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외롭다.
- 작성일 2010-07-11
- 좋아요 0
- 댓글수 0
- 조회수 2,314
그래, 나는 외롭다.(So, I'm alone)
이 소설 속에는, 투명한 나와 반투명한 당신이 나옵니다.
·-1-
무언가에 쫒기는 꿈을 꾸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것보다 견디기 힘든 건,
한없이 무언가를 쫒고 있는 꿈이다.
또다. 정신없이 뭔가를 찾는 꿈을 한참이나 꾸다보면 난 어느새 울고 있다. 그렇게 깨어났고 분명 정신은 제정신이고 아무렇지도 않은데 눈물은 흐르고, 그리고 허전함이 계속된다. 그렇게 깨어나도 난 여전히 무언가를 찾고 있다. 베개를 뒤집고 다시 잠을 청해본다. 하지만 깨어나 버리고나면, 또 잠을 자기까지는 몇 시간이고 흐른다. 양을 60마리정도 세어 봐도 안 된다. 난 이렇게 이대로 거대한 어둠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몇 시간이고 멍하니 천정을 바라본 채, 천정에 그려진 알 수 없는 벽지의 무늬가 보일 때 까지, 그렇게 깨어있어야만 한다. 정작 자신은 죽은 것 같은데….
다행스레 아침이 찾아왔다. 새벽의 추운 공기가 마음까지 움츠려 들게 하기 전에 나는 벌떡 일어나 아침을 준비한다. 요즘은 서구 식단이 오히려 아침식사로는 좋다는 핑계로 식빵을 구워 잼을 발라 먹는 게 아침이다. 인스턴트식품을 좋아하는 다혜는 괜찮다고 했다.
집은 5년 융자기간이 남은 번듯한 새집으로, 몇 년간 일해서 모은 돈과 이민가시면서 나에게 남겨두고 간 어머니의 재산을 보태어 샀다. 다대포에 있는 아파트 13층인 우리 집은, 부동산 쪽에 관심이 많은 내 지인에 따르자면 틀림없이 1.5배는 집값이 뛸 거라고 말했다. 집값이 뛰면 돈을 버는 샘이다.
집에 식구는 다혜와 앙리가 전부다. 다혜는 대학후배이자 함께 일하는 동업자이기도 하다. 집에 방은 2개인데 사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이유로, 빈 한방을 자기가 쓰겠다고 스스로 선언하고 들어왔다. 쾌활하고 명랑해서, 늘 주위는 시끌벅적하다. 그리고 앙리는 내가 5년 전에 산 개 이름이다. 말티즈 종이고 갈색의 털을 가지고 있다. 앙리는 다혜가 없었던 지난 2년간 그나마 곰 인형보다는 집에 온기를 느끼게 해준 고마운 가족이다. 다혜에게 투자하는 만큼 난 앙리에게도 투자하고 있다.
“언니 그 놈의 개 좀 어디다 갔다 팔수 없을까? 이것 봐!”
아침을 먹다말고 다혜가 내게 따져왔다. 그녀의 손에는 어쩌다 빠져나와 하필이면 식탁위에 날아올라 앉은 앙리의 머리카락이 들려져 있었다. 다혜는 나와 다르게 애완동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개는 마당 같은데서 늘 목에는 목줄을 차고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멍멍 짖어 대야한다고 말하는 그녀다.
“싫으면 네가 나가. 앙리도 우리 집의 어엿한 식구야.”
난 앙리와의 애정을 과시라도 하듯, 품에 안고 애완견용 소시지를 먹인다. 생각해보니 아무리 집 주인이고 다혜가 우리 집에 얹혀사는 대학교 후배라고 해도 나가라는 말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너도 네 아침은 네가 해결 해. 수영씨랑 결혼을 해도 아침도 안 먹고 회사 나가게 할 수는 없잖아?”
수영씨는 다혜가 사귀고 있는 2살 연하의 남자친구다. 숫기가 없이 늘 어리버리 한 게 매력이다. 나에겐 아직도 존댓말을 한다.
“흥. 걔는 결혼하면 자기가 아침 차려 준댔어.”
다혜는 말하며 일어난다. 입이 세치는 튀어나왔다. 밥풀이 묻은 그릇 그대로 식탁위에 두고 도망치듯 가버린다.
“아침 설거지는 네가 한다고 했잖아!”
난 소리쳐 보지만,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그녀가 화장실에 들어가면 1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아무리 배가 아프다고 거짓말을 해도 나오지 않는다.
“언니 변비인거 다 알아.”
다혜는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내가 변비가 있는 것도, 그리고 우울증이 있는 것도.
난 부산에 살고 있다. 20년 가까이 서울에 살다가, 어머니가 이민을 가는 해에 부산으로 혼자 이사를 왔다. 바다가 보이는 아파트가 갖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렇게 매일 바다를 볼 수 있는 집을 사도 우울증은 변함없이 날 찾아왔다. 바람이 차가워져서, 도저히 바람을 맞고 서 있을 수 없는 겨울이 오면 그 우울함은 내 등 뒤로부터 날 뒤덮고 날 멈추게 한다. 그렇게 멈추어 서서 나는 그대로 얼어버린다. 겨울 내내 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다.
가끔 잡지에 시답지 않은 글을 써서 내는 것 외에, 나에겐 특별한 일이 없다. 본래의 직업이었던 ‘일반문학작가’로써의 나는 온데간데없고, 그냥 방이며 마음속이며 정신없이 정리하는데 꼬박 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정신없이 집안을 청소하고 뭔가를 사서 방안을 가득 채워 놓는 일 외에 다른 무언가를 할 수가 없다. 생각. 생각하는 직업인 나는 우울증이 찾아오면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생각하면 할수록, 소설의 마지막을 슬프게 장식 하려했던 처음 구성이 그랬듯이, 나의 생각은 점점 슬퍼만 진다. 하지만 지금 나는 정상이다. 우울증이 찾아오면, 난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설 것이다. 그 자리가, 설사 썰물이 들어 모든 걸 침전시키는 바닷가 끝이라고 해도.
“여보세요?”
현진의 전화다.
“나야.”
현진은 3년째 사귀고 있는 내 남자친구다.
“응.”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의 전화가 내 마음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햇수로 3년이 넘었지만, 사실상 그의 얼굴을 보지 않은지도 2달은 넘었다. 그리고 한 번도 본적도 없는 것만 같이 멀게 느껴진다.
“부모님이 내려오신다고 해서. 결혼 문제도 있고 한번 식사나 같이 할까 해서 말야. 사실 어머님이 생신이시거든.”
현진은 서울에서 조명기구도매를 하는 부모님의 가사 일을 돕고 있다. 반 정도는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서 자기 회사 자체에서 조명기구들을 받아 팔고 있다.
“나중에.”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말했다. 그는 다른 남자들과 같이 사람을 귀찮게 하지는 않는다.
“생각은 좀 해봐줬으면 해. 부모님 인사드린다고 말한 게 꽤 오래 됐어. 내 입장도 생각해줘.”
현진은 대학교 동아리에서 만났다. 글을 쓰는 여자가 이상형이라고 했었다.
“생각해보고.”
마지못해 말했다.
“고마워. 이번 겨울은 생각보다 빨리 올 가능성이 높데, 생각보다 기온이 많이 내려간다더군. 그래서 말인데 1년마다 가는 병원이 있잖아. 그곳에 미리 가는 게 어떨까 해. 혼자 가기 힘들면 나를 불러도 좋고….”
그가 말끝을 흐렸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종종 연락 좀 해.”
그 말을 끝으로 전화기를 끊었다. 그는 나와 전화를 할 때면 늘 산소가 부족한 듯이 긴 한숨을 몇 번이고 쉬곤 한다. 그래서 전화를 먼저 끊는 쪽도 그가 하는 일이 많았다. 생각해본다고 말을 하는 건 안한다는 뜻이다. 그걸 그도 알고 있다. 난 늘 그에게 생각해본다고 말했다. “결혼하자.” “너밖에 없다.” 라고 하던 그의 고백조차 생각해본다고 말한 나다.
그는 착하다. 처음 만날 때부터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담배도 끊었다. 부모님 밖에 모르는 효자고, 신체도 건강하고 운동도 잘한다. 게다가 집안에 돈도 많다. 주변에 친구들이 저런 남자를 만난 너는 억세게 운이 좋은 여자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난 아무렇지 않다. 그는 나에게 늘 성가시고 귀찮은, 단지 남자친구의 자리에 놓인 체스 말과 다름이 없다. 내가 이러는 걸 보면, 난 분명 착한 여자는 아니다. 몇 년이고 기다려준 남자를 이렇게 매정하게 대하니까…. 그래 그를 위해서 오늘은 병원에 미리 가두는 게 좋겠다. 그리고 겨울동안 먹을 내 식량을 가지고 와야겠다.
병원을 가기 위해 오늘은 일찍 집을 나섰다. 하늘은 더 없이 높아 가을을 실감케 했지만, 아직 바람은 여름이다. 흰 면바지에 짧은 블라우스를 입고, 가방은 얹듯이 어께에 걸치고 그렇게 지하철을 탄다. 지하철 안은 평일이라 그렇게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서면에 도착하고 보니, 평일에도 웬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머리가 어질어질 할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온 서면의 거리에는 손바닥만한 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학생들로 가득하고, 남자들은 마치 눈도장을 찍듯이 그렇게 여자 다리를 한번 씩 쳐다보고 지난다. 저렇게 자신감이 가득 찬 어린 여자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다. 나도 이번 여름 다이어트에 실패만 않았어도 지금쯤 안 입은 듯 입은 것 같은 그런 나뭇잎 같은 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미끄러지듯 그렇게 걷고 있을 텐데….
내가 다닌다는 병원은 여기 서면의 외각 성형외과로 거리를 매운 거리 속에 투박하게 자리 잡은 종합병원 건물에 4층이다. 1층은 소아과 2층은 내과, 3층은 성형외과이고, 4층이 신경정신과다. 회색으로 된 계단을 걸어올라 어린아이의 지문자국이 선명한 자동문을 열고 들어가니, 새하얀 벽지에 벽걸이 TV가 걸린 병원이 보였다. 평일인데도 사람이 많아, 내부는 후덥지근했다.
“진료 접수하러 왔습니다.”
“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진료 접수를 하는 간호조무사들이 내 이름을 물었다. 이지혜라고 대답하고 주민번호와 연락처를 말했다. 그들은 상냥하고 친절했다. 정신과이니 만큼, 친절하게 말하는 것이 습관화 되었나 보다. 그렇듯 그녀들은 자신의 인생이라는 연기에 충실하다.
“이지혜씨. 진료실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이 병원은 3년째, 그리고 겨울이 오는 이런 가을날 한 번씩 왔다. 특별히 진료를 잘하는 의사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마땅히 다른 곳 이라고 별반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분홍색 벽지로 된 짧은 복도를 지나 진료실로 드니 푸른 벽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새하얀 가운.
“아. 지혜씨 오랜만이네요.”
정신과 의사들은 다른 의사들보다 의사 같지 않은 사람들이, 또 진료 같지 않은 진료를 한다. 웃고 떠드는 것이 치료기법이라고 까지 하는 그들이다. 난 의사에게 현재 나의 상태에 대해 설명했다. 겨울만 되면 찾아오는 이 우울증이 내 체감 상 좀 더 일찍 올 것 같다고 말했다. 밤에 슬프지 않는데 눈물이 나고 조금씩 의욕이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도무지 말 하기가 싫어 메모지에 적어서 건넸다.
“남자친구는 있으세요?”
의사가 물었다. 있다.
“지혜씨가 올해로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의사가 다시 물었다. 30살, 아니 31살이다.
“음.”
의사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마치 성형수술을 할 것만 같다.
“자기 외모에 콤플렉스 같은 게 있나요?”
의사가 물었다. 있다.
“네.”
이번만큼은 내목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어떤 부분이죠?”
“왜요?”
난 정신적 문제로 온 거다. 그런데 내 외모가 무슨 소용이지?
“예. 우울증은 심각한 자기혐오에서 출발한답니다.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게 되죠. 그런 자기혐오는 자기 성격이나 외모에서 많이 느끼게 되지요. 혹시 자기 외모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돈을 들여서 성형을 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의사가 설명했다. 하지만 난 의사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를 느끼질 못했다. 이 의사는 3년째 나를 진료하고 있지만, 이렇게 특별히 내 병의 원인을 설명해주진 못했고, 단지 자신의 대학시절에나 질리도록 받아 적었을 우울증의 특징 따위를 열거해 놓을 뿐이었다.
“역시 지혜씨는 도저히 모르겠군요. 병의 원인이 어딘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확실한건
우울증이라는 것밖에….”
의사는 결국 그와 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 남았다.
“…”
의사가 진단서를 쓰고 다시 소견서를 썼다. 정신질환 관련 약은 꽤 엄격해서 이렇게 의사의 소견서가 없이 약을 받기 힘들다. 그리고 우울증은 행동장애를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아서 이렇게 약을 한달치를 받는 경우가 있다.
“팍실입니다. 15mg이상 복용하시면 위험하시다는 걸 알거에요. 항 우울제는 다 같이 신체 리듬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죠. 신체감각도 많이 떨어뜨리고요. 중추신경을 조금 마취시키는 것과 비슷하니까요. 아. 그리고 일주일에 성관계는 몇 번이나 가지시죠?”
의사들은 때로 환자들을 자극하기도 해야 한다. 또다시 침묵이 흐른다.
“항 우울제는 성관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사는 다시 소견서를 쓰기 시작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아!”
의사가 갑자기 뭔가 떠오른 것처럼 소리쳤다.
“혹시나 기억이 가물가물 하거나 알고 있던 어떤 생각이 사실은 착각이었거나 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십니까? 예를 들자면 건망증과 비슷한 것 말이죠.”
의사의 말을 들으면서 난 의사의 진단서를 챙겨들고 일어났다.
“그런 일은 없네요. 건망증이 있지도 않고요.”
난 그렇게 말하며 돌아섰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왜곡이 쉽게 일어나는 것이며, 가장 믿기 힘든 것이 바로 기억이라는 사실을 명심 하셔야 합니다.”
그의 말에 머릿속에 맴돌았다. 뒤를 돌아 눈길을 한번 주고 밖으로 나선다.
약을 받고 거리로 나왔다. 가방 속에 팍실이 든 통을 만져보았다. 왠지 위안이 되었다. 한번은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이약을 한 번에 다먹어버리면 죽게 되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다만 약에 내성이 생겨서 다음 해 우울증이 찾아오면, 한 번에 밥 한 공기만큼의 약을 먹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정말 끔찍한 생각이다.
기왕 시내에 나온 김에, 여러 옷가게들을 기분삼아 들렀다. 괜찮아 보이는 옷에 치수를 일일이 확인하고, 예쁜 가방을 들어봤다 메어봤다 하며 혼자 놀았다. 이 가방은 다혜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 하나 샀다. 기분이다 싶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시내에서 밥이나 한 끼 먹으려 했더니 받지 않았다.
책 몇 권을 사고 찻집으로 간다. 시내에 그나마 사람의 발길이 많지는 않은 서면의 외곽이다. 여기 찻집의 장점은 4층에 있고 거의가 창가에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난 여기서 글을 많이 쓴다.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게 기분이 나쁘지 않다. 가능하다면 이 찻집을 사버리고 싶기도 하다. 원고의 마무리 부분을 다시 써 내려간다. 요즘은 독자들의 비평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잘못하면 그나마 잡지에 연재하고 있던, 내 연애소설도 중단하게 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독자들은 하나같이 로맨스 소설을 유치한 3류 소설이라 말한다. 희귀 한 병, 현실 불가능한 부자와 신데렐라의 사랑이야기. 사람 사이의 애정 관계를 비비 꼬아놓는 형식들을 들먹이면서 모두가 말하기를, 로맨스는 유치한 현실 불가능한 소설 이라 말한다. 하지만 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우울해진다. 연애는 원래부터가 유치해야 제 맛이다. 남자는 뻔히 보이는 이벤트를 준비하기 위해 땀을 흘리고 여자는 알고도 속아 감동 받는 척하고 눈물을 흘려주고, 남자는 기뻐 춤을 추는 것이 연애가 아니던가. 연애는 원래 3류다. 그런데 내 소설이 유치하다느니 3류라느니 말하는 것들은 정작 연애의 참맛을 아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두시간정도 글을 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슬 저녁이 되어 가니 쌀쌀해 진다. 늘 생각이 많은 탓에 바닥을 보며 그렇게 걸어간다. 초저녁부터 술에 취한 남자들에게 어께가 부딪히기도 하면서, 그래도 내가 걷고 있는 길을 지키며 걸어간다.
“여보세요.”
전화가 왔다. 현진이다.
“나야. 내일 어머님이 형님 댁으로 가시기로 했어. 우리도 그쪽으로 가는 게 좋겠어. 아침에 데리러 갈게.”
현진은 가끔 사람을 귀찮게 할 때가 있다.
“자고 오는 건 아니지?”
그에게 물었다.
“… 그래. 내일 아침 7시에 너희 집 앞으로 가겠어.”
또 한숨을 쉰다.
“…”
전화를 끊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요즘은 현진의 전화를 받기만 해도 이렇다. 그와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도 힘들고 그가 나에게 비위 맞추려 하는 것도 고통스럽다. 집으로 오니 다혜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앙리가 자기 방을 어질러 놓았다는 것이다.
“다 그렇지. 정신연령이 애랑 비슷하니까 애라고 생각해. 애가 집 어질러 놓는 건 당연하잖아.”
다혜는 짜증이라는 짜증은 다 내면서 신경질 적으로 방을 청소했다.
“언니는 개가 그렇게 좋아? 그럼 개랑 살아.”
다혜가 비꼬듯이 말했다.
“개랑 살고 있잖아.”
또 대판 싸울 기세다. 가방을 내 방 침대위에 던졌다.
“어휴. 언닐 누가 말려. 현진씨 아니면 언니 같은 사람 좋아하는 남자 대한민국에 한명도 없을 걸?”
다혜가 말하면서 앙리가 묶인 목줄을 거세게 끌어당겼다. 베란다로 끌고 가는 것이다. 앙리는 오랜만에 목줄을 한 탓에 숨도 못 쉬고 켁켁 거렸다.
“그만해!”
난 다혜의 손에서 목줄을 빼앗았다. 그리고 앙리를 안고 내방으로 데려간다.
“언닌 개밖에 몰라. 그냥 개랑 결혼해야 돼.”
다혜가 소리치며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내방에 문을 잠그고 앙리의 목에 묶긴 목줄을 풀었다.
‘네 덕에 살았다.’
앙리가 그렇게 말했다. 내일은 내가 없을 텐데 앙리와 다혜가 또 싸우진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내일 내가 해야 할 일을 걱정했다. 혹시 밤에 잠이 오지 않을까 미리 팍실 한 알을 집어 삼키고 그렇게 잠을 청했다.
다행이 약 기운 탓인지 새벽에 깨진 않았다. 아침은 현진의 전화로 시작하게 되었다. 현진은 약속은 칼같이 지킨다. 아침 7시가 되니 전화벨이 울린다. 도착했다는 전화를 알았다는 대답으로 끊고, 난 씻기 시작했다. 그렇게 씻고 화장을 하고 하루치 앙리 밥을 챙겨놓고, 그리고 나섰다. 출근하는 다혜와도 함께 나왔다. 정확히 8시였다.
