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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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이별
이별 안성호 가로등 밑, 옷걸이에 걸린 노란 우의처럼 고개 숙인 그녀 벤치를 지나는 누군가 그녀의 뒷덜미를 낚아채서 몸에 딱 맞게 단추를 채우고 가버렸다 흩어지는 발자국마다 이내 비가 몰려든다 하굣길 여중생들이 주전부리하듯 빗물이 길 위로 몰려다니고 고인 빗물 속에 가로등 불빛은 파문을 일으키며 구겨졌다 펴졌다 나는 오랫동안 먹다 남은 두부처럼 천천히 상해 갔다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그 사이로 구불구불 비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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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내 책과의 이별
내 책과의 이별 신재기 2007년 연말에 발간된 어느 수필 동인지에 「나는 계획한다, 분서(焚書)를」이란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그 이듬해 8월에는 이를 표제로 하여 산문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올해 들어 어느 날 우연히 이 글을 다시 읽게 되었다. 책에 대한 나의 남다른 욕심과 집착이 배어나는 글이었다. 글은 이렇게 끝나고 있었다. 나의 책들에 대해 책임을 다하기에는 시간과 힘이 부족하다. 내 품 안에 들어온 것도 온전히 품지 못하는데, 또 새로운 인연을 맺는 것은 기존의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닐뿐더러 과욕이다. 자유를 위해 책을 옆에 두었지만, 두면 둘수록 자유에 목마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더 큰 자유로 가는 길은 붙잡고 있는 줄을 놓는 일이다. 가슴이 아파도 되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물론 품위 있는 이별이 되어야 한다. 홀대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 알량한 선심을 앞세워 누구에게 건네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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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성간공간
별과 별 사이에 이별 이후 내내 걸려 있던 부재자의 외투 한 벌을 겨울나무처럼 앙상한 그의 어깨 위에 걸쳐 주었다. 만남과 이별 사이. 시선과 시선 사이. 어제의 죽음과 내일의 죽음 사이. 세상 모든 사이로 오늘 그는 내 왼쪽에서 걷고 있다. 내 왼쪽 어깨와 그의 오른쪽 어깨 사이 단차 큰 계단이 있고 계단을 밟고 다락으로 오르는 별이 있고 그의 왼쪽 어깨와 내 오른쪽 어깨 사이 비 오는 하루가 통째로 들어차 있고 그의 왼쪽 어깨에서 시작되어 지구를 한 바퀴 휘감고 내 오른쪽 어깨로 이어진 무지개가 있다. 성간풍에 휘날리는 부재자의 외투 안주머니에는 내가 태어나기 직전에 그가 훔쳐간 내 심장이 아직 뛰고 있다. 그가 백지로 접어 날린 종이비행기에 올라타고 지금 난 성간 공간을 건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