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91)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이별
이별 안성호 가로등 밑, 옷걸이에 걸린 노란 우의처럼 고개 숙인 그녀 벤치를 지나는 누군가 그녀의 뒷덜미를 낚아채서 몸에 딱 맞게 단추를 채우고 가버렸다 흩어지는 발자국마다 이내 비가 몰려든다 하굣길 여중생들이 주전부리하듯 빗물이 길 위로 몰려다니고 고인 빗물 속에 가로등 불빛은 파문을 일으키며 구겨졌다 펴졌다 나는 오랫동안 먹다 남은 두부처럼 천천히 상해 갔다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그 사이로 구불구불 비가 흘렀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내 책과의 이별
내 책과의 이별 신재기 2007년 연말에 발간된 어느 수필 동인지에 「나는 계획한다, 분서(焚書)를」이란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그 이듬해 8월에는 이를 표제로 하여 산문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올해 들어 어느 날 우연히 이 글을 다시 읽게 되었다. 책에 대한 나의 남다른 욕심과 집착이 배어나는 글이었다. 글은 이렇게 끝나고 있었다. 나의 책들에 대해 책임을 다하기에는 시간과 힘이 부족하다. 내 품 안에 들어온 것도 온전히 품지 못하는데, 또 새로운 인연을 맺는 것은 기존의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닐뿐더러 과욕이다. 자유를 위해 책을 옆에 두었지만, 두면 둘수록 자유에 목마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더 큰 자유로 가는 길은 붙잡고 있는 줄을 놓는 일이다. 가슴이 아파도 되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물론 품위 있는 이별이 되어야 한다. 홀대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 알량한 선심을 앞세워 누구에게 건네고 싶지 않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인터뷰] 김경미 시인, 두 세계의 화해
『카프카식 이별』(2020), 『너무 마음 바깥에 있었습니다』(2019) 등 방송 원고를 바탕으로 한 산문집은 그 화해의 증표이다. 2024년, 오랜 방송작가 생활을 마무리하고 전업 시인으로 첫발을 내디딘 그가 2025년도 아르코 펠로우십에 선정되었다. 시인으로의 완전한 ‘독립’을 맞이한 작가의 현재와 미래를 묻고 답을 들었다. “두 세계의 화해” — 『너무 마음 바깥에 있었습니다』와 『카프카식 이별』은 오랜 방송 작가로서의 경험이 문학과 아름답게 결합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인이자 방송 작가라는 두 정체성이 어떤 영향을 주며 작가님의 작품 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는지 궁금합니다. “말씀처럼 ‘아름답게 결합한 것’이었으면 좋았을텐데 시인으로서는 부족한 부분이 많이 느껴져서 실은 제가 5년 계약이 끝나자마자 두 책 모두 출판 계약을 종료했습니다. 그런데도 얼마전에 들렀던 서점에는 『카프카식 이별』이 여전히 매대에 놓여있던데, 재고분이겠죠.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