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눈
- 작성자 이하양
- 작성일 2019-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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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그지없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귀향길, 버스 밖 널따란 논이 겨울을 맞는다. 벼 밑동은 눈밭에 묻혀 머리만 내놓은 채. 하얀 공룡알들 위에는 접시 같은 눈이 덮였다. 어렸을 적, 오직 공룡알로만 알고 있던 저것의 이름이 곤포 사일리지임을 알게 한 것은 누구였을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점멸하는 것일까,
버스는 어중간히 녹은 길을 시원스레 달린다. 불똥 튀듯 털그럭거리는 나, 지금 무슨 말을 내뱉어도 선풍기 날갯짓을 거친 듯한 웅얼거림이 나올 것 같다. 앞자리 할머니가 안 계셨으면 안냇말을 따라 웅얼거렸을 것이다. 이번 정류장은, 비우2리 입구, 비우2리 입구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비우1리 마을회관입니다. 라고. 이윽고 고향이다.
할머니와 나는 비우2리 입구에 내린다. 매연을 매달고 가는 버스, 할머니께선 자줏빛 보따리를 이고 버스 잔향을 따라가신다. 왜 나를 힐끔 쳐다보셨을까. 손을 흔들며 등을 전송한 후에 깨닫는다. 짐을 들어달라고 한 것이었을까.
우리는 언덕 오솔길로 걸어 들어간다. 비우리는 여우리와 작은 언덕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구릉 외곽인 비우1리, 안쪽인 비우2리로 나누어져 있었다.
_총각은 초행이 아닌가 보지?
할머니께서 가벼워진 어깨를 크게 돌리신다. 하긴, 뭐. 이런 촌 동네 일부러 처음 오는 사람도 없다만은. 가벼이 톡 말씀하신 것과 반대로 인중을 구기고 계시다. 바지런히 길을 오르신다. 오솔길은 끝이 나간 볏짚 멍석으로 포장되어 있고, 밟혀 녹은 눈에 젖어 군데군데 검다. 주변 숲 대부분은 잎을 떨군 나목이다. 이파리 빈자리에 위태로이 쌓인 눈은 바람이 불면 눈이 온 순간과 함께 날릴 듯하다.
귀향길, 새벽 어느 순간부터 눈이 내렸다. 기차에서 잠들고, 오한을 느끼며 눈을 떴을 때 이미 풍경은 베일을 쓰고 있었다. 고향에 가까워지고 조도가 밝아오며, 날려오던 눈은 자취를 감춰갔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회색빛에 녹아든 것, 그들은 여전히 속살대고 있었겠지. 어느 모녀가 나와 함께 내렸다. 붉은 파카를 입은 아이가 총총거리며, 나를 가로지르곤 외쳤다.
_엄마! 눈이야 눈!
모든 아이는 태생적으로 눈을 기뻐하는 걸까? 아이의 어머니는 주위에 고개를 숙여대며 그를 걷어안았다. 아이를 침묵시키되 혼내지 않았다. 왜였을까, 플랫폼 위의 모두가 그 결정에 수긍한 듯 보였다. 여전히 폴짝거리는 아이에게서 눈을 떼며, 제각기 애수를 추스르는 듯했다.
언덕 위에 다다르자 마을이 보인다. 제설이 끝난 몇 줄기 황토색 길, 눈 덮인 파란 양철 지붕들, 밑동만 남은 논. 이어지며 자리 잡은 전봇대 가로등, 그리고 비우1리 방향으로 가는 트럭 한 대. 할머니께선 자기 허리를 이리저리 틀어주고는, 얼마 안남았다, 하시며 걸음을 재촉하신다. 그녀가 앞서가는 몇 걸음 사이, 나는 숨을 죽이곤 마을을 꼬옥 눈에 안는다. 풍경보다는 정경, 앳된 정서들의 반복되는 환영을 슬며시. 그 순간 바람이 불고 나무가 흔들리며 가루눈이 날려온다. 설풍의 가라앉음, 눈이 내리는 귀향길, 그리고 그 순간이 사라질 듯한 두려움.
_어이 갔다 왔어요!
황톳길 위 텅 빈 유모차를 끌고 계신 할머니께서 소리치신다.
_즈 한의원에 좀 갔다 왔다!
볏짚 멍석이 끝나며 황톳길로 이어진다. 보따리를 건네받자 두 분은 먼저 사라지신다. 허망스러운 맘이 남는다. 나는 어쩌자고 여기를 찾아왔을까. 그 집에 내려가 보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의 표정엔 아련함이 뻣뻣하게 박여있었다. 고개를 끄덕이셨고 나를 걷어안으셨고 무언으로 한참을 우셨다. 그때 우리가 공유한 것은 무력감이었다. 고향에 와도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황망함이 가시질 않는다. 눈이 온다고 들어서일까. 고향을 떠난 후 한동안은 눈이 오면 고향과 소꿉친구들이 떠오르곤 했다, 다분히 눈이 오는 지역이 아님에도. 그 야릇한 감정은 해를 거듭하며 자랐다. 천천히 꾸준히, 일상의 어느 부분을 침범할 때까지. 제설이 안 된 눈길을 걷는다. 빈집 근처는 제설이 늦는 모양이다. 그중 눈에 익은 건물을 찾아 들어간다. 녹이 다 슬어 찢어지는 듯한 대문 소리. 마당 안 평탄히 깔린 눈에 찍힌 내 발자국이 커 보인다. 툇마루에 들어서서 창호문을 열자 조부모님의 일상이 고전이 된 듯 방에 먼지가 고요하다. 마당 쓰는 빗자루를 찾아와 장판을 쓴다. 먼지가 비켜나며 누런 색조를 되찾는다. 이곳에 있는 것은, 혹여나 꿈 때문일까. 빗자루를 움직이는 손짓이 부드러워진다.
