으로 없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세상은 거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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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에릭 사티 외 1편
에릭 사티 황유원 에릭 사티는 하얀 음식만 먹었다고 한다 달걀 설탕 잘게 조각낸 뼈 죽은 동물의 지방 송아지 고기 소금 코코넛 하얀 물로 조리한 닭 곰팡이 핀 과일 쌀 순무 장뇌로 처리한 소시지 페이스트리 (하얀) 치즈 코튼 샐러드 그리고 (껍질을 벗긴) 어떤 생선 이상이 그가 밝힌 하얀 음식의 리스트 결벽증 이라는 말은 대개 피곤하게 들리지만 이 경우 매우 아름답고 청결하게 들린다 병적으로 잘 청소한 깨끗한 공간 처럼 보인다 (깨끗한 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무류(無謬)적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흰 눈 소복이 내린 식탁 같을 것이고 아직 아무도 밟지 않았고 아무도 밟을 일 없는 눈밭 같을 것이다 하얀 음식의 이데아 같은 것을 떠올려 보게 만들고 하얀 음식만 먹고 산 사티는 눈사람처럼 하얗게 사계절 한구석에 놓여 있다 녹아버렸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녹아서 좋았다 누가 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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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흰꽃 등나무 옆에서 - 에릭 사티 외 1편
흰꽃 등나무 옆에서 황유원 저녁 늦게 파주출판도시에 들렀다가 지지향(紙之鄕)에서 일박하고 새벽에 일어나 흰꽃 등나무를 본다 흰 꽃 이미 다 진 등이 꺼진 등나무 일석 이희승 선생이 1973년 혜화동에 집을 신축하며 오백 원을 주고 사서 심은 두 그루 중 하나라는 등나무 (나머지 한 그루는 또 어디서 흰 꽃 밝히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