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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집배원

마윤지 시인의 목소리로 듣는 「동지」

동지(冬至) 마윤지 12월에는 흐린 날이 하루도 없으면 좋겠다 그런 약속이 있으면 좋겠다 놀이터엔 애들도 많고 개들도 많으면 좋겠다 살도 안 찌고 잠도 일찍 들면 좋겠다 조금 헷갈려도 책은 읽고 싶으면 좋겠다 어디든 갈 수 있는 차표를 잔뜩 사고 안 아프면 좋겠다 30만 년 전부터 내린 눈이 쌓이고 눈의 타임캡슐 매일의 타임캡슐 다 흘러가고 그게 우리인가 보다 짐작하는 날들이 슬프지 않으면 좋겠다 묻어 놓는 건 숨기는 게 아니라 늘 볼 수 있도록 하는 거지 그 무엇보다 많이 만져 보는 거지 나중엔 번쩍 번개가 되는 거지 오렌지색 같은 하늘이 된다 맛도 향기도 손가락이 열 개인 털장갑 이를테면 깍지 햇빛의 다른 말이다 - 시집 『개구리극장』(민음사, 2024)

2024.12.12 김언
조예은 소설가의 목소리로 듣는 『스노볼 드라이브』

그 순간을 꽤 선명히 기억한다. 백영중학교 건물은 언덕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고, 덕분에 학교 전경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였다. 운동장에는 세로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야구부 아이들이 기합을 외치며 트랙을 돌고 있었고, 담장 근처 등나무 그늘에는 늦은 시간까지 동아리 활동을 하는 방송부 아이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 중이었다. 야구부 애들이 나아갈 때마다 그림자가 점점 길어졌다. 그 그림 같은 배경 안으로 달음박질하려던 순간이었다. 내 하늘색 컨버스화 끈이 풀려 있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이제는 회색에 가까워진 흰 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왜 이렇게 눈이 시린 걸까. 양손으로 두 눈을 비벼 보있다. 눈은 여전히 시렸고, 눈앞에는 믿기 힘든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푸르른 기운이 무성한 6월의 학교에 내리는 함박는. 그것은 그 해의 녹지 않는 첫눈이었다. 때아닌 함박눈에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운동장으로 뛰어 내려갔다. 눈송이를 손으로 받고, 고개를 쳐든 채 방방 뛰며 팔을 휘저었다. 건물 안의 아이들은 창가에 다닥다닥 붙어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 진풍경은 화면에 고스란히 담겼다. 나는 현관에 서서 팔을 뻗어 떨어지는 눈 한송이를 받았다. 내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그 결정체는 꼭 모형처럼 딱딱했으며, 차갑지 않았다. 차갑지 않은 눈이라니. 이게 정말 눈이 맞을까? 눈송이는 높은 기온과, 내 체온에도 녹지 않았다. 6월 충순, 초여름이었고, 등교 직전 뉴스에서 본 기온은 27도를 웃돌았다. 결정체의 모양이 일반적인 눈송이와는 달리 불규칙적이었다. 그리고 훨씬 밝게 반짝였다. 꼭 진짜 눈을 흉내 내어 만든 모형처럼. 그런데 곧 눈송이를 받치고 있던 손바닥 주위로 불그스름한 반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발 늦게 가려움이 밀려들었다. “아, 따가워.” 소리가 나는 곳을 좇았다. 운동장과 이어지는 계단에 앉아 있던 두어 명이 건물 처마 밑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머리와 체육복에 묻은 눈들을 털어 낶다. 그들의 몸에서 떨어지는 눈은 눈이라기보다는 조금 입자가 큰 모래알 같아 보였다. 잔 우박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박처럼 차갑지도 부서지지도 않았다. 그것들은 녹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쌓였다. 맨 처음 따갑다고 외쳤던 단발머리가 둥얼거렸다. “왜 이렇게 따갑지? 이거 뭐야? 나 새우 먹어서 알레르기 반응 올 때 꼭 이러는데.” “내 손도 그래. 이 두드러기들 뭐야? 징그러워.”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목과 손등이 온통 붉었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하늘 곳곳을 수 놓은 하얀 점들이 보였다. 눈송이들은 조명을 받은 보석처럼 반짝이며 떨어졌다. 그 비현실적인 풍경에 정신 팔려 잇던 나를 깨운 건 운동장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였다. 제일 먼저 뛰쳐나왔던 1학년 아이 한 명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운동장 바닥을 구르고 잇었다. 황토색으로 물든 하복 교