상경한 후 겨울이면 마법사가 나오는 꿈을 꾸곤 했다. 얼음을 쓰는 마법사가 부서진 철도를 순식간에 고쳐 열차를 구해내던가, 얼어버린 마음들을 녹여주거나 하는 꿈. 마법사 꿈을 본 날이면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 느끼면서도 앳된 그리움에 시달리곤 했지만, 마지막 두 번의 만남은 예외였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난 것은 며칠 전, 올해 첫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꿈에서 그는 여느 때처럼 검은 코트를 입고 눈 덮인 무덤가에 서서 나를 빤히 보았다. 천천히 손을 들어 내 심장을 가리키곤, 확 잡아당기며 빼앗아버리겠다는 손짓을 했다. 뭐라 할 틈도 없이 그는 눈보라처럼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설영이가 서 있었는데, 역시 아무런 말 없이 나를 야려보다 사라졌다. 공포심에 깨어나 가슴을 부여잡았을 때, 저주처럼 유난히 심장이 뜨거웠고 크게 쿵쾅대었다.
밖이 노인의 칼칼한 대화 소리로 소란스럽다.
_누구 발자욱이야, 이게. 도둑이 들었나.
_뭔 털 게 있다고, 이 집이 텅 빈 지가 몇 년이 되았는데.
_10년은 훨 넘었겠지.
훨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익숙하다. 뽀독 눈에 발자국 찍히는 소리가 가까워진다.
_여이가 창구네 집이었든가?
_아니 여이 집엔 애기들 살았지. 고 애기 이름이…… 주녁이, 그래! 주녁이네다.
_고 서령이랑 짝짜꿍하던 아?
두 할머니께서 마당에 들어오신다. 푹푹 빠지는 발을 들어 올리며 인기척이라곤 없는 마당을 안쓰럽게 둘러보시다가,
_아이고 총각! 이런 데에 다 있었네.
하고 날 기이하게 여기신다. 보따리를 지고 계시던 할머니다. 다른 한 분은 여전히 유모차를 끌고 계신다. 두 분은 내 뒷켠에 열린 방을 내다보고는 안타까운 신음을 연발하신다. 혀를 끌끌 차기도 하시며, 그러나 곧 추스른다. 이런 일들은 더 이상 그들에게 큰 파장이 아닌 것일까? 보따리 할머니께서 빗자루를 빼앗아 드신다. 툇마루를 쓱쓱 쓸어내고 기둥에다 탁 터시곤, 한쪽 다리를 끌어올려 앉으신다. 우리 세 명은 어울려 앉는다.
보따리 할머니께서 꺼내신 식은 옥수수를 하나씩 우적거린다. 달짜근 짭쪼롬한게 참 맛있다, 잘 먹으니 손자 보듯 흐뭇해하신다. 고향에 가질법한 기대를 충족시키는 안온함. 보따리 할머니께서 먹고 남은 옥수수 속대를 하나씩 챙기신다.
옥이네는 항상 이불이 바닥에 널려있어 따뜻했다. 놀기로 한 날은 먼저 옥이네로 모여, 옥이 할머니께서 달여주신 옥수수 속대차를 마시는 게 당연했다. 항상 나보다 설영이가 먼저 도착해 차를 홀짝였고, 내 발이 녹을 즈음엔 전일규 전이규 형제가 왔다. 가끔 숫대가 부족한 날이면 할머니께선 차 대신 옥수수를 쪄 주셨다, 달짜근 짭쪼롬한 옥수수.
8살 첫눈 날. 설영이가 나보다 늦은 것은 그날밖에 없었다. 옥이네 뛰어들어가선 설영이를 찾아 불렀으나 그곳에는 옥이와 할머니뿐이었다. 설영인? 옥이는 고갤 가로저었다. 하는 수 없이 들어와 이불 속에 다릴 뻗었다. 그때 처음, 옥이 할머니께선 누가 오고야 차를 끓이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가. 옥이와는 어울려 놀았지만 친하지 않았다. 그녀는 소심하고 말수 적은 아이였으며 그날도 말없이 푹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이따금 나를 치켜보다 눈이 마주치면 황황히 눈을 돌리고, 그게 재밌어 푹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할머니의 차가 나오고 몇 분이 지나 전 씨 형제가 왔지만, 아무도 설영이의 행방을 몰랐다.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니냐는 이규의 말에 모두 불안해졌다. 옥이는 파르르 떨며 아예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적적한 침묵이 한창 감돌며 돌아가자는 생각이 들 무렵, 밖에서 눈을 세차게 내리밟는 소리가 들렸다. 설영이, 우리는 처진 고개를 들고 대문을 쾅 여는 그녀를 보았다. 추위에 새빨간 얼굴, 놀랍도록 맑은 표정. 거친 숨을 가다듬지도 않고 성큼성큼 다가와 툇마루를 내리치며, 설영이가 소리쳤다.
_우리, 마법사를 찾으러 가자!
그것이 왜 지금에서야 무엇처럼 느껴질까.
플라스틱 용기에 옥수수 숫대가 가지런하다. 보따리에 꼭꼭 싸매시며 만족한 듯 소담하게 웃으신다. 유모차 할머니께서 한마디 거드신다.
_숫대 차 좀 마시겠네?
_글게 말야, 간만이네. 예전엔 애들이 있었어갔구 숫대가 많았는데.
나를 휙 돌아보시는 보따리 할머니께 그러게요, 옥이 할머님, 하고 대답해버리고 싶다. 그저 뿌옇게 웃어 돌려드린다. 이걸로 된 것일까? 곧이어 왜 나를 숨기려고 하는가가 의심스럽다. 숨기고픈 것이 아니라 윤옥,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이 두려워서일까.
