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 > 소설
JC들의 불행
1 젤디는 폭풍우가 몰려오기 직전에 나다니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일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게에 갈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찬장이 비었는지 확인도 안 했는지, 그러고도 섬사람이 맞는지에 대해 몇 번이나 자기비하를 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가게에 도착했을 때는 괜찮았다. 주인아저씨도 막 문을 닫으려는 참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운이 좋았다. 하마터면 가게에서 꽤 떨어져 있는 아저씨의 집까지 또 달려가야 했을 테니까.심통 부리기만 하던 바람이 거세진 것은 집에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였다. 젤디는 그 거센 바람을 뚫고 뛰어야만 했다. 그녀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비가 올 것 같아서 돌아가는 길 대신 짧은 거리의 해변 길을 선택한 것이 잘못이었다. 해변 길에 들어서자마자 그녀가 바람을 과소평가 했다는 것이 명명백백해졌다. 젤디의 가는 몸은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욕설을 쏟아 부었다. 이정도의 바람이라면 돌아가는 것이 빨랐을 것이다.“---아! ---라고 ---아!”그래서 젤디는 그 거센 바람 속에서도 실랑이를 벌이는 두 남자에게 감탄과 걱정을 동시에 보냈다. 꽤 가까이 서있는 데도 바람에 소리가 묻히는 통에 두 남자는 악을 써가며 대화하고 있었다. 젤디가 있는 곳에서는 세게 말하는 부분만이 들려왔다.“섬- 나가----아!”“폭풍-- 오--- 어떻--가!”젤디와 두 남자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면서 들리는 부분도 늘어났고, 그들이 누구인지도 알아볼 수 있었다. 한 명은 섬 반대편에 사는 노인이었다. 그는 언제나 노익장을 과시하며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곤했다. 그는 폭풍우 속에서도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다른 한명은 외부인이었다. 관광지도 없고, 사람도 적은 이 섬에는 외부인이 거의 오지 않는다. 누군가의 친척인가? 친구? 사람들도 적고 오기 힘든 곳이라 찾아오는 손님은 늘 일정했다. 손님이 줄어들면 줄었지 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낯이 익지 않았다.두 남자의 실랑이는 젤디가 스쳐갈 즈음 끝났다. 외부인은 절망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마 노인은 섬 밖으로 나가는 배를 태워주기로 했지만 폭풍우가 오는 것이 생각보다 빨라서 그만뒀을 것이다. 그리고 자고 갈 생각이 없었던 외부인은 난감하겠지. 젤디는 뒤를 흘끗 바라보았다. 외부인의 얼굴을 보자 무언가 생각이 날듯 말듯했다.“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었나요!”젤디는 바보 같은 질문이란 걸 알면서도 해야만 했다. 그녀의 심경을 표현할 수 있는 질문은 그것밖에 없었다. 외부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핑계로! 잠자리는! 얻을 수! 있을! 테니까!”젤디는 외부인을 쫓아오게 했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돕는 게 그녀의 신조였다. 호기심의 충족 또한 그랬다. 2 “그래요, 나도 바보 같은 질문이란 건 알아요. 나는 이 섬에서 한 발짝도 나가본 적 없고. 당신은 이 섬에 처음 들어왔으니까 우리가 만났다면 꿈속이었겠지요. 그렇지만 만난 적 있나요?”외부인은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하지만 친절에는 감사하고 있습니다.”“당연히 그래야죠. 내가 당신 때문에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되었는데.”“외간남자가 들어오면 부모님이 화내십니까?”“아뇨. 엄마는 육지에 나가 있어요. 반년에 한 번 돌아오시죠. 아, 그 다음 질문에도 대답하겠어요. 왜 부모님을 물은 질문에 어머니라고 대답 하냐면, 아버지는 폭풍우 치는 날에 고기 잡으러 가셨다가 돌아가셨어요.”외부인은 살짝 벌렸던 입을 닫고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젤디는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그럼 어떤 곤경이죠?”“난 오늘 찬장이 비어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당신을 만났어요. 폭풍우가 치는 동안에만 먹을 수 있는 양을 사왔는데 당신이 왔으니…….”“폭풍우 속에서 장을 봐야하는군요.””바로 그거에요! 귀찮은 일이 두 배로 늘었으니 숙박료는 비싸게 받겠어요.”“그럼 얼마를 드려야하죠? 건망증이 있는 편이라 지금 드리는 게 편할 텐데요.”젤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돈 많은가 봐요?”“가난하다는 소리 듣지 않을 만큼만 있습니다.”“돈 내란 소리 듣고도 찡그리지도 않고 바로 알았다고 하네.”“뭐, 숙박비니까요.”젤디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처음에는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계속해서 지긋이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부담을 느꼈다. 젤디는 그가 난감한 표정을 지어도 계속 쳐다보았다. 젤디는 끙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긁적였다.“우리 꿈속에서라도 만난 적 있나요?” 3 젤디는 남자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다.“제 이름을 아는 순간 저랑 어디서 만났는지 알게 될 것 같습니다.”“어느 꿈에서 만났는지 기억할 만큼 저를 사랑하시는군요?”“네. 아마 하얀색으로 가득한 꿈이었을 겁니다. 거기에는 글자가 잔뜩 쓰여 있는데, 저의 일생에 대한 모든 것이 적혀있지요. 그때 당신이 홀연히 나타나 제 인생을 더듬어 읽었습니다.”젤디는 킥킥 웃었다.“가르쳐줘요. 나도 그 꿈 좀 기억해 보게.”“싫습니다.”“당신이 자는 동안 외투에서 명함을 꺼내갈 수도 있어요.”“끌어안고 자야겠군요. 명함강도는 처음 들어보지만요.”그는 갑자기 외투 주머니를 뒤지더니 실망과 안도가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왜 그래요?”젤디가 흘끔 살펴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사실 여기에 올 때, 오후면 떠날 수 있을 줄 알고 빈 몸으로 왔습니다. 핸드폰도 놓고 왔군요.”“어차피 빗속에서 망가졌을 텐데요, 뭐. 전화 빌려줄까요?”“전화번호부도 놓고 왔습니다. 도저히 전화번호를 외우지를 못하거든요. 있는 것이라고는 지갑과 명함상자뿐…….”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젤디가 펄쩍 뛰어올라 명함상자에 손을 뻗었다. 그는 기겁하여 명함상자를 품 안으로 숨겼다. 젤디는 입을 비쭉 내밀었다.“그렇게 감추면 더 알고 싶어지는 거 알아요? 당신이 뭐하고 산 사람인지 밝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요. 혹시 범죄자에요?”“착하진 않지만 나쁘지도 않게 살아왔습니다.”“그럼 가르쳐줘요.”그는 잠시 고민했다. 그는 한참동안 창밖을 보며 젤디의 시선을 피했다. 젤디는 그를 힘껏 노려보느냐 그가 작게 중얼거렸을 때 제대로 듣지 못했다.“뭐라고요?”“제스퍼라고 했습니다.”“제스퍼?”젤디는 인상을 쓴 채로 들락날락하는 기억을 붙잡으려 애를 썼고, 제스퍼는 자신이 실수했다고 느꼈다. 젤디는 정적을 거칠게 부수며 안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제스퍼는 어안 벙벙해졌다. 우르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던져지고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소리가 멎었다. 젤디는 문틈을 조심스레 가리며 문을 닫았지만 제스퍼는 안방이 얼마나 초토화 되어있는지 금세 눈치 채고 말았다.“제스퍼 케니안!”그녀가 든 책을 보자 제스퍼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맙소사, 그 책이 여기도 있습니까!”“육지에서도 베스트셀러라면서요.”“여기까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내가 평생을 산 섬이 베스트셀러 하나 없을 것 같은 촌구석이라고 생각했나요?”“그건 아닙니다만…….”“맞아요! 촌구석이에요! 하지만 우리 어머니가 육지에서 일하는 사람이니까 가끔 책도 부쳐주죠. 이런 동네다보니 상당히 배달이 늦지만.”제스퍼는 조금 전의 젤디와 비슷한 일을 했다.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다. 젤디는 제스퍼가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고 “아니야. 이건 아니야. 오, 제발 꿈이기를!”하고 중얼거리는 것을 즐겁게 쳐다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비치는 얼굴이 울긋불긋했다.“당신 정말로 학교 과학시간에 배울게 없다고 선언하고서 한 시간도 들어오지 않았나요?”제스퍼는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벌떡 들고는 항변했다.“절대 아닙니다! 아니, 정말 한 시간만 들어갔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에요. 그 책은 거짓말투성이 입니다! 없는 자리에서는 나라님 욕도 한다지만 명명백백 둘이나 살아있는데 이딴 책이나 쓰고!”제스퍼는 정말 증오스럽다는 얼굴로 책을 노려보았다. 젤디는 직접 시선을 받는 것도 아닌데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난 그 책이 정말 싫습니다.”“과장이 심한가 보네요. 하긴 자기이야기가 쓰여 있으니 민망하겠어요.”“전기문이 아니라 소설입니다. 그보다 30대 초반인 사람에게 무슨 평을 내린답니까.”젤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스퍼는 정말로 침울해 보였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젤디는 그 옆에 앉았다.“심심한데 그 이야기나 좀 해봐요. 진짜 JC이야기.”제스퍼는 잠시 고개를 들더니 또다시 침울한 자세를 했다.“책보다야 덜하지만 역시 창피한 이야기입니다.”“하지만 섬사람들은 모두 나한테서 책을 빌려 읽는걸요? 그 때 반론해줄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그건 좀 군침 도는 이유군요.”“매력적인 제안이 하나 더 있어요. 