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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종말
오후의 종말남자는 1층부터 15층까지의 버튼을 차례대로 누른 뒤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곧이어 주변 공간이 들뜨는 것 같은 느낌이 남자의 미주신경을 가볍게 죄어들었다. 한손에는 MP3플레이어가 들려있었는데 거기서 기다랗게 비어져 나온 이어폰은 남자의 귓바퀴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러나 노랫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MP3플레이어는 자신의 몸통 한구석에 뚫려있는 자그마한 구멍들로 주변의 덜그럭거리는 소음을 빨아들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깐 한마디로 말해서 녹음 중이었다. 남자는 지하주차장 안을 가로지르며 달라붙었던 어둠의 부스러기들을 옷깃에서 털어내며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순간부터 이미 rec버튼을 누른 채였다. 견고하게 맞물려있던 문이 양쪽으로 물러나면서 흘러나오는 여자의 차갑고 건조한 음성, “지하 1층입니다.”를 남자는 특히나 주의 깊게 MP3플레이어 속에 담았다.그것은 남자의 괴상한 취미였다. 제아무리 서울의 인구수가 미어터지고 그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괴상한’ 취미와 ‘고상한’ 취미가 한끝 차이라지만, 텅 빈 엘리베이터 안에 쭈그려 앉아 녹음을 하는 일을 일상의 즐거움으로 삼는 남자는 분명 유별난 데가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남자가 1년 전, 이곳 아파트에 경비원으로 취직한 이래로 지금까지 이어져왔던 단조로운 일상들. 매일 할 일없이 아파트 구석구석을 쏘다니며 붓으로 슥슥 그려낸 수묵화처럼 색조 없는 풍경에 물들어가고 있을 무렵, 여자는 나지막이 속삭였고 남자는 반응했다.“1층입니다.”다시금 문이 스르륵 열리고 남자는 어느새 MP3플레이어를 위로 치켜 올린 채였다. 문지방을 타고 넘어온 늦은 오후의 나른한 햇살들은 액정 위에 자꾸만 엉겨 붙었다.남자는 꿈속을 허덕이고 있었다. 두 눈을 연신 깜빡여보았으나 동공 위를 쓸어내리는 눈꺼풀의 감촉만이 어렴풋하게 느껴질 뿐, 앞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그 속에서 누군가가 남자를 부르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 목소리는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는 낮은 속삭임에 불과했지만, 어째서인지 남자는 그것이 자신을 부르고 있다고 믿었다. 귀를 곤두세우고 목소리의 발원지를 찾아보려 애썼지만 도저히 방향감각을 잡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라디오의 볼륨조절 휠을 이리저리 돌리며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목소리는 커졌다 잦아들었다가를 반복했다. 마침내 남자는 앞으로 비척이며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그런 남자의 귓전을 바람처럼 스쳐지나가며 간지러운 이명을 남겼다. 앞으로 한걸음씩 내딛을수록 발밑에서 질척이는 어둠이 첨벙거렸다. 당신은 정말 나를 부르고 있는가. 남자의 머릿속에서 울려대기 시작한 또 다른 목소리.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음성이었다. 남자는 무수한 목소리들의 교차점을 지나며 어둠 속을 방황했다. 가끔씩 막연한 두려움에 휩쓸려 걸음이 더뎌지고 두 팔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몸서리쳤지만 아무도 남자를 껴안아 주지 않았다.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깨부수는 몇 번의 둔탁한 소음. “똑, 똑, 똑.”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의자 등받이 위에 비스듬히 기대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 유리창 너머를 건너다보니 웬 낯선 남자 하나가 우두커니 서있었다. 남자는 아직 흐릿한 초점으로 그의 신상을 대강 헤아려보려 했다. 체크무늬 셔츠 위에 받쳐 입은 후줄근한 조끼의 왼쪽 가슴팍에 ‘XX통운’이라고 새겨진 것으로 보아서는 택배기사인 게 분명했다. 남자는 무심히 유리창을 바깥으로 열어젖혔다.“택배인데, 수령인이 집안에 안 계시네요. 대신 보관 좀 해주시죠.”택배기사의 목소리는 어떤 잡음에 뒤섞여 희미했다. 