두 분께서 잡다한 이야기를 하다 떠나신다. 발자국이 세 줄기 찍힌 마당, 문테에 머리를 기댄다. 적적하다. 눈을 내리감고 문테 나무 냄새를 맡는다. 그러자 다시 들려오는 듯한 고향을 떠났을 때의 음성.
_안 된다, 안 돼!
이사 후 첫 아파트, 거실에서 부자가 싸웠다.
_아버지, 제발요, 고집 좀 피우지 마세요……
_제발 그러지는 말아다오, 이 애비 마지막 소원이다. 내 장례는 안 치러도 되니까 나 죽을 때까지 그 집은 팔지 말아라, 그 집만은 제발……
_대체 왜 그러시는 건데요, 아버지, 그 집에 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 생각 땜에 그러시는 거예요?
순간 할아버지께선 할 말을 잃으셨다. 아버지의 표정에 서린 비통함 때문이었으리라. 세상 한 귀퉁이를 잃은 사람이 자신만이 아니었음을, 할아버지는 어떤 심정으로 받아들이셨을까? 어머니께서 조용히 내 뒤로 오셨다. 어머니께 평소 나던 목욕탕 향기가 나지 않았다, 저녁 즈음 여우리에서 돌아온 할머니와 같은 냄새를 풍기던.
_아버님…… 제가 주제넘게 말하지만…… 그만 어머님을 놓아드리세요……
어머니의 부들거리는 손을 간직하고 할아버지를 본다. 일순 단념의 기운이 보이는 듯도 했다. 허탈해하신다. 이를 악물고 눈시울, 열의 번짐을 막으시다가 그는. 할아버지께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으셨다.
_아니야…… 아니야…… 6·25 때도 버텨온 내 집이다, 네 애미랑 같이 키워온 곳이야…… 내 욕심이다, 늙은이의 욕심이야. 그게, 그게 없어지면 이 늙은이한테 뭐가 남니, 내 집도 아닌 곳에서……
이윽고, 마음 공동空洞 어디엔가 흘러넘칠 비가 왔고, 할아버지께선 마지막 제방에서 순간들을 지키고 섰나 보다. 어머니께서 내 눈을 가리셨다. 까끌한 손, 머리에 닿는 포근한 뱃살, 그 모두가 힘을 꽉 준 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렸던 나는 그 장면의 무게에 압도당하며, 검은 시야 끝자락 할아버지의 울음을 들었다.
_제발…… 제발 부탁이다……
녹슨 철문 같은 소리, 곧 무너질 듯한 소리.
처염한 곡소리……
여우눈은 언제 내리는 것일까? 빗자루질을 재개한다. 먼지에 켈룩거리며 할아버지가 지키고자 했던 것을 복원한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도 눈이 오면 고향을 생각하실까? 유년의 할아버지는 지구온난화도 몰랐을 것이고, 그 겨울은 내 것보다 길었을 텐데…… 할아버지께 겨울은 사라져가는 것이 아니었겠구나. 저번 주 즈음일까, 매년 겨울이 줄어든다는 카드뉴스를 보았다. 아득히 먼 곳으로 던져지는 느낌과 함께 심한 더위를 느꼈다. 식은땀을 흘리며 창가의 성에를 문질렀다. 아직 내 체온이 찰 것을 기대하며, 그것이 녹지 않을 거란 믿음을 가지고. 그날, 그 꿈을 꾸었던가? 성에는 손가락 끝에 닿자 바스러지듯 녹았다.
쓰레받기에 수북이 쌓인 먼지를 훌훌 내던진다. 도무지 다 닦일 것 같지 않아 집안 어디에 있을 걸레를 찾는다. 차근차근, 건넛방 건넛방을 연다. 희끄무레한 장지문을 열 때마다 찬 바람이 밀고 들어가고, 그만큼의 자욱한 먼지 냄새가 불어 나온다. 이 먼지에 의미가 있을까. 사소하게 쌓이고 쌓였을 그것은 옛날을 석고로 가두었고, 풍경은 영원할 것처럼 굳어있다. 할아버지께서 지키고자 했던 것은 진정 이 집이었을까? 걸레는 부엌에서 찾았지만 먼지가 배겨 사용할 수 없다. 빨아 쓰고 싶어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 집은 남았어도 수도나 전기는 모두 끊긴 모양이다. 부뚜막에 걸터앉으며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어수선한 마음, 이것은 동질감일까? 할아버지의 입원 이래 3주가 지났다.
환한 병실, 뇌출혈에 의한 혼수상태. 노인의 심장 박동을 반영하는 느긋한 전자음에 되려 조급해졌다. 아버지께선 말이 없는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고개를 푹 숙이셨다. 연신 아버지……를 힘없이 중얼거리시며. 어머니와 나는 병실 한 켠에 물러났다. 어머니께서 침대에 걸터앉은 내 머리를 연신 쓰다듬으셨다. 우리 땜에 힘든 일을 많이 겪지, 아가. 미안해…… 다 괜찮아질 거야…… 가까스로 괜찮다고 대답하며 손길을 받아들였다. 어째서일까, 그날도 할아버지께서 울던 날을 회상했던 것 같다.
친척 어른들이 오고 나는 아이들을 돌봤다. 아이들은 늦은 밤 피곤했는지 조금 어르자 침대 위에 잠들었다. 어른들 사이에서 장례식 이야기가 오갔다. 장례식장, 비용 부담이며 보험, 상속까지. 그런 말 하기 이르다는 아버지의 말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내외의 주제는 여전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손을 잡으셨다. 입을 다물고 화를 삭이고 계신 아버지, 부모님께선 시간이 지날수록 밀착하셨다.
이윽고 숙모님의 한 마디가 터졌다.
_여우리 개발 시작했다던데, 아직 아버님 집 안 파셨다면서요? 잘 됐지 뭐예요, 괜한 노인네 똥고집인 줄만 알았는데.