“수염 길렀네?”
겨우 생각해서 말했다.
“응. 3개월 됐어.”
내 옆에 있던 다혜가 나에게 눈치를 준다. 남자친구 수염이 이렇게 자란 것도 몰랐어? 라는 표정이다.
“만져 봐도 되요?”
명랑한 다혜가 현진의 턱을 매만졌다.
“으 까칠까칠해. 흥흥.”
다혜와 현진은 오래 알고지낸 사이처럼 웃고 떠들었다. 다혜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직장까지 바래다주겠다는 현진의 호의를 애써 거절하며 다혜는 떠났다.
“괜찮아?”
현진이 나에게 물었다. 그러면서 안전벨트를 매어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럭저럭.”
말하고 고개를 돌린다. 오른쪽엔 버스를 기다리는 다혜가 보인다. 다혜는 키가 크고 날씬하다. 게다가 굽이 높은 신발을 즐겨 신어서 어지간한 모델 저리가라 할 정도로 봐줄만하다. 옷 입는 것도 또 어찌나 까탈스러운지 여자인 나도 그 애랑 옷 사러 가면 피곤해져 버린다.
“어쩌면 하루 자고 올지도 몰라.”
어제와 말이 달라졌다. 자고 오는 거였다면 내가 올 리가 없다.
“말이 다르잖아.”
현진에게 말했다.
“꼭 그렇다는 건 아니야. 어머님이 내일 올라가는 거면 우리가 데려다 드려야 하니까. 형님께 또 부탁드릴 순 없잖아. 요즘 사업하느라 바쁜 양반인데.”
현진이 말했다. 우리라는 말이 날 생각하게 만들었다. 언제부터 난 우리, 속에 갇힌 걸까? 현진의 형이 있는 곳은 장유다. 부산의 옆에 있는 작은 도시다. 그곳에서 그의 형은 사업을 하신다.
“원고는 잘되어가?”
현진이 물어온다. 말 걸어오는 게 귀찮다.
“그래.”
짧게 대답하고 눈을 감았다. 눈이 아팠다.
현진이 내 손을 잡는 통에 눈을 떠버리고 말았다. 자동차가 스틱이 아니라 오토매틱이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귀찮아 진다.
1시간도 못되어 도착했다. 도착하니 현진의 어머니와 현진의 형, 그리고 현진의 형 부인이 있었다. 3살 된 현진의 형 아들도 있었다. 간단히 인사하고 식사를 같이 했다. 업체에 주문해서 만든 음식이 한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하지만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좀 웃고 같이 이야기도 해 동서. 어머님 생신인데 아무리 기분이 안 좋아도 그렇지 좀 웃어야지.”
현진의 형의 부인이 나에게 눈치를 주며 한소리 한다. 겨우 소리 내어 대답한다. 식사가 끝나고 차례차례 선물을 건넨다. 현진의 형과 누나가 선물을 건네고, 이번에 현진의 차례가 되었다.
“여기, 어머님 옷 한 벌 샀어요.”
현진이 웃으며 종이가방을 건넨다.
“고맙구나.”
염색한 머리카락의 뿌리가 흰줄도 모르는 어머니는, 현진의 선물을 받고 가장 좋아하셨다.
“지혜가 골랐어요.”
끝까지 내 생각을 하는 그다. 옆에 현진의 형 부인은, 의심에 찬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집안에 비위를 맞추며 살고 있는 그녀가 대단해 보인다. 식사도 끝나고 선물전달도 끝났다. 이제 난 집으로 가면 된다.
“오늘 자고 가신데.”
현진이 몰래 내게 말한다.
“나도 여기 있어야 돼?”
현진이 또 한숨을 쉰다. 갑갑하다. 저녁이 되어서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사업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손자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간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올 겨울이 어떠냐?”
현진의 어머니가 한 말이다. 멍하니 있다 현진이 신호를 주어 나에게 하는 말인 줄 알았다.
“네?”
내가 반사적으로 대답한다.
“결혼 말이다.”
결혼. 생각해본 적 없다.
“올 가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진이 멍한 나를 위해 말한다. 잠시간 조용해 졌다. 이렇게 나와 연관된 이야기가 나오면 모두가 조용해진다.
갑갑하다.
“나 차에 가있을게.”
현진의 대답을 뒤로하고 차로 간다. 차에 운전석에 앉아서 멍하니 있는다. 아직 개발이 되지 않은 지역이라, 텅 빈 논이 보인다. 논이 가득히 자라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가방 속에 손을 넣어본다. 손거울, 화장품 가방. 그리고 약이 만져진다. 한 알 먹을까하는 생각이 스치었다 사라진다. 차를 몰아볼까? 운전면허는 몇 년 전에 따놓았긴 했다. 운전면허를 딸 때만큼은 참 즐거웠다. 차를 몰아볼까 하는 상상에 며칠간 즐거웠다. 면허를 따고 차를 덜컥 샀다가 한 달도 못가고 고물이 되어버렸다. 어떻게 운전면허를 땄느냐고 물어오는 다혜가 생각나 순간 웃음이 난다. 다혜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현진이 걸어온다. 조수석에 앉는다.
“괜찮아?”
현진이 물었다. 현진은 끝까지 내편에 서있다. 차라리 화를 냈으면…
“별일 없어.”
난 창가를 보며 앉는다. 현진은 잠시 옆에 앉아 있는다. 둘 사이에는 거의 대화가 오가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으면서도 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어머니 생신이야. 힘들더라도 비위 좀 맞춰 줬으면 좋겠어.”
현진은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밖은 조금 더 어두워 졌다. 갑자기 현진형의 부인이 나타났다. 인상을 잔뜩 찡그린 게 나에게 화가나 있는 것 같아 보였다. 현진을 보낸 것도 그녀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날 좀 가만히 놔뒀으면….
“동서. 잠깐 이야기 좀 해.”
야무지게 묶어 올린 머리가 눈에 거슬린다.
“…”
현진이 체면도 있고 해서 순순히 창밖으로 나갔다.
“대체 뭐가 문젠데?”
팔짱을 하고 배꼽이 보일 듯 말 듯 한 짧은 옷을 입은 그녀가 따져온다.
“별로 문제없어요. 그냥 좀 기분이 안 좋네요.”
내가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내가 나이가 어린 게 그렇게 아니 꼬와요? 그럼 진작 결혼 하든가. 나이가 많은 지혜씨가 문제지 내가 문제에요? 난 결혼 일찍 한 것도 아니에요. 내 나이게 맞게 온 거라고요. 그리고 내가 동서한테 뭘 시키길 했어요? 그냥 좀 따라 웃어주면 어디가 덧나냐고요!”
참았던 말이 많은지 말을 줄줄 내어놓기 시작했다. 원래 말이 빠르고 말싸움하기를 좋아하는 타입의 여자였다. 저번 결혼식 피로연때도 한바탕 싸우는 걸 봤다.
“….”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었다.
“휴. 아직 결혼 안했으니 동서라고 부르는 건 좀 이르긴 해도, 우리 같은 여자끼리 좀 친하게 지내죠? 어차피, 피차 이집 재산보고 들어오는 거라면 서로 한편 아니에요?”
현진의 형 부인이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밖은 어둑어둑해져 밤이 찾아올 듯 했다.갑갑했다. 갑갑해 미칠 것 같았다. 팍실을 한 알 집어 물과 함께 삼켰다. 하지만 마음은 진정이 되질 않는다. 괜히 억울해진다. 난 이런 애가 아닌데, 난 이러고 싶지 않는데 왜 다른 사람 신경도 쓰지 않고 내 고집대로 행동하는 바보 같은 여자가 되어있을까? 그리고 현진을 만나게 된 건 결코 그 집이 대단한 집안이라서가 아니다. 고백을 한 것도 그였고 결혼을 서두르려는 것도 그인데 왜 내가 나쁜 여자 같을까?
앙리.
한없이 앙리의 발바닥을 만져보고 싶다.
드르르릉.
차에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거는 것이라 한 번에 되지 않았다. 기어가 시동을 걸 때 있어야 하는 D에 있는지 확인하고 다시 악셀을 조금씩 밟으며 시동을 걸었다.
부웅.
됐다!
여기를 탈출할 테다. 이 불빛도 사람도 없는 시커먼 공간을 벗어나, 불빛이 가득한 부산의 도시로 가야만 한다. 그리고 바닷가가 보이는 내 집에서 앙리와 함께 간식을 나누어 먹으리…
힘껏 악셀을 밟는다.
쿠당탕.
시골의 비포장도로에 돌부리가 차 밑바닥을 긁고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어느새 포장된 도로에 발이 올라서니 세상은 다시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해졌다. 너무 오랜만에 운전을 해본 터라 여기저기 신경 쓸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온 사방에 있는 거울이 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왼쪽 사이드 미러를 봤다가 위쪽 백미러를 보았다가, 뒷 차가 따라오는 것을 신경 써서 보고 있다가 순간 앞차에 빨간 미등이 들어온걸 보고 깜짝 놀라 브레이크를 밟는다!
“거 아줌마! 운전 똑바로 못해!”
여기저기 소리가 난다. 차 경적소리. 아저씨들의 고함소리. 도로확장공사 탓에 좁아진 도로 속에서 초보 운전수의 운전은 너무나 힘들다.
“고속도로로 나가야 돼. 고속도로는 어디 있지?”
늘 현진의 차를 얻어 타기만 하다 보니 길을 외워둘 리 만무하다. 때마침 전화벨이 울린다.
하지만 전화를 받을 여유가 없다. 그러다 부산으로 가는 초록 팻말이 보였다. 저리로 가야 된다. 하지만 내가 있는 차선과 정 반대 차선 이였다. 신호는 빨간불, 유턴을 해도 좋을 것. 핸들은 왼쪽으로 두 바퀴 반, 너무 급히 악셀을 받지 말 것. 브레이크는 풍선을 밟듯이 터지지 않게… 호랑이 같은 운전 교육 선생님의 엄한 얼굴과 함께 소리치던 말들이 떠오른다.
빵빵!
뒷 차가 경적을 울렸다. 놀라서 악셀을 밟는다. 고개가 뒤로 젖혀질 만큼 차는 튕겨지듯 앞으로 나아간다! 전신주와 부딪힐 것 같다.
“브, 브레이크!”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아 위기를 모면했지만, 기차처럼 줄지어 선 차들은 이미 내 엉덩이 끝에 와있다.
“안가요?”
뒤차에서 소리를 지른다. 아. 핸들을 한 바퀴만 감았구나, 다시 핸들을 더 감아 돌린다. 차는 니그적 니그적, 조금씩 조금씩 움직인다.
“아 거 아줌마! 운전 못하면 집에서 드라마나 보란 말이야!”
“아! 씨X 이게 뭐하는 짓이야.”
신호가 두 번이나 바뀌고, 도로에 경적소리가 백번은 울렸을 때, 겨우겨우 유턴을 했다. 고속도로에 진입해서 시속 80키로로 달리기 시작 했다.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눈물이 목을 타고 속옷을 적시었다. 1년 치 들어야 할 욕을 한꺼번에 들어버렸다. 험악한 얼굴의 아저씨들이 소리를 지르는 통해 몇 번이고 깜짝깜짝 놀라고, 심장이 두근두근 거린다. “난 운전면허를 따고 거의 운전을 안 해봤는데”라고 말해도 아무도 나의 어려운 점을 알아주려 하지 않는다. 그래, 처음 태어날 때 엉엉 울며 눈물을 흘린 건 분명 이것 때문이었다.
세상엔 나 혼자다.
-2-
차를 몰고 부산 안으로 들어왔지만, 도저히 어디로 가야 우리 집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어
난 결국 차를 길 한복판에 세워두고 택시를 탔다. 가슴이 너무 놀랐는지, 택시기사 아저씨마저도 마음이 놓이지를 않아 타던 택시를 몇 번이나 갈아탔다.
“아가씨 무슨 일 있어요?”
이렇게 물어오는 택시기사들의 눈빛을 보면, 너무 겁이나 타고 갈 엄두가 나질 않는다. 혹시나 모르는 길로 들어서는 것 같으면, 주저 않고 멈추고 택시에서 내렸다. 그렇게 택시를 타고 눈물을 쏟아 부으면서 그리고 가슴을 들썩거리면서 집에 돌아왔다. 집 앞에 아파트 주차장에서도 한참을 헤맨다. 대체 뭘 찾는지, 가방 속에 핸드폰을 찾다가 바지 뒷주머니에 있는 것을 알았다. 핸드폰에는 현진의 전화가 열통 가까이 와있었다. 핸드폰을 떨어뜨렸다가 주워 든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집 앞에서 잠시간 진정을 하고 집 문을 열었다. 문은 열려있었다.
“다혜야! 문을 열고 있으면 어떡해! 여자 혼자 있으면서 도둑이라도 들면 어떡하려고!”
소리치며 들어갔다. 그런데 현관에 남자신발이 있었다. ‘쿠당탕’하는 소리가 나고 급하게 다혜가 나왔다.
“언니 왔어?”
다혜의 얼굴이 빨갛다. 수영씨가 온 모양이다.
“그래, 수영씨 왔어?”
내가 묻자, 다혜는 ‘미안’이라고 말했다.
“같이 사는 사람끼리 지킬게 있다고 했었잖아.”
다혜가 내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조건 중에 있던 말이었다.
“오늘 언니가 올 줄 몰랐지. 눈은 왜 그래?”
화제를 돌리려고 퉁퉁 부은 내 눈을 걸고넘어진다.
“됐어. 수영씨 밥은 먹었데?”
나 역시 화제를 돌리려고 말을 해봤지만, 지금 시간은 깜깜한 한밤중이다. 급하게 수영씨가 나왔다. 멋쩍게 웃으며 인사한다. 모든 게 어색하고 낯설다. 내방에 들어와 한참동안 뭘 할지 두리번거렸다. 정말 최악의 하루였다. 또 팍실 통을 집는다. 병이다. 중독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앙리는?
앙리를 소리쳐 불러본다. 그사이 수영씨는 인사를 하고 급히 밖으로 나간다. 다혜는 모처럼 만의 데이트가 무산되는 것이 불만인지 입을 내밀고 보고 있던 비디오 영화를 보고 있었다.
“앙리는?”
다혜에게 물었다. 화장실에도 거실에도 방 구석구석 어디를 찾아봐도 앙리는 없었다.
“앙리 어딨냐고!”
결국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쳤다.
다혜는 내목소리에 주눅이 들었는지, 보던 TV를 껐다.
“자꾸 시끄럽게 굴잖아.”
다혜의 말을 듣자 번뜩이며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바로 방밖 베란다.
“앙리!”
문을 열자 앙리는 온몸을 웅크린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비명 같은 목소리를 조금씩 내면서 앙리는 추위에 떨고 있었다. 급히 방안으로 데리고 와서 이불로 몸을 감싸주었다. 보일러 온도를 최대한 높였다. 신경질이 머리끝까지 치솟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뭘!”
다혜는 지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난 정말 화가나 미칠 것 같았다.
“지금이 몇신 줄이나 알아? 따뜻한 계절도 아니고 아무리 감기 안 걸리는 개라고 해도 이건 좀 심하잖아. 쟤 가슴속에도 심장은 있단 말이야!”
소리쳐 보았지만, 다혜는 지지 않고 달려들었다.
“개 개 개. 그놈의 개! 아우 죽겠어 정말. 원래 밖에서 사는 짐승 밖에 좀 내 놓았다고 나한테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그리고 수영이한테 인사라도 좀 해주지 무안해 져서 갔잖아!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그렇게 잘못했어!?”
다혜가 내게 화를 내자 눈앞이 흐려졌다. 다혜도 눈이 빨개져서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난 내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갔다. 못이 있었다면 내 방문에 수십 개의 못질을 해놓았을 지도 모른다. 수영씨에게 인사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분명 눈짓을 주었단 말이다. 내가 나이가 한참 많은데 왜 내가 먼저 인사를 해야 하지? 앙리의 몸에 손을 갖다 대었다. 방안은 꽤 따뜻해졌지만 앙리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난 소리 내어 운다. 가엾은 생명의 고통이 너무나 안쓰럽다. 왜 이렇게 몸을 떨까? 더 이상 춥지도 않을 텐데, 혹시나….
당장에 동물병원에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새벽 2시, 동물병원이 사람들처럼 응급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개를 안고 응급실로 달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침이 되면 일찍부터 일어나 앙리를 데리고 병원에 가야한다. 그리고 그러기위해서, 난 잠을 자야만 한다. 팍실 네 알을 집어 입에 털어 넣는다.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내 침대위에 앙리를 꼭 껴안고 잠이 들었다. 앙리의 이 작은 떨림이 멈추기를… 그날 밤에, 난 세상이 있을 만큼의 양을 머릿속으로 세어보았다.
밤에 잠을 자다 깨었다. 또 안 좋은 꿈을 꾸었는지 눈물로 베개가 범벅이 되어버렸다. 변함없는 하루하루가 다시 반복 될까 생각에 잠긴다. 그런데 순간, 심장이 멎을 뻔 했다. 앙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앙리를 다시 한 번 껴안아 보았다. 아무리 세게 껴안아도 앙리는 숨이 빠진 인형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제발 아니기를… 기도하며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다시 한 번 잠을 잔다.
아침, 꿈이기를 간절히 기도 했건만, 앙리는 저 세상으로 갔다. 힘껏 껴안아서 내 심장의 울림이 불꽃이 되어 앙리의 심장에 다시 한 번 생명의 불을 붙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앙리는 끝내 되살아나지 않았다. 사람으로 치면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 탓을 해야 할까. 갑작스레 추운 곳으로 환경이 변한 탓을 해야 할까. 끝내 앙리는 죽었다. 새끼 개를 사는 것보다 훈련이 잘된 개를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나이가 있는 개를 산 게 잘못이었을까?
다혜는 깜짝 놀라는 척 하는 연기를 하며 죽은 시체를 보았다. 쭉 늘어진 문어처럼 바닥에 달싹 붙어서 꼼짝도 않고 있는 걸 보고 다혜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렸다. 다혜에게 따져버릴까 생각도 했다.
“어떡해?”
다혜가 묻는다.
“묻어야 하나?”
손가락을 깨물고 말하는 다혜의 말이 어찌나 매정하게 들릴까? 마치 엎질러진 컵라면을 보는 시선이다.
“그냥 이대로 두고 싶어.”
다혜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엔 아침밥도 없이 다혜는 회사에 나갔다. 나는 하루 종일 죽은 앙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술을 좋아하지 않지만 술을 마셔야 정신이 들것 같다. 이민 간 엄마가 보낸 이름도 모르는 양주를 병째 한 모금 들이킨다. 쎼한 열기가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온다. 두 모금 째 마시고는 관두었다.
이 허탈한 기분.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그나마 내말을 제일 잘 알아주었는데 이렇게 가다니… 앙리의 발바닥을 만진다.
드디어 우울증이 도지고 마는 걸까? 매일같이 약을 먹었다. 먹을 때마다 약은 그 양이 늘고, 약을 복용하는 횟수로 늘어났다. 급기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약을 털어 넣는다.
“대체 뭐가 문제야.”
현진이 내게 물었다. 잃어버린 자동차 키 문제로 대판 싸우고 난 뒤였다.
“아무것도 문제없어.”
애써 눈을 피하며 말한다.