남자는 문득 자신의 귀에 이어폰이 꽂혀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것을 잡아 뺐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모아놓은 녹음파일들을 돌려듣다가 설핏 잠이 든 것 같았다. 택배 기사는 비닐 테이프로 입구가 밀봉된 작은 종이상자 하나를 남자에게 건네고는 쏜살같이 사라져버렸다. 남자는 장부에 기록해두기 위해서 곧장 수령인 이름을 확인했다. 103동 401호, 안희진. 또 그 아이로군. 남자는 플라스틱 파일에 철해진 종이 위에 그 이름을 대충 휘갈겨 쓴 뒤, 상자를 경비실 구석에 쳐 박아 두었다.희연의 택배는 지금까지 꼬박 한 달에 걸쳐 거의 사흘에 한번 꼴로 도착했다. 어째서인지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은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고 덕분에 남자는 그런 그들 대신에 택배기사와 맞닥뜨리기 일쑤였다. 희연이 주문한 물건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것들의 대부분은 남자의 손을 거친 셈이다.희연은 물건을 찾기 위해 밤늦게 경비실에 들를 때마다 항상 교복 차림이었다. 그리고 얼굴에는 무거운 피곤기가 서려있었다. 처음에 남자는 여태까지 학교나 학원에서 시달리다 왔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날이 갈수록 가방조차 매지 않은 날이 잦았고 왠지 모르게 얼굴에 서려있는 피곤기가 한층 더 짙어져 가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풍성한 단발머리는 마치 그녀에게 달라붙은 악몽의 터럭들처럼 힘없이 어깨에 늘어져 있었다.하지만 남자는 그 이상으로 희연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도 이유도 없었다. 남자는 빗자루로 아파트 건물 구석구석에 널브러진 쓰레기들을 쓸어 담거나, 몇몇 불한당 같은 놈들이 제멋대로 뒤섞어놓은 폐품들을 다시 알맞게 분류해놓는 등, 경비원으로써의 일상에 충실해야했고 그 사이에 틈이 나면 어김없이 엘리베이터를 찾아 여자의 음성을 녹음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사실상 희연은 그가 근무하는 아파트 단지에 군집해있는 표정 없는 얼굴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니깐 불과 며칠 전까지는 그랬다는 소리다.희연이 택배를 찾으러 오지 않은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 그리고 그 사이에 두 번째 택배가 연이어서 도착했다. 남자는 인터폰으로 희연에게 연락을 해보기도 하고 직접 집으로 찾아가도 봤지만 어째서인지 매번 응답이 없었다. 그녀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남자가 반상회에 참석하게 된 것은 세 번째 택배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뒤였다. 그때까지 희연은 경비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남자는 배달된 종이상자들을 경비실 한편에 고스란히 쌓아두었다. 그것들을 대신 맡아두고 있는 것이 딱히 번거로운 일은 아니었으나 왠지 모르게 자꾸만 남자의 신경을 거슬렀다. 대체 저 상자들 속에 담겨있는 물건이 무엇이기에, 그 아이는 그토록 필사적으로 주워섬기려 했던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고 종적을 감춘 것일까. 그 아이의 부모는 제자식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이 없단 말인가. 최소한 찾는 시늉이라도 해야 되지 않는가. 아니면 다 같이 어딘가로 떠나버린 걸까. 여러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나 남자는 결코 상자를 허락 없이 열어본다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희연에 관한 생각이 불현듯 떠오를 때면 습관처럼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기계들이 분주하게 맞물리며 사각의 공간을 허공으로 잡아채고 마침내 스피커를 통해서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오면 남자는 이내 깊은 안도를 느끼곤 했다. 물론 이 모든 과정들은 wma파일로 변환되어 MP3플레이어 속에 차곡차곡 쌓여갔다.“저녁에 순찰 좀 제때 돌아주세요. 아니, 밤 열시만 되면 놀이터에 불량학생들이 모여든다니까. 여기가 무슨 도적떼 소굴이야, 뭐야? 어찌됐든 그 애들 때문에 문제가 이만 저만이 아니에요. 제 딸이 시끄러워서 공부를 못하겠다고 어찌나 투정을 부리는지… 게다가 벤치 아래 쌓여있는 담배꽁초들도 다 그 애들 작품 아닙니까. ‘아저씨’, 그게 미관상 얼마나 안 좋을지 상상이나 해보셨어요?”최소한 남자보다 대여섯 살 정도는 많아 보이는 천상아줌마가 남자에게 굳이 ‘아저씨’라는 호칭을 붙여가면서 그를 연신 다그쳤다. 