가슴이 크게 뜨끔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께서 격양되어, 말리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쳐내며 소리치셨다.
_나가……
_예?
_나가! 다 꺼져! 시발 다 꺼지라고! 너네가, 너네가 그러고도 자식이야? 자부냐고!
나는 아버지께서 누구라도 한 대 때려주기를 바라며 서 있었다. 그러나 이미 백모 숙모는 소스라치며 저 멀리 달음질친 후, 큰아버지 작은아버지께서 날뛰는 아버지를 싸매고 제압했다. 이 자식이, 어느 안전이라고 큰 소리야? 나동그라진 어머니를 가서 일으켰다. 어머니께선 다리가 풀려 일어나지 못하셨다.
_이 새끼들, 너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그 집 못 팔아, 너희한테는 절대 못 넘겨줘……
아버지께서는 진이 빠질 때까지 소리치셨다, 곡소리처럼 처염하게.
휘적거리며 마을 길을 내려온다. 아버지께서도 집, 그 너머의 의미를 느끼셨던 것일까. 3시를 조금 웃돈 시각이지만 해가 제법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눈 때문인지 겨울 해가 유난히 희어 보인다. 목덜미를 감싸오는 한기. 마을에 내린 눈은 녹지 않고 내일을 맞을 것이다. 어쩌면 눈이 더 올지도 모른다. 밤사이 하얀 몸을 옹송그리고, 눈을 꼭 감고선 포근히. 그들은 어떤 심정으로 내리는 것일까.
검붉은 벽돌로 지어진 작은 교회 같은 건물 곁, 우스꽝스레 휘어진 장승 하나가 몸에 글자를 새긴 채 있다. 비우2리 마을회관. 누구의 신발도 없으나 문은 열려있다. 널브러진 화투판과 몇몇 운동기구, 무기력하게 녹이 슨 싱크대 벽면. 그리고 회관 특유의 냄새…… 느끼함을 덜어낸 가스 냄새 같은 것이 감돈다. 싱크대로 대야를 가져와, 온수를 받고 가져온 걸레를 빤다. 땟국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온다. 홀로 남아있던 시간이 이렇게나 벅찬 것이었나? 퐁퐁을 짜 빨아보아도 소용이 없다. 몇 겹의 시간에 걸쳐 빨아야 할까, 세젯물을 대야에 풀어놓고 걸레를 모두 담근다. 수건이 없어 손을 옷에 문질러 닦고 구석 어느 곳에 가만히 앉아 기다린다. 동작이 멈추자 맥이 풀리며 싫증이 난다.
핸드폰을 두고 온 것이 실수였을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도망치고 싶었는데, 지금은 다시 여기에서 도망치고 싶다. 주머니를 턴다. 얇은 지갑과 내일 돌아가는 왕복 기차표뿐. 하릴없는 처지를 자조하며 지갑을 연다. 중학교를 졸업하며 찍었던 가족사진이 한가운데 꽂혀있다. 할아버지와 어깨동무를 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선 지금 할아버지와 마주하고 계실까. 병실을 뒤로하고 아버지와 둘이 술잔을 기울였던 밤, 아버지께서 왜 그리 자신을 말하고 싶으셨을까.
아빠가 죽으면 있잖냐…… 납골당에 말고 고향에 묻어주면 안 될까. 나이가 먹으니까 고향이 그립다, 그 집 안 팔길 잘했어.
고향 생각이 자주 난다. 그런데 잘 기억나질 않아…… 여긴 정말 아무것도 없어. 집이 아니라 은신처 같아.
무엇이 아버지를 감상적으로 만들었을까, 할아버지? 시간의 흐름? 단지 향수병일 수도 있었다. 아버지께선 소주를 세 병 연거푸 들이키셨다. 잠드신 줄만 알았던 어머니께서 오징어와 땅콩을 꺼내주고 가셨지만 그는 손도 대지 않으셨다. 몇 분도 안 되어 비는 잔에 끊임없이 술을 따랐다. 내가 네 잔 즈음 마시고 알딸딸할 때, 아버지께서 마지막 잔을 비우셨다. 네 병째였다.
다 없어질 것 같다, 다…… 이 나이 먹고서도 존재하는 게 서럽다, 참……
고개를 푹 숙인 아버지의 머리는 새치로 가득했다. 머리 위에 눈이 온 듯, 내일 낮이면 증발할 듯이 허망해 보였다.
눈이 녹으면 무엇이 사라지는 것일까? 회관 창문 밖으로 눈이 인다. 여우눈일지도 몰라, 문득 생각이 스친다. 밖으로 튀어 나간다. 갑작스레 밝은 장소로 나와 이는 현기증, 시야에 무한히 퍼져나가는 동심원, 이윽고 진정된 후 마을이 보인다. 멀뚱히 마주 선 가로등과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탄한 논. 여우눈이 아니야, 순식간에 맥이 풀린다. 일부러 바람은 크게 웅웅거린다. 싸락눈을 꼭꼭 쥐고 있다가 내 얼굴에 철벅철벅 후려친다. 눈은 금세 녹아 습기만이 남는다. 이 가증스러운 습기, 나는 왜 여우눈을 찾고 있지. 싱크대 앞으로 돌아와 걸레를 든다. 거품을 여기저기 치장한 더러운 것.