“그럼 왜 피하는데?”
현진이 얼굴을 들이밀고 말한다. 입술을 갖다 맞추려 든다. 난 피한다.
“이게 아무문제 없는 거야?”
현진이 약간 화를 내며 말했다. 무섭다.
“원래 이맘 때 되면 나 이렇잖아. 좀 기다려 줘. 마음이 안정이 안 돼.”
현진은 내 말에 긴 한숨을 푹 내쉬며, 우리 집 앞에 나를 데려다 주고 갔다. 밖은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당분간, 연락 하지 않을 게. 그리고 여행 좀 다녀오려고, 같이 가자고 말해봐야 갔다가 또 혼자 가버릴 것 같으니, 혼자 다녀 올 거야.”
현진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마치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이 가을의 비가 날 축축하게 젖게 만들고 다시 우울하게 만든다. 풀잎도 새싹도 기다리지 않는,
이 가을의 비.
집에 돌아와 보니, 앙리의 시체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다혜가 남긴 한 장의 쪽지가 있었다.
<당분간 수영네 집에서 신세 좀 지려고, 집에선 숨을 못 쉬겠거든. 미안 해 언니. 앙리 그렇게 된 건 분명 잘못했어. 앙리는 아파트 입구 화단에 수영이랑 같이 가서 묻어줬어. 작게 팻말에 앙리라고 써놓았어. 며칠 있다가 올 거 같아. 기다리지 마.>
그렇다. 모든 것이 그렇듯 나를 떠난다. 세상에 태어나 힘껏 무언가를 움켜쥐려 주먹 쥔 두 손은 서서히 펴지는 것이다.
바다. 바다가 보고 싶다.
얼른 베란다로 달려가 창밖을 본다. 흐린 날씨 탓에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앙리. 앙리가 보고 싶다.
슬리퍼와 우산하나를 챙겨들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앙리를 처음 데리고 산책을 하던 기억이 난다. 싸구려 소시지를 제일 좋아했다. 내가 타고 올라온 뒤로 아무도 타지 않은 엘리베이터가 날 기다리고 있었고, 1층으로 가서 입구 화단에 뛰어 들어간다.
<앙리.>
왜 이렇게 서글플까. 앙리가 묻힌 곳은 봉분도 없이 평평했다. 그리고 사람의 발자국이 있다. 손으로 파서 꺼내주고 싶었다. 비닐 속에서 숨도 못 쉬고 있진 않을까? 보고 싶은데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개는 왜 사람보다 오래 못사는 거야. 개는 왜 말도 못하는 거야. 이왕 친구가 되어줄 거였으면 끝까지 같이 함께 했으면 좋았잖아. 서글프다. 가을비가 내 눈을 타고 흐른다.
다혜, 다혜가 보고 싶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다. 나쁜 지지배.
엄마, 엄마가 보고 싶어.
이민 간 엄마는 내 전화를 받을까?
받지 않는다.
돌아가신 아빠가 보고 싶다. 어릴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보고 싶다. 현진이도, 예전에 사귀었던 남자친구도 보고 싶다. 아 슬프다. 이렇게, 내가 억지로 붙잡아 두었던 내 친구들도 이젠 나를 버리고 떠난다.
비를 맞으며 온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잠옷차림에 가디 건 하나 걸치고, 들고 나온 우산은 내팽겨 쳐버리고, 빗물이 고인 웅덩이 속을 첨벙거리며 걷는다. 분홍색 슬리퍼에는 화단에 들어가면서 묻어 나온 흙 탓에 걸을 때마다 흙이 조금씩 떨어져 바닥에 내 발자국을 만들어 놓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온통 비를 맞아본다. 쌩쌩 달리고 지나가던 차들이 내게 또 구정물을 퍼붓는다.
무슨 일 있어요? 왜 울어요?
이렇게 물어오는 이 하나 없다니… 난 대체 뭐하며 살았나? 전화가 울리지만 다 필요 없다.
이미 늦었다. 이미 늦었어. 이미 난 와버렸다고 이렇게 온통 비를 다 맞았는데 이제 와서 내게 전화한들 무슨 소용이야. 다 필요 없어. 난 혼자야. 난 아무도 없어. 내 마음 알아주는 사람 한명도 없어. 나 같은 애는 태어나질 말았어야 해. 나는 죽어야만 해.
30분은 걸은 것 같다. 비도 그쳤다. 이젠 나대신 울어줄 하늘도 없어졌다. 이대로, 끝장을 내버리는 건 어떨까? 앙리도 그렇게 되었고 다혜도 없고, 현진이와의 결혼도 내키지 않는다. 모든 게 고민 투성이다.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 도대체가 내가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도 없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 없이는 못사는 깊은 애인이 있지도 않다. 그래, 끝장을 보자. 고속도로로 가서 도로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거다. 가서 온몸의 피를 바닥에 내뿜을 테다.
툭.
갈색으로 뒤덮인 무언가에 부딪혔다. 눈물을 사방으로 뿌리면서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비틀 걷다가, 이젠 눈까지 잘못된 걸까? 갈색이다. 털이다. 갈색 털로 뒤덮인 동물하고 부딪힌 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보았다. 가슴에는 피켓이 보였다.
<FREE HUGS>
“안녕하세요?”
고개를 더 들어 얼굴을 쳐다본다. 개구리같이 생긴 사람이 날 내려다보고 있다.
“아.”
입이 벌어지면서 자연스레 소리가 나왔다. 뉴스나 TV에서 보던 프리허그 운동하는 사람이구나.
“아. 이런 날씨의 만남에 딱 걸 맞는 인사말이군요. 저도 따라해 보겠습니다.”
남자는 말하더니 입을 크게 벌렸다.
“아.”
남자의 벌어진 입에서 다 썩어 가는 이빨 몇 개가 보였다.
“아….”
난 당황하고 말았다.
“아….”
키는 180은 족히 넘는 키에 몸엔 갈색 털로 뒤덮인 옷을 입고 머리에는 곰 인형 탈을 쓰고 있는 이 남자. 곰 인형에 커다랗고 검은 두 눈과 물기 가득한 코. 그 아래 커다랗게 벌어진 입사이로 개구리 같은 커다란 눈과 작은 코, 그리고 쫙 벌어진 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두꺼운 가죽옷으로도 가릴 수 없는 튀어나온 배를 피켓으로 가리고 있다. 그의 눈에게 난 어떻게 비칠지… 눈은 퉁퉁 부어서 비에 다 젖어 가지고는 발에는 흙을 잔뜩 뭍은 채로 도로가를 걷고 있는데….
“오늘은 비가 예고도 없이 오더군요. 프리 허그 운동 하려고 나왔는데 비가 오더군요. 곰 인형 옷을 입고 우산 쓰고 집에 갈수도 없고,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그놈의 지갑을 놔두고 왔더군요. 이 옷에는 주머니가 없거든요. 그래서 전 이렇게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만….”
남자는 머리를 긁으며 말한다. 우습게도 온몸이 갈색털인데 손은 하얗게 맨 손이다. 까만 가죽장갑이라도 끼지. 디테일이 떨어지지 않는가.
“아. 네.”
뭐라고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아 네. 그런데 죄송하지만 부탁하나 드려도 될까요?”
난 대답대신 눈을 크게 뜨고 그 남자 얼굴을 쳐다보았다.
“프리 허그입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남자는 날 안았다. 온몸이 비에 젖은 나를 안아주었다. 그의 가슴팍에 있는 FREE HUGS라는 문장이 내 가슴 안까지 파고 들어왔다. 그의 온기가 느껴져 왔다. 무의식적으로 팔이 그의 등으로 향한다.
“프리 허그는 좋은 운동이에요. 나를 안아주고, 그리고 이웃과 가족을 안아주는 좋은 운동이지요.”
남자는 한동안 나를 안고 있다가 말했다.
“아 네. 좋은 운동이군요.”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물기 탓에 옷이 배에 탈싹 붙어 찝찝하지만 괜찮다.
“그런데 죄송한데 차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남자가 머리를 긁는다. 곰 인형의 머리를 긁는다고 자기 머리가 시원해지는지 궁금하다. 돈이 있을까? 아 마침 돈을 들고 있다.
“여기”
만원자리 한 장을 꺼내려는데 지갑에서 얼른 천원자리 지폐 한 장을 꺼내간다.
“이거면 됩니다. 역시 지혜씨는 착한 사람이네요.”
곰 인형이 다시 나를 안는다. 진짜 인형이 날 안는 기분이다. 그런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아 이름은 지갑을 여실 때 슬쩍 봤어요. 죄송해요. 하지만 실물이 훨씬 예쁘군요.”
대단한 눈썰미다.
“전 늘 사람을 관찰하는 습관이 있지요.”
남자는 내 생각을 읽는 듯이 말했다. 조금씩 난 그가 신비로워 보였다. 그가, 내 이 허무한 마음을 알아줄까?
“사람은 누구나 외로움을 가지고 태어나요. 남자건 여자건 할아버지건 어린 아이건 다 마찬가지지요. 봐요. 아기도 태어날 때 웃는 것보다 먼저 엉엉 울며 태어나잖아요. 엄마랑 함께 있었는데 이렇게 서로 따로 떨어져 버리니 너무 외로운 거지요.”
남자의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감탄했다.
“와.”
입이 벌어지며 자연스레 소리가 나왔다.
“와.”
남자는 다시 내말투를 흉내 낸다.
“전 프리 허그 운동가이면서 사회 봉사자에요. 동남아건 아메리카건 유럽이건 안 가본 데가 없이 세계를 돌며 사회봉사를 해요. 물론 약간의 수입도 있고요.”
남자는 내가 별 마디를 안 해도 혼자 떠들어 댔다.
“전 말하는 걸 좋아해요. 대화라는 건 꼭 서로가 말을 해야만 되는 건 아니에요. 한사람이 말하고 한사람이 그 말을 잘 들어주는 것 역시 대화지요. 세상에 모든 문제들은 바로 이 대화를 하지 못해서 나오는 거랍니다.”
남자는 말을 잘했다. 생각도 깊어 보였다.
“전 또한 심리치료사이기도 해요. 정신질환에 대한 얄팍한 지식이 있고 특히 우울증을 잘 고쳐주지요. 물론 전문적으로 의료 허가를 받은 건 아니고, 사회봉사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몸에 익힌 것들이에요.”
우울증. 난 우울증 때문에 이렇게 비를 맞고 울고 있었어요.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여기.”
남자는 자기 연락처가 적인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지요. 하지만 외로움을 벗어나는 건 의외로 쉽답니다. 귀여운 아가씨. 절 불러주세요. 언제든 당신에게 달려가겠습니다.”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머리에 쓴 곰의 탈이 무거운지 벗어서 한손으로 들고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 올리며 걸었다. 뭔가 신비로운 동화책을 읽은 듯한, 내가 늘 만나고 싶어 했던 어린왕자의 사촌 형정도 되는 사람처럼, 그는 나에게 왔다가 사라졌다.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뒤돌아서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은인.
어느새 내 얼굴은 웃고 있다. 곰 인형 탈을 허리춤에 낀 채, 버스정류장에 비를 맞고 서있는 걸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이렇게 웃어본 게 몇 년 만인가? 얼굴에 팔자주름이 더 짙게 파고들어도 상관없다. 고인 물에 비친 내 웃는 얼굴에 보인다. 곰 인형 같이 불룩 튀오나온 그의 배가 생각난다. 가슴에는 꼭 앙리나 하면 어울릴 것 같은 피켓이 있었지. 그리고 그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
귀여운 아가씨.
나이 31 노처녀에게 귀엽다니, 이거 너무 띄어주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하지만 상관없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젖은 옷을 홀라당 벗어버리고 샤워를 해야겠다. 내친김에 방청소도 해야지. 앙리의 무덤가에 울타리도 쳐야겠다.
달리듯 뛰기 시작했다. 뛰어가서 말 그대로 옷을 거실에다 홀라당 벗어버리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어젯밤부터 틀어놓은 보일러 탓에 온수가 펑펑 쏟아져 나온다. 곰 인형 탈을 쓴 사람이 내게 말을 걸다니, 이거 너무 우스운 일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우습다. 욕조 속에서 아무렇게 대충 씻었다. 머리도 대충감고 욕조 속에 잠수도 해본다. 다 쓴 샴푸통을 물위에 띄우고 아이들같이 물장구도 쳐보았다. 정말로 근 1년 만에 가장 즐거운 하루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는 희망이라는 새로운 피가 심장 안에서 대동맥을 타고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벨이 울렸다.
다혜다. 그 애가 돌아온 것이리라. 그 애는 나처럼 마음이 약하니까.
“띵동 띵동.”
“나가요. 다혜야?”
몸을 대충 닦고 맨몸으로 문을 연다.
“아.”
열려진 문 틈새 사이로 그 곰 인형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으악.”
다시 문을 닫았다.
“으악.”
문밖에서 그 남자의 소리가 났다. 하지만 난 가슴이 내려앉는다. 어떻게 된 거지.
“전 아무것도 보지 못 하였습니다?”
남자가 중얼거리고 있다. 저 남자. 이상하다. 분명 나를 처음 봤는데 어떻게 내 집을 알았지? 미행한 건가? 뒤에는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미행 했다고 해도 분명 엘리베이터 안엔 나 혼자였어. 그렇다면 내가 몇 층에서 내렸는지 본건가?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많은 세대가구가 있는데 우리 집을 찾는 건 불가능해. 그렇다면 뭐야. 이 전부터 날 알고 있던 사람이야?
“저기 아가씨.”
“뭐야 당신. 우리 집 어떻게 알았어?”
난 경계조로 말했다. 수건으로 몸을 닦으면서 집에 문은 모두 잠근다. 1중 2중 3중으로 문을 잠근다.
“아. 아까 신분증에 주소까지 봐버렸네요. 죄송해요. 외우려고 한건 아닌데 외워졌거든요.”
말도 안 돼. 변명이야.
“정체가 뭐야? 내게 뭘 원하는 거야!”
“아. 전 사회봉사자이면서 거리 프리 허그 운동가에요. 심리치료사이기도 하구요. 아까 말씀드렸습니다만.” “시끄러워! 변명 하지 마. 스토커지. 변태지? 그 곰 인형 탈을 벗기면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거지!”
이런 경험이 한 번도 없었지만, 이런 때일수록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
“지혜씨. 아니에요. 오해라고요. 전 단지 버스를 어디서 타야할지 물어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이 동네는 처음이거든요.”
그가 말한다. 잠시간 정적이 흐른다. 정말로 물어보는 거라면, 대답해주면 그만이다.
“어디 사시는데요?”
옷을 찾아 주섬주섬 입으면서 말했다. 너무 놀라서 몸이 다 떨린다.
“해운대요. 사파이어호텔에서 신세를 지고 있어요. 한국에 온지 2달 되었지요. 20일 정도 휴식하고 다시 중국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거기서 2달 정도 복지시설을 건축하는 자원봉사를….”
“그만! 거기까지, 여기서 해운대에 직행하는 버스는 없고, 지하철을 타세요. 지하철을 타면1시간 정도 가면 갈수 있으니까요.”
제발 이 무서운 녀석이 사라져 주기를….
“지하철 비는 없는데요. 지혜씨 죄송한데….”
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창문으로 만원자리 한 장을 던졌다.
“아.”
그 남자는 내 말투에 맛을 들인 모양이다.
“고마워요. 지혜씨.”
“됐죠? 이제 가주세요. 여긴 여자 혼자 사는 집이거든요. 씻다가 대충 나온 거라 마저….”
아차. 여자혼자라는 말을 왜 했을까? 긴장에 온 몸에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다. 제발… 제발
그냥 가.
남자의 발소리가 들린다. 이제 갈 생각인가 보다.
“지혜씨. 저 너무 추운데 차 한잔만 주시면 안 되요?”
남자는 끈질기다.
“제발 꺼져! 더 이상 날 무섭게 하지 말란 말이야! 신고 할 거야!”
욕을 해버리고 말았다.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었는데… 밖은 조용해진다.
비눗기가 머리카락에 그대로 있다. 마저 헹궈 내야만 한다. 목욕탕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 얼른 씻고 자야지. 무서워 죽겠다. 근데 하필이면 목욕탕에 창문이 있다. 밖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복도다. 분명, 이 집을 설계한 녀석은 변태일 것이리라, 높은 곳에 있고 쇠창살이 쳐져 있긴 하지만, 창문사이로 손을 넣어 카메라 같은걸 넣어 사진을 찍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협박 같은 걸 할지도… 물론 그런 협박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테지만…
순간 아니나 다를까 창문이 드르륵 거리며 열렸다. 손이 닿지도 않을 만큼 높은 위치인데
그 남자는 키가 크다.
“소리 지를 거야!”
손이 불쑥 들어온다. 갈색 털 사이에 하얀 손이다. 순간 웃을 뻔했다. 남자의 손에는 신분증이 들려져 있다.
“조 희선이라고 합니다. 이건 신분증이고 이건 사회봉사활동 인증카드에요. KOICA에서 발급한 거거든요. 이래 뵈도 꽤 명성 있는 사회 봉사자에요. 인터넷에 제 이름 치면 나온다고요.”
조금 웃기기도 했다. 나쁜 남자인 것 같지는 않다. 가까이 가서 그 남자의 사진을 본다. 포토샵을 너무 많이 한 게 아닌가. 개구리가 어떻게 이런 얼굴이 돼.
“윽.”
남자는 힘이 빠졌는지 손에 든 신분증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난 바닥에 떨어진 신분증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인증카드인가 뭔가는 꽤 볼만했다. 그 남자의 기록이 있었다.
대단했다. 7년에 걸쳐 40개국이 넘는 곳에 사회봉사를 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태평양아시아 청소년 위원회, KOICA, 세계청소년봉사단, KOPION. 가입되어있는 사회봉사단체도 10개가 넘는다. 나이는 27살. 이 남자 대체 무슨 목적에서 이렇게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사회봉사를 한 걸까?
“돌려주세요.”
창문 안으로 들어온 손이 문어발처럼 꼼지락 거린다. 얼른 막대기 같은 걸 집어다가 두더지를 잡듯이 손을 때린다.
“더 이상 들어오면 진짜 신고할 거예요!”
그가 문틈사이로 물렁물렁 한 얼굴을 집어넣을 것만 같다.
“네.”
남자는 말하며 문어발 같은 손을 뺀다. 말은 잘 듣는 타입이었다. 몸을 닦고 머리를 드라이 한다. 남자에게는 무슨 말이라도 하라고 시켰다. 어디 있는지 위치를 알아야 한다는 핑계였다. 남자는 정말 말하는 것이 직업인 것처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유럽에도 의외로 못사는 나라들이 많다는 이야기. 사회봉사를 하다보면 예쁜 여자들과 미팅을 하기도 한다는 이야기. 한국말은 외국에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고, 고려인 3세들도 외국에 많이 흩어져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동남아 지역에는 항상 물이 문제죠. 오염된 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우물을 팔고 상수도를 설치하는 일이에요. 마을 중앙에 물이 나오는 샤워시설을 설치해 두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지요. 하하하.”
남자는 중얼거리면서 말을 잘했다. 남자는 정말 추운지 목소리가 떨렸다. 난 어느새 옷을 다 갈아입고 드라이도 끝마쳤다. 얼굴에 에센스 크림을 바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얼굴이 굉장히 낯익은 기억이 나서 돌아온 겁니다. 혹시 외국에 나가신 적 없으세요? 분명히 한번 마주쳤던 것 같은데..”