주위 사람들은 벤치 밑에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들보다 몇 배는 더 아파트의 미관에 해악을 끼칠 법한 아줌마의 험악한 외모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지 좋아라하며 맞장구를 쳐댔다. 어쩌다보니 반상회는 한낮 경비원 나부랭이를 날선 말로 몰아세우고 겁박하는 청문회로 탈바꿈했다. 야간 순찰하는 시간을 지금보다 곱절로 늘려라, 브래스 너클을 보란 듯이 손에 끼우고 다니는 불량학생들을 말로 좋게 타일러서 바깥으로 내쫓아라, 아저씨 이발할 시간에 가로수들 머리나 단정하게 다듬어 줘라, 가정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서 검침원이 돌아다니기 전에 미리 한번 도시가스를 예비점검 해줘라, 지난번에 공고 나왔다고 하지 않았느냐, 한번 그 재능을 십분 발휘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 등등. 아줌마의 무리들은 다양한 패턴으로 남자를 사정없이 쪼아댔으나, 결국 이야기의 골자는 우리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비록 임금을 인상해주지는 못하겠지만 직업에 대한 의무감을 가지고 아파트에 성심성의껏 봉사하는 새 나라 아니, 새 아파트의 일꾼이 되라는, 참으로 되도 않는 소리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앉아있었다. 자신이 언제 목이 댕강 날아갈지 모르는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이 자꾸만 발목을 붙잡기도 했었거니와, 무엇보다 희연에 대한 정보를 주워들을만한 장소가 이곳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여태까지 난타를 당하기는 했지만 이왕 자리한 김에 본전이라도 뽑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저기, 혹시 103동 401호에 사는 사람들 아십니까? 요새 통 얼굴을 못 봐서요.”남자는 마침내 아줌마들의 대화 주제가 일상적인 일들로 넘어갔을 때, 넌지시 물었다. 물밀 듯이 쏟아져오는 아줌마들의 수다에 떡밥 하나만 잘 던져 넣는다면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들을 줄줄이 낚아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 예상은 언제나 그랬듯이 적중했다.“103동 401호? 거기 어떤 아저씨가 딸 하나 데리고 같이 살지 않나? 딸이 고등학생 이었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 그래, 우리 딸이랑 동갑이라고 했을 거야, 아마.”처음 남자가 던진 떡밥을 문 것은 여전히 모든 남자들을 아저씨라는 협소한 범주로 묶어내는 데에 여념이 없는 험악한 아줌마였다. 생각보다 대어가 걸린 셈이다.“둘이 산다고? 엄마는 어디 갔는데?”105동 701호 사는 새댁이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 물어왔다.“오래 전에 이혼을 했다나봐. 얼핏 들어보니깐 그 뒷얘기가 여간 구린 게 아니더라고. 여자가 바깥남자랑 바람이 나서 이혼 서류에 도장도 안 찍고 냅다 도망쳤다는 거야, 글쎄. 그 이후로 401호 아저씨가 줄곧 혼자서 애를 키웠고.”“그래도 애 아빠가 돈은 잘 번다던데? 어디 무역회사 이사인데 해외출장도 많이 다니고 그런다면서. 그래서 얼굴을 못 보는 건가? 오다가나 한번 쯤 마주칠 만도 한데.”“돈 잘 벌어봤자 뭐해. 애가 그 모양 그 꼴인데. 내 딸이 그러는데 자기 학교에서 유명하데. 선생 놈한테 붙어먹어서는 연애질을 한다나 뭐래나. 참나, 역시 피는 못 속인다고…”아줌마는 남자를 흘낏 쳐다보더니 이내 말꼬리를 흐렸다. 남자가 자신을 괜한 사람 뒤에서 헐뜯는 몰염치한 인간으로 여기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그리고 그 우려는 이미 오래 전부터 기정사실화 되어있었다. 남자는 가로수들 이발이나 시켜주러 가야겠다는 핑계를 대고는 아줌마의 불안한 시선을 뒤로 한 채, 반상회장 자리를 유유히 빠져나왔다.남자는 초인종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눌러보았지만 여전히 안에는 기척이 없었다. 무심코 현관문 위를 올려다보니 ‘401호’라고 새겨진 투박한 글씨체가 시야 속에 들어왔다. 아연으로 도금처리 된 글자들의 매끄러운 외연은 희미한 비상등 불빛을 머금고 있었다.벌써 두 번째 방문. 남자는 반상회장에서 시달리느라 어수선해진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들른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신이 하필이면 103동 건물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곧장 4층에서 내려 이 현관문에 앞에 섰다. 단순한 우연일까. 