2024.11.28 천운영
허꽃분홍 배우의 목소리로 듣는 최지은 시인의 「가정」

가정 최지은 우리는 말이 없다 낳은 사람은 그럴 수 있지 낳은 사람을 낳은 사람도 그럴 수 있지 우리는 동생을 나눠 가진 사이니까 그럴 수 있지 저녁상 앞에서 생각한다 죽은 이를 나누어 가진 사람들이 모두 모이면 한 사람이 완성된다 싹이 오른 감자였다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는 푸른 감자 엄마는 그것으로 된장을 끓이고 우리는 빗소리를 씹으며 감자를 삼키고 이 비는 계절을 쉽게 끝내려 한다 커튼처럼 출렁이는 바닥 주인을 모르는 손톱을 주웠다 나는 몰래 그것을 서랍 안에 넣는다 서랍장 뒤로 넘어가버린 것들을 생각하면서 서랍을 열면 사진 속의 동생이 웃고 있다 손을 들어 이마를 가리고 있다 환한 햇살이 완성되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다 우리가 눈 감으면 우리를 보러 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거기 있었다 - 시집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창비, 2021)

2024.11.14 김언
윤이안 소설가의 목소리로 듣는 『온난한 날들』

정오가 되자 태양이 머리 꼭대기 위에 떠올랐다. 슬슬 직장인들이 몰려와 테이크아웃을 해 갈 시간대인데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당연했다. 이런 땡볕에 에어컨도 안 트는 카페에 올 손님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 틈을 타 나는 유리와 함께 카페 테이블에 얼굴을 대고 늘어져 있었다. 평택호 바로 앞 관광단지라는 특성 때문에 원래가 직장인보다는 뜨내기손님이 더 많은 가게였다. 단골도 별로 없다. 주변에 같이 장사하는 가게 사장님들 외에는.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라 버스나 지하철을 탈 필요가 없다는 게 유일한 장점이었다.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테이블에 반대쪽 볼을 갖다 댔다. 테이블에서 올라오는 찬기로 얼굴이 조금은 시워해져서 이러고 있으면 그나마 살 것 같았다. 점장님은 이러고 누워 있는 우리를 보고 나무늘보가 따로 없다고 잔소리를 하시지만. 볼을 바꿔 대려고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 제일 가까이에 있던 스킨답서스 화분에서 불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듣는 순간 테이블에 엎어져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킬 정도로 놀랐다. “부점장님,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정도로 놀란 것도 오랜만이었다. 소리가 들린 것 자체가 오랜만이긴 했다. 지난달 초에 한 번 듣고 이번 달에 처음 듣는 거니까 얼추 두 달 만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 유리가 불안해할까 봐 다시 테이블에 볼을 갖다 대고 누웠다. 누운 채로 점장님이 있는 포스기 쪽을 향해 물었다. “점장님, 저희 화분 몇 개만 더 뺄 수 없을까요?” 카페 내부에는 보이는 자리마다 화분이 깔려 있다. 어스프레소는 대대적으로 친환경 브랜드라는 점을 강조하는 마케팅을 펼치곤 했다. 일회용 플라스틱 없는 커피 브랜드로도 유명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플라스틱 제로가 아니라, 여기 평택 에코시티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신소재 플라스틱만 사용한다는 뜻이지만 신소재 플라스틱은 일반 플라스틱과 달리 금방 썩는다는 특징이 있으니 크게 다른 말은 아니다. 평택이 신소재 플라스틱 시번 사용 도시, 에코시티로 지정된 지 이제 10년째였다. 평택 구도심 아래쪽, 평택호 인근 지역이 에코시티로 지정된 이후 시티 내에서는 사용하는 플라스틱 양에 제한이 없어졌다. 신소재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만큼 탄소 배출도 타 지역보다 20퍼센트까지 더 가능하다. 그 영향인지는 몰라도, 최근 들어 공장이나 기업의 본사가 에코시티로 이전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스프레소의 본사만 해도 에코시티 내에 있었다. 그러니까 가게 내부에 가득한 화분은 어스프레소의 친환경 브랜드 마케팅의 일환이었다. 어스프레소 사장님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게 내 업무 환경을 저하시키는 데 한몫하고 있었다. 점장님에게 매일 우리 화초 좀 몇 개만 빼자고 말해도 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점장님이 말했다. “명색이 에코시티인데, 초록이 좀 많아야 보기도 좋지 않니?” 초록, 저도 참 좋아하는