그가 말했다. 하지만 난 외국은커녕 제주도 한번 가본 적이 없다. 배도 비행기도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다.
“거짓말! 난 외국한번 나간 적이 없다고요!”
내가 그에게 다시 따져들었다.
“아니 분명해요. 지혜씨가 나에게 뭔가 사례를 해주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런 말 할 거면 가세요! 그런 말 안 통하니까요.”
내가 그의 말에 대꾸하자 그는 잠시간 조용해졌다. 난 현관문에 기대고 섰다. 낯선 사람이지만 대화를 나눈 게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남자는 나를 따라 현관문에다 대고 중얼 거렸다.
“아가씨. 창밖을 보세요. 비는 정말 장마가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억수같이 내리고 있어요. 이런 비는 상하의 나라 필리핀에서도 한창 비가 내릴 때의 날씨죠.”
거실로 가서 밖을 보았다. 정말 밖은 비가 쏟아져 내려왔다. 가을에 웬 비가 이렇게 내리는지 모르겠다. 이런 비는 풀들도 싫어하는 비인데 말이다.
밖에 있는 그가 어디에 갇혀 있는 듯이, 그의 목소리는 애처롭다. 들여 주고 싶기도 하다. 저 남자와 하루 종일 떠들어 대고 싶다. 하지만 난 여자. 너는 남자. 문을 열어주었다간 짐승처럼 달려들지도 모른다.
딸깍.
밖을 볼 수 있게 문을 걸어두는 장치를 빼고 문을 다 열었다. 빼꼼 문을 열어본다.
“하하!”
남자는 소리치며 거세게 문을 잡아당겼다.
쿵.
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 환희에 찬 얼굴에서 경직 되어버린 그의 얼굴이 보인다.
“이거 봐. 날 덮치려고 했지?”
난 그렇게 호락호락 한 남자가 아니다. 하지만 이상하다. 진짜 강도일 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난 이렇게 즐거울까?
“아니에요. 지혜씨! 날 아직도 못 믿는군요! 억울해요. 이렇게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프리허그 피켓까지 목에건 사람이 어떻게 나쁜 짓을 하겠어요!”
남자는 억울함에 눈물을 글썽인다. 진짜 도둑이래도 속아줄 만하다. 그만큼 그의 연기는 일품이다.
“알았어요. 그런 표정 그만 지어요. 당신도 남자잖아? 왜 그렇게 유치하게 이래?”
남자는 잠시 안심한 표정을 짓더니 끝내 뜻을 굽히지 않고 손을 집어넣으려고 한다. 손을 집어넣어봐야 문이 열리진 않지만.. 하지만 겁이 나서 문을 잡아당긴다.
“아악!”
남자는 문틈에 손이 끼고 만다.
“손 안 뺄래?”
그의 손이 다시 문어발처럼 꼼지락 거린다.
“아! 아! 알았어요. 놔주세요!”
손이 빠지고 난 문을 닫았다. 재밌다.
“나쁜 사람이 아닌 건 알겠는데, 대체 나에게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거예요?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거예요? 안됐네요. 나 남자친구 있는 여자거든요. 관심도 없고요. 그러니 이제 가주세요.”
크게 소리쳐서 말하니 방안에 쩌렁쩌렁 울린다.
“나도 여자 친구 많아요. 하지만 아가씨는 좀 다르네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다시 문을 열었다. 남자가 얼굴을 들이 미려 한다. 문을 닫는다. 이번엔 얼굴이 낀다.
“아악!”
다시 문을 연다. 조금 미안했다. 계속 남자가 문어인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다.
“알았어요. 하지만 난 여자에요. 문을 열어주기엔 너무나도 연약하죠.”
나 역시 그와 대화를 하고 싶긴 했다.
“난 보기보다 연약한 남자에요.”
남자는 곰 가죽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안엔 반팔 의 티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거 봐요. 힘 하나 없게 생겼죠?”
남자가 하얀 팔을 들어 보였다. 그러면서 그가 짐케리처럼 비실비실 뼈대 없는 팔을 흉내 낸다. 힘이 없어 보이긴 했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골격자체가 다르다.
“어! 저거 나한테 주세요.”
남자가 손을 문 안으로 넣어 무언가를 가리켰다. 난 문을 닫으려다 가리킨 것을 본다.
개 목줄이다. 앙리 목에 하던 목줄이다.
“저걸로 내 목에 묶어서 걸어놓으세요. 그럼 꼼짝도 못할 거 아니에요?”
좋은 생각이다. 재밌어 보이기도 한다.
“좋아요.”
개 목줄을 건네니 스스로 목에 목줄을 했다. 진짜 생긴 게 개 랑도 조금 닮아서 너무 잘 어울린다.
“됐죠?”
남자가 처량한 표정으로 묻는다. 정말 한 마리의 개 같다. 난 문을 닫고 잠금 장치를 열었다.
-3-
“휴.”
남자는 갈색 가죽옷을 질질 끌고 또 한손에는 곰 인형 탈을 들고 들어왔다. 다행스레 남자는 돌변하지 않았다.
“이거 어떻게 하지요? 축축한데?”
“현관에 놔두고 들어와요.”
난 따뜻하게 말했다. 커피를 끓여 줄 생각이었다.
“거기 얌전히 앉아있어요.”
개 목줄은 현관 입구에 걸어두었다. 생각해보니, 남자는 개가 아니다. 목줄 따위 손으로 풀면 그만이다. 묶은 것도 그 자신이 아니었던가?
“안되겠어요. 손 이리 내요.”
다른 끈을 가지고 왔다. 손을 묶을 생각에서다.
“왜요. 여기까지 들어왔는데 이제 와서 또 의심하는 거예요?”
남자가 또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다. 돌아가신 아빠 말이 남자는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 말이 맞는 게, 늘 함께 있어주기로 해놓고 아빠는 먼저 가버렸다. 그의 손을 꽁꽁 묶었다. 이제 스스로 목줄을 풀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안하네요. 미스터 조.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마음의 경계를 풀 수 없을 거 같아서 그랬어요.”
내 말에 남자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팔팔 끓인 물로 커피를 탄다. 인스턴트커피이긴 하지만 비오는 날에는 뭘 먹어도 맛있다.
“전 에스프레소로 늘리는 것은….”
남자는 당당하게 말한다. 걷어차려다 참았다.
“아 죄송해요. 외국에 살다보니 늘 익숙해져서….”
내 눈치를 보더니 사과한다.
“그래, 커피는 이것뿐이니 이거라도 마시고 몸을 좀 녹여요.”
따뜻한 커피만큼 따뜻하게 말했다.
“아 네. 고마워요. 지혜씨.”
남자는 말하면서도 몸을 달달 떨었다. 꼭 죽기전날의 앙리 같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날 마치 비 맞는 개처럼 보는군요.”
“하하하.”
남자는 웃기게 하는 재주가 있다.
“네. 예전에 기르던 개가 있었어요. 앙리라는 이름이었어요. 사실 그 개가 어제 새벽에 죽었어요. 오늘 묻어주었죠.”
남자에게 말했다. 의외로 아무렇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마음 많이 아팠겠네요.”
남자는 영화 슈렉에 나오는 고양이의 눈이 되어 울상이 된다.
“제발 그 가식적인 표정 그만 두지 못해요?”
“아 네. 그러죠.”
남자는 금새 진지한 표정이 된다.
“그래,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보세요.”
어떤 이야기든 들어주겠다는 표정으로 그 남자의 눈을 쳐다보았다.
“네. 사실 저는 우울증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울증 치료에 일가견이 있지요. 말하자면 전 당신에게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온 거랍니다.”
남자가 말한다. 우울증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최근 연구 결과에 우울증의 환자의 70퍼센트는 여성이고, 자살하는 사람들 중에서 30프로는 이 우울증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죠. 세계적으로 그 숫자만 해도 어마어마하고 21세기가 되면서 우울증은 마음의 상태가 아닌 확실한 정신적 질환으로 인정이 되어있습니다. 최근에는 우울증으로 인해 살인을 저지른 독일의 한 여성을 무죄로 판결내린 사례도 있고요.”
난 커피를 마시며 남자의 설명을 들었다.
“우울증을 실로 무서운 질병이죠. 자살하는 사람들이 순간적인 감정으로 죽음을 택한 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틀린 생각입니다. 우울증은 결코 우울해지는 병을 의미하는 게 아니죠. 오히려 무감각해지고 의욕이 사라지는 게 병의 특성입니다. 모든 사물들이 거짓된 것처럼 의미가 없어 보이지요. 화장실에 들어가서 2시간이고 앉아있는 사람들은 보통 변비라고 알기 쉽지만, 사실 그건 우울증을 동반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대인관계를 기피하게 되고 모든 것들이 영화처럼 사람들이 각본에 짜인 연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남자의 말은 내가 경험하고 있는 말처럼 일리가 있었지만 듣기 지루했다.
“그래서요. 결론이 뭔데요?”
조금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한다.
“네. 제가 볼 때 당신은 우울증입니다. 오늘부터 당신의 병을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비용은 주시고 싶으신 대로 주시면 되요. 사회봉사자라 사회봉사차원에서 하고 있는 거거든요.”이 남자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이해가 안가십니까?”
남자가 되물어 온다. 당황스럽다. 사기꾼이 아닐까?
“다시 한 번 말해드리겠습니다. 공감이 간다면 공감이 간다고 말해주세요. 난 혼자다. 자신의 주위엔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 내게 전화한통 걸어주는 이도 아무도 없다. 내 생일을 챙겨주는 이도 아무도 없다. 내가 울어도 울지 말라고 해줄 사람도 없다. 내 기쁨을 나눠줄 친구도 없다.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
그 남자는 마치 내 마음을 꿰뚫고 있는 듯이 말했다. 틀림없었다. 내겐 아무도 없다.
난 혼자다. 난 아무도 없어. 앙리도 다혜도 없고 현진이는 내 마음을 알아주지도 못해. 엄마는 날 버리고 가버리고, 늘 건강하게 다시 퇴원할 거라고 했던 아빠도 저세상으로 가버렸는걸…
“그만.”
듣고 있으니 다시 우울해 지려고 한다.
“난 아무도 없어. 난 이렇게 예쁜데. 왜 날 사랑해주는 이 하나 없을까?”
남자는 내가 말하는 듯이 내 말투를 따라하며 말한다. 연기를 한다. 우울해진다.
“왜 내 마음을 안 알아주고 쟤 편만 드는 거야? 난 잘못한 게 없어. 난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왜 날 버리고 가는 거야?”
마치 어린 여자아이를 흉내라도 내듯 그가 우울한 표정과 말을 한다.
“그만 좀 해요.”
남자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웠다. 발가벗고 있는 것처럼 부끄러웠다.
“그만하고 싶다면 인정하세요. 당신이 외롭다는 사실을 말이죠. 우울증이라고 변명을 해봐도 외롭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남자친구가 있건 100만명의 친구가 있건 그건 문제가 안 돼요. 정작 중요한건 당신은 외롭다는 사실입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고 눈앞에 보이는 상대에게 도움을 청하세요. 늘 거울을 보며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나날을 보내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의 말에 쉽게 상처를 받아 사람들에게 솔직한 이야기한번 못하지는 않으세요? 그래서 말 못하는 짐승들을 껴안고 대화를 하려 하지는 않으십니까?”
남자는 내 모든 걸 알고 있다.
“제발 그만 좀 해요!”
소리 지르고 말았다. 남자의 진한 눈동자가 날 눈물 짖게 만든다.
“그래요. 난 혼자에요. 내 곁엔 아무도 없어요. 앙리도 다혜도 떠나고 말았어요. 도와주세요. 난 너무 외로워요. 우울증이 찾아오면 난 다시 꼼짝도 못하고 이렇게 죽은 채로 있어야만 하죠. 날 도와주세요. 미스터 조.”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이 남자에게 벌써 두 번째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 추웠다. 공기가 차가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너무 차가웠다. 내 마음속 깊은 곳부터 누군가가 나를 가득 채워 줬으면….
“자, 일단은 직업은 직업인 지라.”
남자의 따뜻한 음성과 함께 온기가 느껴진다. 남자는 나를 안고 있다.
들린다. 상대방의 심장소리. 안정되고 편안한 소리다. 두 개의 심장소리를 들어본 것이 얼마만인가? 엄마뱃속 이후로 거의 처음이 아니던가?
하지만, 분명 남매지간에 나누는 우정과도 같은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 증거로 그 남자도 나도 잠시간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아. 거리에서 하는 프리 허그 운동과는 조금 다른 것 같긴 하네요.”
남자가 멋쩍어 하면서 말한다.
“좋아요. 인정하겠어요. 도와주세요. 당신 말처럼 내 우울증을 치료해 준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보답해 드리죠.”
그 남자의 품속에서 분명히 느꼈다. 이 남자라면, 나를 치료해 줄 것이라는 사실.
“좋습니다. 치료를 시작하죠.”
남자는 말하면서 커피를 들이켰다.
잠시간의 공백이 있을 때, 난 그 남자와 나와의 관계를 정리해 보았다. 소설을 쓰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나이기에 정리를 하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다. 그 남자는 사회봉사자이면서 프리허그 운동가이다. 40개국이 넘는 곳을 여행하고 낯선 이들을 도와왔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에게 있는 본질적인 어려움을 그는 발견한 것이다. 모든 이들이 나처럼 외로움이나 우울증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사회봉사를 하면서 자연스레 그 사실을 접했다. 그러면서 그는 따듯한 손길과 함께 사람들을 도왔고, 그들 중 몇은 우울증에서 완전히 벗어나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적 질환을 치료하는 슈바이쳐다. 기대해 볼만했다. 투자해 볼만 했다. 그가 나의 이 우울증만 없애준다면, 그에게 내 모든 걸 바쳐도 아깝지 않다.
“자! 치료를 시작해 보죠. 자 첫 단계 입니다.”
희선은 손짓과 몸짓을 하며 말하는 것이 특징이다. 방금도 검지 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말했다.
“외로움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12번과 13번 척추에 스며들어 있는 기생충 같은 녀석이죠.”
희선은 말하면서 내 등을 만졌다. 브레이지어 끈이 있는 부분에서 약간 윗부분이었다.
툭툭.
희선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안 믿어야 할지, 외로움이 척추 뼈 안에 있다니, 말이 안 되긴 하지만 희선이 내 등을 두드려주니 금방 눈물을 흘릴 것 같다.
“울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려 주는 건 바로 이런 원리죠. 등을 때려서 외로움이라는 녀석을 자극하는 겁니다. 그러면 좀 견딜 만해지죠. 하하하 물론 근거 있는 말은 아니니 너무 믿으시지 마세요.”
의심스러웠지만 남자가 등을 만져주니 따뜻했다.
“계속적인 스킨 쉽을 하는 건 우울증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연구결과에 나와 있어요. 인터넷 검색 해보시면 아마 확인 하실 수가 있을 겁니다. 자자.”
희선은 내 어께와 목을 마사지 해주었다. 뭐가 뭔지 어리둥절했다.
“지금 무슨 생각하세요?”
남자가 대뜸 물어온다. 무슨 생각하긴. 아무생각도 안하지.
“혹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시진 않으세요?”
희선은 묻는다.
“네.”
내가 대답하자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역시! 내 치료는 획기적이야!”
희선이 소리쳤다.
“들어보세요. 울고 있는 아이의 귓속에 손가락을 넣어주면 울음을 멈추죠. 왜냐고요? 새로운 감각에 울 틈이 없거든요. 스킨쉽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어요. 자! 제 치료의 첫 번째는 바로 스킨쉽입니다. 프리허그 운동역시 이런 역할을 해준다고 하겠어요. 사람에게는 오감이라는 게 있답니다. 미각 촉각 시각 후각 청각. 이렇게 다섯 가지지요. 이런 감각은 나이를 먹을수록 감각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미각은 40대 후반 청각은 60대가 되면 서서히 감퇴되지요. 후각은 본래부터가 사람이 가진 감각 중에 가장 발달되지 않은 감각이고, 시각역시 50대가 되면서 노안이 찾아와 원근감이 사라지게 된답니다.”
남자가 말을 뿌리듯이 내뱉었다. 그 남자의 말이 맞는지 틀린지 생각해볼 겨를이 없다.
“하지만! 80대 노인이라 할지라도 어린아이와 같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있답니다. 뭘까요?”
희선이 마이크를 갖다 대듯 내 입 가까이 댄다. 입술이 손에 닿았다 떨어진다.
“촉각.”
내가 대답했다. 유치하지만 재밌다.
“네 맞습니다!”
희선이 박수를 친다.
“그래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촉각만큼은 예민하답니다. 손에 파리가 앉은 것도 느낄 수 있고 어린 아이의 피부를 만져보아도 그 감각이 여전하지요. 맞습니다. 촉각은 아주 중요한 감각입니다. 그렇기에 이 스킨쉽도 정말 중요한 것이라는 거예요.”
남자가 말하면서 자연스레 내손을 잡아 크게 원을 한번 그렸다. 만일 그가 연애를 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그는 정말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 그렇구나.”
난 고개를 끄덕인다. 유치원생이 된 것처럼 그의 강의는 재밌다. 한순간도 놓칠 수가 없다.
“우울증을 인정하세요. 외로운 사실을 인정하세요. 주위의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고 가급적 스킨쉽을 하세요. 안아달라고 말하고 만져달라고 말하는 거예요.”
희선이 말했다. 하지만 그 부분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지만 스킨쉽으로 우울증을 치료하긴 너무 막연해요. 지나가는 사람을 다짜고짜 안아 볼 수도 없고 모두가 프리허그 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잘 모르는 사람보고 날 만져주세요 라던가. 날 안아 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도 좀 이상스럽잖아요.”
내가 말한다. 그렇지 않은가? 날 안아주세요. 라고 말하는 여자가 얼마나 바보스러운지…
“네! 좋은 지적입니다. 특히 남자들 같은 경우에 날 안아달라고 말했다간 변태로 오인받기 십상이죠. 하지만 우울증이 여자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질병이니 만큼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희선은 대충 넘어가는 게 특기인 모양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뭘 말하는 건지 물어볼 새도 없이, 미스터 조는 말을 이어간다.
“자 우울증은 대부분 비관적인 생각, 비판적인 생각 등을 동반해요. 상대방의 부정적인 면을 자꾸 보게 되고 자기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게 되죠. 자. 그런 비판적인 생각을 하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한 거랍니다. 생각자체를 하지 않는 거예요.”
희선이 말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아무리 아무생각도 안하려고 해도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뭔가가 떠오르잖아요.”
내가 항의하자 희선이 맞장구를 친다.
“네, 그래서 생각을 하지 않도록 노력을 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은 상대방에게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입을 다물고 있지 않고 계속 떠오르는 생각을 입을 통해 배출하는 연습을 해야 해요. 아시겠죠?”
그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생각을 하지 않게 노력을 하되, 생각나는 건 말을 하라는 거지요?”
“그렇지요! 역시 지혜씨 똑똑하군요.”
너무 입에 발린 칭찬이었는데도 기분이 좋아 웃고 말았다.
“그럼 시작!”
희선의 말과 동시에 침묵이 시작됐다. 한창 떠들고 있을 때는 기분이 좋아 들떠 나도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다물고 있고 나도 말을 하지 않으니 우울해 질 것 같았다.