어쩌면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희연을 의식하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경비실. 이 야박한 세상이 남자에게 내어준 지극히 협소한 삶의 공간. 그리고 그곳의 한 귀퉁이에 눌러앉기 시작한 정체모를 종이상자들. 그 기묘한 동거.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희연이라는 소녀는 어느새 남자의 일상 속으로 기어들기 시작했다.희연은 어떤 아이일까. 남자는 계단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워 물며 생각했다. 주위에서 들리는 풍문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희연은 외톨이였을 것이다. 엄마의 외도. 틈만 나면 해외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아빠. 남자가 내뿜은 희뿌연 연기 사이로 텅 빈 거실에 홀로 선 희연의 뒷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듯했다. 많아봤자 고작해야 열아홉 살의 소녀일 터. 이른 아침,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서늘한 밤공기로 식어있는 방안에서 깨어나 아무도 챙겨주는 이 없이 주섬주섬 학교를 갈 채비를 하고 아침밥을 억지로 떠넘기고 학교에 갔다가 다시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집안으로 되돌아오는 일상. 그리곤 조막만한 손으로 차린 어설픈 저녁밥상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멍한 시선으로 텔레비전을 응시하겠지. 일말의 온기조차 끼어들 틈이 없을 만큼 아무런 굴곡도 감동도 없는, 그런 하잘것없는 시간들. 지독한 외로움. 그다지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희연과 선생님 사이에 펼쳐진 위태로운 치정극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그 아이는 누군가의 손길이 그리웠을 것이다. 그 누군가가 꼭 선생님이 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상관할 바 아니었겠지.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남자는 스스로를 힐난했다. 나는 그 아이와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잖아. 이건 모두다 망상이야, 망상. 그리고 그가 옳았다. 남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손가락 사이에 들려있던 담배꽁초를 계단 위에 비벼 껐다. 그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금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별다른 일 없이 며칠이 지났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들. 남자는 마치 그것들을 쓸어 담으려는 듯 맨바닥을 빗자루로 더듬거렸다. 그러다가 아스팔트 귀퉁이에 고여 있는 한줌의 햇살을 발견하고는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해졌다. 문득 고개를 위로 들어보니 푸른 하늘에 드문드문 걸려있는 조각구름이 보였다. 그리고 남자는 이내 빗자루를 석조 기둥 근처에 세워놓고는 그 아득한 풍경 위로 담배연기를 뒤섞었다. 요즘 들어서 부쩍 담배가 늘었다고 생각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경비실의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니 탁자 위에 놓여있는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고 있었다. 남자는 곧장 핸드폰의 폴더를 열고는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나야, 현진이. 이게 대체 얼마만이냐. 잘 지내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상대방의 목소리에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어조. 남자는 어렵지 않게 그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보냈던 옛 친구임을 상기했다. 참으로 오랜만의 연락이었다. 갓 서른에 접어들었을 무렵, 현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서둘러 유학길에 올랐고 이후로 자연스레 멀어졌다. 유학을 떠나기 전날 밤, 남자의 친구들은 어느 허름한 주점을 통째로 빌려서 밤새 퍼마셔댔다. 그때 현진은 취기가 올라 풀어진 눈길로 남자를 건너다보며 말했었다.“이게 사는 거야? 