2024.10.24 천운영
조성래 시인의 목소리로 듣는「창원」

창원 조성래 창원으로 갔다 이제 두 달도 더 못 산다는 어머니 연명 치료 거부 신청서에 서명하러 갔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일단 도착하면 나는 그곳과 너무 가까운 사람이었다 먼 곳은 먼 곳으로 남겨 두기 위하여 나는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먼 곳이 너무 싫어서 먼 곳을 견딜 수가 없어서 세상의 모든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속속들이 모든 먼 곳을 다 알고 모든 먼 곳을 파악하고 모든 먼 것들의 사정을 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전지하신 하느님께 합장하고 기도 올리는 성모마리아······ 파티마 병원에 어머니는 누워 계셨다 빗자루에 환자복을 입혀 놓은 것처럼 바싹 말라서 아직 살아 계셨다 내 손을 잡고 울다가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러다 조금 뒤면 자기가 죽을 것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처럼······ 내가 하나도 밉지 않은 듯이, 어제도 날 본 사람처럼 웃었다 다음 생에는 안 싸우고 안 아픈 곳에서 함께 있자고 이제 당신이 내 자식으로 태어나라고 내가 당하겠다고 당신도 당해 보라고 눈물이 끝 모르고 흘렀다 눈물 흘릴 자격이라도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식 된 사람인 것처럼······ 그 시각 모든 일이 먼 곳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거기선 엄마도 죽고 나도 죽고 끔찍한 날 피해 자리를 비킨 동생도 죽고 모두 죽어서 죽고 나서 웃고 있었다 모두 지난 일이라는 듯 모두 지나야 했던 일이라는 듯······ 그러나 그건 나 혼자서 듣는 소리였다 어머니는 홀로 죽을 것이며 나는 여전히 어떤 현실들에 마비된 채 살아도 되는 사람처럼 살아서 살아 있는 것 같은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닐 것이다 —시집 『천국어사전』(타이피스트, 2024)

2024.10.11 김언
김기창 소설가의 『지구에 커튼을 쳐줄게』

도경이 사는 곳은 용희가 익히 경험해 본 장소였다. 대학 시절 같은 과 동기의 자취방이 꼭 저랬다. 여름에 동기의 자취방은 주변에 햇빛을 가려 줄 만한 큰 건물이 없어 작은 냉장고에 몸을 쑤셔 넣고 싶은 집으로 탈바꿈했고, 매서운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에는 동면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뼈 시리도록 반성케 하는 집으로 변모했다. 도경의 집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가림막 하나 없는 여름 한낮의 옥탑방은 재난 지역으로 선포해도 무방했다. 딱 한 가지 좋은 점은 상쾌한 가을밤이 내려앉았을 때 옥상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캔 맥주가 손에 들려 있으면 더 좋았다. 용희는 옥탑방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생각했다. 도경에게 캔 맥주 한 박스를 몰래 사다 주는 것 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 같다고. 용희는 긴 한숨을 내쉬며 언덕길을 내려다보았다. 도경이 검은 봉지와 막대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고서 자신이 있는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도경이 용희를 알아보는 데 쓰인 10초는 용희에게 머나먼 북극의 바다를 두어 번 갔다 오는 시간만큼 길게 느껴졌다. 당황한 용희는 마찬가지로 어찌할 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도경을 향해 소리쳤다. “제가 지구에 커튼을 쳐 드릴게요!” 도경은 입을 벌린 채로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용희는 도경의 집 옥상에 놓인 평상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지난 5년간 얼핏얼핏 그려 왔던 일이, 지난 이틀간 문득문득 상상했던 순간이 눈앞에 당도했다는 기쁨에 용희는 이마에서 얼굴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땀방울도 잊은 채 자신의 심장 소리에만 주의를 기울였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것을 처음 알게 된 순간에도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러나 그 역시 정해진 트랙을 벗어나 날뛰는 소리는 아니었다. 용희는 심장이 악보 없는 음악에 홀려 무작위의 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처음으로 천문대를 찾았을 때 광활한 우주를 탐사하며 느꼈었던, 거대하고 두려운 무언가가 눈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예측불가능한 불안함 속에서도 주체할 수 없는 흥분으로 몸을 떨던 때의 심장 소리였다. 그때, 도경이 옥탑방에서 나와 유리컵 두 개와 감자칩을 담은 그릇을 평상에 내려놓았다. 도경은 평상에 편하게 앉더니 검은 봉지에 든 맥주 세 병을 꺼냈다. “병맥주 한 병을 마셨을 때 기분이 제일 좋아요. 그제 제 주량이에요. 더 마시면 정신 줄 놔요.” 용희는 물었다. 그런데 왜 세 병을 샀느냐고. “술이 술을 부르니까.” 용희는 빙긋 웃었다. 도경은 용희의 컵에 맥주를 따른 후 자신의 컵을 스스로 채웠다. 건배 없이 도경이 먼저 맥주를 들이켰다. 용희도 마셨다. 도경이 말했다. 정말 화를 참을 수 없었다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내 탓은 아닌 것 같은데, 정말 내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r