얘깃값으로 숙박료 줄여줄게요.”제스퍼는 픽하고 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4 첫 인간 복제가 이루어지자 세계 각국에서 복제 경쟁이 붙었다. 윤리단체가 목소리를 드높여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첫 인간 복제 이후로 공상과학소설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있었고, 자신들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처음 인간복제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영화 속의 장면을 떠올렸다. 본체와 복제가 나란히 서있는 모습 말이다. 둘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닮아서 주변인이 놀라는 모습이라던가, 본체는 복제에게 불만을 표시했다던가 하는. 하지만 뉴스에 나온 것은 대리모의 품에 안긴 갓난아기였다. 복제의 대상이 된 남자가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아기를 끌어안는 장면은 있었다. 하지만 40년의 격차를 뛰어넘는 기술이 발명되기 전에는 복제와 본체가 닮았다는 소리를 들을 일은 없었다. 사람들은 곧 시들해졌다. 복제 아기는 평범한 가족에게 입양되어 곧 잊혀졌다. 가끔은 뉴스에 나오고 다큐멘터리도 촬영되었지만 어느 것도 화제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첫 인간복제를 성공시킨 연구팀은 새로운 연구에 착수하기로 했다. 공상 과학 소설을 읽던 연구원이 제안했다. ‘아인슈타인을 복제해보면 어때?’ 반농담조의 제안이었다. 하지만 일부 낙천적인 연구원들은 안 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복제인간이라는 말도 그들이 성공하기 전까지는 공상과학적인 어감을 띄고 있었다. 공상과학에서 현실로 끌려 들어오는 단어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것뿐이다. 단순히 천재를 복제한다고 천재가 나올 리는 없었다. 하지만 연구팀은 그것이 이 매력적인 주제를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그들은 천재의 선발에 여러 가지 조건을 붙였다. 첫째로 선천적으로 우등한 지능을 지녔을 것. 둘째로 현재와 관련이 없는 사람일 것. 셋째로 가능하면 유명인이 아닐 것. 뒤의 두 조건은 천재의 후천적인 교육에 영향을 미칠 것을 고려하여 내세운 조건이었다. 그들은 복제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복제아의 교육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들은 복제의 본체가 지나치게 유명한 사람일 경우 복제인간이라는 꼬리표도 모자라서 또 다른 꼬리표가 일평생 덜렁거릴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만일 뉴턴을 복제한다면 사람들은 그들이 거인과 해변을 운운한 명언을 다시 하기를 바랄 것이고, 아인슈타인을 복제한다면 혀를 내민 사진을 원할 것이다. 혹시 고흐를 복제한다면 사람들은 새로 태어난 고흐들이 해바라기를 그리도록 강요할 뿐만 아니라 권총자살을 은근히 기대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새로 태어날 천재들은 유명인도 아니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도 아닌데다 ‘이름 없이 세계를 바꾼 이들’에도 포함되지 못한 사람의 복제가 되어야 했다. 천재의 행적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복제들에게 섣부른 기대를 하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이었다.연구팀은 또다시 골머리를 앓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찾아서 복제하지? 어느 마을에 가서 “혹시나 해서 말인데요, 이 근처에 특별히 잘나거나 유명하거나 명망 있는 사람은 아닌데 유별나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 있나요?”라고 물어본다면 무슨 대접을 받게 될지는 뻔했다. 그보다 그런 질문에 대답이 돌아온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이 그 지역에서는 유명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명하면 안 된다, 하지만 유명하지 않으면 대답을 들을 수 없다.의문은 의외로 금방 풀렸다. 어느 연구원이 친척 장례식 때문에 며칠 쉬었을 때, 다른 연구원들은 풀리지 않는 매듭을 푸는 장소에서 자기들도 이탈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런데 그 이탈자가 매듭 푸는 방법을 가져왔고, 그는 연구원들에게 사랑을 고백 받았다. 그는 삼촌의 장례식에서 유품 정리를 도와주었고, 서랍에서 고인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그는 비도덕적인 호기심에 굴복하여 일기장을 펼쳤다.삼촌은 그럭저럭 괜찮은 학자로, 이름은 드루엔 크랭핀이었다. 세상을 바꿀만한 연구는 없었지만 적당한 성과는 내는 학자. 그런데 노년의 일기장에는 그 성과에 대한 후회가 가득 담겨있었다. 그는 자신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한 모든 발상이 도용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드루엔은 케니안 스폰이라는 남자의 생각을 도둑질 했다.케니안 스폰은 가난하고 자식 많은 집의 셋째로, 형편 때문에 의무교육만 마쳤다. 그는 읽고 쓰기와 사칙연산, 지구가 둥글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드루엔은 도서관에서 케니안을 만났고(케니안은 배움에 목이 말라 도서관의 책을 섭렵하고 있었다) 곧 친해졌으며 종종 집의 책을 빌려주기도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드루엔은 난제에 부딪혀 헤매다가 기분전환 삼아 케니안의 집에 놀러갔다. 드루엔의 말을 들은 케니안은 “얼마 전에 그 문제로 고민한 적이 있어.”라고 말 하고는 두텁고 더러운 노트 한 권을 가져와 뒤적였다. 그리고 그 안에 해답에 근접한 이론이 있었다. 마지막 징검다리만 뛰어넘으면 되는 정도로 발전된 것이었다. 그러나 케니안은 자신이 어디까지 근접했는지 몰랐다. 그 뒤로도 드루엔은 종종 노트를 훔쳐보고 논문에 반영했다. 하지만 그 일이 계속될 수는 없었다. 여느 때처럼 케니안의 노트를 보고 몇몇 생각을 적어가려 했던 드루엔은 불쑥 나타난 케니안에게 모든 것을 들켜버렸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는 케니안의 집을 방문하지 못했다. 케니안은 그의 집을 알면서도 찾아오지 않았다. 도망칠 때조차 케니안은 쫓아오거나 이름을 부르거나 역정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이 드루엔을 더욱 창피하고 죄스럽게 했다.몇몇 연구원들은 단지 성장환경이 다른 사람의 생각이 한 문제에 대한 다른 시각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영감을 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이들은 의무교육만 마친 사람이 독학으로 그 정도 책을 읽으려면 선천적으로 뛰어나야 한다고 반박했다. 케니안을 발견한 연구원은 젊은 시절 드루엔이 살던 곳과 그 근처의 도서관들을 찾아가서 케니안에 대해 질문했다. 도서관에는 도서카드를 발급 받은 사람들의 인적사항이 기록되어 있었다. 가장 열성적으로 반대하던 연구원들도 케니안의 대출기록과 낡은 노트를 보고서는 아무 말도 못했다. 연구팀은 이 이상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늙어 병상에 누워있는 케니안의 세포를 채취했다. 5 인간복제에 성공한 연구팀이라고 해서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복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연구원들은 갓 출발한 때보다는 요령이 있고 방법을 숙달했다. 여섯 아이가 대리모에게 착상되었다. 한명의 아이는 부주의로 유산되었지만 다섯 명은 무사히 출산되었다.그리고 교육팀에게 아이들이 넘어갔다. 교육팀은 아이들의 양부모를 모집했으나 신청자가 없어 애를 먹었다. 첫 인간복제 때는 입양하겠다는 사람들이 열 가구는 넘게 있었다. 그 때도 인간 복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시위를 벌였고, 일부 과격한 사람들은 센터 앞에서 난장판을 벌이고는 했다. 사실 그 당시의 반발이 훨씬 거셌다. 교육팀은 당시에는 멀게만 보이던 복제아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에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이 구세대와 현세대 간의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옛사람이 어린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본다는 것 자체가 섬뜩한 일이기는 했다. 결국 다섯 명중 세 명만 입양되었다.첫 번째로 태어난 콜린은 유명 배우 부부의 양자가 되었다. 두 배우가 콜린을 안고 활짝 웃는 기사들로 한동안 신문이 도배되었다. 두 번째로 태어난 조셉은 평범한 중산층 불임부부의 양자가 되었다. 그 부부는 아이를 몰래 데려가기를 원했다. 그들은 누구도 조셉이 복제인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게 이사까지 계획했다. 세 번째로 태어난 제스퍼는 양부모를 구하지 못했다. 네 번째로 태어난 리키는 어느 교사의 아이가 되었다. 그들도 가능한 조용히 입양하고 싶어 했으나 들키고 말았다. 다섯 번째로 태어난 브람스도 양부모를 구하지 못했다.교육팀은 양부모를 구하지 못한 두 아이는 센터의 한 방에서 키우기로 했다. 그런데 양부모가 없는 두 아이에게는 무슨 성을 붙여줘야 할까? 그들은 케니안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케니안의 이름을 따자고 했다. 성을 따기에는 애매하기 때문이기도 했다.그렇게 아이들은 이름이 길어지게 되었다. 콜린 스미스, 조셉 브라운, 제스퍼 케니안, 리키 테일러, 브람스 케니안. 기사를 쓰는 이들은 이름 모두를 쓰기 귀찮았다. 게다가 조셉 브라운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름만 알려져 있어서 쓰고 나면 조셉 혼자 성 없이 덜렁거리는 모습이 보기 흉했다. 이 복제아들을 통칭할 명칭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GC(Genius Clone), 천재의 복제라는 명칭을 사용하자는 의견이 주류였지만 다른 연구팀에서도 천재의 복제를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무산되었다. 결국 다섯 명에게 붙여진 명칭은 JC(Junior Cenian)이었다. 