나는 못 견디겠어. 그래서 난 도망치는 거야. 다시 살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그리고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남자는 우연찮게 그가 유학을 떠난 낯선 나라에서 한 폴란드 여자와 결혼을 해 정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그날, 햇살이 비쳐들지 않는 눅눅한 지하방에 틀어박혀 홀로 맥주 캔을 비우며 남자는 친구의 결혼생활에 대해서 떠올려 보았다. 아마 그런대로 행복하겠지. 한때 남자와 함께 분투의 시간들을 견뎌냈던 현진은, 어느새 남자의 처지로부터 한참이나 빗겨가 있었다. 왠지 모르게 그를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건, 남자가 이 아파트의 경비실에 정착하게 된지 한참 전의 일이었다.그런 그가 남자에게 연락을 해온 것은 정말이지 의외의 일이었다. 현진은 며칠 전에 귀국을 했다고 한다. 방금 전 남자가 높게 치솟은 아파트 건물들 사이로 마주친 하늘만큼이나 푸르른 눈을 가졌을 그의 아내와 어떻게 생겼을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아들놈 하나를 데리고서. 어째서인지 반가운 마음에 앞서 뜻 모를 위화감이 비집고 들었다.“아마도 난 다음 주 쯤에 다시 돌아갈 것 같아. 옛날 추억도 환기시킬 겸, 부모님 얼굴도 한번 뵐 겸해서 잠깐 들른 거라서. 그전에 꼭 한번 얼굴이라도 보자.”그리고 그는 자기 멋대로 약속날짜와 장소를 정해버린 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남자는 한손에 핸드폰을 그러쥔 채로 오래토록 경비실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허공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던 남자의 시선에 맞닿은 형체들. 경비실 구석에 위태로이 쌓여있는 그 작은 종이상자들.남자는 그 앞으로 다가가서더니,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그것들을 굽어보았다. 현진이 돌아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가.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남자가 미지근한 맥주를 입속에 털어 넣으며 불현듯 들었던 생각, 그를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는 생각만큼은 변치 않을 것이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마음을 뒤섞을 상대는 네가 아니라 이쪽이야. 남자는 어느새 종이상자 하나를 집어 들어 밀봉된 비닐테이프를 뜯어내고 있었다.남자는 탁자에 바짝 붙어 앉아 그 위에 길게 늘어선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나무를 덧댄 손잡이, 스테인리스 실링과 실린더, 온갖 크기의 금속 나사들, 스프링, 탄창 따위의 기계부품들이 그늘진 방안에서 희미한 윤곽을 드러냈다. 그리고 남자의 손에 들린 몇 장의 설명서, 모서리 부분이 말려 올라간 그 낡고 헤진 종이들 위엔 권총의 단면도와 부품들을 조립하는 방법이 순서대로 나열되어 적혀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희연이 주문한 택배 속에서 끄집어낸 내용물들이었다.드디어 남자의 삶속으로 틈입해 들어온 존재의 정체가 밝혀졌다. 그것은 누군가의 죽음. 특이한 취향을 가지고 있어 총기류 수집을 즐겨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권총을 장난삼아 구입하지는 않는다. 국내에서는 총기소지 자체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을뿐더러, 불법적으로 들여온다 하더라도 그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희연은 미성년자이기까지 하다. 희연과 희연에게 택배를 보낸 누군가도 이러한 사실을 간과했을 리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부품들을 일정 기간에 거쳐 소량씩 보내오는 불편을 감수한 것이다. 이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희연이 권총을 고집했던 이유는 두말 할 것도 없이 방아쇠를 당기기 위해서다.탄창 안에 들어있는 몇 개의 총알. 남자는 그 중 하나를 집어 들어 손으로 어루만져 보았다. 그러자 금속성 물질 특유의 서늘한 감촉이 와 닿았다. 이것은 대체 누구를 관통해 들어가기 위해서인가? 버림받은 자신? 아니면 자신을 버린 사람들? 어찌됐든 희연은 그로부터 도망친 것이다. 한 떨기의 죽음이 만개하기 시작한 총구를 남자에게 들이민 채로.현관문은 생각보다 쉬이 열렸다. 비밀번호 잠금장치는 드라이버, 스패너, 죔쇠와 같은 기본적인 공구들로도 가뿐히 해체할 수 있을 만큼 단조로운 구성이었다. 