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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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노을 霞
노을 霞 이종민 비가 들어가는 글자에는 물기가 있고 장마철에 비 맞기 좋아하는 당신과 바다를 좋아하는 내가 앉으면 그렇게 잔잔했나 보다. 무릎을 끌어안고 쪼그려 앉은 당신에게 왜 그렇게 앉느냐 물으면 작게 숨 쉬는 소리만 들려온다. 작은 소리에도 잘 놀라는 당신은 천둥소리는 곧잘 즐기곤 했지만 뒤에서 내가 부르는 소리에는 자주 놀라 주저앉았다. 그런 날이면 우리는 서로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고 내가 쓰는 대부분의 글자는 '미안해'와 결을 같이하는 글자들이었다. 어릴 적 엄마의 머리카락을 잡고 잤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난 뒤로 당신은 머리카락을 잘 자르지 않았다. 큰 바람이 스쳐 지나간 자국처럼 흉이 난 살갗과 비 그치고 처마에서 떨어진 물방울 같은 점이 난 팔을 어루만지다가 눈 밑 점을 처음 눈물점이라고 부른 사람이 흘리지 못한 눈물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이러나 저러나 사는 건 매한가지 죽는 길은 단 한 가지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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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노을 외 1편
《문장웹진》이 주목한 2012년 젊은 시인들 성동혁 노을 살인자들의 마을에 과수원이 생겼다 살인자가 살인자를 죽이고 산 살인자가 살인자를 죽인 살인자를 죽이고 엉킨 가지들은 던져 놓은 그물 같았다 석류가 웃돌았네 석류를 따먹으며 살인자들만 부르는 노래를 엿들은 바람 과수원을 나올 때 팔이 없어진 바람 석류를 만지고 돌아오는 길엔 모든 것에 살기가 느껴졌다 과수원의 박동이 짐승처럼 움직였다 작은 짐승에게 무거운 돌을 던지며 과수원과 가까워졌다 명절이면 텅 빈 마을에 석류가 웃돌았다 명절이 지나고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마을엔 식물을 키우며 난폭하게 늙어 가는 하늘이 있었다 액자에 산 사람을 담아 갔다 그림자 어젯밤엔 아편밭을 걸었다 쟁반 위에 램프를 쌓아 둔다 하얀 깃털이 늘어나는 새벽 파란 눈의 선교사가 내게 기도를 하고 갔다 그날 뒤로 나의 피아노 줄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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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기념사진
기념사진 - 1950 주민현 영화관과 별장 사이에서 살고 죽고 사랑하네 놀이는 언제나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노을 진 바닷가에서 바닷가의 끝까지 가슴에서 총을 꺼내면 사슴보다 멀리 쓰러지는 우리들 차가운 모래에 발을 넣고 모래가 미지근하게 부드러워질 때까지 눈을 감고 꿈속에 두고 온 작은 병정들을 데리러 간다 버찌 묻은 손으로 만졌지 바닷가에서 물 주름을 바라보면서 해변의 노인들은 죽음으로 실없는 농담을 하고 전망대에 선 부부의 발목은 반질하게 빛나고 사람 없는 오후에 거리로 나와 춤을 추는 훈련병 한때 부유했던 이들이 생활전선으로 뛰어들고 종전을 알리는 퍼레이드 뒤 그 시절의 영화를 간직한 채 운전사가 신경질적으로 미끄러지는 거리 노을 속을 걷는 사람들은 쉽게 행복해 보인다 괜찮아, 괜찮아, 사람들은 서로의 귀에 속삭여 준다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개를 잃어버린 남자는 이 부드러운 모포가 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두려움에 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