곧 모든 사람이 JC라는 명칭에 익숙해졌다. 이제 그들은 좋든 싫든 한 무리의 양떼로 취급받게 되었다. 6 다섯 살이 되기 전까지는 일주일에 한번, 교육팀이 집을 방문해 아이의 발달상황을 확인하고, 다양한 활동을 시키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다섯 살이 되자 부모들은 주말마다 아이를 차에 태우고 센터를 오가야 했다.콜린은 거만했다. 가장 부유한 환경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들고 다니는 장난감이 언제나 바뀌었다. 그는 다른 JC들이 자신을(정확히는 장난감을 마구 사주는 부모를) 부러워 한다는 것을 알고는 더 거만하게 굴었다. 조셉은 부모가 바란 대로 평범하게 자랐다. 적당히 낯을 가리고 적당히 친절했으며 아이답게 장난치고 아이답게 심술궂었다. 제스퍼는 조용했다. 움직이기보다는 가만히 앉아서 동화책읽기를 좋아했다. 리키는 떼쟁이였다. 그와 같은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리키가 JC라는 이유로 못살게 굴었다. 처음에는 혼자 해결하도록 격려해주던 부모도 매일 울면서 들어오는 리키를 보자 가슴이 아팠는지 직접 나서서 해결해주고는 했다. 그러자 리키는 떼를 쓰면 다 해결해 줄 거라 믿고는 조금만 곤란해지면 바닥에 드러누워 뒹굴며 울고는 했다. 브람스는 자존심이 셌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쉬이 인정하지 않았다.어느 날 콜린과 브람스가 싸웠다. 둘이 싸우는 것은 흔한 일이어서 연구원들도 이골을 낼 뿐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거만한 콜린과 깔보이기 싫어하는 브람스가 싸우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언제나 콜린이 “넌 이거 없지?”하고 말을 거는 것이 시작 신호였다. 그런데 그날의 싸움은 좀 달랐다.“넌 왜 엄마가 없냐?”연구원들은 사색이 되었다. 교육팀이 5년 동안 가장 회피해오던 주제가 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안 부러워.”라던가 “그런 바보 같은 걸 누가 가지고 노냐?”하고 말하던 브람스도 이번에는 대꾸를 하지 못했다.“우리 엄마는 영화도 많이 찍었다. 광고에도 나온다.”브람스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돼지주제에.”라고 쏘아붙였다. 콜린은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브람스는 “너네 엄마도 돼지야.”라고 말하면서 눈을 치켜떴다. 연구원들은 그 즈음에 말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브람스는 콜린이 대답하기도 전에 뛰쳐나가서 사라져 버렸다. 연구원들은 처음에는 브람스의 위치보다 그에게 부모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에 걱정했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브람스가 발견이 되지 않자 새하얗게 질렸다.물론 건물 곳곳에는 CCTV가 달려있었다. 그러나 CCTV기록을 열람할 경우 목적과 이용방법 등등에 대해 기록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기도 했다. 문책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자유시간도 아닌 수업시간에 JC들끼리의 싸움을 막지 못하고 브람스의 도주까지 허용한 것은 상사에게 크게 혼날 일이었다. 그리고 브람스는 아직 건물 내부에 있으니, 어떻게든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또다시 오산이었다. 이제는 CCTV를 사용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도주의 허용과 더불어 고작 어린애 하나를 찾아내지 못하는 연구원들로 낙인찍힐 판인데다 안전 불감증으로 질책 받을 것이다. 뛰어다니다가 지친 연구원 하나가 “과연 JC야. 저렇게 어린데도 우릴 물 먹이고 있어. 우리 대학은 왜 나온 거지?”라고 했을 때 누구도 웃거나 대답하지 못 할 만큼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었다.브람스를 발견한 것은 제스퍼였다. 하지만 제스퍼는 연구원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브람스가 새빨간 눈 주위를 가라앉힐 시간을 줘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브람스는 운 것을 들키기보다는 오랜 시간 사라진 벌을 받고 싶어 할 터였다. 그리고 장소를 밝히는 것도 브람스에게는 치욕적인 일이었다.배고픈 브람스가 스스로 식당에 나타나자 소동이 끝났다. 그 뒤로 제스퍼와 브람스는 교육팀에게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 엄마는 없어요?” 교육팀은 세상의 수많은 부모들처럼 “더 크면 알게 될 거야.”라고 대답을 유보하는 미봉책을 사용했다. 그 미봉책과 진실을 밝히는 것 중에 어느 것이 교육적으로 적합한 대답인지는 판가름하기 어려웠다. 7 리키가 생일을 몇 주 앞두고 죽었다. 연구소에서 돌아가던 길에서 난 큰 사고였다. 리키가족의 차가 가드레일을 박았고, 뒤에서 오던 차들이 연쇄충돌을 일으켰다. 설상가상으로 무면허로 폭주하던 망나니들이 반대편에서 정면으로 들이박았다. 그렇게 사고가 난다는 것조차 놀라운 사고였다. 차는 폭발했다.JC들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얼떨결에 장례식에 갔다. 검게 차려입은 옷이 영 어색했다. 기자들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사진을 찍어대었다. 놀랍게도 그 자리에서 서럽게 운 것은 브람스였다. 다른 JC들은 리키가 떼를 쓰지도 않고 관 안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도 벅찼다. 그리고 브람스가 드러내고 운다는 것에 또 놀랐다. 제스퍼는 멍하니 생각했다.‘죽는다는 건 브람스가 울만큼 대단한 일인거구나.’JC들이 죽음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장례식이 끝나고도 몇 주가 흘러서였다. 처음에는 그저 멀리 떠났다고 생각했으나, ‘영원히’라는 말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영원히 떠나가게 되는 것이 죽음이다. 사고가 나면 죽을 수도 있다. 죽어서 관에 들어갈 만큼의 시신이 남지 않을 수도 있다. 자동차는 폭발할 수도 있다. 그 안에 있으면 죽을 수도 있다. 죽을 수도 있다. 우리도 죽을 수도 있다. 죽으면 다시는 교육을 받지 못한다. 다시는 치즈케이크를 먹지 못한다. 다시는 뛰어다닐 수 없다. 죽으면 땅 속에 누워 있어야 한다. 다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저 부패하고 잊힌다. 기억에 곰팡이가 슨다.제스퍼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땅속에 누워있는 리키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한 자신을 상상했다. 가슴 속에서 욱하고 치밀어 오르더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제스퍼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울었다. 2층 침대의 위층에서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잠이 잔뜩 묻어있는 목소리였다.“왜 울어?”제스퍼는 훌쩍거리면서도 무형체적인 무언가를 애써 설명했다.“너도 그렇게 될까봐 무서워?”“넌 안 무서워?”브람스는 제스퍼와는 다른 말을 했다.“누군가 나를 그렇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 무서워.”“무슨 말이야?”브람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스퍼는 눈을 감았지만 쉬이 잠들지 못했다. 꿈속에 리키가 나올 것만 같았다. 8 JC들이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각자의 집 근처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은 제스퍼와 브람스뿐이었다. 그들은 입학식 때 또다시 부모의 부재에 대하여 깨달았다. 연구원 몇몇이 그들을 데리고 입학식에 참석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을 지켜보고는 있었다. 하지만 연구원들도 두 JC도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그 즈음 JC들은 연구원들에게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너희들이 모두 비슷하게 생긴 것은 케니안이라는 남자의 닮은꼴이기 때문이라는 식의 설명이었다. 과학이라기보다는 동화와 마법과 비슷했다. 그리고 제스퍼와 브람스는 다른 아이들이 없는 곳에서 설명을 더 들었다. 낳아준 어머니가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어머니는 아니며 단지 제임스와 브람스가 자라는 걸 도와준 사람일 뿐이라는 이야기였다. 대리모에 관한 이야기를 이해하기에는 둘 다 어렸기 때문에 그저 어렴풋하게 자신들에게 어머니라고 부를 사람이 없다는 것만을 납득했다.그들이 부모의 부재에 대한 슬픔을 느낀 것은 비단 그것만이 아니었다. 가까이는 너희 집에 놀러가도 되겠냐는 이야기부터 학부모 면담까지 그들이 경계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았다. 엄마가 구워준 쿠키나 아빠의 낚시를 따라간 일 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물론 연구원들은 발달을 위해 자주 체험학습을 나갔고, 심심찮게 유원지나 바닷가에 데려가 주고는 했다. 그리고 그들도 직접 제스퍼와 브람스와 부대꼈기 때문에 정을 느끼고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연구원들이 가진 친절함은 오히려 제스퍼와 브람스에게 ‘부모가 없다’는 것을 일깨워줬을 뿐이었다. ‘부모’라는 것은 둘로 이루어져있으며, 이혼이나 재혼에 따라 서넛의 부모가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십 수 명은 아닐 테다.2학년이 되자, 브람스는 그 때까지 자신을 괴롭힌 ‘부모’라는 존재에 대한 해결책을 내렸다. 계기가 된 것은 가계도를 그려오는 숙제였다.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는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위로도 아래로도 옆으로도 더 퍼져갈 가지가 아무것도 없었다. 브람스는 저녁 내내 고민하였다. 그리고 그가 결정한 것은 자신의 위로 가지를 뻗게 하고 ‘케니안 스폰’이라고 적어 넣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옆으로 가지를 하나 뻗어서 제스퍼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케니안을 아버지로 하고 제스퍼를 형제로 한 단출한 가정이었다. 