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
- 작성자 李多迎
- 작성일 2019-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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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197
아침에 눈을 뜨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구나.'라는 체념과 함께 피곤이 몰려든다. 피곤은 아픔으로 바뀌어 몸에 달라붙는다. 재수가 여간 없다. 일어나자 마자 숨이 쉬어지지 않아 비몽사몽한 상태로 요가를 한다. 고양이 자세, 어린이 자세를 차례로 하다 보니 겨우 숨통이 트인다. 요가도 하니 어느정도 정신이 돌아온다. 지끈지끈한 머리를 부여잡고 상황 정리를 한다. 일주일 중에 제일 지루한 목요일다. 어제도, 오늘도 역시나 학교에 가기 싫다. 아마 내일도 비슷하겠지. 알람 소리와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밖으로 나간다. 화장실로 가려는 발걸음을 틀어서 거실로 향한다. 출근 준비와 집안일에 한창인 엄마를 향해 힘이 다 빠져 축 처진 목소리로 말을 한다. "엄마, 나 진짜 몸이 너무 아파. 어제부터 컨디션이 나빴는데 감기 걸린 것 같아. 학교 안 가면 안 돼?"아픈 건 사실이었으나 참고 견딜만 하다. 그치만 엄마가 어물쩍 넘어가주길 바랄 뿐이다.
"그냥 참고 가. 또 학교 안 가려고?"쉽지 않으리라 예상은 했으나 떡심이 풀린다. 정말로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못 가겠다고 눈물까지 머금으면서 사정을 한다. 엄마 얼굴에는 '얘를 어쩌나.'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역정을 내며 담임선생님께 문자를 보낸다. 끝까지 아픈 척은 잃지 않고 입가에 번진 미소를 지우고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엄마는 문을 나서면서도 말투와 표정에 짜증을 거두지 않고 내가 알아들 수 있는 크기의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며 사라졌다.
이제 완전한 내 세상이다. 학교에 가지 않으면 무얼 할지 계획했었나 머리 저편에서 기억을 끄집어 낸다. 하고 싶고, 쉽게 이룰 수 있는 것들을 쭉 나열해본다. 전과는 다르게 색다른 걸 하고 싶다. 하지만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색다른 일에는 한계가 있어서 결국 서점에 가기로 결론을 내린다.
밥을 먹고 평소에 한 번도 듣지 않은 노래를 들으며 설거지를 했다. 방정리를 싹하고 널브러진 마스킹테이프와 스티커들로 방 이곳저곳에 붙인다. 침대 머리맡, 스탠드, 거울, 스위치, 방문 할 거 없이 눈에 보이는 곳에는 다. 방 가운데에 서서 빙 둘러보니 곳곳에 있는 스티커들로 인해 나만의 공간임이 티가 난다. 눈을 조금만 돌려도 내 손길이 닿아있는 게 기분이 참 묘하다.
병원에 다녀오고 더 늦기 전에 서점에 갈 준비를 한다.
지하철에 몸을 싣고 가는 동안 읽을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한다. 평소에 자주 보던 문체가 아니라서 잘 안 읽히지만 그런대로 읽을만 하다. 지루해질 때즈음 환승을 하고, 책이 슬슬 지겨울 때즈음 지하철에서 내린다. 처음 가는 서점이라서 약간 길을 헤매다가 지나가는 분께 길을 여쭙고 약간의 우여곡절 끝에 서점에 들어선다.
생각보다 큰 서점은 아니다. 큰 서점이 아니다보다는 작은 서점에 가깝다가 더 좋은 표현일 만큼.
서점이든 도서관이든 책이 많은 곳에서 내가 하는 의식들이 있다. 우선 사방으로 둘러싸인 책들을 한눈에 담고 가까이에 위치한 책들에게로 간다. 천천히 걸으면서 책 제목과 책표지를 구경한다. 그러다가 맘에 드는 책은 끄집어서 작가를 확인하고 맨뒷면 줄거리나 다른 사람들의 서평을 읽는다. 양장본은 맨뒷면에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는 처음 시작하는 말을 몇 문단 읽는다. 그렇게 책을 느낀다.