설영이를 제외한 우리는 모두 어리둥절했다. 마법사? 만화영화에나 나오는 그 마법사란 말인가. 그러나 기다림에 지친 우리는 먼저 뛰쳐나간 설영이의 뒤를 쫓았다. 설영이는 마을 안쪽으로 뛰고 있었다. 여우리 방향도, 비우 1리 방향도 아닌, 어른들이 멧돼지가 나온다며 가지 말라 한 산길. 설영이는 주저 없이 그 길을 뛰고 있었다. 우리는 다급히 뛰었다. 누가 저 지지배좀 잡아봐라! 우리 중 키가 가장 컸던 일규가 힘껏 달려가 설영이를 붙잡았다. 어깨를 콱 후려잡힌 설영이가 기울어지고, 일규도 넘어진 설영이에 밀려 둘은 산길을 굴렀다. 화들짝 놀라며 엉겨 붙은 둘 곁으로 뛰어갔다. 일규는 허리를 두들기며 끙끙 앓고 있었다. 반면 설영이는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다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옥이는 그 웃음에 움츠러들었지만, 남자 셋은 그것이 아주 상쾌할 때에 내는 소리란 걸 알았다. 설영이를 일으켜 세우고 우린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설영이가 앞장서서 오늘 꾼 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마법사 아저씨랑 여기저기 다니면서, 아기들 가슴에 얼음을 넣고 왔어!
비누칠만 세 번째다. 걸레는 하얘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정녕 사용할 수 없는 걸까, 땟국물을 배수구로 흘려보낸다. 흐르는 온수에 걸레를 신경질적으로 문지른다. 보풀이 각질처럼 일고 미세한 검은 것들이 유수에 박혀 지나간다. 제발 깨끗해져라, 제발. 한참을 박박 비벼대다 걸레를 집어 던진다. 찰박 눌어붙는 소리, 허탈함에 솰솰 흐르는 물을 끌 생각도 하지 못한다. 왜 굳이 그 집에서 자려고 하는 걸까, 회관에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순간 정신이 울렁거린다. 발을 헛디디며 의도치 않게 수도꼭지를 붙잡아 물을 잠근다. 무력감과 함께 고개를 쳐든 구토감, 극심한 멀미. 바닥에 드러눕는다. 역류한 위액이 식도를 채운다. 숨 못 쉬는 목을 부여잡고 코로 큰 숨을 들이켠다. 고향 집에 머무르고 싶다는 마음이 점차 시듦은, 그것이 기억을 뒤적거리는 일이기 때문일까? 고향에 돌아오고 반나절도 되지 않았지만 소생한 기억들이 많다. 그것들은 일렁거리며 순식간에 나를 빨아들이곤, 어느 순간에 성의 없이 내팽개친다. 그럴 때마다 사람 없는 역에 버려진 기분이다. 그들은 치사하게도 접근에 용기가 필요하다. 아, 지갑이 유난히 무겁지만.
그래도 잊기 싫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기심일까?
고등학생이 되고 첫 겨울,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누구일까, 생각하고 전화를 받자 그녀가 낭랑하게 말했다.
_준혁이 핸드폰 맞으면, 내가 누군지 알 텐데.
끊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지나치리만큼 익숙했다. 전화를 끊지 않은 채 SNS에 접속해 그 번호를 검색했다. 검색 결과 하나, 오설영. 설영이었다.
이름을 불러주자 그녀는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잠시 뒤 문자로 주소가 하나 왔다. 덧붙이듯 보내온 말. 주말에 여기까지 와줄 수 있어?
젖은 걸레를 가지고 망연히 집으로 돌아간다. 집은 대문을 열고, 장지문을 열고 굳은 풍경 채로 나를 맞는다. 빗자루질은 아무 소용도 없었는지 먼지가 점막처럼 남아있다. 결국 닦아낼 수 없는 것일까. 다시 속이 역류할 듯해 급히 몸을 숙인다. 부탁하듯 간절히 걸레로 바닥을 훔쳐낸다. 그러자 달팽이 지나간 자국 같은, 한 줄기 낯빛이 익다. 드러난 민낯, 자실하여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역함이 사라지고 순결한 기분이다. 부활할 수 있어. 무심코 떨어뜨린 걸레는 온갖 먼지를 매달고선 희생된 듯 널브러진다. 대청으로 나서 청초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눈이 찌뿌둥할 정도로 풍경은 희다. 빛나기보다 소박히 환한 하양 눈결, 이것에 둘러싸여 부활할 수 있는 것일까. 황홀한 마음으로 기차표를 꺼내 찢어버린다. 가족사진 속, 부활을 희망하는 두 사내가 어깨동무를 하고 졸업장을 든 나는 사형선고를 받은 표정이다. 이제 너를 부활시킬 수 있어. 뭔가 잃어버렸다고 자각한 순간을 기억한다.
설영이를 만나고 1년이 지나 겨울. 나는 그녀를 잊었으며, 단 한 번도 그녀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무심코 알게 되었다. 교실 창밖 희미한 첫눈을 보며 문득 설영이와의 만남을 곱씹어냈다. 예언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 설영이는 카키색 코트를 걸친 채 있었다. 바람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웠고 나는 반사적으로 옷을 여몄다. 다름을 상징하는 것이었을까, 설영이는 팔을 벌리고 바람을 맞았다. 1년이 지나고 내가 기억했던 것은 그곳이 높은 빌딩의 옥상이었다는 것과, 설영이에게 녹아든 앳됨과 허무, 그리고 그녀가 내게 던진 충격적인 말뿐이었다. 혹시 너는 나를 사랑해줄 수 있을까? 대화는 시제가 어긋나 있었다. 가장 친했던 소꿉친구에게 느낀 지독한 낯섦은 애틋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작별이 편안했던가. 돌아오는 길, 유원지의 불꽃놀이를 상상했다. 하늘이 무심히 검어지며 드리운 적막, 몽롱히 뒤돌아 터벅거리던 상실의 걸음. 그러다 출구를 빠져나가 집 현관에 다다랐을 때의 인정하기 싫은 허탈함. 공허감은 돌아오는 길 내내 마음 한구석에 있었다. 1년이 지나 그것이 사망선고였음을 차분히 깨달았다.
날이 기울고 창밖 첫눈 색은 짙어졌다.