“무슨 생각하고 있죠!”
희선이 내 어께를 덥썩 잡았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묶어둔 팔이 풀어져 있다.
“네?”
“무슨 생각하고 있었잖아요!” 그가 다그쳤다.
“지혜씨는 무슨 생각을 할 때면 왼쪽 아래를 멍하니 보고 있는 습관이 있어요. 그러니 눈동자는 가급적 이리저리 굴려보세요.”
희선이 시킨 대로 난 여기저기 눈을 굴렸다. 생각하지말자. 아무생각도 하지말자. 그러다 문득 화장대 위에 있는 거울에 내 모습이 비친다. 하필 거울에 내가 보일게 뭐람. 그러고 보니 얼굴에는 화장기가 없다. 입술도 맨 입술이다. 너무 못생겼네. 화장실에 가서 대충 입술하고 눈썹만 그릴까….
“무슨 생각해요?”
희선이 묻는다.
“아무 생각도….”
“아니에요. 분명 무슨 생각 했어요. 말하세요. 난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희선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난 너무 못생겼다고 생각했어요.”
겨우 용기 내어 말한다.
“어디가? 말도 안 돼. 나한테 ‘예쁘네요.’하는 말이 듣고 싶어서 한 말이죠?”
희선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천만에요. 난 못생겼어요. 어디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걸요.”
고개를 푹 숙이고 말한다.
“예뻐요. 난 남자니까 내말을 믿으세요. 아까 말한 것처럼 지혜씨는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내 말을 듣고 내말을 따라 외치세요. 난 예쁘다.”
희선의 말에 왠지 기분이 좋다.
“난 예쁘다.”
수줍게 말한다.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다. 하지만 이해는 된다. 내 부정적인 생각을 말하면, 그는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거로구나! 거울을 다시 본다. 분명 못생겼지만, 그래도 아직 피부는 나쁘지 않다. 알아들었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금껏 난 너무 나를 과소평가 했던 거야.
“이해 한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프리허그 운동은 별게 아니에요. 자신을 안아주고 자신을 안아줄 수 있게 되면 가족을 안아주는 겁니다. 가족을 안아주게 되면 밖으로 나가 이웃을 안아주고 낯선 이들을 안아주면 되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기 이전에 자신이 자신을 사랑해야한답니다. 지혜씨 자신감을 가지세요. 당신은 꽤 근사한 사람이에요!”
고마웠다. 나에게 이렇게 따뜻한 말을 해주는 이가 있다니! 잠시였지만 행복했다.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치료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늘 생각하고만 있던 것들을 꺼내어 놓고 서로 대화를 나누니 별일이 아니었다. 앙리가 죽은 것도 다혜 탓을 하기보단 앙리가 많이 약해져 있던 탓이었고 다혜 역시 잘못을 인정하고 앙리를 정성껏 묻어주지 않았던가?
“미스터 조. 내 말을 들어봐요. 내 남자친구와 최근에 싸웠어요. 그런데 그가 혼자 여행을 간다고 해요. 하지만 섭섭해요. 왜 나에게 같이 가자고 말 한마디 없죠? 늘 안 간다고 부정적으로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우린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요. 안 그래요?”
내가 희선에게 말하자 희선은 맞장구를 쳤다.
“그러네요. 남자분이 좀 밴댕이 소갈딱지군요.”
“좀 소심하긴 한 거 같아요. A형이거든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옛날이야기든 최근에 있었던 이야기든 내 인생을 통해 느꼈던 많은 크고 작은 일들을 그에게 말했다. 그는 늘 나의 편에서 그 문제들을 다시 생각하고
해결해 주었다.
“전 1남 2녀에 장녀에요. 밑에 두 동생들 때문에 늘 많은 것을 양보해야 했어요. 여자라는 이유로 설거지나 방 청소 같은 집안일은 늘 나에게 하게하고, 누나라는 이유로 동생들을 보살펴야 했죠. 동생들은 늘 자기들끼리 놀기를 좋아하고 여자인 나와는 놀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난 눈물을 조금씩 흘리고, 또 웃기도 하면서 말한다.
“나도 말 타기도 하고 싶고 야구도 해보고 싶었어요. 같이 공도 차서 골을 넣어보고 싶기도 했고, 남자아이들처럼 절벽위에서 멋지게 다이빙을 해보고 싶었다고요.”
섭섭했던 것들을 떠올리면서 말을 하니 생각보다 많았다.
“옛날에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빈말로 헤어지자고 말했더니 금방에 그러자고 말하더군요. 난 그냥 그 애 마음을 알고 싶었는데, 내말에 너무 쉽게 날 버리더군요. 너무해요. 나에게 고백한 것도 그녀석인데 왜 내가 차여야 하냐고요.”
그때의 기억은 슬픈 기억이었다. 가급적 떠올리고 싶지 않았는데 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왔다.
“여자는 늘 불어나는 체중 때문에 고민을 해야 하죠. 남자처럼 많이 먹고 열심히 활동하면
근육이 붙는 몸이 아니라고요. 조금만 살이 쪄도 금방에 티가 나고 사서 입던 옷도 못 입게 돼버리고 말죠. 억울해요. 나도 먹고 싶은 게 많은데 늘 다이어트에 대한 부담 때문에 끼니를 거를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에요.”
중얼중얼 잘도 나오는 내 불평을 그는 끝까지 들어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그 역시 조금은 지루해 하는 눈치였다.
“좋아요. 살기위해 먹는다고 들 하지만, 사실은 먹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더 많죠. 식욕은
사람이 가진 기본적인 욕구 중에 하나랍니다. 먹는다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일은 없죠. 그래, 먹고 싶은 게 있고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 해야죠. 그 일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라면 그 일은 어떤 것이든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좋은 일이랍니다. 꼭 남을 돕는 일이 좋은 일은 아닌 거죠. 자기 자신을 돕는 것도 분명 좋은 일이에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잖아요. 그 뜻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개구리처럼 생기긴 했지만 피부가 깨끗한 게 언뜻 보면 여자처럼 생기기도 한 것 같아보였다. 저 들창코 코와 쌍꺼풀 없이 커다란 눈만 아니었으면 꽤 괜찮았을 텐데….
“무슨 생각해요?”
그가 대뜸 묻는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그에게 상처 주는 말은 할 수가 없다.
“하고 싶은 게 많아요. 눈으로 뒤덮인 산에 등산을 해보고 싶기도 하고, 계곡에 놀러가서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싶기도 해요. 비오는 바닷가를 가서 크게 넘실대는 파도를 보고도 싶고 나이아가라폭포 같은 곳 위에서 번지점프를 해보고 싶기도 해요!”
난 조금씩 들뜨기 시작했다.
“좋아요. 지혜씨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군요. 잘 들으세요. 부정적인 생각은 입으로 내뱉어서 상대에게 전하고, 상대를 통해 자신의 안 좋은 생각을 바로잡는 습관을 길들이는 연습을 하는 것이 세 번째 라면, 바로 네 번째는 자신의 꺼져버린 욕망이라는 장작에 다시 불을 붙이는 것이 네 번째랍니다. 먹고 싶고 자고 싶고 놀고 싶고 하는 어릴 때의 수많은 욕망들을 생각해보세요. ‘어른이 되면 해야지.’ 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정작 어린이 되고나니 여러 가지 일들과 사회적인 위치로 인해 포기하고 말죠. 돈을 벌면 ‘이걸 사야지 저걸 사야지’하며 돈을 모았는데 돈을 쓰기엔 아까운 거죠. 사람은 그렇게 늙어 간답니다. 죽기 직전에서야 모아온 돈을 어디다 쓸지 고민하다가 자식들은 유산을 가지고 앞 다투는 꼴을 보고, 자기는 사회에 환원을 하고 싶어도 자식을 탓에 그러지 못하고, 끝내 죽는 순간에도 눈치를 보며 생을 마감하게 되죠.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것도 역시 중요하답니다. 지혜씨 다음 단계에요.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뭐죠? 뭘 하고 싶어요?“
희선은 얼굴에 열을 올리며 물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질문이었다. 하고 싶은 게 뭐냐니, 내가 하고 싶은 게 뭐지?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해야 하는 일에 둘러쌓이다 보니 하고 싶은 건 늘 뒷전이었거든요.”
내가 말하자 희선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물었다.
“해야 하는 것? 해야 하는 게 뭐죠? 지혜씨. 당신은 당신의 것이에요. 당신을 위해 있는 것이 당신이죠. 해야 하는 것이라…그럼 다시 물어볼게요. 해야 하는 일이 뭐죠?”
희선이 물어오는 두 번째 질문은 더 어려운 것 같았다. 문득 한 가지가 떠오른다.
“살을 빼야 해요. 다이어트를 해야 하죠.”
내가 희선에게 말했다. 하지만 희선은 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살을 왜 빼야 되는데요?”
“그야, 살이 찌면 보기 흉하니까.. 뚱뚱한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어요.”
웃으며 말했다. 또 지혜씨는 하나도 안 뚱뚱 하다고 내편을 들어줄 것 같았다.
“이상하네요. 지혜씨는 남 눈치 보며 사는 사람 같진 않아보였는데, 살이 찌면 얼마나 쪘다고 그래요. 제가 보기엔 적당하구만, 게다가 뚱뚱하다고 사람들이 싫어 할 거라는 건 역시 지혜씨의 부정적인 생각이에요. 나만해도 마른 여자는 별로거든요. 예전에는 풍만한 여인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었잖아요. 그래서 아름다울 미(美)역시 양이 살이 찐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들 하잖아요. 아마 그 시절에는 너도나도 살을 찌우려고 난리를 쳤겠죠. 물론 그 시대 사람들 중에도 마른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겠죠. 다 연예인들을 보고 따라하려는 여성들의 잘못된 생각에서 나온 거죠.”
희선이 내편을 들어주니 나도 모르게 히죽거리며 웃었다.
“맞아요. 내가 정상이고 연예인 걔네 들이 비정상이지.”
“그래요!”
깔깔거리며 웃는다. 좋다. 생각해보니 해야 할 일 따위는 없다. 공부해야 돼? 일 해야 돼?
자야 돼? 그런 건 없어. 다 내 마음이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건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고, 그 일이란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니까. 맞아.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공부도 소설 쓰는 일도, 싸구려 차를 사서 보험을 드는 일도 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야. 남들 눈에 좋게 보이려는 일 따윈 이제 집어치우겠어.
“아. 알아들었어요. 해야 하는 일이란, 결국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사실 이였군요. 살을 빼야 하는 게 아니라, 살을 빼고 싶은 거였어요. 그렇구나!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사실은 내가 나를 위해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이였군요! 살이 좀 찌면 어때. 뚱뚱한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되지. 그리고 아무렴 먹어봐야 어디 살로만 가겠어? 키가 커지고 피부가 좋아진다는 음식도 많으니까. 도저히 안 되겠으면 그때 살 좀 빼지 뭐. 그렇죠. 미스터 조?”
난 어느새 미스터 조의 매니아가 되기 시작했다.
“좋아요. 하고 싶은 거 사실 많아요! 난 사실은 비행기도 한번 못타봤거든요. 해외에 발을 내려놓긴 커녕, 제대로 된 유람선 한번 타본 적이 없죠. 제주도 같은 섬에도 한번 안 가봤어요. 아! 생각해보니, 고속도로를 달려본 적도 없네요. 운전면허도 있는데!”
난 지갑에서 운전면허증을 꺼내어 보였다.
“그럼 여행을 가면 되죠! 갑시다!”
희선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목에 걸린 목줄이 찰랑거린다.
“아. 잠깐만요!”
“생각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야 돼요! 생각만으로 하면, 결국 그것은 실패 하고말고, 곧이어 부정적인 생각으로 바뀌게 되죠. 하고 싶은 건, 해야 해요! 먹어보고 싶은 건 먹고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 하죠. 어서요!”
희선은 지금 당장이라도 나를 하와이로 데려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해가 저물어 가는 저녁, 게다가 날씨도 좋지 않다.
“미스터 조. 알겠어요.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는데서 우울증이 생긴다는 사실은 알겠지만,
지금 당장 가기엔 우리의 준비가 너무 부족한 것 같아요. 내일가기로 해요. 설마 가을인데 내일도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진 않겠죠. 어딜 갈지도 생각해보고 얼마나 있을지도 고민해 봐야죠. 게다가 희선씨 무일푼이잖아요!”
내가 소리치자 희선은 자리에 앉았다.
“그런가요?”
희선이 자상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 어디론가 떠난다는 상상만으로도, 난 벌써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그는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을 기쁘게 하고 놀라게 하고, 가슴을 뛰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늘 사람을 기대하게 만들고 실망시키지 않는다. 여행. 좋다. 어디든 가겠다. 당신과 함께라면 무엇도 무섭지가 않아!
벨소리가 났다. 누구일까? 이번에도 다혜 이리라….
“엇. 문이 열려있네. 늘 문 꼭꼭 닫고 다니라는 언니가 웬일이래.”
문을 열려 일어나는 찰나에 다혜가 들어왔다.
빨간 재킷에 보석이 박힌 청바지를 입은 다혜가 들어왔다. 술이 조금 취한 모양이었다.
“어디서 술 먹고 온 거야?”
내말은 들리지 않는지 다혜는 멍하니 한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개목걸이.
아차. 개목걸이는 아직 미스터 조의 목에 걸려있다.
“와.”
다혜가 입을 벌리며 자연스레 소리를 냈다. 희선은 반바지 반팔차림에 목줄을 하고 있다. 얼굴엔 문에 찍힌 작은 긁힌 상처들이 있었고 팔도 묶인 흔적이 역력했다.
“와.”
희선이 따라 입을 벌리며 말한다.
다혜는 가방을 내팽개치고 곧바로 탁자 앞에 앉았다.
“언니가, 남자가 많은 건 눈치 챘는데 이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
다혜가 신기해하며 희선의 목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눈치 없이 희선은 다혜에게 인사를 건넨다. 이거 크게 오해하게 생겼다. 소문 퍼뜨리길 잘한다는 다혜가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면, 난 더 이상 이 동네 얼굴 들고 다닐 수가 없게 된다. 이러다 미스터 조와 다혜가 프리허그라도 한번하면 끝장이다.
난 다혜를 데리고 다혜의 방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몇 분에 걸쳐 희선에 대해 대강 설명했다.
“프리허그 운동가? 대단한데? 나도 한번 안아 봐도 되는 거잖아?”
다혜는 사회봉사자. 우울증치료사 등의 말보다 프리 허그 운동가라는 말에 관심을 보였다.
“물론이죠. 다혜씨.”
희선이 방밖에서 소리쳤다.
“얼래?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대? 나 좋아하나?”
다혜가 재밌어 하며 말했다. 내가 한 말속에서 이름이 다혜인 걸 생각해 낸 모양이었다. 다혜는 옷을 갈아입다가 말고 잠깐 침대에 누웠다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가 하고 있다. 밖에 남자가 있는데 이렇게 칠칠맞아서야 시집이나 갈지 모르겠다.
“술 마셨지 너.”
물어볼 것도 없다.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술고래로 어지간한 남자들은 다 재우고 나서야 술자리를 떠난다는 다혜가 이렇게 취한걸 보면 꽤 마신 것이다. 10시밖에 안 됐는데 대체 언제부터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인가?
“수영이랑 싸웠니?”
내가 묻자 다혜는 대답대신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혜는 오늘 수영에게 오갈 곳 없으니 너희 집에서 며칠 재워달라고 요구한 모양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시고 사는 대가족의 장남인 수영씨네 집에 다혜가 신세를 질 리 만무했다. 아무리 사귀는 사인 걸 온 천하에 공표했다 한들, 어른들 눈에 수영씨 입장이 난처해지는 건 당연한 일.
“네가 잘못했네. 계집애가 아무리 남자친구라도 그렇지. 남자 집에 재워달라고 하는 게 말이나 돼? 난 수영씨가 멋지다고 생각해. 너를 아끼는 거야. 수영씨가 허락해서 그 집에서 잠을 며칠 잔다고 해도, 수영씨 부모님 보시기에 네가 잘 보일 거라 생각해?”
난 다혜를 좋게 타일렀다. 꿍한 표정의 다혜가 조금은 인정을 하는 모양이다.
“다른 남자 같으면 좋다고 받아줬겠다. 수영씨니까 널 그렇게 타이른 거야. 안 그래도 술 먹고 돌아다닌다고 안 좋게 이미지가 나있으니 수영씨가 네 생각해서 한 말 같네 보니까. 수영씨가 멋지다야.”
내가 말하자 다혜가 웃옷을 아무데나 틱 던지며 ‘그런가?’라고 말했다. 난 다혜의 옷을 주워 들었다.
“내일 아침 되면 네가 먼저 사과 해. 그런 남자친구가 어딨냐? 수영씨 안 그래도 걱정하면 밤잠설치는 사람이잖아. 이전에도 너랑 대판 싸우고 몇날 며칠을 밤을 샜다더라. 너도 좀 잘 좀 해줘. 그래도 나중에 네 남편 될 사람인데 그렇게 마음고생 시키면 되겠니?”
오랜만에 언니구실을 한 것 같았다. 다혜는 내 이야기를 곰곰이 곱씹으며 인정하는 눈치였다.
“여하튼, 싸우고 나니까 생각 나드라. 헤헤. 모텔에서 잘려다가 술값으로 써버려서 돈이 없었거든. 그래서 생각나는 게 언니뿐이더라.”
바지를 벗다 말고 다혜가 날 보며 눈시울을 붉힌다. 괜히 나도 미안해진다.
“미안해 언니. 나 너무 못됐지.”
바지를 마저 벗던가, 청바지를 발목에 걸친 채 눈물을 뚝뚝 흘린다.
“엉엉. 언니 내가 잘못했어.”
다혜가 발목에 바지를 질질 끌며 내 품에 안긴다. 괜히 나도 눈물이 난다. 그렇게 몇 분간 같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런데 저 남자, 동물처럼 생겼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다혜가 문을 조금 열고 미스터 조를 엿보며 대뜸 말한다. 언제 울었다는 듯이 나를 보고 해맑게 웃고 있다.
“그래, 사람 같이는 안 생겼어.”
“파충류는 아니고 양서류 쪽인 거 같아.”
몇 년 같이 살았다고 어느새 눈높이도 비슷해져 버렸나보다.
어느새 시간은 10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벌써 잠잘 준비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지나면 버스가 끊길 시간이다. 미스터 조. 이러다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간다고 하면 뭐라고 말할까 고민이 되었다. 아무리 마음이 놓이는 상대라고 해도 처음 보는 이를 잠까지 재워줄 수는 없는 일이다.
“희선씨라고 했죠?”
다혜는 울던 기분을 다 풀고 뛰어 나갔다.
“넵!”
다혜와 희선은 어느새 떠들어 대고 있었다. 성격이 비슷해서 맞는 모양이었다. 저녁에 먹을 간단한 과일을 준비해 내어놓을 때 즈음엔 어느새 누나 동생 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오늘 자고가라 희선아!”
“그럴까요 누나!?”
다혜는 큰일 날 소리를 한다.
“누나는 무슨, 형이라고 불러.”
“혀엉! 헤헤헤”
“헤헤헤.”