하지만 제스퍼는 그 방법이 무척 맘에 들었다. 제스퍼 역시 브람스를 따라 가계도를 그려 넣었다. 뒤늦게 그 일을 알게 된 연구원들은 어떻게 고쳐주지도 못한 채 쩔쩔매었다. 대범한 연구원들 몇은 ‘사실 틀린 건 아냐.’라면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9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주말교육은 한층 딱딱해졌다. 이전까지는 놀이와 비슷한 형태였지만, 점점 강의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그 즈음 콜린은 더욱 뚱뚱해졌는데, 늘 몸에 상처가 한두 군데 있었다. 게다가 예전의 거만한 모습은 간데없이 소심해졌다. 연구원들이 종종 부모에게 주의를 주었지만 그들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장난치다보면 그럴 수도 있다며 오히려 화를 내었다. 그들은 스케줄의 빡빡함과 휴식의 필요함을 주장하면서 그래도 콜린을 위하여 직접 데려다주는 것이라고 역정을 내었다. 하지만 연구원 누구도, 심지어 브람스와 제스퍼도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가장 바빴을 때는 기사를 고용했었다. 그들의 인기는 하락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연구원들은 콜린에게 신경을 써주고 상담도 해주었지만 콜린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성과는 없었다.제스퍼는 여전히 조용했다. 특별히 주의를 줄 일도 없었지만 특별히 괄목할 만한 일도 없이 조용히 책만 읽고 구석에 틀어박혀 있었다. 학교에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바람에 교우관계도 좋지 못했다. 특별한 몇 명을 빼놓고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브람스는 맞서 싸우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그 자존심을 지키고 있었다. 콜린이 시비를 걸면 맞대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볍게 코웃음 치고 어린아이를 어르듯이 행동하면서 자신이 어른스럽다는 자기만족을 누리고는 했다. 콜린이 의기소침해지면서 시비를 거는 횟수도 줄어들었기 때문에 JC들의 모임은 점점 안정되고 평화로워졌다.연구원들이 가장 걱정한 것은 조셉이었다. 조셉은 여전히 평범한 아이였다. 그는 쉬는 시간에는 가져온 게임기에 열중하기도 하고 까불까불하게 다른 JC들과 장난도 쳤다. 하지만 수업에는 집중하지 못했다. 게다가 수업 자체에 흥미를 잃었다. 학교 성적은 중상위권이었지만, 열성적으로 노력한 점수는 아니었다. 그가 골몰하는 것은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것인데 주말마다 불려옴으로써 그 기회를 박탈당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연구원들은 부모들이 그를 지나칠 정도로 평범하게 키운 것이 아닌가 걱정하게 되었다.수업이 놀이에서 탈피하자 조셉은 더욱 우둔한 아이가 되어갔다. 그의 이해속도는 무척 느렸으며, 적용능력도 많이 떨어졌고, 수업에 잘 집중하지 못했으며, 다른 JC들처럼 하나를 넘어 두 개, 세 개를 한 번에 보는 능력이 없었다. 수업을 하다보면 JC들은 알아서 이해하려니 하고 과감하게 생략하는 부분이 많다. 적당한 생략은 그들의 추론능력을 높여주는 데 기여했고, JC들도 그런 수업에 익숙해서 오히려 하나하나 다 일러주는 학교 수업에 짜증을 낼 정도였다. 하지만 조셉은 그러지 못하고 혼자 동떨어져서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어떤 연구원들은 어릴 때의 조셉은 다른 아이들과 비슷한 정도였으니 계속 교육을 하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연구원들은 이미 조셉이 어릴 때 갖고 있던 추론능력을 크게 상실했고, 그들 부모의 바람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평범한’ 아이에 불과해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교육으로 추론능력을 회복시키는 동안 다른 JC들은 더 앞서갈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었다. “조셉을 우등생으로 만들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다른 JC들처럼은 되지 못 할 거에요.” 그들은 결국 조셉의 부모에게 완곡한 표현으로 뜻을 전달했다. 연구원들은 그들이 콜린의 부모처럼 말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조셉의 부모는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솔직히, 조셉이 이곳에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 애는 그저 다른 아이들처럼 뛰놀고 싶어 해요. 우리가 그렇게 길렀으니 우리가 책임져야죠. 그래도 주말 캠핑은 갈 수 있겠군요.”다음 주 주말에는 친구 집에서 자고와도 되냐며 재차 묻는 조셉을 바라보던 연구원들은 약간의 씁쓸함을 느꼈다. “어쩌면 저 애들에게 가장 필요한건 친구들하고 노는 걸지도 몰라.” 한 연구원이 제스퍼를 흘끔 보았다.그날 밤 제스퍼는 브람스에게 소곤거렸다.“나도 저렇게 될까봐 무서워.”“조셉은 좋아했잖아?”“조셉은 친구들하고 못 노니까 여기가 싫었던 거야. 그렇지만 난 여기서 쫓겨나면…….”“우리는 못 쫓겨나.”제스퍼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윗침대로 올라갔다. 브람스는 툴툴거리면서도 제스퍼가 올라오게 내버려두었다.“무슨 말이야?”“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니 우리만은 끝까지 교육시키겠지. 보육시설로 보내기에는 지금까지의 연구가 아깝기도 하고 어느 정도 잘 되어가고 있거든. 게다가 이렇게 돈들이고 시간들인 연구가 성과가 없으면 지장이 생기니까.”“그럼 너는 안 무서워?”브람스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있었다.“누군가 나를 그렇게 볼 지도 모른다는 게 무서워.” 10 JC들은 초등학교에 있을 때는 연구원들에게 마음을 그럭저럭 연 편이었다. 종종 상담을 하면 잘 받아들이고(물론 그 즈음에도 숨기고 싶은 일은 입을 앙 다물고 숨겼지만.) 연구원들이 내놓는 해결책이나 중재안, 규칙을 썩 잘 지켰다. 그들은 모든 것을 이해했다. 부모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대리모가 무엇인지, JC가 무엇인지, 그들이 왜 태어났는지, 가계도에 케니안을 아버지라고 적어 넣었을 때 왜 말리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그 작은 뇌에서 사실들을 오해하고 곡해하고 굴절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중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반항의 기미를 보였다. 자의식이 투철해지는 시기에는 JC라는 것이 걸어 다니는 데 거치적거리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콜린은 더욱 뚱뚱해졌다. 몸집과 거만한 성격, 그리고 JC라는 양념이 더해져 초등학교 때부터 따돌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때마다 먹을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했던 콜린은 점점 공과 비슷해졌다. 그리고 그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원들이 나름대로 내놓은 계책들을 시도하거나 들어보려고 하기는커녕 짜증부리며 그들을 쫓아내기 바빴다.제스퍼는 여전히 조용했고, 하루에도 몇 권씩 책을 읽었다. 어릴 때는 동화책,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과학책을 읽어댔다면 중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소설이나 사상계통으로 관심이 옮겨갔다. 그는 얼핏 보기에는 연구원들을 말을 잘 듣고 순종하는 듯 보였지만 뒤돌아서면 전부 잊어버리고 멋대로 굴고 있었다.브람스는 어른스러워 보이는 데에 아직도 집착하고 있었다. 그는 어른의 발치를 좇는 또래의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담배와 술에 손을 댔다. 브람스는 그들과 시시덕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깔보고 있었다. 연구원들은 그가 나쁜 부류의 아이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알았지만, 담배를 피운다거나 술을 마신다는 증거를 잡아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제스퍼는 브람스의 비행에 대해 낱낱이 알았다. 그들은 자주 학교 도서관 뒤편에 숨어 담배를 피웠다. 도서관의 맨 끄트머리 창문에서는 그들이 아주 잘 보였다.둘은 이층침대를 사용하는 것이 점점 불편해졌다.“불 좀 끌 수 없어?”“뭐?”“잠을 잘 수가 없잖아. 불 꺼.”제스퍼는 늦은 시간까지 책을 읽고는 했다. 하지만 실컷 놀다 온 브람스는 어서 자고 싶었고, 제스퍼도 그의 수면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제스퍼는 형광등을 끈 뒤, 스탠드를 끌어다가 침대 위를 비춰 책을 읽고 있었다.“불이 저 벽에 비친다고. 이불 뒤집어쓰고 읽던지, 엎어져 자.”“네가 이불 뒤집어쓰고 자면 되잖아.”“답답해.”“그래? 그동안 내가 찬찬히 설명해 주지 않아서 미안해. 나에게는 허파라는 것이 있는데 이불을 뒤집어쓰는 방법 같은 것으로 밀폐된 공간 안에 있으면 공기가 탁해져서 나에게 고통을 주는 호흡기지. 나에겐 없는 줄 알았어?”브람스는 이층침대의 난간을 쾅 찼다. 침대 전체가 진동했다.“닥치고 잠이나 자! 졸려 죽겠다고!”“행패는 네가 부리는 거야! 원래 우리가 자는 시간보다 1시간 빠르다고! 내가 형광등을 양보했으면 너도 이불정도는 뒤집어 써!”제스퍼는 그 와중에도 책의 다음 장면이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브람스가 조용해졌다. 제스퍼는 그가 한순간 울컥하여 화를 낸 것이라 생각하고는 관심을 끊었다. 제스퍼가 스탠드를 책에 가까이 댔을 때였다.쾅.침대가 진동했다. 쾅 쾅 쾅. 브람스가 위에서 난간을 계속 차고 있었다. “시끄러워!” 제스퍼가 악을 썼다. “제발 잠이나 자!” 쾅 쾅 쾅 쾅 쾅! 위에서 무언가 기다란 것이 떨어졌다. 탕! 그것은 귀청을 울리는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사이 두 번째 물체가 떨어졌다. 쿵! 먼저 떨어진 것이 난간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것은 난간보다는 좀 더 무거운 생물이었다. 