그날 소식을 듣고 부모님과 장례식장에 들렀다. 많지 않던 조문객들은 하나같이 무례하고 시끄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자식 잃은 사람 앞에서…… 어머니께서 더 울지도 못하는 오랜 친구를 안으셨다. 설영이의 아버지께서도 아버지와 인사를 나누셨다. 영정사진과 마주 서자 비죽 입가가 틀어졌다. 부모님과 두 번 반 절을 하고 꽃과 향을 바쳤다. 착잡하되 슬프지 않았다. 그녀의 죽음이 숙명적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나를 끌어안고 오열하시는 아주머니를 위로하곤 물러났다. 부모님께선 오랜 친구 곁에 있기로 하셨다. 홀로 빗겨나간 채 복도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바보 같은 년. 소란스럼 틈 아무도 듣지 못하게 중얼거렸다.
한참 밖을 내다보았다. 가로등이 지친 채 서 있었고, 누군가가 내게 다가왔으며 첫눈이 폭설이라는 이례적인 뉴스가 흘렀다.
_준혁이 맞니?
말을 건 여자는 단발머리에 크고 예쁜 눈을 가졌으며, 허탈한 미소와 어딘지 요염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낯선 이와의 거리감을 모르는 듯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꺼낸 말에 놀라지 않았을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창으로 눈보라가 후드겼고 눈도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_나 옥이야, 윤옥.
그리고 성장이라고 생각했던 사망선고가 상실이었음을 깨달았다.
옥이가 영정에 절하는 것을 보았다. 제 딸을 겹쳐보셨는지 설영이 어머니께서 다시 오열하셨다. 아직 저녁을 먹지 않은 우리는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밥을 소고기 뭇국에 말아 먹었다. 아저씨들이 화투 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우리 사이 여전한 것은, 치켜보다 눈이 마주칠 때 황황히 시선을 내려버리는 것뿐이었다. 편육을 하나 집어 먹을 때 옥이가 입을 열었다.
_많이 변했네, 뭐랄까…… 차분해진 것 같아 너, 분위기가.
그녀는 시선을 어느 한구석으로 떨구고 있었다. 뭇국을 마시며 너도 변했다는 말을 눌러 참았다. 따뜻한 국물이 위장에 떨궈지며 울멍진 무엇을 흘려보냈다. 착잡한 심정이겠거니 하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옥이는 국밥을 몇 번 휘젓고는 역시 수저를 내려놓았다. 어떤 아주머니께서 가져다주신 음료수를 하나씩 손에 들고 우리는 다시 복도 구석에 앉았다. 눈이 창문을 톡톡 후려치는 소리가 귓가를 건드렸다. 침묵을 메우며 토독, 톡, 아스라한 것이 시간 같았다.
_저기…… 잘 지내?
수줍게 물어오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눈발 소리가 잠시 적요해졌다. 아저씨들의 화투판이 격해졌다. 쓰리 고, 옥이와 나 둘이 표정을 찌푸렸다. 그래도 서로 추모하는 마음은 있었다는 듯이. 다시금 그녀를 보았다. 앳됨이 사라진 듯한 얼굴은 20대 초중반으로 보였고, 옷차림이며 화장법 역시 우리 또래의 것은 아니었다. 정말 내가 알던 옥이가 맞을까. 설영이의 것과 조금 다른 낯섦을 느꼈다.
_넌 잘 지내냐.
화투판을 노려보던 옥이가 놀라며 돌아봤다.
_나름 잘 지내. 처음엔 설영이도 없어서 불안했는데, 지금은 잘 적응했어.
변화를 내포하는 것이었을까, 적응했다는 말은 일부러 선택한 것 같았다.
_설영이는 자살했다고……
_그래……
어째서인지 잠시 눈이 멈춘 밖을 내다봤다. 화투판 소리도 잦아들었고 오늘 밤 내내 꾸준히 눈이 올 거라는 예보가 흘러나왔다. 옥이는 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핸드백에 다시 집어넣었다. 무슨 말을 해야겠다는 비장함이 그녀에게 보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었을까?
_설영이는 혼자였대. 왕따를 당했던 것 같아.
자백하듯이 말한다. 나랑은 다른 학교였어, 그 학교 다니는 아는 애한테 들은 거야. 급히 덧붙이는 것은 죄책감 때문이었을는지. 그녀는 차분히 말을 골랐다. 설영이는 예전 그대로였으며 친구 한 명 없었고, 작년 겨울부터 유난히 힘들어하더니 오늘 사태가 터졌다는 것이었다.
_설영이랑 만난 적이 있었어.
옥이는 자백 하듯 말을 이었다. 그녀가 털어놓은 것은 내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_그때 그 애한테 정신 차리라고 말했으니까…… 그래서일지도 몰라.