아니면 정말 아줌마들의 말처럼 오래전 공고에서 졸업장을 따낸 경비원이 마침내 숨겨뒀던 실력발휘를 하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다행히도 402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잠깐 집을 비운 터여서 안에 내장되어 있는 경보장치를 발로 부수어 트릴 때조차 큰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남자는 신발장 앞에 구두를 벗어두고는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거실에 들어섰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집안 곳곳에 독기처럼 번져있는 어둠. 그 위로 드문드문 놓여있는 목조가구들과 벽걸이형 텔레비전이 마치 낯선 방문객을 경계하는 듯이 남자에게 경직된 시선을 내던졌다. 방바닥에는 커튼 사이를 겨우 비집고 들어온 햇살들이 축 늘어져 잿빛으로 시들어가고 있었다. 이 싸늘한 풍경이 희연이 매일 마주한 집의 모습이란 말인가. 어느 누구도 하루치의 피곤을 어깨에 치렁치렁 늘어뜨린 채로 돌아온 희연을 반겨주지 않았을 이곳. 남자는 괜히 모자를 한번 고쳐 쓰더니 입가에서 맴돌고 있는 뜻 모를 탄식을 삼켰다.쓸데없는 감상은 그만두자. 나는 해야 될 일이 있어. 남자가 이곳에 무단으로 침입해 들어온 이유는 그저 모자란 권총의 부품들을 챙겨가기 위해서일 뿐이다. 설명서를 읽어본 결과, 경비실 탁자 위에 늘어놓은 것들만으로 권총을 조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쯤에서 남자가 단념했더라면 모든 일은 순조롭게 매듭지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집안 어딘가에 희연이 직접 받아둔 택배의 내용물들이 보관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고 결국엔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감정적으로 몇 번 중요한 일들을 그르친 적은 있었지만, 사는 동안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단 한 번도 예상해보지 못했던 남자였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마음속은 평온했다. 마치 남자를 둘러싼 이 모든 부조리한 광경들이 당연하기라도 한 것처럼.어찌됐든 옆집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현관문 앞에 늘어선 잠금 장치의 잔해들을 발견하기 전에 서둘러 일을 마무리 지어야한다. 남자는 곧장 거실을 가로질러가 부엌 맞은편에 있는 방문을 황급히 열어젖혔다. 그 서슬에 남자의 재킷 주머니 속에 한가득 담겨있던 부품들이 작은 소리로 덜그럭거렸다.방안은 거실과 다름없이 무척이나 어두웠다. 남자는 손을 더듬어 백열등의 스위치를 올렸고 순간 주위가 환해지면서 남자의 눈꺼풀 사이로 날카로운 가시광선이 파고들었다. 곧이어 남자는 방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창문가에 놓여있는 책상부터 옷장, 나이트테이블 하나하나까지 그곳에 있는 거의 모든 수납공간들을 집요하게 헤집었다. 하지만 부품들은 어디에도 들어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남자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침대 아래에 불쑥 손을 들이밀었을 때 무언가가 만져졌다. 골판지의 꺼끌꺼끌한 감촉. 그것은 나무상자의 날개부분이었다. 남자는 그것을 있는 힘껏 잡아챈 뒤에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속에는 익숙한 모양의 기계부품들이 어지럽게 몸을 뒤섞고 있었다.“15층입니다.”남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단숨에 아파트 꼭대기 층까지 올라왔다. 곧이어 문이 열리며 빛이 들지 않는 거뭇한 층계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맞은편에 이어져있는 가파른 계단. 그것은 옥상으로 이어지는 통로인데 그 끝간에는 걸쇠가 채워진 육중한 철제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남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을 뿐, 내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더 이상 올라갈 곳도 없다. MP3플레이어는 검은 액정 뒤에 숨어 끈질기게 주변의 자잘한 소음들을 기록했다.짧은 시간, 거북한 공기를 게워내고 다시 닫히는 문. 남자가 바라보고 있던 풍경도 그와 동시에 사그라졌지만 아쉬움은 없었다. 어차피 아래층에 내려가면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이 똑같은 속도로 허물어지고 있을 테니까. 