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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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비행
비행 문혜진 이제는 영악할 법도 하여 쉽게 열정에 빠지지 않겠지만 어린애들은 시시하고 늙은 남자는 비린내 난다. 무엇보다 나른한 요즘의 내가 연유를 듬뿍 넣은 베트남식 커피를 마시다 주술을 거는 일은 특별할 것도 없다. 국경도 없는 구름 속 새벽 비행기 안에서 해가 지는지 뜨는지 구름은 온통 붉은 카펫처럼 뭉클뭉클한데 좁은 의자에서 몸을 구부려 잠이 들다가 비구니만 사는 고요한 절간의 깊은 계곡 새끼 낳다 죽은 천년된 고양이의 울음과 오래된 기와에만 산다는 푸른 이끼의 안타까운 전설 그러나 그런 전설쯤은 레퍼토리를 달리하여 어디선가 들어본 오래된 노래 같아. 그래도 가끔 아주 가끔만 찾아온다면 뻑뻑한 콘택트렌즈의 이질감이 느껴지는 순간에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아 주겠어. 일생을 통해 그런 식으로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면 그때 나는 또 고도 오만 피트의 구름 속에 있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안녕 하고 인사를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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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이 저물녘
이 저물녘 이용임 머리를 감은 꽃들의 고요 너머로 나비 날아간다 아름다움을 딛고 산다, 고 말하면 거울 조각의 바다에 올려놓은 발등을 생각한다 얇은 날개 위에 얹혀진 빛과 파닥이는 난반사를 곁눈으로 보며 나는 왜 일찌감치 혓바닥을 잘라 저 꽃밭에 묻었을까 갸우뚱거리며 긴 모가지를 흔들거리는 꽃들과 저무는 빛 사이로 흘러드는 습기와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비행 사이 우두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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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블랙박스 리뷰]언어 속에서 잃어버린 삶을 찾아-연극 ‘블랙박스’를 본 후
백과사전식 정의는 ‘비행기나 차량 따위에 설치하는, 비행 또는 주행 자료 자동 기록 장치’이다. 사고가 났을 때 그 원인을 밝히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연극 <블랙박스>에 등장하는 젊은 남자는 검은 상자를 꼭 쥐고 있다. 불안에 떨다가 사탕을 문 아이의 표정, 혹은 마약을 하는 표정이다. 남자는 눈을 번뜩이며 말한다.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위해서라면 손가락 하나 정도는 아무도 모르게 쓰레기통에 버릴 거예요.” 좁은 무대는 꼭 블랙박스 같다. 승객이 앉는 좌석 두 개, 가방, 흘러들어오는 구름, 떨어지는 물방울, 총, 와인, 조종사의 잘린 머리, 세면대, 야간할증, 핵전쟁, 칫솔, 왕꿈틀이, 종이새, 거울, 카메라, 양말, 명령, ‘그분’, 접촉, 졸음, 젊은 남자와 늙은 남자, 스튜어디스, 그들의 대화, 행동, 표정, 어투, 침묵과 정적, 사이가 모두 블랙박스 안에 갇혀 있다. 남자 두 명과 스튜어디스의 삶도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