말을 끊었지만 내용은 알 수 있었다. 다시 시간을 확인하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이 흠칫흠칫 내리기 시작했다. 잘 살자 우리, 문 앞에서 작별을 고하고 그녀는 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산을 쓰고 가는 모습이 처연해 보였다. 뒷모습을 끝까지 보려 했으나 갑작스레 쏟아지기 시작한 눈 탓에 금세 사라져버렸다. 계단을 올라오다가 한 무리 취객과 스쳤다. 장례식장에 인기척이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설영이 어머니께서 유령처럼 분향소에서 나와 억지로 배를 채우셨다. 음료수 캔을 버리다 아주머니의 혼잣말을 들었다. 왜 다들 애 탓을 하는 거야,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다른 게 무슨 죄라고…… 나는 못 들은 척 다시 복도 구석에 쭈그려 앉았다. 폭설 피해를 연이어 보도하는 뉴스 속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리모컨으로 티비를 끄곤 머리를 창에 기댔다. 차갑다 못해 이마에 저릿한 통증을 느끼며, 그제야 설영이는 자살한 게 아니라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꼼꼼히 구석구석 닦인 집은 목욕재계를 끝마친 듯하다. 열려있던 장지문을 닫고 걸레를 잘 접어 부엌에 가져다 놓는다. 일몰까지 한 시간, 녹슨 대문을 안에서 닫고 걸쇠를 채운다. 어렸을 적 그랬듯 유난히 낮은 뒷담을 타고 집을 나선다. 죽은 나무가 우거진 터에서 담벼락을 따라가면 나오는 큰길, 눈 덮인 길을 타고 마을 안쪽 산길로. 아무 발자국도 없는 길가가 언제적 머금었던 애들 발소리 웃음소리, 상쾌한 환청의 배웅을 받으며 무덤가로 간다. 무덤가에 가면 우선 마법사를 비웃어줄 것이다. 그리고 설영이에게 죽여서 미안하다고 사과할 것이다. 그러면 여우눈이 올까? 올 것이다, 눈밭에 누워 개인 하늘 광명에 휘감기며 내리는 그것들을 볼 것이다……
장례식 둘째 날은 어머니만 남아 설영이 부모님을 돌보셨다. 아주머니께서는 어제보다 야위셨지만 사람에게 냉랭하셨다. 슬픔이 소진되고 근원적인 증오만 남은 것이었을는지, 분향하는 낯선 이를 보시는 옆얼굴 아슬한 눈 속에 피떡진 흉터가 썩어가던 것처럼 보였다. 어제와 다른 조문객들의 소음이 정신을 괴롭혀댔다. 지금 막 제설 작업에 착수했다는 TV의 외침은 방치되어, 나 외의 사람들은 눈이 그쳤다는 사실도 모를 것 같았다. 사람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이른 저녁을 먹었고 한참 상차림을 도왔다. 소음과 술 냄새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종업원마냥 반찬 가지를 나르고 엎질러진 소주를 치웠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속이 뒤집어졌다. 그들이 먹고 뜯는 그 음식들을 있는 힘껏 게워내고 싶어졌다. 앞치마를 벗어두고, 급히 입을 틀어막곤 화장실로 갔다. 울긋불긋한 육개장 국물과 전혀 잘리지 않은 고사리, 사각 무, 미음 같은 밥풀과 아직 소화되지 못한 반찬을 토했다. 위까지 집어넣은 호스를 누군가 뽑아내는 감각에 속눈썹이 눈물로 젖었다. 변기를 쥐며 어째서인지, 설영이에게 가까워지고픈 충동을 느꼈다. 두어 번 더 속을 게워낸 후 세면대에서 입을 헹구었는데, 잇몸에 스미는 차가움에 이유 없이 위로받았다.
화장실에서 나오자 두 사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크기를 제외하고 달라진 부분이 없어 보였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는지, 서로 단박에 이름을 부르고 부둥켜안았다. 고향에 돌아온 듯한 안도감을 느끼던 중 문득 담배 냄새를 맡았다. 게워냈던 위가 발작했고 나는 그들을 떼어놓고 헛구역질을 했다. 머리가 이명처럼 울렸고 나를 걱정하는 그들이 낯설어졌다.
_일규 너 담배피니,
그는 쓴웃음만 지어 보였다. 숙명인 것이었을까.
깨져있던 창문 새로 손을 집어넣어 옥상 도어락을 해제했다. 쌓인 눈에 밀리지 않는 문을 어거지로 밀어내니 격리되어 보전된 눈밭이 있었다. 먼저 앞서가 어제 보던 가로등을 내려다보았다. 가로등 위에 쌓인 눈은 더욱 침울해 보였다. 일규는 옥상 문 맞은편 끝에서 담배를 피려다, 눈이 마주치자 라이터를 도로 집어넣었다. 이규는 말없이 발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진 지 오래되었지만 반사광으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
_옛날 생각나지 않아, 형?
그렇게 말하는 이규는 눈밭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눈을 떼면 안 된다는 본능적 호소였을까, 나는 그가 떠올리고 있을 추억을 알 수 있었다.
눈 덮인 산길을 올라가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즐거워서, 마법사를 찾겠다는 당초의 목적 따위는 잊은 채 우리는 뛰어놀았다. 어스름 녘까지 마구잡이로 야산을 헤집고 다니다가, 숨겨진 오솔길을 발견한 설영이가 우리를 길 안으로 불러모았다. 가파른 경사로는 유난히 미끄러워 포복 전진하듯 길을 올라야 했다. 길 끝에는 무덤가가 있었다. 우리는 보물창고를 발견한 것처럼 흥분했다. 설영이와 전 씨 형제는 눈덩이를 뭉쳐 던지며 무덤가를 구르고 달렸고, 옥이는 구석에 혼자 쭈그려 앉아 눈사람을 만들었다. 아이들 특유의 고음이 산골에 울리는 것을, 나는 눈 위에 누워 들었다. 하늘은 눈이 녹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청명했다. 눈은 체온에도 분유 가루처럼 남아 비린내를 풍겼고, 나는 충만한 기분에 잠겨 눈을 붙였다.
마법사를 보았다.
그는 무덤가 입구 맞은편 구석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손가락을 접고 있었다. 옥이를 가리키고 손가락 4개, 일규를 가리키고 6개, 이규에게 9개, 나에게 7개. 그는 마지막으로 설영이를 가리키려다 팔을 축 늘어뜨렸다. 잠시 후, 자신의 가슴을 세 번 두드리고는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나에게 애틋한 일별을 보내곤 사라졌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옥이가 만든 작은 눈사람이 서 있었다. 눈 온다, 눈! 아이들은 외치며 뛰놀았다. 하늘은 회색 그늘 없이 푸르렀다. 나른함에 몸을 맡기고 눈밭 위를 뒤척였다. 후드기는 여우눈을 맞으면서도 우리는 젖지 않았다. 그래서 안심하며 그루잠을 잤다, 가슴 언저리가 기분 좋게 시려워오는 것을 느끼며……
_이장님한테 혼났지.