아파트라는 공간 속에 진열되어 있는 늦은 오후의 폐허들. 여자는 그곳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남자는 그들의 자취를 쫓는다.남자는 웅크려 앉은 자세로 손을 뻗어 14층부터 지하 1층까지의 버튼을 차례대로 눌렀다. 그리고는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제 모든 일이 끝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했다. 바로 희연 대신에 방아쇠를 당기는 일.남자는 재킷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권총을 슬며시 쥐어보았다.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남자는 오래 전의 기억들을 헤집어 본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바구니 속에 잔뜩 담겨있던 눅눅한 새우깡. 누군가가 그것을 하나 집어 입안에 던져 넣는다. 술집의 지하창고에서 몇 달은 절어있었을 법한 그 값싼 안주거리를 질겅질겅 씹고 있는 남자는 바로 현진이다. 그때 현진은 술을 연신 들이켜 새우깡만큼이나 푹 삭혀진 얼굴을 하고선 자기는 살기 위해서 도망치는 중이라고, 남자에게 말했었다. 그때 남자는 무어라 대답을 했던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남자는 이내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건 남자에겐 현진처럼 도망칠 여력 따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다.엘리베이터는 단속적으로 멈춰서며 문을 여닫았고 그 너머로는 계속 똑같은 풍경이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새 4층.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다.“4층입니다.”바닥이 조금 들썩거리더니 이내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의 마지막은 역시나 당신인가요. 남자는 허공에 치켜들고 있던 MP3플레이어를 거두고는 주머니 속에 질러 넣고 있던 손을 빼냈다. 권총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겨누었다.“문이 닫힙니다.”어느 누구도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다. 하지만 언제 갑자기 죽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삶은 지나치게 피로하다. 만약 희연이 떠나지 않았다면 이 러시안 룰렛의 희생자는 누가 되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남자는 방아쇠를 당겼다.그리고 엘리베이터는 다시 아래로 몸을 움직거리기 시작했다.…남자는 잠에서 깨어났다. 꿈의 티끌 하나조차 남아있지 않은, 혼곤한 잠이었다. 그때까지 귓속에 꽂혀있던 이어폰에선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재생 시간이 막 11분을 넘어섰을 무렵, 녹음 파일은 정지되었다. 그것은 MP3플레이어 속에 저장되어있는 마지막 녹음파일이었다. 어디에서도 총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애초에 기록되지 않은 소음이었다. 남자는 잠깐 주저한 끝에 재생 리스트에 들어있는 녹음 파일들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그리고는 이어폰을 잡아 빼서 MP3플레이어에 둘둘 말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지난 며칠 동안 남자는 반상회 아주머니들의 거듭되는 잔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이번에도 험악한 얼굴의 아줌마는 남자를 ‘아저씨’라고 부르며 몰아세웠고 주위 사람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에 암묵적인 동의를 보냈다. 많은 말들이 오갔지만, 그 대부분이 103동 401호에 든 도둑에 관한 것이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덕분에 한동안은 진절머리를 앓았겠지만, 그저 한귀로 듣고 한귀를 흘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 견딜만했다. 무엇보다 그 일의 주범은 남자 자신이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마음이 홀가분하기도 했다. 은연중에 죗값을 치루는 기분이랄까. 그러나 가택 무단 침입으로 수갑을 차기는 싫었기 때문에 당시의 CCTV 비디오테이프는 모조리 불로 태워버렸다. 비겁하다고 해도 별 도리가 없었다.그 이후로 현진은 만나지 못했다. 