분량이 적고 끌리는 책을 한 권 집어서 독서 공간으로 간다. 앉고자 한다면 충분히 앉을 수 있을 만한 인원이 자리하고 있다.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책을 읽어나간다. 화려한 문체를 지니지도, 무거운 주제의 소설은 아니다. 그렇다고 가볍진 않으나 잔잔하게 읽기 좋은 책이다. 글이 눈에 안 들어오자 옆에 있는 문구 코너로 간다. 머리핀을 사고 싶은데 마음에 쏙 드는 머리핀이 없다. 너무 과한 공주풍이거나, 너무 담백해서 밋밋하다거나. 문구 용품들을 구경하다가 나와 관련 없는 수능 서적을 보로 있는 와중에 엄마한테 전화가 온다.
엄마가 담임선생님이랑 통화를 한 모양이다. 오늘 기분이 별로인지 평소보다 훨씬 흥분한 목소리다. 나도 나 나름대로 화가 나서 나 역시 퉁명스럽게 통화를 이어나간다. 둘 다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서점을 나가려는데 머리핀이 잔뜩 쌓인 바구니가 보인다. 3개 5천원. 맘에 드는 머리핀 3개는 골랐는데 문제는 내 전재산이 5천원이다. 직원에게 낱개로 계산이 되냐고 물었지만 안 된다는 말을 듣고 미련을 걷어내고 밖으로 나간다.
가까운 지하철 역으로 들어갔는데 역에서 서점으로 바로 이어진 길을 마주한다. 아까 길을 헤맨 게 허무하면서도 바로 앞에 두고 못 찾은 게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다음에 오면 이 길로 와야지 다짐을 하고 개촬구를 통과한다.
집에 가는 길이 싫다. 정확히는 집에 가기가 싫다. 자꾸만 느긋하게 움직인다. 정신을 놓고 있다가 역을 지나쳐 다른 역에서 내려 걸어간다. 처음 가는 길이지만 한 번 인터넷으로 지도를 보고 앞으로 걷는다. 앞으로 앞으로. 집으로 가는 길 개천 위에 놓인 다리에서 멈춰 선다. 다리 아래를 본다. 잔잔한 물이 흐르고 옆에서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전거를 타고 조깅을 한다. '뛰어내리고 싶다. 내천은 얼마나 깊을까. 너무 얕아서 머리를 땅에 박아서 즉사하려나. 내가 뛰어내리기 전에 누군가가 나를 막을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솟구친다. 정말로 내가 뛰어내릴 수도 있겠어서 다리에 힘이 풀린다. 그대로 주저앉는다. 그리고 눈물이 쏟아진다. 이런 내 행동에 놀라며 진정하기 위해 앉을 만한 곳으로 이동한다. 숨을 고른다. 내쉬고 들이쉬고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고 계속해서 숨을 쉬려고 노력한다. 시간이 흐른 뒤, 눈물이 말라서인지 더 이상 눈물은 나지 않는다. 숨 쉬는 패턴도 일정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할지 무서워서,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피곤한 발로 빨리 걷는다.
그렇게 가기 싫은 집이었는데 막상 집 앞에 도착하니 몸이 묵직해서 얼른 씻고 방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엄마에게 잔소리 들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집에 들어간다. 엄마가 바로 앞에서 나를 맞이한다. 보자마자 큰 소리를 낼 줄 알았는데 웬 일이지. 엄마 얼굴을 본 체 만 체 하고 방으로 향한다. 엄마가 따라 들어와서는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다. 어라, 이게 아닌데.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다. 엄마가 생각을 해봤는데 전학을 가자고. 그리고 내가 담임선생님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겠다며 같이 담임 선생님을 흉 보는 대화로 흐른다. 그렇게 열을 내며 얘기를 하다 엄마는 거실로 돌아간다.안도감이 흐른다. 두려움이 앞서서 지금 상황이 상대적으로 더 기쁜 걸까.
숨을 들이쉰다. 숨이 폐 끝까지 닿는다. 한계에 도달한 숨이 다시 입 밖으로 나오면서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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