2024.09.26 천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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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틴

소설 11월

암흑 같던 하늘색이 차츰 옅어져 가던 그런 이른 시간에, 나는 비현실감에 반쯤 잠긴 채 걸음을 내딛었다. 거리에는 분명히 아무도 없었건만 나는 평소 습관 탓에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참으로 쓸모 없는 동작이었다. 독자는 여기서 말하는 내가 누구이며 또 어떤 이유로 이른 시간부터 길거리를 배회하는지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그 따위 정체성이니 방향이니 하는 것들은 나 자신마저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그걸 찾아보겠다는 핑계로 막연히 집 앞 산책로를 거닐고 있을 뿐이다. 난 갑자기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냐하면 첫 번째, 몇 번이나 돌았던 발자국을 되짚어 본들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꼼짝도 하고있지 않았고. 둘째, 이런 장소는 산책로라고 하기엔 입구와 출구만이 이어져 있는 폐허와 같기 때문이다. 생기라곤 없이 희멀건 가루가 날리는 콘크리트 바닥이 전부이고, 공사를 하다 진즉 버려진 듯 멀찍한 간격마다 나사 비스무리한 것이 널부러져 있었다. 우울하다. 우울하다. 우울하다. 우울하다. 우울하다. 우울하다. 우울하다. 우울하다. 불과 일주일 전부터지만, 우울한 기분이 들 때면 나는 늘 여기로 달려왔다. 즐거움이라곤 없는 여기서 혼자 11월의 바람에 에워싸이면 무엇과도 비교할수 없이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순적이게도 그것은 우울을 해소하는데서 나오는 그런 쾌감이 아니라 이 장소에서 완전히 스스로 버려졌다는, 한 마디로 우울을 증폭시키고 완전히 소유하는 데서 나오는 만족감이었다. 꽤 강한 바람이 두 차례 짧게 불었다. 눈가에서는 눈물이 조금 배어 나왔고, 그로부터 적어도 일 이분 동안은 계속,계속 내 초라한 셔츠에 자국을 남겼다. 바람 탓일런지 아니면 , 아무래도 좋다. 눈물 따위보다도 내 눈에 띈 것은 언제부턴지 왼손 끝에 걸쳐친 초록 풍선이었다. 그러나 이미 너덜너덜해져서 쓰레기라고 불러야만 할 그런 모양새다.이것도 아까 바람 불때나 날아왔을 테지. 난 문득 이것이 누구의 물건인지 궁금해졌다. 이 주변에서 어린아이라곤 몇년 간 본적도 없는데. 헬륨풍선 이라면 어딘가 멀리에서, 또 풍선이라고 어린이만 소지할거란 건 편견이다. 이게 뭐람. 난 겹겹이 내려앉는 잡생각의 거슬림에 현기증을 느끼며 콘크리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초록 풍선. 초록 사과가 달린 사과 나무. 초록의 초록이 겹쳐진 그런 자연물을 11월에는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의식의 흐름대로 외로움이 몰려들었다. 나는 반 퍼센트의 두려움과 반 퍼센트의 고독으로 이루어져 있을 게 분명하다. 이 공간을 빠져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유달리 일찍 일어난 나에게, 아침 시간은 넉넉했으므로 언제까지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어디든 좋으니 시계가 있는 곳을 찾아가야만 했다. 일어나면서 바지와 손바닥에 묻은 하얀 분을 털어내었다. 안녕 .또 올게. 그리고는 앙상하기 짝이 없는 가로수길을, 어느 정도 걸었더라. 아무튼 걸어가서 주택가까지 다다랐다. 우리 집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나는 줄곧 모순적인 사고를 하는데 그 중 하나는 이거다.난

