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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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시·시조 「주황과 노랑 어디쯤」외 6편
들어왔다는 여자, 크레바스의 자일처럼 세상과 이어진 유일한 줄이던 남편은 어쩌다 그 줄을 놓았나 * 정명원의 ‘사건 외곽의 풍경들’( 한겨레 신문 2023.10.21.)에서 가져옴 겹잎 난 다시 젊은 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흰 발목을 내놓고 팔짱을 낀 연인들을 보며 너는 말했지 둘씩 다섯씩 다정한 카페 웃음이 부스러기처럼 떨어져 쌓인다 교복 차림 아이들은 무거운 가방을 메고 왁자지껄 계단을 오른다 구름의 그림자는 흰색이어서 우리를 덮칠 때까지 알지 못한다 파비안느, 아무르 강가, 가을, 파랑, 보이저 어떤 말은 발음만으로도 노래가 된다 노래는 날아가서 나무에 앉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꼭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나무로 태어나고 싶어 너는 물결처럼 가만가만 말한다 풍랑 속 각도를 바로잡는 조타수처럼 너무 사력을 다해 살아왔나 봐 호수 속 한나절의 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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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로빈손 크루소와 그 후예들 [2]
항해 날짜며 배의 항로에 대한 세세한 언급은 항해 기록을 보는 듯 자세하며, 난파선에서 건져 올린 물건들이라든가 오두막집 살림살이는 담배 파이프며 냄비, 항아리까지 조목조목 제시된다. 오두막집을 만드는 과정이나 배를 만드는 과정도 정말 그럴 듯하고 실감나게 묘사된다. 사사건건 정말 일어난 일, 겪은 일 같다. 셋째, 그렇다고 그가 무슨 특출난 인간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로빈슨이 생활에 필요한 물건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고심하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일은 전에는 해 본 적도 없거니와 그만큼 엄청난 노력이 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를 들면, 널빤지를 한 장 만들려면 나무를 한 그루 넘어뜨리고 도끼로 양쪽을 베어내어 널빤지처럼 얇게 깎은 다음 도끼로 반반하게 고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방법으로는 나무 한 그루에서 판자 한 장밖에 만들지 못하지만 그것으로 참을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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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타향의 집
‘자네는 이제 항해의 항해, 시체의 시체일세.’ 이 뱃사람은 정복해야 할 저무는 날 덕에 주조되지 않은 인간의 수와 항상 대등했다. 그러므로 그에겐 잠든 자를 훔치러 오는 도적이 없고 숯 그릇과 거리가 줄지 않는다. 무명지(無名指)로 엮인 뗏목이 떠간다. 조용한 오므리는 이 충견은 안내자로서의 뭔가가 그릇되어 있었다. 사람의 벌레가 가뭄의 신에 매달리면 천사는 이것을 거스르기 위해 입이 닿은 과일을 머리에서 떼어 둔다. 부은 발에게 모기장을 덮어 주러 갑니다. 할머니의 파티에서 무딘 칼을 휘두른 남자는 터진 알주머니일 뿐 아니라 저녁 공기의 것이기도 합니다. 큰 입의 복사술사와 짧은 손가락의 인형술사에겐 생것을 벗겨 돌과 기왓장 위에 찧은 것, 참으로 성긴 한 푼의 항해를 가르칩니다. 십자성호의 냄새 뒤를 따르는 개장수처럼 개여, 언젠가는 네게도 무명(無名)의 물이 탄생할 것이다. 대홍수가 일어나자 점토판 도서관의 책은 다시 흙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