일규가 눈을 한 움큼 쥐어, 하늘에 대고 뿌렸다. 머리카락에 내려앉은 것이 유난히 차가왔다. 그날 우리는 성묘하러 오신 이장님께 혼났다. 우리를 혼내시며도 어찌 여까지 찾아왔을꼬, 하며 신기해하셨다. 우리는 앞서가시는 이장님 뒤를 따라 마을로 돌아왔고 모험은 끝났다. 그다음 달,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고 이듬해 가을에는 옥이가 서울로 올라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느덧 달이 숨겨진 하늘에 또 눈이 오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맞았다. 어느 순간, 기침 소리에 고개를 들자 누군가가 성수를 뱉어준 듯, 일규의 앞머리만이 젖어있었다. 쓰다듬듯 눈을 털어내며 생각했다. 무엇을 탓해야 할까.
오랜만에 형제의 부모님과 인사를 했고, 그들 형제는 돌아가려 했다. 설영이 부모님과 작별하고 계신 그들 부모님을 뒤로 한 채 내게 일규가 걸어왔다.
_역시 담배는 안 좋겠지?
그는 나를 화장실로 데려가, 내가 보는 앞에서 라이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담뱃갑에 있던 담배를 모두 변기에 털었다. 조곤조곤 찢긴 담뱃갑을 그 위에 뿌려주고는 변깃 물을 흘려보냈다. 그는 나를 보곤 허탈히, 약소한 웃음을 지었다. 무언가를 묵묵히 견뎌내며 내게 결별을 고했다. 나는 그가 탄 차가 떠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다시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고 뉴스는 말했다. 그의 강직한 영혼이라면 아마 끄떡없지 않을까. 두서없는 생각을 하며 가슴 언저리에 차가운 결정이 엉겨있음을 깨달았다. 늦은 밤 고속도로 위, 어머니의 차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실려 마법사를 만났다. 그는 손을 꼼지락대고 있었다. 나의 심장과 얼굴을 씁쓸히 번갈아 보고는, 무언가 가져가려다가 말았다. 잠시 유예를 주겠다는 듯 그대로 뒤돌아 사라지며 꿈에서 깬 나는, 미약하지만 차가운, 나의 결정이 서서히 녹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감각은 할아버지가 입원하시던 날, 결국 사라졌다.
가파른 오솔길을 기어 올라간다. 어스름이 보랏빛으로 깔려 무덤가를 채색한다. 구석에 앉아 눈을 뭉친다. 작은 덩이, 그것보다 큰 덩이 하나. 몇 분 만에 만들어진 작은 눈사람을 입구 맞은편에 세워두고, 눈밭에 눕는다. 손을 가지러히 모으고, 이가 덜덜 떨려오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젖어오는 목 언저리의 감촉을 무시하고 눈을 감는다. 체온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지갑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심장이 차가와온다. 심박 수가 천천히 느려지고, 나는 곧 꿈을 꿀 것 같다. 마법사에게 말할 것이다.
방법을 깨닫는 게 늦었지? 나도 내 심장을 얼릴 수 있었어. 이것은 네가 더 이상 빼앗을 수 없는 거야. 나는 이게 녹을 때마다 다시, 다시 눈밭에 누워 부활할 거야. 저주처럼 심장이 쿵덕거리는 일도 없을 거고, 눈이 내리는 하늘은 깨끗할 거야……
몸이 가벼워진다. 눈 감은 시야에 일렁이던 잔재들도 하나둘 사라진다. 쓰다듬듯 열기를 지워가는 것이 내 더러운 손임에 더없이 기쁘다. 누군가 다급히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이 설영이의 목소리이길, 기원하며 꿈꾸듯 잠든다.
*
노인이 옥수수 숫대차를 끓인다. 오밤중에 그녀가 서성거리는 것은 왜일까? 그녀는 가스레인지 불에 손을 쬐며 몇 년 전 설날에 보았던 손녀를 떠올린다. 여린 아이였지만, 서울서 멋쟁이로 잘 자라주었다고, 노인은 생각한다. 단발머리를 쓰다듬으며 유난히 쭈그려 앉아, 손녀는 노인에게 물었다.
_할머니, 나 옛날엔 어땠지?
문자 그대로의 질문은 아니었다. 설영이 소식은 노인도 들어 알고 있었다. 무언가 변화를 느낀 것이었겠거니, 노인은 착잡한 심정으로 말을 골라보았다. 잘살고 있는 거야, 누구든지 다 그런 거지, 사는 게 그런 거지……
_미안하다……
어째서인지 노인은 그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_옥이 할멈, 옥이 할멈! 얘 순자야!
유모차를 끌고 들어오는 노인은 유난스럽다. 가스레인지를 끄고 옥이 할멈은 숫대차를 컵에 따른다. 유모차 할멈이 이불 속으로 기어든다.
_무덤가에 쓰러져있던 총각 있잖어, 이장님이 찾으신! 그놈이 주녁이란다, 주녁이!
옥이 할멈은 이미 짐작하고 있어 무심하다. 유모차 할멈은 계속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는다. 지금 막 병원에 도착한 이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주민등록증을 보니 준혁이였다고 한다. 옥이 할멈은 밖이나 쳐다보고 있다. 비어있던 준혁이네 집을 보았을 때, 평소에 생각하지 않도록 하던 것을 직면했을 때 그녀는 습관적으로 착잡함을 추슬렀다. 무언가 말해주는 편이 좋았을까, 그녀는 오늘 모은 숫대로 끓인 차를 홀짝인다.
하늘엔 달이 선명하게 떠 있고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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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 대사는 사투리 배우고서 고칠게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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