2025.01.10 키릴
졸업

-alice5yun졸업은 영화다딱 한 번만 볼 수 있는 영화보는 내내 지루하고 지겨웠는데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서그래서 어서 빨리 끝나길 바랐는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가 되어서야거기에 적힌 우리의 이름과 얼굴을 읽는 순간너무 튀는 파아란 색 체육복파도처럼 밀려들던 수행평가아침 조회시간마다 늦으셨던 담임쌤...별 것도 아닌 일에못마땅하다 불평하고 재밌다고 웃던 너희가,우리의 시간이 그리워지는그러나 다시는 리플레이할 수 없는,딱 한 번만 볼 수 있는 영화

2025.01.09 alice5yun
기원

생각에 잠긴 빨대가멸종하기 직전의 달을 건지기 위해서 늘어났어잠의 칼날로 자른 조각이 빨대 안에서 소용돌이치고식곤증과 학교에서 받은우유 푹 찔러 마셨지등 뒤에서 속삭일 때너는 어제 아침으로 저녁을 먹은 사람나는 먼지를 엮어서 친구의 화분에 몰래 심었지손톱만한 흙더미 홍수가 났고씨앗이 없는데도 지애의 식물은 잘 자랐어창틀에 버려진 우유의 개수를 세다간 집에 가지 못할 것 같았던 날들빈 것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자리 넌 종이 화분을 씻는다 “손톱이 이렇게 지저분하니”놀이터에서한 칸짜리 곡선을 쥐고 달렸어우유가 내리는 날이었지 반짝이는 빨대와넌 역시 기다리는 사람나는 팔을 뻗어 먼저 사과를 따는 사람뉴턴이나 그런 건 잘 몰라서나란히 세워둔 흰색 종이 상자 앞에 오랫동안 머무르던 폭언상한 냄새가 나는 얼굴손 안에 꼭 쥔 꽃씨는어느샌가 전부 날아가버렸어혼자 있는 등 위로 엎질러진 달빛을 묻고 소원을 빌면 빨대같은 기원이 자라났다

2025.01.09 방백
사이

처음 만날 때부터 그랬다뭔가 가까워질 수 없을 듯한 느낌대화는 언제나 뚝뚝 끊기고만날 때마다 어색하기를 몇 년,친구라 하기에는 뭔가 애매한데또 그렇다고 악연도 아닌 사이가 되었다어떤 일이 생겨도 서로 간섭 안 해라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는 듯눈이 마주쳐도 인사를 생각하지 않고블로그에 글이 올라와도보지 않고 삭제하는또 누가 있으면 친한 듯이 보이는오래 알아온 관계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관계함께 있는다고 다 진정한 친구는 아니더라시간과 관심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거너무 잘 알아서오늘도 그냥 그저 그런 사이로 있다가 왔다

2025.01.09 가엘
살아간다,

관관지의 사람들은 과거에 그곳에서광났던 사람들은 과거를 되새기며지금 나자신은 과거와 함께하며

2025.01.08 선인장
소설 미스 피터 씨의 딸(미완)