이 둘을 누가 말릴까. 하지만 남녀7세부동석, 난 찝찝한 거 질색이다. 고민거리가 있으면 밤에 잠을 설치는 사람이다.
“희선씨. 오늘은 집으로 가서 일찍 자요. 내일 또 나 치료해줘야 할 것 아니에요?”
희선을 좋게 타일렀다.
“아 그렇죠. 참! 내일 여행가기로 했으니 오늘 집에 가서 가방을 싸야겠어요!”
희선은 다혜와 이야기를 나누던 탓에 들떠있었다.
“여행? 나도 나도!”
어느새 다혜도 끼어들고 말았다. 일단을 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각자가 알아서 준비를 해오기로 합의를 봤다. 결국 치료의 목적으로 나온 이야기가 내일 당장의 일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수영씨와 다혜도 함께 가니 문제는 없을 것이다.
수영씨는 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를 맞고 있으니까 든든하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지혜씨. 그리고 형.”
희선이 다혜에게서 빌린 나이키 점퍼를 입고 현관 앞에서 인사를 했다. 밖은 어느새 어둑어둑했다.
“그래 임마. 잘 자고 내일봐. 동생.”
다혜가 남자들처럼 희선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넵!”
희선은 그렇게 소리치고 사라졌다. 다혜는 술에 취해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나보다.
희선이 가자마자 거실에서 배를 드러내놓고 잠에 빠진다. 나는 방을 대충 정리한다.
정리하는 김에 집안에 어지럽혀졌던 것들도 모두 제자리에 정돈해서 넣었다. 그리고 여행을 다녀야겠다고 다짐하고 샀던 배낭을 꺼낸다. 여행을 간다. 이 몇년만의 설렘인가?
가자. 좋다. 어디든 가자. 집만 아니라면, 익숙한 곳만 아니라면 어디로 떠나도 좋아.
“칫솔이랑, 속옷 몇 벌이랑 옷 한 벌 정도는 여분으로 가져가는 게 좋겠지. 혹시 모르니 우산도 챙겨야 해.”
난 혼자 중얼거리면서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김밥을 만들어 볼까 하는 소박한 고민도 해보았다. 오늘처럼 재밌었던 일이 없었다. 마치 오늘 처음 태어난 것처럼 상쾌한 기분이었다. 문득 나도 모르게 배낭 속에 팍실 통을 집어넣으려고 하다가, 통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저 통을 집어 드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난 분명 변하고 있다. 그 증거로, 거울에 나는 한없이 해맑게 웃고 있지 않던가?
그래, 이제 알았다. 난 외롭지 않다. 난 혼자가 아니다. 난 나를 사랑한다.
‘당신이 나를 이렇게 살아있게 해주었어요.’
내일,
이렇게 내일을 기다려본 날이 얼마만인가.
-4-
“언니! 좀 일어나 봐!”
깊은 잠에 빠진 나를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다혜였다.
“앗! 몇시야!”
난 놀라 몸을 일으킨다.
“8시가 넘었어! 어쩐 일이래? 언니가 늦잠을 다자고.”
다혜가 비꼬듯이 말한다. 늘 늦잠 자는 자신을 깨우며 구박하는 나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다. 난 근 몇 년간 늘 새벽에 잠이 깨곤 했다. 그런데 어젯밤 난 한 번 도 잠을 깨지 않고 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잠을 자고 일어났다. 왠지 지금 누워도 또 몇 시간은 잘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얼마만의 여유로움 인가? 하지만 다시 잠들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지금 내 가슴은 콩닥콩닥. 당장에 뛰쳐나가고 싶은 경마장 3번 레일의 다크호스다.
얼굴을 여기저기 꼼꼼히 씻는다. 이미 한번 헹구어 내고도 코를 다시 폼클랜징으로 싹싹 문지른다. 찬물을 두세번 퍼 붓고 거울을 보니, 하얗고 맨들맨들한 코가 반짝반짝 거린다.
바보같은 표정을 짓고 연신 입을 오물거려도 보았다.
날씨를 확인하기위해 커텐을 열어젖힌다. 하늘은 어제 언제 비가 왔느냐는 표정을 지은 듯이 뻔뻔하다. 그렇게 뻔뻔하리라 만큼 맑은 아침이다.
내가 씻고 나왔을 때, 다혜는 이미 외출 채비를 끝마친 뒤인 것 같았다. 레이스달린 노란색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지금은 침대에 앉아 침대위에 작은 물건들을 발가락으로 집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TV연예인이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나와서 선보인 뒤로, 연신 그 것을 따라하는 취미가 생겨버렸다. 다혜는 늘 TV속에 연예인을 따라하는 버릇이 있다. 물론, 나도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도 솔직히 있다.
“왜 이렇게 늦어 너!”
다혜는 전화에 대고 한바탕 욕을 퍼부어 댄다. 발가락으로는 간신히 쥔 빨래집게를 들어 올린다. 수영씨가 늦는다고 전화를 한 것 같았다. 수영씨는 출근길에 차가 막힌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다혜와 상의를 한 끝에 여행지를 정하고, 기다리다 지친 다혜가 먼저 수영이가 있는 차로 내려갔다. 난 미스터 조를 기다렸다.
우리 집의 위치는 알고 있지만, 아직 전화번호도 없다. 혹시 이대로 안 오는 건 아닐까?
시간은 점점 가속이 붙는 듯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시계는 어느덧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두고 간 곰 인형 세트를 세탁기로 빨아 베란다 빨랫줄에 걸었다.
축 눌어진 채 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 마치 미스터 조가 빨랫줄에 걸려있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마침 전화가 울렸다.
“왜 이렇게 안와 그 자식! 어젠 분명 좋은 녀석 같았는데 이렇게 약속 안 지키는 녀석이었어?”
다혜는 흥분해 있다. 약속 안 지키는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는 그녀다. 하지만 그가 내일 여행을 가자고 했지 몇시까지 오겠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오겠지. 정 그러면 먼저 출발해. 나도 차 있으니까 미스터 조 오면 금방 뒤따라가면 되잖아.”
마저 못해 말했지만 다혜는 ‘그러면 되겠네.’라고 말하고 출발해버렸다. 이렇게 미스터 조가 오지 않으면 난 이대로 집에 갖혀 버리고 만다. 시간은 점점 달리기 시작한다. 결국 배가 고파 아침에 준비한 도시락을 혼자 까먹고 말았다. 수영씨와 다혜의 몫은 그녀가 가져갔지만, 이렇게 미스터 조를 위해 준비한 도시락은 싱크대 위에 버려지듯 놓았다.
그는 오지 않는다. 시간은 12시, 이제 와서 온다고 해도 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렇기도 하다. 어제 처음 만난 사이가 여행까지 떠난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그는 분명 바쁜 사람일 것이다. 나를 치료하는 목적에서 여행을 가자고 말을 꺼내어 봤을 뿐, 정작 여행을 가자고 말을 하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나 같은 여자에게 시간을 투자할 만큼 마음 넓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보지도 않던 TV를 틀어본다. 웃기고 재밌게 떠들어 대는 재방송 프로그램을 본다. 나도 웃어야 한다. 웃지 않으면 울게 되고,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 시간이 오면 난 어느새 쓰레기통을 뒤져서라도 그놈의 팍실을 집어들 것이다.
신경질이 나서 비닐 안에다가 그놈의 도시락을 갖다 버렸다. 아침에 시간을 내어 김밥 집에서 사온 김밥이다. 오후 1시가 되었을 때, 다혜 일행은 포항에 도착해 있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오후 1시 반, 난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팍실을 일단은 꺼내놓아야겠다. 치료는 무슨 치료. 긍정적인 생각은 무슨. 약속하나 지키지 못하는 놈, 말 따위,
벨이 울린다. 움직이지 않는다.
다시 벨이 울리고, 문이 열린다. 문을 또 안 잠가 두었구나.
그가 보였다. 멀리서도 보이는 커다란 배낭 가방을 메고 키가 큰 골리앗 같은 남자가 천천히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들어오지 마세요!”
소리친다. 내방에서 웅크린 채 외출복은 구석에다 쳐 박아 두고 잠옷을 입고 있다.
“지혜씨. 미안해요! 어제 처음 와본 지역이라 오는 길이 헷갈려서….”
그가 변명했다. 하지만 대꾸하고 싶지 않다. 귀마개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여행 가야죠. 지헤씨?”
난 화가나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 거실로 가서 그를 들이민다.
“나가요. 필요 없으니까 가세요! 여행 따위 안 갈 거라구요.”
아무리 밀어도 덩치 큰 사내는 밀리질 않는다. 도리어 내 팔을 붙잡는다. 붙잡힌 팔은 못쓰게 된 것처럼 꼼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연약한 남자라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여행 가아죠. 가고 싶어 했잖아요!”
“싫어 안 갈거야!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야! 아침에 옷 입고 실컷 아침도시락까지 만들어 놨는데 오후 1시가 되서 간다는 게 말이나 돼! 필요 없으니까 나가!”
난 소리쳤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냉정하고 잔인한 연쇄살인범같이도 절대로 내 마음을 너에게 보여주진 않을 거야.
미스터 조는 어느새 내가 쓰레기 비닐에 남아둔 김밥도시락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뭐하는 거예요!”
그러자 미스터 조는 배낭을 내려 두고 비닐봉지 속에 버려둔 내 김밥 도시락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하필 주황색 비닐에 담겨서 속이 보인 탓이다. 안에 다른 이물질은 없긴 했지만, 분명 난 그것을 버렸다.
“왜 그래요! 먹지마세요!”
내가 미스터 조의 팔을 잡아끌어보았지만 막무가내였다.
“냠냠.”
미스터 조는 아침을 굶었는지 맛있게 먹는다. 그러면서 계속 내 눈치를 본다. 또 눈물이 난다. 맙소사 벌써 이 남자는 내가 우는 걸 24시간 안에 세 번이나 보고 말았다. 어께가 들썩인다.
“앗 저건 내 옷.”
미스터 조가 빨랫줄에 걸려있는 곰 인형 탈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머리에 뒤집어쓰려 든다.
“앗! 아직 안 말랐을 거예요!”
하지만 미스터 조는 곰 인형 탈을 뒤집어 쓴 뒤였다. 그리고 인형들이 하는 것처럼 엉엉 우는 시늉을 하다 다시 곰 인형 탈을 벗었다.
“그러네.”
벗을 땐 이미 기껏 멋을 낸 머리가 바다 속 미역줄기로 변한 뒤였다.
“푸하하!”콧구멍을 벌렁거리는 미스터 조의 표정이 너무 웃기다. 쳇. 절대 안 웃어 줄려고 했는데 웃고 말았네.
“가요 여행!”
희선이 내 어께를 잡는다.
“싫어. 안 갈 거예요.”
삐진 듯이 몸을 뒤로 돌린다. 하지만 계속 입 꼬리가 올라간다.
“가요. 이 옷 입고 가려고 한 거죠?”
희선이 내가 던져둔 옷을 집어 들었다.
“예쁘네. 빨리 입어보세요. 어서 가요. 시간이 늦었잖아요!”
희선이 말하며 잠옷위에 옷을 입히려 들었다.
늦은 게 누구 때문인데..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다. 아침에 먹을 계획이던 도시락은 아침에 각자 까먹었고, 배는 부르니 이제 마음의 공복을 채우기만 하면 되겠다.
“드라이기 좀 써도 되겠죠?”
희선이 화장실에서 소리쳤다. 머리를 말릴 모양이다. 물론이다. 당신만큼은 내가가진 그 무엇도 사용할 권리가 있다.
난 노란색, 그는 빨간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집은 열쇠로 잠그고 열쇠는 어디론가 던져버리고, 차 뒤 트렁크에 배낭을 집어 던져 넣어 두고 조수석에 앉는다.
“왜요? 고속도로에서 실컷 달려보고 싶었다면 서요? 나 운전면허도 없어요.”
희선이 말했다. 면허도 없는 게 자랑이다.
다시 운전석에 앉는다. 악셀은 오른쪽 브레이크는 중앙, 크런치는 왼쪽. 크런치와 악셀은 정 반대로 생각하면 쉽다. 조수석에 미스터 조가 들어와 앉았다.
“어디로 가기로 했었….”
차가 튕기듯이 앞으로 나간다. 악셀을 밟고 있었나 보다.
“아! 운전벨트 안할 거예요? 일부러 경고 줄려고 그랬어요!”
얼굴에 철판 깔고 소리친다. 미스터 조는 새하얀 얼굴이 되어 안전벨트를 맨다.
핸들을 왼쪽 두 바퀴 반을 감고 주차장을 빠져나오려 한다. 앞에 빨간 주차금지 오뚝이가 보인다. 뒷바퀴에 걸릴 것 같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오뚝이니까…..
“저기 팻말 넘어졌는데 일으키고 올까요?”
미스터 조가 눈치 없이 말한다. 오뚝이니까 상관없다고. 일어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야.
차를 타고 쌩쌩 달린다. 강변도로를 타고 밟고밟고 또 밟는다. 희선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까부터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다. 열어둔 창문사이로 바람이 세차게 들어온다. 중고차이지만, 스포츠카 못지않다. 난 이렇게 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그뿐.
“앗 저 자식이 날 앞지르다니! 가만 놔두지 않겠어.”
힘껏 밟아보지만 내차는 앞차를 앞지르지 못한다. 하지만 시속 100km. 난 이미 온몸이
바닥에 달라붙는 다운코스를 느끼고 있어.
“미스터 조. 어디 어제 하던 우울증 치료 계속해야죠. 생각하지 않기였나?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기였나? 아! 미스터 조! 나 지금 이대로 바닷가에 풍덩 빠져보고 싶은데요?”
영화에서 보던 장면 중에 자동차가 바닷가로 빠지는 장면들을 보면서, 난 늘 차안에서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 어떤 기분일지. 또 진짜로 그렇게 수압 탓에 문이 열리지 않는 건지 너무 궁금했다. 희선은 아까부터 안전벨트를 붙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시선은 정면을 본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응? 왜요?”
나는 오른손으로 미스터 조의 눈을 가린다.
“으악! 으아!!!”
미스터 조는 비명을 질렀다.
“크하하하.”
손을 땐다. 그리고 왼손으로 창문이라는 창문은 모두 열어젖힌다. 바람이 차 안에서 소용돌이친다. 그냥 내가 보고 있는 정면의 창문도 깨뜨려 버릴까?
“아. 지혜씨. 운전대를 잡으면 성격이 나온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미스터 조가 내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응 뭐요?”
옆을 쳐다보자 다시 미스터 조는 기겁을 한다.
“앞! 앞을 봐요! 고속도로에서 옆을 보는 사람이 어딨어요!”
미스터 조는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킨다. 앞에 차가 닿을 듯 말 듯 했지만 재빠르게 옆 차선으로 바꿔 들어간다. 옆에는 모래를 가득 실은 화물 트럭이 지나가고 있었다.
“와. 저기 모래는 다 어디다 쓰이는 거지.”
몸을 숙여 조수석 창문으로 고개를 들이민다.
“지.. 지혜씨!”
재밌었다. 한 번도 사람을 놀려먹은 적이 없지만, 이렇게 재밌는 것이었구나. 포항에 거의 도착했을 때 까지 미스터 조는 하얀 얼굴 그대로 안전벨트를 꼭 쥐고 있었다.
어느새 포항 톨게이트를 지나고, 다혜 일행이 있는 바닷가 근처로 왔다. 그때까지 미스터 조는 잡고 있던 안전벨트를 끝까지 놓지 않았다. 도착하고도 시동을 끄고, 내가 문을 여니
그때서야 안전벨트를 풀고 나왔다. 모래사장에 앉은 한 커플이 보였다. 옷을 보니 다혜가 분명했다.
“다혜야!”
다혜를 부르자 다혜가 달려왔다.
“이 자식!”
다혜는 희선을 보자마자 이단 옆차기를 한다. 안 그래도 차멀미 때문에 고생한 희선은 모래사장에 고꾸라진다. 웃기다.
“누, 누님!”
“왜이렇게 늦었어!”
다혜는 쓰러진 희선에게 모래를 퍼부어 댄다. 나도 옆에서 모래를 뿌렸다. 넘어지면서 흘린
침에 모래가 ANE어 희선의 얼굴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화가 풀린 다혜가 포장마차로 가고, 난 희선의 목에 붙은 모래를 털어주었다. 희선은 그때야 어지러움 증이 가셨는지 하늘을 보며 한 모금 공기를 마셨다.
“아! 이제 살 것 같다.”
나도 바람 한 모금 마셔본다. 내 가슴의 폐가 시냇물에 담긴 기분이다. 자, 이제 진짜 여행을 떠나자.
“자자 이제 뭐 할 건데!”
다혜가 라면 한 가닥을 입에 물고 소리친다. 점심은 해수욕장 포장마차에 파는 컵라면과 어묵으로 때우기로 했다.
“몰라.”
난 대책 없는 사람이다. 뭐 어떤가. 생각 없이 행동하기가 치료의 단계라고 희선씨가 그랬으니까. 수영씨와 미스터 조는 어느새 꽤 친해졌는지 둘이서 이야기를 해댔다. 사실 알고 보니 둘의 나이가 같았다.
“너 왜 쟤랑 이야기 하냐?”
다혜가 자기와 놀아주지 않는 수영씨를 걸고 넘어 지고, 먹던 어묵 꼬챙이를 수영 씨의 콧구멍에 찌르려고 하다 둘은 넘어진다. 그 사이 내 눈은 웃고 있는 미스터 조를 넘어 하늘을 보고 그리고 그 순간, 하늘 밑으로 떠가는 하얀 여객선이 보였다.
“저거다!”
난 소리쳤다. 미스터 조가 가장 먼저 뒤를 돌아보았다.
“선 플라워?”
커다란 여객선이었다. 어디로 가는 배일까.
“저걸 타고 가는 거예요!”
내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어디로 가는지 그건 상관없다. 저 배를 타기만 하면 된다. 아마도,
저 배는 나를 절대 실망 시키지 않으리.
그렇게 우리는 배에 올랐다. 반쯤 침몰한 타이타닉 호를 닮은 선 플라워가 하늘과 바다를 가른다. 갈라진 바다는 배가 지나간 뒤편에서 다시 뭉쳐지면서 다시 한 번 박수를 친다. 그리고 갈라진 하늘은 다시 뭉쳐지면서 내 머리를 마녀로 만들어 놓는다.
“와 배는 처음 타본 거예요!”
희선에게 소리쳤다. 희선은 배 멀미가 심해서 배 갑판위에 거의 엎드려 있다.
“왜요. 여행 많이 다녔다면서요. 근데 배 멀미 하는 거예요? 순 뻥쟁이 아냐?”
내가 희선에게 말했다. 희선은 울상이 되어 사회봉사 인증카드를 꺼낸다. 가을 하늘답게 파랗고 높은 하늘이 희선의 얼굴 뒤로 펼쳐져 있다. 이대로 눈을 감고 둥실 둥실 떠있으면서, 지나가는 바람과 끝없는 입맞춤을 상상하면, 정말로 하늘을 날고 있는 듯한 흥분을 감출수가 없다. 마치 어릴 때 ‘퐁퐁’이라고 하던, 놀이 기구 위를 뛰어노는 기분. 그렇게 뛰어 놀다가 바닥에 발을 딛으면, 세상은 본디 돌처럼 딱딱했다는 사실에 우울해지기도 했다.