그 것은 책을 빼앗아 던졌다. 제스퍼는 책을 피했다. 책이 침대에 떨어지면서 매트리스가 출렁거렸다. 제스퍼는 고통을 느꼈다. 스탠드가 쓰러지면서 한껏 달아오른 전구에 허벅지가 닿아버렸다. 제스퍼는 다리를 감싸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꺼.”제스퍼는 눈을 치켜뜨고 브람스를 쏘아보았다.“끄라고! 그 빌어먹을 스탠드를 꺼!”제스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그래도 안 끌 거야?”브람스는 침대를 쾅 찼다. 제스퍼는 벌떡 일어나 문고리를 잡았다. 그는 이 공간이 지긋지긋했다. 책을 들고 방을 나가려했으나, 이대로 나가는 것은 무엇인가 억울해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오래전에 알고 있던 비밀을 폭로해버리고 싶은 저열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왜 잠은 거기서 안자?”브람스는 무슨 개소리냐고 되물었다.“너 콜린이 놀리면 만날 거기서 울었잖아. 잠도 거기서 자지 그래?”“뭐?”“여자화장실.”브람스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승리감과 분노로 범벅되어있던 웃음이 일그러졌다.“헛소리 하지 마.”“나는 봤어. 그 잘난 브람스가 여자화장실 셋째 칸에 들어가서 훌쩍훌쩍. 밖에서는 그렇게 콧대를 세우더니.”브람스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씩씩 거렸다.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제스퍼는 희열을 참지 못하고 자그맣게 키득거렸다. 그 소리를 신호로 브람스가 스탠드를 집어던졌다. 제스퍼는 반사적으로 문을 닫았다. 문의 반대편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제스퍼는 곧장 도망쳤다. 브람스가 쫓아오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이젠 그가 여자화장실에 숨어야할 판이었다. 그런데도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11 그 뒤로 제스퍼와 브람스의 사이는 극도로 악화되어 같은 방에 있으려 하지를 않았다. 브람스의 짐은 하나 둘 줄고 있었다. 어디로 빼돌리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도서관 맨 끄트머리 창문에서는 모든 게 보이니까. 하지만 제스퍼는 연구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날 밤의 일을, 연구원들은 청소년 사이의 조금 심각한 다툼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제스퍼와 브람스의 사이가 벌어진 것을 이해한다는 듯이 행동했고, 몇 년 후에야 뒤늦게 브람스의 행각을 알게 된 연구원들은 사색이 되었다. 브람스는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조심스럽게 행동해왔다.“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제스퍼는 태연했다.“싸웠다고 말했잖아요.”제스퍼는 자신의 안의 무언가가 차가워진다는 것을 느꼈다. 브람스가 들어오지 않아도 걱정되지 않았다. 연구원들과 브람스의 말싸움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지독히도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연구소에 돌아온 브람스가 자신과 마주치기 싫어 휴게실의 긴 의자에서 잠을 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스퍼는 어렸을 때부터 모르는 척 하는데 익숙했다. 브람스는 종종 몰래 책을 찢어놓은 뒤 도망치고는 했다. 제스퍼는 브람스의 오만함이 옮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 광경을 보고 분노하기는커녕 코웃음 치며 ‘어린애 같군.’하고 생각했다.어느 날 제스퍼는 마음껏 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잠들었다. 몸과 정신의 피로가 노곤하게 그를 누르고 있었다. 제스퍼는 오랜만에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그 기분도 오래가지 못했다. 제스퍼를 언짢게 한 것은 버스럭거리는 소리였다. 달던 꿈이 깨지고 강제로 현실에 끌어올려졌다. 제스퍼는 짜증내며 말했다.“누구야.”소리가 멎었다. 제스퍼는 게슴츠레 눈을 떴다. 시커먼 형체의 손이 날카로웠다. 제스퍼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손에 칼이 달려있었다. 아니, 들고 있었다. 그 것은 야위고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연구원 중에 저런 사람이 있던가? 제스퍼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브람스?”브람스는 칼로 무언가를 후벼 파고 있었다. 제스퍼의 서랍이었다. 제스퍼는 화가 나기 이전에 소름이 끼쳤다.“너 미쳤어? 뭐하는 거야?”“그래 미쳤어.”“혼자 미쳐. 내 서랍은 건드리지 말고.”“네 사춘기 일기장 따위엔 관심 없어. 돈이 필요할 뿐이야.”제스퍼는 뭐라고 소리 지르려 했지만 브람스의 눈이 광기와 절박함으로 번들거리고 있어 머뭇거렸다.“네 서랍이라고? 여기 붙어있는 스티커 본 적 있어? 연구소의 소유임을 증명함. 규격. 가격. 보증기간. 제조사. 보통 가정집에서 이런 거 붙인 가구 사용해? 우리 목에도 개목걸이가 달려 있잖아. 이름 브람스, 나이 18세, 고등학교 재학생, 소유기간 성인까지, 그리고 연구는 그 후에도 계속, 연구소의 소유임을 증명함!세상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간청한 아기는 없어. 그러니 만든 사람이 일정기간 소유권을 가진다는 것은 인정하겠어. 하지만 우린 아기가 아니라 실험동물 신세라고! 왜 세상은 JC를 이렇게 다루는 거지? 우린 왜 조셉처럼 될 수 없는 거지? 조셉은 엄마에게 ‘나 오늘 친구 집에서 자고와도 돼요?’라고 물어보면 돼. 그런데 왜 나는 친구 집에서 자고 싶으면 다섯 명의 연구원을 거쳐서 외박계를 끊고 외박 사실과 장소를 기록해야 하냔 말이야! 우리를 만든 사람들이 소유권을 넘어 다른 것 까지 바라고 있어!”제스퍼는 오랜 동안 잊고 있던 사람을 기억해내고 소스라쳤다. 조셉.“리키는 왜 죽었어?”제스퍼는 대답을 빠르게 떠올렸다. 연구소에서 집으로 가려다가.“콜린의 부모는 왜 그렇게 신경질적이지?”연구소에 매주 데려와야 하니까.“왜 우리는 부모가 없지? 하다못해 고아원에서라도 자라지 못하지? 우리가 뭘 먹고 어떻게 자라는지를 기록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살아야해? 왜 가고 싶지도 않은 유원지에 끌려가서 우리의 발달을 돕도록 해야 하지?”제스퍼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JC니까.“제스퍼, 예전에 너는 연구소를 떠나면 갈 곳이 없는 게 두렵다고 했어. 기억해?”제스퍼는 잘 움직이지도 않는 입술을 달싹였다. 브람스의 날카로운 눈이 그를 찌르다시피 하고 있었다.“너는 두렵지 않다고 했어. 하지만 사람들이 너를 바라보는 것은 무섭다고…….”브람스는 욕설과 함께 내뱉었다.“그래, 무서워. 나는 아버지가 모르는 아들이고, 어머니는 없고, 양부모도 없고, 친구라고는 제대로 된 녀석도 없고, 형제들은 전부 성이 달라. 그리고 이 빌어먹을 연구소에서 감시받아. 오늘은 브람스가 소시지만 먹고 샐러드는 먹지 않았다. 편식이 심각하다. 제길, 보통의 18살들은 무슨 음식을 먹는지 감시 받지 않는다고! 그 사실에 대해 분노하는 것만이 내게 남은 18살의 권리야!”하지만 제스퍼는 이해할 수 없었다.“밖에 나가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는데?”“나가는 게 두려운 너는 몰라.”그 와중에도 움직이던 브람스의 손은 드디어 제스퍼의 서랍을 분리해냈다. 브람스는 제스퍼가 돈을 모으는 장소를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돈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그리고 칼을 바닥에 던졌다. 금속성의 날카로운 소리가 제스퍼의 귀를 울렸다.“유일하게 성이 같고 18년을 같이 산 형제조차 나를 몰라.”제스퍼는 침대 안으로 웅크려 들어갔다.“그동안 타락한 척 하고서 돈을 모아뒀어. 네 돈까지 합치면 내가 하려는 일은 할 수 있어.”이불 너머로 브람스의 목소리가 웅얼거렸다. 제스퍼는 귀를 막았지만 소리는 몸을 울리듯이 퍼졌다. 제스퍼는 머릿속으로 책의 구절을 암송했다. 문이 쾅 닫혔다. 브람스가 소리를 죽이고 뛰어가고 있었다. 제스퍼는 책의 암송을 그만두었다. 울고 싶었다. 그래서 제스퍼는 브람스를 떠올리며 펑펑 울었다. 그러나 그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12 제스퍼는 브람스의 실종으로 자신을 추스르기만도 벅찼다. 그는 책에 더욱 몰입했다. 학교 성적도 추락했고, JC들의 강의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스퍼는 콜린의 변화에 대해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의 몸에 상처가 있는 것은 예전부터 그랬다. 그래서 그렇거니 했다. 그러나 눈에 멍이 들었을 때는 심각성을 알아챘어야 했다.“혈기왕성한 애들이 그럴 수도 있죠.”콜린의 부모는 그렇게 대답했다.그 해는 JC들의 헤어짐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눈에 멍든 것이 제스퍼가 마지막으로 본 콜린의 모습이었다. 콜린은 신문에 보도된 것을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잊혀졌다. JC, 부모살해. 붉은 문구가 눈길을 잡아끄는 기사였다. 콜린은 부모의 무관심과 폭력으로 위험한 상태였다. 그는 폭식증으로 괴로워했지만 부모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들은 아동학대 혐의로 몇 번 조사를 받았지만 잘도 빠져나갔다. 그들의 폭력은 갈수록 심해졌고 콜린은 그들을 죽인 뒤 도망쳤다. 식칼을 사용한 우발적인 범행이었다. 경찰들은 곧 콜린을 찾아냈다. 그는 제발 알아달라는 듯이 강물에 떠내려 왔으니까. 제스퍼는 관속에서만은 그 멍이 가라앉아있기를 바랐다.JC들의 도덕성이 도마 위에 올랐다. 감춰졌던 브람스의 가출도 드러났다. JC들이 실패가 아니냐는 물음이 들려왔다. 지성과 윤리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 되풀이 되었다. 조셉이 더 이상 교육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어느 부주의한 연구원의 입에서 토로되었다. 남은 것은 제스퍼뿐이었다. 제스퍼의 도덕성과 사교성과 예의와 성적이 모두의 관심사였다. 제스퍼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구토했고, 압박감에 짓눌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빠르게 야위어갔고 끝도 없이 흐느꼈다.그 와중에도 새로운 학년은 시작되었다. 