미스 피터 씨가 액자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파란 야광별이 떠오른다. 그리고 미스 피터 씨의 딸이. 보육원을 막 나와 대학교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핸드폰에는 미스 피터 씨의 전화번호로 모르는 사람의 문자가 전송되어 있었다.연락해야지. 곧 연락해야지. 치기 어린 용기가 근래 바닥을 보여 이 주째 마음만 먹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던 그 메시지란 위로 갑작스럽게 알림 표시가 떠올랐다. 나는 도둑질한 심장을 단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라서 순간 화면을 껐다가 다시 켰다. 어떡하지. 그러곤 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피터 씨인가? 그럴 리가 없겠지만. 조금 고민하다가 약간의 기대를 안고 어플리케이션을 눌렀다. 오랜만에 보는 말풍선에는 덤덤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누구세요?나는 당황스러웠지만 처음에는 침착하기 위해서 노력했다.전화번호를 바꾼 것일까? 피터 씨라면 날 모를 리가 없어. 그런데 정말 피터 씨인가?아니다.확실히 피터 씨일 수 있다.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했다. 연락처를 내 이름으로 저장하지 않았다면? 그럴 수 있지.그럴 수 있다.....차가운 겨울밤이었다. 얇은 후드 한 장에 패딩만 걸쳐 입은 사이로 바람이 계속 몸을 식혔다. 알 수 없는 마음에 옷깃을 여미고, 나는 서늘하게 언 손을 주머니에서 녹이며 얼른 메시지를 작성했다.- 선생님, 저에요. ㅣ- 선생님, 저 ㅣ-선생님 ㅣ바보같은.이럴 때만 꼭 한마디도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누구세요라고 물어봤는데 저에요라고 대답하면 어떡해. 일단 자기소개를 해야지. 뭐라고 보내면 좋을까. 기숙사로 돌아가서 좀 더 고민하다가 읽었으면 좋았을 걸. 이미 사라진 ’확인 않음‘ 표시가 원망스러웠다. 바람은 계속 불고, 보도 한복판에 멈춰 선 나를 사람들이 자꾸 시선으로 스치며 지나갔다. 이미 편의점을 나와서 마땅히 앉을 만한 곳도 없었다. 일단 원래 목적지인 학교 기숙사 건물을 향해 계속 걸었다. 핸드폰은 그 상태로 검은 비닐봉투에 집어넣어버렸지만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자꾸만 메시지 생각에 정신이 팔렸다. 떠올릴수록 ’누구세요?‘가 적힌 파란 화면 너머로 낯선 두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손보다 싸늘한 직사각형 디스플레이가 답변을 독촉하듯이 날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누가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를 들었다.툭툭.저기요.네?당신 이 사람 맞아요?어떤 여자였다. 캡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었고 흰색 롱패딩으로 온몸을 감쌌다. 나는 그녀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와 사이비인가봐. 대박. 역시 대학로에는 이런 사람이 있구나...... 인터넷에선 무시하라고 했으니까 그냥 지나가야 되겠지?그러던 나의 어깨를 다시 한 번 잡아 돌려세우며,저기요. 이거 당신 맞냐고요. 저 아까 읽고 있는 거 다 봤거든요? 왜 그냥 무시하세요?그 여자는 내 눈앞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가까이 대었다. 메시지 창이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에요. 잘 지내시죠? 요즘 뭐하고 지내세요. /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대학교 합격했어요. ㅇㅇ대에요. 언제

2025.01.08 방백
곧 죽을 사람의 담화

“나 곧 죽어.”“언제?”“내일,”“그렇구나.”“슬프지 않아?”“슬프지 않아.”“왜 슬프지 않는 거야?”“슬프지 않으니까.”“너는 항상 내 옆에 있었으면서 내가 떠나도 좋다는 거야?”“네가 떠나든 말든 나는 상관 안 해.”“왜 그렇게 매정한 거야?”“매정하지 않아.”“아니. 넌 매정해야 해.”“왜 내가 매정해야해?”“그것마저 없다면 너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니까.”“미안하지만 나는 매정해질 수 없어.”“안돼.”“그런데 너는 왜 죽는 거야?”“너 같은 것에게는 알려주기 싫어.”“궁금해.”“궁금해하지 마.”“궁금해.”“아니. 넌 알 자격이 없어.”“왜?”“…”"배터리가 부족합니다."

2025.01.08 학교라는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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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2025 글틴캠프가 1월 20일, 파주에서 개최됩니다.

캠프 운영 날짜 : 1월 20일(월) ~ 22일(수) / 2박 3일 ▶신청하러 가기◀

2024.12.13
공지사항 2024년 문학광장 이벤트 첫번째(문학광장 댓글 챌린지)