처음에 남자는 그저 약속시간에 나가지 않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석연치 않아 결국엔 전화로 에둘러야했다. 그 찰나의 시간동안 남자의 직업은 아파트의 경비원에서 무역회사의 중역으로, 앞으로 최소 보름 동안은 아파트 단지 안에 쳐 박혀 근무를 서는 대신에 중국으로 해외출장을 나가는 것으로 뒤바뀌었다. 남자는 숱한 변명들로 만리장성을 쌓고 자금성을 세운 셈이다. 현진은 이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약속이 깨진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며 전화를 끊었다. 거짓말을 해서인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어릴 적 동네 어귀를 누비며 사람들을 혹했던 약장수의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을 한번쯤은 믿어보기로 했다.남자는 나른한 기분을 쫓기 위해 경비실 바깥으로 나섰다. 하늘은 여전히 현진이 결혼한 폴란드 여자의 눈동자 색깔처럼 새파랗고 맑았다. 그 한가운데에서 마치 현진과의 약속을 저버린 남자를 다그치기라도 하듯이 따사로운 햇살들이 부서져 내렸다. 그렇게 한동안을 하릴없이 서성이고 있는데 트럭 한 대가 아파트 입구에서 멈춰 서는 게 보였다. 차체에 매달린 컨테이너 박스 위에 익숙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XX통운’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문이 벌컥 열리고 택배기사 하나가 바깥으로 미끄러지듯 내렸다. 몇 개의 종이상자들이 품에 한가득 들려있었다. 택배기사는 곧장 남자에게로 다가와 그 중 하나를 건네고는 서명을 요구했다. 남자는 그가 건넨 PDA위에 대충 글씨를 휘갈겨 쓴 뒤에 다시 돌려주었다. 이번에도 역시 희연의 택배였고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을 받아들어 경비실로 돌아왔다.남자는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상자를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은 이미 대충 예상하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남자는 마침내 상자를 주섬주섬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분주한 손길 뒤로 너절한 테이프들이 하나둘씩 접착 면에서 떼어져 아래로 축 늘어졌다. 마침내 입을 벌린 상자 속에는 작은 나사 한 개가 들어있었다. 막상 그 실체와 마주하고 보니, 그 작은 크기와 뚜렷하지 않은 존재감에 허탈했다. 그날, 엘리베이터 안에서 남자는 방아쇠를 당겼고 어째서인지 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관자놀이가 지끈 거리는 했지만, 그것은 탄환이 두개골을 관통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한 긴장감 때문이었다. 망연한 기분으로 터덜터덜 경비실로 돌아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설명서를 확인해보니 부품 하나가 모자랐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드디어 그 마지막 부품이 도착한 것이다. 나의 죽음을 빗겨가게 해준 것이 고작 이런 나사 나부랭이라니. 인간의 운명이란 결국 이런 한낮 사소한 운명에 좌지우지 될 만큼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남자는 손바닥 위에 그 작은 나사를 올려놓고는 쓰게 웃음 지었다. 그 순간,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경비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남자는 인기척을 느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문간에는 한 소녀가 서 있었다. 남자의 가슴 한편에서 낯선 감정이 일렁거렸다. 아득한 그리움. 마치 소녀를 둘러싼 세계가 허물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남자와 소녀는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아니, 그저 남자 혼자만 시계의 초침을 느리게 되감고 있었을 뿐, 그것은 찰나였다. 그리고 마침내 소녀가 입을 뗐다.“아저씨, 택배 찾으러 왔는데요.”남자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던 작은 나사를 무심코 떨어뜨렸다. 그 소녀는 바로 희연이었다. “얘야, 꽤 늦었구나.”늦은 오후의 한가운데에서, 남자는 희연을 맞이했다.fin.p.s 꽤나 오래 전에 써두고 묵혀둔 거라 그런지 오글거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