그 즈음에는 제스퍼의 인권을 보장하라는 외침과 가장 가까운 친구의 죽음에도 완벽하게 행동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실패작이라는 여론이 커지면서 JC논란도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어디나 그를 고깝게 여기는 존재는 있었다. 새 과학 선생님은 자연스러움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을 인생의 원칙으로 삼아서 유전자 조작 식품이나 전통적인 육종 방식을 따르지 않은 모든 품종을 비난했다. 그런 그에게 제스퍼는 세상의 악이자 불안의 씨앗이었다.제스퍼는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 이들의 환심을 사는 것은 포기한지 오래였다. 하지만 과학 선생님처럼 면전에 대고 적대적으로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제스퍼의 출석을 부르지 않았다. 몇 안 되는 제스퍼의 친구들이 제스퍼가 빠졌다고 말하자, 그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출석이 필요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십오 분 정도 제스퍼라는 존재의 비자연성과 연구원들의 바보스러움에 대해 논평한 다음, 이 말을 덧붙였다.“그 멍청한 녀석들이 부모를 죽이고 가출하고 학업을 포기하는 따위의 짓을 벌이는 것도 당연하지. 자연이 그들을 거부하거든!”몇 명의 동조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제스퍼는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절대 당신의 수업은 듣지 않겠어!”제스퍼는 흥분해서 가방을 챙기다가 필통을 엎질렀다. 그는 주워 담으려다가 자신의 꼴에 되레 화가 났다. 그래서 제스퍼는 남은 필기구도 던졌다.“어차피 인간이 아닌 존재의 출석 따윈 확인하지도 않겠지!”과학 선생은 쉽게 자신의 양심을 배반했다. 그는 일 년 내내 수업을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표시되었다. 이유는 이러했다. 있어야할 장식품이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그 후 제스퍼는 사람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 분노를 공부와 책으로 풀었다. 그의 대학 성적은 상당히 좋았다. 그리고 곧 떠오르는 수학자로 극찬 받았다. 이번에는 JC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능력으로 받은 평가였다. JC라는 꼬리표가 완전히 떨어져 나간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제스퍼는 안정되었다. 그리고 다른 JC들은 잊히는 듯 했다. 13 이야기가 끝났을 때, 제스퍼는 입이 아파 드러누워야 했다. 그는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해 본적이 없었다. ‘구연동화 하는 사람들은 대단하군. 그 위대함을 일찍 알았어야 했어.’ 이야기를 멈출라치면 젤디가 눈을 반짝거리며 달려들어서 도저히 쉬거나 그만 둘 수가 없었다. 결국 이틀 내내 이야기를 하고서야 드디어 끝났다. 일생을 반추하는 작업이 이틀 만에 가능하다니. 조금 허망하기도 했다. 제스퍼는 얼얼한 턱뼈와 입을 주무르고는 조그맣게 웅얼거렸다.“동료들은 내가 JC라는 것을 잊어갔어요. 조금 소심하고 괴팍한 수학자라고만 생각했지요. 어느 분야에나 있는 괴짜 말입니다. 나는 JC를 소재로 농담하기 시작했고요. 다른 이들이 자기 자신을 가지고 농담하는 것처럼요. 비하와 농담의 경계선에서 나는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이 모든 것을 망쳐놓았지요.”제스퍼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사람들은 다시 내가 JC란 것을 인식했어요. 나는 JC에요. 그것도 날조된 JC죠. 그러나 사람들은 저 것이 진실이라고 믿어요. 나는 그저…….”젤디는 그의 목소리에 물기가 맺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스퍼는 입을 다물었다.“나는 이제야 브람스를 이해합니다.”젤디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폭풍우는 잠시 잦아들었다. 곧 다시 몰아칠 테지만 일단은 소강상태였다. 젤디는 가게에 가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브람스를 찾지는 않았나요?”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세월이 너무 흘렀고, 그 때의 수색에도 잡히지 않았어요. 지금은 더 깊숙이 숨었을 겁니다.”젤디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머리를 한참 굴렸으니 이제 몸을 굴릴 차례였다. 젤디는 그것이 제스퍼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나가죠! 당신이 먹은 분량을 보충하러.”제스퍼는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젤디는 우비를 꼼꼼히 잠그고는 몸을 움직여보았다. 제스퍼도 외투를 여몄다. 집 앞의 작은 길은 진창이 되어 질퍽질퍽하고 미끄러웠다. 그들은 조심조심 발을 내딛었다. 젤디는 엉덩이를 쑥 빼고 걷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웃었다. 제스퍼는 그녀가 왜 웃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따라 웃자 기분이 한결 맑아졌다.“그런데 어디까지 갑니까?”“섬 반대쪽이요.”제스퍼는 주룩 미끄러지다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젤디는 다시 웃었다.“절벽 있는 곳 말입니까?”“어? 가봤군요? 맞아요. 가게 주인이 거기 살거든요.”“집 한 채 뿐이던데요?”“절벽 아래쪽 말고 위쪽요. 아래쪽에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분이 살고, 위쪽에는 제가 제일 필요로 하는 분이 사는군요. 재밌네요.”젤디는 폴짝 뛰어 작은 진창을 건넜다. 이제부터는 포장된 길이었다.“그런데 아래쪽이 가게 아저씨 집이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아, 그 절벽 아랫집 친구인건가? 어라, 그럼 나한테 재워달라 그러지 않았을 텐데…….”“가게가 있기에는 너무 외딴 곳이어서요. 다른 집들은 항구 근처에 있잖아요.”“절벽 아래 밖에 안 봤군요. 위가 더 장관이고 사람도 많은데.”“위쪽은, 무서워서 못 가봤습니다.”“어쩔 수 없죠. 지금 가는 길에는 절벽 끄트머리도 안보이니까 걱정 말아요.”젤디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에 젤디는 바닷가 길로 걸어가는 대신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올바른 선택이었다. 바람은 곧 약해졌고, 좀 더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여기 집은 대부분 빈 집이에요. 항구에서 가까우니 몇몇 사람은 임시용 집으로 이용하고, 항구에서 들어오는 물건을 실어 나르기 귀찮은 가게 아저씨도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게를 차렸죠.”젤디의 말 대로 이곳에는 바람만이 휘저으며 울고 있었다. 빈 집의 문들이 싸우기라도 할 듯 삐걱거리며 앞뒤로 내달렸다. 조금 더 걸어가자 허름한 간판의 가게가 있었다. 그래도 몇 안 되게 관리되고 있는 집이라는 것은 알아 볼 수 있었다. 젤디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게 문을 밀어보았으나 문이 화내며 덜컹거리는 것 외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는 없었다.“가죠.”그리고 그들은 또 걸었다. 제스퍼는 왜 마을 사람들이 절벽 위에 집을 지었는지 알 것 같았다. 갈수록 바람이 줄어 걷기 편해졌다. 길은 구불구불했지만 바위 언덕이 양 옆에서 바람을 막아주었다. 그리고 절벽이 향한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다른 면에 비해 그리 심하지 않았다. 젤디는 익숙하게 길을 찾아가며 말했다.“반반이에요.”“네?”“얘기값으로 퉁치자구요. 반반이에요. 식료품값.”젤디는 어느 집 문을 두드려 사정한 뒤, 돈을 주고 가게 열쇠를 받아왔다. 그리고 오던 길을 돌아가 가게 문을 열었다. 불만스럽게 덜컹거리던 문은 결국 굴복하고야 말았다. 제스퍼는 문을 닫으려고 했으나 그게 꽤나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문은 앞뒤로 출렁거렸고 제스퍼는 제자리에 문을 두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했다. 젤디는 그 틈에 작은 상자 하나를 집어 들어 음식으로 꽉꽉 채운 뒤 뚜껑을 엇갈려 닫았다. 그리고 살짝 던져 올려서 튼튼한지 확인했다. “받아요.” 제스퍼는 젤디가 던진 상자를 아슬아슬하게 받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문은 벌컥 열려서 바람을 훅 불어넣었다. 가게 안의 먼지가 일시에 날아올랐다. 젤디는 그를 빨리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걸어 잠갔다. 제스퍼는 그 동작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이루어 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젤디에게 질문하려 했으나 젤디는 “뛰어요!”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가랑비가 상자를 적시고 있었다. 제스퍼는 뛰었다. 젤디도 뛰었다. 둘은 다시 웃었다. 14 젤디의 집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거뭇거뭇한 형체였다. 젤디는 그를 보자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가다 미끄러져 넘어졌다. 철푸덕 소리가 났다. 진흙투성이가 된 젤디는 얼굴을 문질렀다. 집 앞에 서있던 사람은 소리 난 곳을 바라보았다. 남자였다. 어쨌든 이 멀리에서도 눈에 띄는 텁수룩한 수염이 여자일리는 없었다. 제스퍼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그는 이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에게서는 빗물의 냄새보다도 바다의 냄새가 났다. 그는 억세지만 부드럽게 젤디를 일으켰다.“벤! 어쩌면 이렇게 타이밍도 나쁘죠? 방금 절벽까지 가로질러 갔다 왔는데 못 만나고 여기서 만나네요.”“절벽 아래쪽 길로 해서 해안가 길로 왔거든. 너는 골목으로 돌아왔지?”젤디는 두 남자를 집 안에 들였다. 제스퍼는 상자를 눈에 띄는 곳에 놓고 외투를 벗었다.“이방인이 왔다던 게 정말이군. 네가 데려갔다기에 걱정 돼서 와봤다.”“아무 일도 없었어요.”“그래 보이니 다행이군.”벤은 제스퍼를 흘깃 바라보았다.