문학광장 댓글챌린지 이벤트 2024년 한 해 동안 발행된 문학광장 콘텐츠를 보고,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들려주세요! 추첨을 통해 참여 작가의 사인본과 캠핑 테이블 등 푸짐한 선물을 드립니다! ㅇ 참여방법 1. 2024년 발행된 문학광장 콘텐츠에 댓글을 남기고 캡처하세요! ★ 댓글 작성 가능 콘텐츠 : 김기태, 윤이안, 김중혁 소설가 및 조성래 시인의 작품 ★ 바로가기 - 김기태 소설가 : https://munjang.or.kr/board.es?mid=a40102000000&bid=0032&act=view&ord=B&list_no=101601&nPage=2&c_page= - 윤이안 소설가 : https://munjang.or.kr/board.es?mid=a40703000000&bid=0035&act=view&ord=B&list_no=103036&nPage=1&c_page= - 김중혁 소설가 : https://munjang.or.kr/board.es?mid=a40102000000&bid=0032&act=view&ord=B&list_no=103264&nPage=1&c_page= - 조성래 시인 : https://munjang.or.kr/board.es?mid=a40702000000&bid=0034&act=view&ord=B&list_no=102878&nPage=1&c_page= 2. 댓글 작성 후, 응모 폼에 설문 제출! ★ 인스타그램 피드 또는 스토리에 @munjang2005를 태그하여 댓글캡처본을 공유하면 당첨 확률이 UP! ★ 응모 폼 링크 : https://answer.moaform.com/answers/EO3oQP ㅇ 댓글 작성 플랫폼 : 유튜브, 문학광장 누리집, 팟빵, 인스타그램 등 어디든 OK! ㅇ 이벤트 기간 : 11.28(목) ~ 12.9(월) ㅇ 당첨자 발표 : 12.10(화), 개별 안내 예정 ㅇ 경품 안내 - 문학광장 작가 사인본 (16명) - 『천국어 사전』(5명), 『온난한 날들』(3명),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5명), 『영화보고 돌아오는 길에 글을 썼습니다』(3명) - 접이식 캠핑 테이블 (5명) 지금 바로 댓글 남기고 특별한 선물을 받아보세요!

2024.12.05
공지사항 2024년 문학광장 이벤트 두번째(문장 ONE-PICK)

문장 ONE-PICK 이벤트 2024년 한 해 동안 문학광장과 함께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콘텐츠를 ONE-PICK 해주세요! 독자 코멘트는 문장웹진 2025년 1월호에 소개되며, 푸짐한 선물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ㅇ 참여방법 1. 2024년 문학광장 콘텐츠(문장웹진, 문장의소리, 문학집배원) 중 가장 인상 깊은 콘텐츠를 골라주세요! 2. 선택한 콘텐츠와 그 이유를 이벤트 응모 폼에 작성해 제출하세요! ★ 응모폼 링크 : https://answer.moaform.com/answers/Ev9lyN ㅇ 이벤트 기간 : 11.28(목) ~ 12.9(월) ㅇ 당첨자 발표 : 12.10(화), 개별 안내 예정 ㅇ 경품 안내 - 문학광장 작가 사인본 (4명 ): 『카카듀』 - 손난로 보조배터리 (12명) - 리싸이클 코끼리 노트 (9명) 여러분의 최애 콘텐츠를 골라 문학광장과 함께해보세요! 당첨자에게는 특별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024.12.05
공지사항 2024년 문학광장 이벤트 세번째(숨은 문장이 찾기)

숨은 문장이 찾기 이벤트 2024년 한 해 동안 문학광장과 함께 한 콘텐츠에 숨겨진 '문장이' 캐릭터를 찾아주세요! 정답을 맞히면 푸짐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ㅇ 참여 방법 1️. 2024년 문학광장 콘텐츠(문장웹진, 문장의소리, 문학집배원) 중 무작위로 '문장이' 캐릭터가 삽입된 5개의 콘텐츠를 찾아주세요! 2️. 찾아낸 '문장이' 캐릭터가 있는 콘텐츠 링크를 복사하여 설문폼에 제출하세요! ★ 설문폼 링크 : https://answer.moaform.com/answers/EKnp4g ㅇ 이벤트 기간 : 11.28(목) ~ 12.9(월) ㅇ 당첨자 발표 : 12.10(화), 개별 안내 예정 ㅇ 경품 안내 - 여행용 구급 키트(10명) - 로이텀 A5 다이어리 LEUCHTTURM 1917(5명) - 에코 키트 선물세트(손목가방, 대나무칫솔, 고체치약, 고체 3종 어메니티)(5명) 문장이를 찾아 문학광장의 재미를 더해보세요! 당첨자에게는 특별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024.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