3시간을 타고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울릉도였다. 울릉도 하면 노란 호박이 떠오르는 것과는 다르게 울릉도는 높은 산과 푸른 나무들로 도배되어 있는 큰 섬 이였다.
“낚시 낚시!”
다혜는 줄곧 낚시 타령이었다.
“이럴줄 알고 내가 다 챙겨왔지!”
챙겨왔다기 보다 트렁크에 넣어 둔 듯한 낚시 세트가 보였다. 가끔 낚시를 하러 가는 취미가 있는 수영씨다.
울릉도는 본래 바다지만, 부둣가에서의 낚시는 금물이었다. 물도 다른 곳보다 더럽고 울릉도 동쪽인 도동에 위치한 도동항 낚시터로 갔다. 우리는 낚시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도동항은 언뜻 보기에는 부산의 영도의 항구와 비슷했지만 그보다 훨씬 작고 한적해보였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부두와 100m는 되어 보이는 방파제가 눈길을 끌었다.
“누님! 여기가 말입니다. 낚시꾼들이 꼭 한번 와보고 싶은 명소 중에 명소란 말입니다!”
낚시 광 수영은 벌써부터 흥분하기 시작했다. 낚싯대를 빌리고 미끼를 비롯한 물품들을 준비하기까지, 그가 모든 것을 다 해내면서도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2시간 남짓의 포항으로 스스로 운전을 하고 왔고, 3시간 남짓 배 멀미를 하며 배를 타고 왔건만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낚싯대를 던지는 시늉을 해보이곤 했다.
“어째서? 여기가 그렇게 물고기가 잘 잡히나?”
다혜가 수영에게 물었다. 그러자 수영이 손가락으로 도동항 바닷가 근처에 무언가를 가리켰다.
“저게 다 뭐야?”
나도 궁금해서 눈살을 찌푸리며 자세하게 보았다. 하얗고 작은 물체가 빨랫줄 같은 곳에 무수히 널려져 있었다.
“오징어를 잡아서 자연풍에 말리고 있는거라고요.”
수영이가 말하며, 낚싯대와 낚시 용품들을 지고는 바닷가 근처로 나갔다.
“그게 낚시랑 무슨 상관이야.”
다혜가 퉁명스레 물었다. 미스터 조는 배 멀미가 이제 좀 가셨는지 안색이 돌아와 있었다.
“잘 들어봐요. 9월은 오징어 어업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시기로써, 오징어 배 한척이 들어오면 수천마리의 오징어가 어업이 되거든요!”
그가 소리쳤다.
“그래서?”
다혜가 되묻자 수영이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말더듬지 말고!”
다혜가 소리치자 그가 진정을 하려는 듯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 그러니까… 그 뭐시냐. 그 내장 손질 있다입니까.”
수영이가 칼로 오징어의 배를 가르는 시늉을 해보였다. 난 그 광경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아하! 그러니까! 그 내장을 바다에 버려서 그 내장 맛을 보는 고기들이 몰린다 이 말이지!”
내가 입을 열려는 찰나, 미스터 조가 선수를 쳐서 소리쳤다.
“그래 그 말이지!”
수영이가 갑갑한 숨을 내쉬며 맞장구를 쳤다. 울릉도에 들어오는 수많은 오징어 배들이 어업을 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바다에 많은 오징어 내장을 버리게 되고, 그 맛을 본 물고기들이 울릉도 도동항 근처로 몰려들면서 최고의 낚시터를 만든다는 말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여기 물고기가 많이 몰려 있다는 거야?”
바닷가 근처에서 낚시를 해 볼만한 장소를 잡았다. 낚시전문가들이 쓰는 낚시 의자를 어디서 구했는지 수영이가 들고 왔다. 나는 지나가는 길에 주워든 빈 깡통을 바닷물로 씻고, 그 안에 잡을 물고기가 어떻게 생겼을지 상상하며 쪼그려 앉았다. 수영이가 낚시질을 한다. 옆에서 멍하니 지켜보던 미스터 조도 미끼를 꾀기 시작했다.
“빨리 좀 낚아보란 말이야!”
다혜가 수영을 다그친다. 낚시 광이라는 수영이 명성답지 못하게 30분 째 한 마리도 못 낚고 있다. 온 나라를 돌아다녀본 여행의 대가라는 미스터 조 역시. 낚시는커녕 지렁이 한 마리도 못 잡아서 안달이다. 보다 못한 내가 나서 야무지게 지렁이 한 마리를 잡는다.
“요놈이 좀 먹음직스럽네.”
난 도톰한 지렁이 한 마리를 잡아다가 입에 넣는 시늉을 한다. 그러자 미스터 조가 기겁을 한다.
“하하하.”
또 한바탕 웃고, 바람 공기 한번 마시고, 그리고 파도를 안주로 삼아본다.
“자! 큰놈 하나 물어 와라!”
난 소리치며 낚싯대를 뿌리듯 던진다. 생전에 아버지를 따라 낚시를 하던 기억이 난다.
바다위에 찌가 보인다. 넘실대는 파도에 떠밀려 오는 상어든 참치건 한 마리만 걸려라. 바다 끝까지 빨려 들어갈 지라도 낚아 올릴 테다.
“잡았다!”
수영과 다혜가 소리쳤다. 미스터 조는 나를 버리고 고기를 구경하러 뛰어갔다.
“아앗.”
순간 내 낚싯대에서 묘한 느낌이 들더니 갑자기 나를 바다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하마터면 낚싯대를 놓칠 뻔 했다.
“미, 미스터 조!”
난 급히 남자를 불렀다. 정말 강한 녀석인 모양이었다. 내 팔의 근육만큼의 힘은 분명히 있었다. 미스터 조는 허겁지겁 달려와서 바톤을 이어받고는 온힘을 다해 당기기 시작했다.
영화 노인과 바다를 보는 듯한, 정말 힘으로 봐서는 참치새끼정도는 될 것 같았다. 희선이 물고기를 바다위에서 뽑아내는 동시에, 그가 앉아있던 삼발이 의자가 균형을 잃고 쓰러지고
희선도 자갈밭위로 넘어졌다.
“푸하하.”
다혜와 수영이 그것을 보며 한참을 웃고, 난 그가 잡아 올린 물고기를 가까이 보려 달려갔다. 커다란 두눈이 미스터 조를 닮은 매끄럽고 힘 세 보이는 물고기였다.
우리는 가까운 횟집으로 가서 회를 먹었다. 횟집 아저씨는 꽤나 인심이 좋았다. 수영씨도 처음 보는 고기였기에 손질은 횟집 아저씨에게 맡겼다.
“야. 섬 밖에서 관광 온 사람이 이 물고기 구경하기는 힘들지에.”
횟집 주인조차 입안에 침이 고이게 한다는 생선이었다. 알고 보니 울릉도에서도 자연산은 유통가만 30만원이 넘는 다금바리라는 생선이었다.
“으아 죽인다.”
술을 좋아하는 수영과 다혜는 벌써 소주 한 병을 비웠다. 횟집 주인이 눈을 떼지 못 하기에
회 몇 점을 접시에 담아 그에게 주었다. 그랬더니 술을 세병을 더 내어 주었다.
“이게 여기서 사서 먹으라면 돈 백 만원은 줘야 대예.”
횟집 주인은 회 한 점을 먹을 때마다 다금바리 칭찬을 해댔다. 나도 한입 먹어봤지만 난 아직도 이게 초장 맛인지 된장 맛인지만 알겠고 회 맛은 도저히 모르겠다. 그래, 난 어쩔 수 없는 서민이니까.
“우엑.”
미스터 조는 그 귀하다는 회를 입에 넣었다가 뱉어버렸다. 그에게도 영 입맛에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 이런 걸 먹으라는 거야”
희선은 횟집 주인이 서비스로 내어 놓은 멍게를 먹더니 짠맛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루는 그렇게 또 지나갔다. 우리는 가까운데 숙소를 정하고 밤새도록 이야기를 했다. 민박을 겸하는 하숙집에 어린 아이들이, 철지난 수박을 썰어다 가지고 들어왔다. 함께 수박을 먹는 것도 즐거웠다.
다음날, 난 전날에 하던 낚시 생각이 나서 희선을 깨웠다. 꿈속에서도 몇 번이고 낚싯대를 잡고 물위로 뽑아내는 물고기들을 본 듯도 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잡은 물고기를 그의 손에 맡긴 게 억울하기도 했다.
“미스터 조! 나 낚시하고 싶어요! 낚시!”
난 어린애가 된 듯이 그에게 보챈다. 그는 마치 악몽이라도 꾼 듯한 얼굴로 일어났다.
“네?”
미스터 조는 나에게 슬슬 지쳐가는 모양이었다. 그는 피곤해 보였다. 특히 배 멀미를 심하게 했고, 저녁으로 회를 먹었지만 그의 입맛에는 맞지 않아 거의 굶다시피 한 것이었다.
“놀자고요! 밖에 나가요. 이렇게 아침에 바보처럼 누워있는 시간이 아까워요. 게다가 우리가 울릉도에서 오랫동안 머무를 것도 아니잖아요!”
난 그를 설득한다. 그는 여전히 비몽사몽이었다.
“가요. 물고기 잡으러 가요. 이번에 그 다금바리인가 하는 생선을 세 마리정도 잡아 보자고요! 그래서 그 걸 팔아다가 돈으로 바꾸고, 그 돈으로는 다시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는 거예요!”
희선은 조금씩 정신을 차린 듯 벗어놓았던 바지를 주섬주섬 입었다. 다혜와 수영은 서로 부둥켜안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6시였다. 아직 밖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새벽이다. 하지만 괜찮아. 물고기들은 우리보다 눈이 밝을 테니까.
새벽의 안개를 맞으며 밖을 나선다. 숙소 바로 앞에 낚시터가 있다. 낚싯대는 수영의 차 트렁크 안을 뒤져서 가지고 왔다. 어제 쓰고 남은 미끼도 충분했다. 희선은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지렁이를 바늘에 꾀다가 손가락을 찔렸는지 한 방울의 눈물을 보였다.
“자! 물어라!”
힘껏 낚시질을 한다. 바다에 풍덩하는 소리가 날만큼 찌가 깊게 빠졌다. 희선도 내 옆에서낚시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안개가 있는 바닷가와 산 위에 있는 등대. 그리고 여기저기 아직도 떠있는 빛나는 별들이 있었다.
‘하고 싶은 것들이 저기 떠있는 별들 보다는 더 많아.’
난 희선을 돌아본다.
“미스터 조. 나 아직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도너츠 가게에 가서 거기 있는 도너츠를 다 사놓고 며칠 동안이나 도너츠만 먹어보고 싶어요. 그리고 첫눈이 내리는 강원도에 가서 눈을 입안가득 넣고 머리가 지끈 거릴 만큼 이가 시려 보고도 싶어요. 번지점프도 안 해 봤고 비행기도 안타봤고, 기회가 된다면 패러글라이딩도 한번 도전해 보고 싶어요!”
나는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쏟아내듯 말하기 시작했다. 왠지 다시 눈물이 나려고 했다. 키가 큰 그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목이 아파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음, 그리고 다른 애완동물을 기르고 싶어요. 아 참. 그것보다 사는 게 바빠서 요즘은 조금 멀어져 버린 친구들도 보고 싶어요. 바보같이 시집간 계집애가 있는데 술을 많이 먹는 남편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은 애가 있거든요.”
친구이야기를 꺼내자 목이 멘다. 저 바닷물이라도 한 모금 마셔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랬다간 내 눈물이 더 짜버려서 바다조차 내 눈물을 싫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엄마도 보고 싶어요. 재혼을 하면서 이민을 갔거든요. 그리고 죽은 우리 아빠도 보고 싶어요. 그땐 너무 슬퍼서 작별인사를 못했거든요.”
희선은 웃으며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흐려진 시야 때문에 그가 잠시간 내 아빠를 닮은 것 같았다.
희선이 다시 한번 나를 안았다. 이번엔 나도 그를 안는다. 온몸이 이대로 두부처럼 산산조각이 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뼛속까지 그를 안으로 집어넣고 싶다.
“지, 지혜씨!”
희선이 소리치며 낚싯대를 가리켰다. 난 안고 있던 그를 내팽겨 쳐버리고, 그리고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며 낚싯대를 잡아챘다.
“이놈아! 잘 걸렸다!”
난소리치며 낚싯대를 세차게 잡아당겼다. 그를 안았던 힘으로 두 손을 힘껏 몸 쪽으로 끌어 당기자, 제법 굵은 한 마리가 바다 안에서 뛰쳐나왔다. 오늘 아침도 해결 되었다. 이젠 무인도에 가도 굶어죽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해는 분명 떠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시간은 8시. 어제 대체 뭘 하느라 늦게 잤는지 다혜와 수영을 깨우는 데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뭐야. 또 회야?”
회 센터에 가서 기껏 회를 떠왔더니 다혜는 아침부터 투정이다. 어제 먹은 야식 탓에 다혜는 비싼 돈 들여 예쁘게 해놓은 쌍꺼풀이 없어질 지경이었다. 수영은 밤사이 수염이 덥수룩했다. 동생들 밥을 먹이고 아침에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나는 한참 생각했다. 오늘은 뭘 할까? 오늘은 왠지 운동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어제도 하루 종일 여행이랍시고 먹기만 했다. 배를 만져보니 이젠 꽤나 묵직했다. 아직 처녀인데 누가 아줌마라고나 하면 또다시 우울증에 빠져버릴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수영과 나, 그리고 미스터 조가 30분은 기다리니, 드디어 다혜가 숙소 밖으로 나왔다.
청 반바지에 민소매 티를 입고 있었다.
“어때? 오늘 코디?”
다혜의 장점은 늘 기분이 좋다는 것이다.
“죽여.”
다혜가 수영에게 묻자 수영이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다혜가 웃으면서 수영의 목에 팔을 감는다. 오늘은 차를 타고 울릉도를 한 바퀴 돌아볼 심산이었다.
“뭐예요. 운전면허 없다고 했잖아요!”
내차를 운전하는 미스터 조에게 따졌다.
“그건 다 지혜씨가 운전을 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해본 말이에요.”
희선이 보기 좋게 둘러댄다. 분명, 고속도로 운전하면 피곤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 게 틀림없다.
“역시 순 뻥쟁이야. 외국을 여행하고 왔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지?”
내가 묻자 희선은 운전하다 말고 그놈의 인증 카드를 꺼내어 보였다.
“에잇.”
난 그의 카드를 뺏어다가 창밖으로 던지는 시늉을 했다. 순간 차가 크게 휘청거렸다.
“으악!”
미스터 조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웬일인지 난 아무렇지 않았다. 놀이기구를 타는 것 마냥 즐거울 뿐이었다. 도로가 잘 되어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달리는 느낌은 났다. 도로사이로 가지가지 풍경이 펼쳐졌다. 온 창문이라는 창문은 다 열고 바다 속 소용돌이처럼 빠르게 흐르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마치 외국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다혜가 전화를 주었다.
“언니!”
전화를 받자 다혜의 특유의 높은 톤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혜는 조금 흥분해있었다.
“내가 진짜 근사한 이야기를 들었거든, 진짜 멋질거야!”
다혜가 말했다.
“뭔데 그래?”
아무리 물어도 다혜는 말하지 않았다. 꽤 멋진걸 알아낸 모양이었다.
“오늘, 우리 야영하는 거야!”
다혜가 소리쳤다. 전화기가 고장이 날만큼 큰 소리였다. 어찌되었건 다혜의 계획대로,
우리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작은 배 하나를 빌렸다.
“이틀에 이 만원은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아저씨?”
타협과 아부에 능한 다혜가 아무리 몸을 비비꼬며 비벼대도, 배 대여를 하는 아저씨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어요. 요즘 IMF다 뭐다 해서 돈벌이가 시원치 않거든요.”
30대 후반정도 보이는 노총각 같은 스타일의 남자는 언제 끝난 IMF를 들먹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순간 현진이 생각이 났다. 나쁜 자식 전화 한통을 안줘.
보트를 타고 바다를 가로질러가기 시작했다. 보트는 우리가 타고 왔던 여객선의 곱절은 되는 속도로 가는 것 같았다. 바다 위에 떠있는 갈매기를 볼 새가 없었다. 이대로 큰 파도를 만나 배가 떠버리면 그대로 바다 속에 인어공주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자고 올 건데 준비는 확실한 거야?”
다혜가 걱정이 되었는지 수영에게 물었다. 수영의 등에는 다혜 만한 가방이 있었다.
“뭐?”
너무 빠른 속도 탓에 서로 대화가 잘 되지 않았다.
“짐 잘 챙겼냐고!”
다혜가 머리에 핏대를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오는 귀가 먹은 수영은 다시 고개를 들이민다. 어째서 내겐 둘의 이야기가 다 들릴까.
“에이씨!”
갑갑해진 다혜가 수영의 다리를 걷어차고, 배는 한번 크게 휘청거렸다. 놀란 선장이 뒤를 돌아보는 동시에, 미스터 조는 미끄러져 배 갑판위에 넘어졌다.
“휴.”
우리가 도착한 곳은 울릉도 북동쪽에 있는 섬인 죽도였다. 울릉도에서 가장 큰 섬이라고 바다의 무법자인 노총각 아저씨가 말했다.
“그럼 내일 점심때나 데리러 오겠습니다.”
선장은 그렇게 말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아무래도 낮술을 한잔 했는지 배가 직선으로 가지 않았다.
“자! 여기서 오늘 밤을 새는 거야!”
다혜는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건지 들떠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죽도의 입구엔 100개가 넘는 계단이 있었다.
“젠장 이런 예기는 없었잖아!”
다혜가 소리치며 수영이 다리를 다시 걷어찼다. 거북이 등 마냥 이고 있는 배낭이 그의 머리를 넘어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어쩔 수 없어. 이 계단만 올라가면 평지니까 걱정 없어.”
수영이가 다혜를 달래며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은 정말 살인적으로 많았다.
특히 5인용 텐트를 등에 맨 미스터 조는 한 바가지의 땀을 쏟아야 했다. 내가 뒤에서 그의 짐을 덜 무겁게 받혀주려다가 미스터 조는 계단에 얼굴을 쳐 박았다.
“우아!”
가장 몸이 가벼운 다혜가 먼저 올라가 뒤돌아 소리쳤다. 짧게 자른 단발이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멋지지?”
다혜가 소리치자 모두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울릉도가 한눈에 보였다. 여기저기 고기잡이배들도 보이고, 양식장도 보였다. 산위에 등대도 보였다. 그리고 계단을 다 오르자 정말 신기하게도 평야가 있었다. 들도 있었지만 나무 한그루 없는 잔디밭이었다. 진짜 놀기엔 그만이다.
“여기다 텐트를 치자!”
다혜가 기초 설계를 시작했다. 들뜬 다혜 덕에 나도 덩달아 춤을 추게 되었다. 텐트는 꽤 큼지막했다. 남자 둘이서 치기엔 버겨워 보이기에 나와 다혜가 도와 텐트 속에 들어가서 중심 기둥을 붙잡고 섰다. 기둥은 여자 무게로도 붙잡고 힘들만큼 무거워서, 몇 번이고 넘어뜨려서 수영이의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그것 밖에 못하냐!”
다혜가 소리치며 희선 손에든 망치를 뺏어다가 말뚝을 박았다. 그러다 잘못 자기 발등을 찍고는 땅을 데굴데굴 굴렀다.