“당신 이름은 어떻게 되시오?”제스퍼는 말문이 막혔다. 젤디가 입을 열려고 했다. 제스퍼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숨통이 꽉 조여 왔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저분 이름, 굉장히 비싸요. 제가 얼마나 졸랐는지 아세요?”“한 번 입 밖으로 나온 비밀은 값싸지는 법이지. 이름이 뭐요?”제스퍼는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애썼다.“제스퍼입니다. 듣자하니 그쪽은 벤이시죠?”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부요, 라고 덧붙였다.“네가 그렇게 말해도 나는 저 남자가 멀쩡하단 것을 확신할 때까진 못가겠다. 그 동안 시간 때울 책이나 빌려다오. 아니면 혹시 자네가 읽을 만한 책을 갖고 있나?”제스퍼는 어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젤디는 벤을 안방으로 이끌었다. 지난번에 엄마가 이 책하고 이 책 부쳐주셨어요. 이거 표지 예쁘지 않아요? 벤은 젤디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책 하나를 뽑아들었다. JC의 책. 손발이 덜덜 떨리는 제목과 사진의 표지가 제스퍼의 눈에 박혔다. 그는 표지의 앞뒷면을 읽더니 제스퍼를 바라보았다.“제스퍼 케니안이시군. 여긴 웬 행차신가?”제스퍼는 눈을 피해야 할지 말아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젤디는 그런 그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제스퍼는 자신의 표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제스퍼, 당신 왜 왔어요? 여긴 아무도 안 오는 곳인데?”젤디가 거들자 제스퍼는 대답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는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학회까지 하루의 여유가 있어서요.”벤은 제스퍼가 더듬거리며 대답하는 것을 노려보았다.“조금 답답해서, 아무데로나 가고 싶었는데, 여기 섬 주민이 돈을 좀 주면 데려가 줄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날 오후에 떠날 수 있고요. 그래서 와봤습니다.”“그 영감이 폭풍우가 온다는 것을 숨길 양반은 아닌데.”“하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고요. 날씨가 정말 맑았거든요.”제스퍼는 조금 쉬겠다고 말하고는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벤의 눈이 그를 뒤쫓고 있었다. 15 제스퍼가 소파에서 일어나자 비가 다시 퍼붓고 있었다. 가랑비 틈새를 지나가는 것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이런 폭우를 지나가는 것은 어떨까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재미있는 책이군. 당신 배울 것이 없어서 수업에 안 들어갔소?”제스퍼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그건 아닙니다만……, 설명이 귀찮습니다.”“그럼 하지 마시오.”벤은 잘라 말하고는 다시 책에 눈을 돌렸다. 그는 화나보였다. 텁수룩한 수염이 위아래로 움찔 거리는 것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 같았다. 제스퍼는 그 책을 쳐다볼 용기가 없었다. 벤을 쳐다볼 용기도.“폭풍우는 언제 그칠까요?”“빠르게 와서 빠르게 지나가는군. 내일이면 배를 띄울 수 있을 거요. 내일 오후라면 더 안전하고.”“그 영감님께 다시 부탁해봐야겠군요.”“어차피 당신 학회는 물 건너갔소. 안전할 때 가시오.”제스퍼는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다시 소파에 누워 이불을 끌어올렸다.“최근 성과가 부진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학회는 중요했는데.”벤은 콧방귀를 꼈다.“서른넷밖에 안 된 양반이 성과 부진 운운 하다니 웃기군. 나온 성과도 없을 테니 부진한지 아닌지도 모를 나이잖아.”“네, 서른넷이죠.”둘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제스퍼는 입이 간지러워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그리고 JC의 서른넷입니다.”다시 침묵이 흘렀다. 제스퍼는 그 침묵을 깰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벤은 책장만 넘겼다. 제스퍼가 다시 몽롱한 잠의 영역을 헤매고 있을 즈음 젤디가 활기차게 거실에 들어섰다. 그녀는 주전자와 찻잔을 달그락거리며 차를 끓여 내놓았다. 젤디는 귀엣말로 제스퍼에게 속삭였다. ‘짐작했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절벽 아랫집 사람이에요.’ 제스퍼는 그 소리를 무시하며 잠을 청했다. 16 잠을 깼을 때 집안의 공기는 잿빛으로 켜켜이 내려앉아 있었다. 요 며칠 동안 계속된 색이다. 제스퍼는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한 밤일지도 몰랐다. 시계를 보니 12시였다. 정오일까 자정일까? 고개를 돌려보니 잠들기 전과 그다지 변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벤은 JC의 책은 다 읽었는지 다른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제스퍼는 벤에게 물어보았다.“정오입니까, 자정입니까?”“그 것도 모르다니 대단한 수학자군. 창밖이나 보시오.”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자 자정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먹구름이 끼었다고 해도 정오가 이렇게 어두울 수는 없었다.“제가 바보일 확률은 꽤 높거든요.”“JC가?”벤의 빈정거림에 제스퍼는 인상을 썼다.“바보가 대통령도 하고 의사도 하는데 JC는 바보가 아닐 이유 있습니까?”“JC에 들어간 돈과 유전자.”“나는 학문적 호기심에 물든 연구원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그건 그들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재료였지요.”브람스는 코웃음 쳤다.“당신 피부 속에 천재가 되기 위한 유전자가 들어 있잖아.”제스퍼는 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당신은 어부가 되기 위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까?”벤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스퍼와 벤은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았다. 밖의 빗소리가 그들 사이에 휘몰아치듯 들어와 뒤흔들었다. 입을 연 것은 벤이었다. 그는 우물처럼 깊은 눈으로 제스퍼를 바라보았다. 제스퍼는 그 우물이 말라있다고 느꼈다.“복제인간 따위, 만들지 말아야 했어.”제스퍼는 다시 역겨움을 느꼈다. 과학 선생과 비슷한 말을 읊조리는 사람이 눈앞에 서 있었다. 그는 정신적으로 비틀거렸다. 제스퍼는 다시 한 번 외치고 싶었다. 당신의 수업 따위 듣지 않는다. 그의 시선이 책의 표지에 머물렀다. JC들의 이야기를 왜 책으로 낸 거지? JC들의 비참한 말로와 네 명의 죽음에 개의치 않고도 천재성을 발휘하는 한 수학자를 비웃고 그의 공로를 유전자 탓으로 돌리기 위해서? 인간은 유전자에 기본적으로 지배를 받는다는 어느 연구팀의 신념을 비웃기 위해서? 자연주의자들과 과학 선생의 같잖은 양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JC는 있어도 제스퍼는 없다. 제스퍼는 위액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벤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만들어지지 말았어야 했어. 유산되어야 했어. 이름도 없는 형제들처럼.”제스퍼는 더 이상 수업을 듣지 않기로 했다. 그는 정상이었다. 그는 심장이 하나였고, 신장은 잘 작동했고, 대뇌피질에 주름도 잘 잡혀있었다. 그는 감기나 치통보다 심각한 병을 앓아 본 적이 없다. 그는 봄이면 꽃가루 알레르기로 콧물을 훌쩍이지만 심각하지는 않다. 제스퍼는 추위를 많이 탄다. 그래서 겨울을 싫어한다. 하지만 눈은 퍽 좋아한다.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수학자다. 그는 평범한 외모의 남자다. 그는 도시의 거리를 지나다니는 수많은 제스퍼 중의 한 제스퍼다. 과학 선생은 말했다. ‘태어나서는 안 될 존재.’ 자신은 태어나게 해달라고 한 적 따위 없었다. 벤이 말했다. ‘만들어지지 말았어야 했어.’ 제스퍼는 축축한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벤이 그를 뒤따라왔다. 제스퍼는 발을 재게 놀리다가 진창에 넘어져 굴렀다. 그는 기침을 심하게 했다. 갑자기 구역질이 밀려와 진창 위에 잔뜩 토했다. 뒤따라온 벤은 그를 일으켜주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세상이 내게 태어날 것을 요구했어.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것도 모르고, 형제는 모두 배다르고 성 다르지. 유일하게 성이 같은 형제는 18년을 같이 살았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나를 구제해 줄 생각도 안했어! 빌어먹을 이기주의자!나는 멍청해! 그 것만이 내가 제일 잘 아는 거야. 왜 JC가 영리해야하지? 케니안 스폰이라는 작자는 왜 아무런 행적도 남지 않아서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 하게 만들지? 그 작자가 아무리 천재라도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었잖아! 그 작자는, 그래 어려운 책을 많이 읽었어. 하지만 요리나 농사에는 멍청이잖아!부자연스러운 존재? 왜 그런 게 태어나도록 용납했어. 왜 진작 연구소를 부수지 않았어. 시험관에 들어있던 세포덩어리를 죽여서 나를 없앴어야지. 그런 주제에 내게 들어간 돈은 자기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단 말이야. 너는 사회를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부자연스러워서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한 게? 머릿속에 든 것을 꺼내서 뿌리라고 요구해. 든 것도 없는 골을 벅벅 긁어서 핏덩이를 내놓으라고 한단 말이야. 나한테만 요구하지 마. 너도 알고 있는 것을 알려줘야 공평하잖아!”제스퍼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했다. 어느새 달려 나온 젤디는 문 앞에서 멀거니 서있었다. 벤은 비를 맞으며 묵묵히 서 있었다. 제스퍼는 흐느끼고 있었다. 구역질과 창피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어찌할 수 없는 수치심이 밀려왔다. 자신이 흐느끼는 것을 모르도록 비가 계속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셋은 꽤 긴 시간 동안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입술을 들썩이던 벤이 제스퍼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제스퍼는 도리질하며 끔찍한 소리를 토해내었다. 입밖으로 나오는 것은 없었으나 이전보다 심각한 토악질이었다.젤디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이 개이고 있었다. 빗줄기는 얇아지다가 곧 사라졌다. 17 제스퍼와 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육지로 가는 동안 그들은 침묵을 지켰다. 조금 높은 파도와 흔들리는 배가 전부였다. 섬에서는 그렇게 구역질이 났는데 배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제스퍼는 기묘하다고 생각했다.벤은 배를 모는 솜씨가 좋았다. 제스퍼는 항해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나 물 밑에 도로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릴 정도로 벤은 배를 잘 몰았다. 제스퍼는 외투 주머니의 양편에 들어있는 것을 만지작거렸다. 왼쪽에는 명함상자와 지갑이, 오른쪽에는 젤디가 준 음료수 병이 있었다. 차가웠던 음료수병은 하도 움켜쥐고 있어 이젠 따뜻할 지경이었다. 젤디는 그렇게 숙박료, 음식 값 타령을 하더니 돈 한 푼 받지 않고 그를 보내주었다.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음료수 한 병을 건네주면서 ‘잘 가요.’라고 손을 흔들어주던 모습이 아른거렸다.배가 멈췄다.“뛰어 내리시오. 기껏해야 허리까지 밖에 안 올 거요.”제스퍼는 외투를 벗어 위로 높이 들었다. 그는 잠시 바닷물을 응시하다가 뛰어내렸다. 허옇게 변한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는 철벅거리며 몇 걸음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옛 친구는 우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했지요. 그래서 비밀장소에 숨고는 했습니다.”벤은 아무 말 없이 제스퍼를 바라보았다.“왜 그를 상처 입히는 대신 끝까지 모른척하지 못했을까요?”벤의 수염이 조금 움직였다.“언제나 그렇지. 겁쟁이 양반.”“그렇게 겁쟁이는 아닙니다.”“겁쟁이가 아니면 바보군.”벤과 제스퍼는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제스퍼는 갑자기 벤이 멀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리적으로는 아니었지만, 그의 심리적 거리는 확실히 멀어졌다. 벤의 눈에 체념이 나타난 것을 그는 쉽게 알아챘다. 제스퍼는 질문하고 싶었다.“지금도 못하고 있잖소.”벤은 뒤돌아보지 않고 배를 움직여 떠났다. 제스퍼는 목이 메여 와서 벤의 이름 한 번 불러보지 못하고 배를 보내고 말았다. 18 제스퍼는 젖은 몸으로 걸었다. 걷다보니 허름한 옷가게가 보여서 옷을 사 입었다. 주인은 제스퍼의 몰골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제스퍼는 괘념치 않았다. 빗물과 바닷물에 절은 옷은 가까운 쓰레기통에 버렸다. 어서 주차한 곳을 찾아갔다. 조수석에 놓고 간 핸드폰을 열자 현실의 문제가 물밀듯이 쏟아져왔다. 다시 폭풍우 한 가운데에 들어서 있는 것만 같았다. 제스퍼는 핸드폰을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고 하나하나 전화를 걸었다. 모든 일을 일단락 지었을 때, 그는 녹초가 되어있었다. 19 제스퍼는 가까이에 있는 묘지에 들렸다. 원래의 계획은 하루의 여유시간 동안 섬에 들렸다 나온 다음, 이 묘지에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차를 몰고 학회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제는 다 망쳐버렸지만. 묘지에는 조그만 비석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 얼굴과 목소리들은 가물가물한 기억 속으로 침잠했지만, 존재를 잊어버릴 수는 없었다. 리키. 콜린. 죽어버린 JC들. 제스퍼는 꽃을 묘지에 바치고 무얼 해야 할지 모를 기분으로 서 있었다. 제스퍼는 마음이 황야나 다름 없다고 느꼈다. 어느 가족이 두 비석 앞에 멈춰 섰다. 그것도 잠시, 부인과 딸은 남편을 내버려두고 다른 곳을 향해 걸어갔다. 남자는 제스퍼를 바라보더니 말을 걸었다.“제스퍼? 제스퍼 케니안?”제스퍼는 소스라쳐 놀랐다. 남자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팔을 벌렸다.“오랜만이야, 제스퍼!”제스퍼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남자는 어느새 제스퍼를 짧게 포옹하고는 억지로 악수를 권했다.“아, 하긴 못 알아보겠군. 나도 얼마 전에 이 책을 보고서야 네 지금 얼굴을 알게 되었거든. 내가 기억하는 건 초등학교 때의 너니까.”“설마, 조셉?”제스퍼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 며칠은 제스퍼가 JC들과 재회하는 날로 결정되어있단 말인가? 조셉은 제스퍼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쾌활하게 웃었다.“보는 대로! 멍청해서 수업을 못 따라간 그 조셉이야.”“세상에!”제스퍼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조셉은 웃음기를 띤 채 말했다.“사실은 일반인이 관람할 수 있는 학회에 네가 참석한 대서 보러갔었어. 몇 십 년 묵은 난제를 풀었다면서? 그런데 넌 불참했더라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를 거야. 네가 무서워서 도망쳤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어. 아내랑 딸을 데려갔는데 나도 면목이 없었지. 그래서 그 도시에서 며칠 놀다가 오랜만에 JC들이라도 보고 갈까 해서 왔는데 너를 만났네! 이건 더 없는 행운이야!”“나도, 생각도 못했어.”그들은 잠시 할 이야기가 없어서 어색한 침묵을 나눴다. 제스퍼는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너는 무슨 일 해?”“아, 나 외과 의사야. 인턴 생활은 죽을 맛이었지. 지금도 여전히 바쁘지만. 너는 대단한 수학자님인 거 아니까 말하지 않아도 돼.”조셉은 유쾌하게 웃었다. 제스퍼는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JC를 전부 만난 셈이군.”“그래 여기 넷이나…….”“JC를 전부 만났어.”조셉은 잠시 생각하더니 더더욱 밝은 표정이 되었다.“너, 브람스도 만났어? 우와 역시 그랬구나. 둘이서 비밀작전을 짠 뒤 브람스를 탈출시키고 연락을 하고 있는 거지? 그 책 보길 잘했네. 약간 거짓말이 섞여있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겠어? 그래도 몇 개는 진실이었군. 브람스도 언제 함께 모이자. 내가 전화번호 줄 테니 연락…….”제스퍼는 입술을 덜덜 떨었다. 조셉은 제스퍼의 표정을 보더니 당황해서 그의 팔을 살짝 그러쥐었다.“이봐, 괜찮아?”제스퍼의 입에서 낮은 신음같은 소리가 나왔다.“조셉, 조셉, 생각해봐. 아무 빛도 못보고 사라져가던 가난한 천재의 연구가 누구의 손에서 학회의 인정을 받았지? 누구의 손으로 날조되었지? 드루엔, 드루엔이야. 케니안은 마지막 징검다리를 건너지 못했어! 하지만 징검다리가 어디 있는지 알려준 것은 케니안이야! 그건 날조야. 표절이야. 도둑질이야. 범죄라고!”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제스퍼는 거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멀리에 있던 조셉의 아내와 아이가 걱정스러운 듯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엄마, 제스퍼 케니안이다! 제스퍼는 귀를 틀어막고 고통스러운 소리를 흘렸다. 조셉은 그를 세게 흔들었다.“제스퍼! 제스퍼 케니안! 정신 차려!”제스퍼는 조셉의 손을 뿌리쳤다. 그는 겁에 질려 도망치는 아이 같았다. 제스퍼는 어설프게 뒷걸음질 하다 볼성없게 넘어졌다.“날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제스퍼 케니안!”“그렇게 부르지 마! 난 케니안이 아니야! JC도 아니야!”제스퍼는 떨리는 손으로 외투 주머니에서 상자를 꺼냈다. 명함상자였다. 조셉은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제스퍼는 상자를 왈칵 열어젖혀 뒤집었다. 명함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명함 사이사이, 손으로 쓴 조약한 메모들이 있었다. 빗물이 스며든 종이는 잉크가 번져있었다. 종이에서는 빗물보다는 바다의 냄새가 났다. 조셉은 종이와 명함들을 그러모았다. 제스퍼는 흐느끼고 있었다. 조셉은 어찌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케니안은 드루엔을 그냥 보내주었어.”제스퍼는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울었다. 목에서 쇠 긁는 소리가 났다. 조셉은 아무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들의 대처법은 이럴 때 무기력했다. 조셉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JC의 공통적인 기질이라면 그것일지도 모른다. 조셉은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20 폭풍우는 말끔히 가셨다. 바닷가에 쓰레기들이 쓸려 내려와 있었다. 병, 스티로폼, 물에 젖은 종이, 옷가지, 무엇에 쓰는지 모를 긴 막대들. 그 중에는 보라색 표지의 공책도 있었다. 벤은 한동안 그 공책을 바라보다가 눈길을 거뒀다.“바보 녀석.”젤디는 의아해져서 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왜요?”벤은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젤디도 따라서 고개를 들고는 미소지었다. 폭풍우가 가신 하늘에 흰 구름이 노닐고 있었다. ---------------------------- 으음, 글틴도 정말 오랜만이네요, 거의 1년만인가.중등어 시절에 민물에서 물장구 펑펑 치다가, 갓고등어가 되어서 바닷물에 적응하느냐 펄떡펄떡 뛰어다니다보니 소설 쓸 시간이 없더군요.뭐 핑계도 약간 있긴 하지만.. 여튼저튼 오랜만에 올리니까 기분 새롭다고요.그런데 저는 왜 시간이 없다면서 내일 모래가 시험인 시점에 공부 안하고 소설 쓴거지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