수영은 놀라서 다혜에게 뛰어가고 희선은 다시 망치를 들고 땀을 흘리며 텐트를 쳤다.
제법 그럴싸한 연두색 텐트가 완성되었다. 텐트가 아니라 집처럼 보일정도로 크고 안정되어 보였다. 뒤편에는 절벽이 있고 그 다음에 자갈밭, 그리고 바다가 있다. 자갈밭에 가서 휴대용 조리 기구를 가지고 라면을 끓였다. 컵라면을 냄비에 삶았다. 찬밥이 있기에 그것도 함께 먹었는데 서로가 배가 많이 고팠는지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밥을 다 먹고 우리는 한바탕 운동을 하기로 했다. 나와 미스터 조가 편을 먹고 다혜와 수영씨가 편이 되어 2:2로 체육대회를 하기로 했다. 종목은 축구 피구 야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다에 있는 만큼 수영 마라톤을 하기로 했다.
“자! 우리가 여기 나무사이를 골대로 할게.”
골대는 없다. 나무와 나무사이 돌과 돌 사이가 골대다. 미스터 조는 생각보다 운동을 잘했다. 그리고 수영씨는 본래부터 체육선수였기 때문에 운동을 잘한다. 둘이 경쟁이 붙었는지
여자인 우리들이 골키퍼인데도, 온힘을 다 실은 강 슛을 날렸다. 내가 수영이의 슛을 팔로 막다가 빨갛게 살갗이 조금 긁힌걸 보고 흥분한 미스터 조가 공을 몰고 가서 다혜의 얼굴에다 공을 찼다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다혜가 미스터 조의 다리 사이를 온힘을 다해 때리고 말았다. 미스터 조는 비명한번 지르지 못하고 쓰러져서는 그대로 텐트에서 몇 시간을 쉬었다.
“괜찮아 동생?”
미안해진 다혜가 미스터 조를 달래보았지만, 이번에 제대로 겁을 먹었는지 다혜의 손길을 피하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너도 한 대 쳐.”
쿨한 다혜가 농담 삼아 말했더니 미스터 조의 눈빛이 순간 바뀌었다. 주먹을 쥐는걸 보았다. 물론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순간 눈빛은 조금 섬뜩했다.
“자 오케이. 축구는 우리가 이겼지만 반칙을 했으니까 동점으로 치고,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바로 야구를 하자!”
다혜가 소리치며 글러브를 끼고 달려 나갔다. 고교 야구 코치를 하는 수영씨 탓에 그의 배낭속에 절반은 야구용품이었다. 거기엔 제법 멋진 야구모자도 있었다.
“자, 이번에 지는 쪽이 먹은 그릇 설거지하기!”
다혜가 소리쳤다. 질 수 없는 경기다. 난 매일같이 설거지를 한다. 다혜가 이번만큼을 설거지를 하게 시킬 테다.
야구는 네 명 뿐이라서 룰을 조금 바꾸었다. 한명이 타자, 또 투수, 포수를 하고 타자의 상대팀 중의 한명이 외야수를 보기로 했다. 남자들은 타자를 할 수가 없고, 점수를 낼 수 있는 쪽은 여자들만 가능하기로 합의를 봤다. 결국엔 다혜와 나의 승부인 샘이었다.
“자 깜찍이팀 공격!”
다혜가 먼저 타자를 하게 되었다. 단발에 빨간 야구 모자를 쓰고, 옷마저 빨간 민소매를 입고 있으니 제법 귀여웠다. 내가 힘껏 공을 던졌다. 하지만 아무리 집중해서 던져도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넣기는 너무 힘들었다. 볼넷이 없다고 규칙을 정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경기가 영원히 안 끝날 뻔 했다.
“아웃.”
왜 그렇게 됐는지, 다혜는 공 한번 쳐보지 못했다. 엉뚱하게도 수영의 뒤통수만 연속으로 두 번을 때렸다. 수영은 반쯤 정신이 나간 표정이었다. 분명 안 맞는 거리에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다혜의 방망이는 수영의 뒤통수를 때렸다.
다음엔 내 차례, 다혜 와는 다른 색인 파란색 뉴욕양키즈 모자를 눌러쓴다. 갈색으로 염색한 파마를 한 머리카락이 눈을 가리기에 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기는 찰나, 그 앙칼진 계집애가 공을 스트라이크 존에 넣었다. 스트라이크가 되면 두 번의 공격기회를 잃게 된다.
“이씨!”
나도 승부욕은 꽤 있는 편이고, 운동도 잘한다고들 알고 있어서 지고 싶지 않았다. 기필코 한번은 쳐 내리라. 하지만 아무리 휘둘러도 공이 맞지 않았다. 결국 야구도 무승부로 끝을 내고 우리는 들판 위에서 잠시 쉬었다. 하지만 한 번도 못 쳐본게 너무 억울해서 다혜가 공을 던지고 야구 선수출신의 수영씨가 타자를 한번 해보기로 했다.
슉-.
하지만 헛스윙. 포수를 보고 있던 내 허벅지에 공이 맞았다. 꽤 아팠다.
“잘 좀 던져봐.”
자기 전문인 분야에서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게 너무 억울했던지. 수영이가 웬일로 다혜에게 화를 냈다. 화가 난 다혜가 공을 수영에게 던졌다. 하지만 수영은 잽싸게 몸을 뒤로 빼면서 야무지게 휘둘렸다.
탕.
꽤 그럴싸한 소리가 나고, 공은 태양이 떠있는 하늘 위로 치솟았다.
“우와!”
난 놀라 탄성을 내지른다. 하늘에 이름 모를 새들 사이로 공이 지나가는 듯 보였다. 하늘엔 멋진 구름도 떠있었다. 순간 하늘을 넋 놓고 보고 있었다.
“마이 볼 마이 볼!”
멀리서 언제 뛰어갔는지 언덕아래 절벽근처에서 미스터 조가 소리쳤다. 허리까지 자란 풀숲 속에서 글러브를 낀 미스터 조가 100m 떨어진 이곳에서도 보일만큼 해맑은 미소로 하늘을 보고 있다.
“미스터 조! 조심해요!”
저런 풀밭에서 뒤도 안보고 뒷걸음 질 치다간 넘어질 지도 모를 일이었다.
“으악!”
아니나 다를까 미스터 조는 돌부리에 걸렸는지 나자빠지고, 공은 그의 얼굴위로 떨어졌다.정말 대단한 몸 개그였다. 다혜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수영씨도 자기가 친 공이 아웃이 안 된 것이 만족스러운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늘은 점점 높아지고, 계절은 가을에서 도로 여름으로 돌아가는 듯이 점점 더워 졌다.
다음으로,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물놀이를 하기로 했다. 수영복을 입기엔 너무 유치한 것도 같아서 각자 짧은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물놀이를 했다.
“미스터 조. 바닷물이 얼만큼 짜요?”
대뜸 미스터에게 묻자, 그가 물속에 잠수를 한다. 그러다 몇초 후에 얼굴을 내밀더니 코와 입안에서 물을 뿜어내며 인상을 찡그린다.
“어우, 많이 짜요.”
웃기지만 나도 해보고 싶다. 바다가 얼만큼 짠지 사실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물속에 얼굴을 집어넣는다. 공기에 둘러쌓일 때보다, 바다에 둘러 쌓이니 기분이 다르다. 우주가 나에게 집중된 느낌이었다. 입을 슬며시 열었다. 우엑.
“아우. 진짜 짜네요.”
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키가 큰 미스터 조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바다 물맛이 짠 게 나에겐 왜 이렇게 새삼스러울까?
“자, 헤엄을 쳐서 저기까지 갔다 오기 해요.”
난 미스터 조와 수영 대결을 하고 싶어졌다. 수영이라면 자신 있었다. 초등학교 때 매일 주말만 되면 애들하고 동네 목욕탕에서 야단 좀 맞았다는 나다.
“준비, 시작!”
다혜가 심판을 보기로 했다. 난 나름대로 멋지게 물속을 가로지르며 배처럼 누워 신나게 발을 첨벙거렸다. 눈을 감고 정신없이 손을 휘젖다 보니, 어느새 도착점이었던 스티로폼 부표에 손이 닿았다. 눈을 뜨고 보니 미스터 조는 아직 한참이나 뒤에 있었다. 다시 잠수를 한다. 온몸을 춤을 추듯 비틀면서 발을 동동 구른다. 그러다 미스터 조와 머리를 부딪치고, 미스터 조는 방향감각을 잃고 옆으로 헤엄쳐 가기 시작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즈음엔, 미스터 조는 힘이 빠졌는지 물속에서 물을 먹으며 비명을 질러댔다. 수영이가 겨우 그를 발이 닿는 곳 까지 끌고 나와 다행히 살았다.
“으아. 바다엔 다시는 안가.”
자갈밭위에서 새빨개진 눈을 한 미스터 조가 말했다.
“남자가 그렇게 수영을 못해서 어따 써먹어요. 그래가지고 좋아하는 여자가 물에 빠지면 목숨 걸고 구해주겠어요?”
내가 묻자 미스터 조는 또 억울한 표정을 짓는다. 습관적으로 사회봉사카드를 꺼내려는 듯 보였다.
“좋아하는 여자가 물에 빠지면 밧줄이나 튜브 같은걸 던져 줘야지 바보같이 왜 들어가요?”
미스터 조가 말했다.
“응, 메너 없네.”
난 말하고 그의 곁에서 일어났다.
“엇.”
미스터 조가 따라 일어났지만 바다로 들어가는 나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그러지 말고 이번기회에 수영을 배워요.”
미스터 조는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내가 그의 팔을 잡아끌고 다시 바다로 들어갔다. 슬슬 추워져서 몸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아직 심장은 뜨거웠다. 한때 수영을 하기도 했던 수영이의 코치로 우리들은 정식으로 수영을 배웠다. 바다위에서 눈을 뜨고 있는 것도 연습하고 파도에 몸을 실고 물위에 둥실둥실 떠있는 방법도 익혔다. 하지만 희선에겐 역부족이었다. 이상하게 그의 몸은 떠오르지 않고 가라앉았다. 일일 수영 코치를 자처한 수영이도 코로 물이 들어가 토하듯 켁켁 거리는 희선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혜와 내가 평형과 바다식 자유형을 익힐 때 즈음엔, 미스터 조는 반쯤 정신이 나간채로 부표를 붙잡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버너에다 밥을 지었다. 밥 냄새가 이처럼 향기로울 수가 없다. 수영이가 뚜껑을 열지만 않았어도 압력밥솥 부럽지 않은 맛있는 밥이 되었을 것이었다. 다혜와 수영은
카레라이스를 만들었다. 카레가루를 물에 풀어 손가락으로 대충 젓더니 껍질도 벗기지 않은 양파를 댕강댕강 썰어 물에 풍덩 집어넣었다. 당근도 감자도, 다진 고기도 대충 썰어다가 집어넣는게 보였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우리 쪽에서 만든 밥도 너무 질어서 욕먹을지도 모르니 참기로 했다. 저녁은 만찬이었다. 진밥에 묽은 카레라이스. 플라스틱 숟가락도 개수가 모잘라서 미스터 조는 나무젓가락으로 떠먹다가 나중엔 마시듯이 먹었다. “이건 좀 심했다.”
내가 제대로 씻기지도 않은 당근 꼬투리를 잡아들었다. 끝이 할아버지 수염처럼 길었다.
“헤헤헤헤.”
밥먹으며 맥주 한 켄을 뜯어다 마시던 다혜가 불그스름한 얼굴로 웃었다. 저녁이 되어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바다위에서 지는 해를 보고 싶었건만 아쉽게도 울릉도가 지는 해를 가렸다. 등대 뒤로 지는 해를 보면서 난 다시 명상에 잠겼다. 희선은 아직도 설거지를 하는 중이었다.
“내 팔 핥아봐.”
다혜가 제 팔을 수영씨에게 들이 멀자 수영씨가 뱀 혓바닥 같은 혀로 팔을 핥았다.
“짜지.”
다혜의 말에 답례를 하듯이 수영이가 인상을 찡그렸다.
오늘 햇빛을 너무 많이 받아 광합성은 충분히 했다. 덕분에 기미가 100개는 생길지도 모르고, 얼굴을 부시맨 부인처럼 까맣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뭐 어떤가. 난 연예인도 아니고 예쁜이도 아니니까. 쓸데없는 걱정일 뿐이다. 그렇게 탠트 안에서 야영을 했다. 밤이 될 때까지 잘 치지도 못하는 기타를 들고 온 수영이의 기타연주를 들으면서 우리는 놀았다. 캠프파이어까지 해보려고 했지만, 풀이 많아 자칫 위험해서 그만두기로 했다. 가을이라 잘못하면 불이 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밤이 되어 우리는 또 한가지 놀라운 경치를 보았다. 내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차가움에 놀라 눈을 뜨니 미스터 조가 내 뺨에 손을 갖다 댄 것이었다. 놀라서 일어나니 그가 내손을 잡고 어디론가 데려갔다. 죽도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었다.
“봐요.”
그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놀랍게도 밤알만한 별들이 떠있었다. 너무 놀라서 눈을 감았다 떠봐도 그대로였다. 달만한 별들이 바다에 떠있던 것이었다.
“저게 대체 뭐에요? 너무 아름다워요!”
나도 모르게 지그시 눈을 뜨고 멍하니 보게 되었다.
“오징어 배에요.”
미스터 조가 설명을 해준다. 빛을 보고 달려드는 오징어의 습성을 이용해서, 밤에는 대형 전구를 가지고 오징어를 잡는 배들이 많다고 한다. 울릉도에서는 이렇게 오징어잡이 배를 심심찮게 볼수 있다고 한다.
“오늘은 유난히 멋지네요.”
미스터 조가 말했다. 술을 조금했는지 별빛에 보이는 그의 얼굴이 빨갛게 보였다. 언덕 아랫 편에서는 바다위의 은하수를 보며 애정행각을 벌이는 다혜와 수영이 보였다. 어른 앞에서 무슨 경거망동이냐고 한마디 하려고도 생각했지만, 그보다 별들의 축제는 더욱 아름다웠다. 그렇게 언덕 위에서 미스터 조가 가져다 준 이불을 안고 잠에 빠졌다.
잠에 빠진 시간, 추위가 외로움과도 같이 내 온몸 구석구석을 파고 드려 한다.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가운 바람이 들 때마다, 난 조금씩 작아진다. 온기, 하지만 내 심장은 뜨겁지도, 따뜻하지도 않다. 온기를 찾아 조금씩 움직이고 끝내 찾은 따뜻한 무언가에 조금씩 파고든다. 내 뼛속으로 스며드려는 이 외로움을 벗어나게 해주세요. 간절한 기도에 응한 살아있는 심장은 나를 다시 살아있게 한다.
아침에, 가장 늦잠을 잔건 다름 아닌 나였다. 어제 먹은 한 잔의 술 탓인가, 들판에서 잠들었는데 일어나보니 텐트 안이다. 누군가 날 옮겨 놓은 것이다. 조금 부끄러웠다. 짐을 정리하고 텐트를 걷고 나니 노총각 아저씨가 우리를 데리러왔다. 그리고 또다시 시작되는 경제 한탄을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다시 우리들의 홈베이스 울릉도로 돌아왔다.
아침에 미스터 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배를 타면서 다시 시작된 멀미와 겹치면서 울릉도에 도착했을 땐 거의 바닥에 기절하다시피 했다. 바늘 같은 정신을 놓지 않으려는 듯, 자기 품속에 인증카드를 꼭 쥐고 있었다.
“왜 그래요? 미스터 조! 괜찮아요?”
바닥에 앉은 그의 뺨을 만져보니 뜨거웠다. 입고 있는 셔츠 안에 손을 집어넣었더니 너무 뜨거워서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수영씨! 희선씨가 이상해요!”
버스표를 사러간 수영에게 소리치자, 수영이가 사태를 짐작하고 다가와 곧바로 등에 들쳐 업었다.
“세상에, 장난이 아냐.”
인근의 병원을 데려가 눕혔다. 열은 39도를 넘어섰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었다.
괜스레 미안해진다. 못하는 수영을 하고 못 타는 배를 타고, 그리고 어제는 잠든 나를 옮기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가 식어가는 땀에 온기를 빼앗기고 감기가 걸린 게 틀림없다. 병원에 도착하니 다혜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녀도 다른 병실에서 링겔을 맞게 되었다.
난 미스터 조의 간호를 맡고 수영씨는 다혜의 곁으로 달려갔다.
“괜찮아요? 미스터 조.”
미스터 조는 죽어가는 앙리처럼 숨을 내뿜었다. 추위에 몸을 아직도 떠는 듯 보였다.
“아무 문제없어요.”
앙리와는 다르게 말을 했지만, 그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또 눈물이 난다.
“과로일 뿐이에요.”
웃는 그의 얼굴이 결국 나를 눈물짓게 했다. 아픈 건 그인데, 위로를 받고 간호를 받는 건 나였다. 그는 울고 있던 내 손을 잡았다.
“내가 있을 때만큼은 울기보다 웃어줘요.”
미스터 조가 말한다. 억지로 웃으려다가 또 한줄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빠생각이 났다.
죽기 직전까지 괜찮다고 그가 그랬다. 그 괜찮다는 말을 100번만 덜했어도 10년은 더 살았을 지도 모른다.
“외로움은 뼛속에 있죠. 지금은 어때요? 지혜씨.”
난 대답대신에 그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머리에 물수건을 헹구어다가 얹어주었다.
열을 재어보니 아직 38도를 넘었다.
“정말로 고마워요. 이렇게 무리를 해가면서 나에게 맞춰준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어요.”
눈물은 어느새 멎었다. 그도 조금씩 눈이 감기는 모양이었다.
“그래요. 내가 언제까지 당신 곁에 있어줄 수는 없으니, 내가 한 말들을 생각하면서 스스로의 우울증과의 싸움에서 꼭 이기길 바랄게요.”
희선이 하는 말이 멀게 느껴졌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잠에 빠졌다. 병실에 혼자 앉아서
들리지도 않게 틀어놓은 TV화면의 빛에 조금씩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 나도 여행에 피곤해진 마음을 편안한 그의 침대위에 올려놓고 말았다. 침대는 생각보다 편안했다. 전혀 좁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좁으면 좁을수록 좋다. 나는, 꿈을 꾼다.
꿈이다. 꿈인 것을 느낄 수가 있다. 하지만 의식도 있다. 병실, 아빠가 있다. 나는 울고 있다.
“눈 감지 마!”
어린 나는 아빠에게 소리친다.
“아빠. 잠좀 잘게 지혜야.”
아빠는 감기는 눈을 한 채로 말한다.
“싫어. 잔다고 해놓고 그대로 죽어 버릴거 나 다 알아. 그렇게 그냥 자는척하면서 죽어버릴거지?”
어린 나는 소리친다.
“아니야. 정말 피곤한 것 뿐이야 지혜야. 잠을 자야 빨리 낫지.”
아빠는 말한다.
“싫어. 안 돼. 거짓말인거 다 알아. 눈감으면 안 돼! 내가 다보고 있어.”
병실. 장에서 시작된 암세포가 위에까지 전이되어 의사는 길어도 한 달을 못 넘길거라고 했다. 어릴 때의 나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나는 아빠의 병실에서 열흘간을 잠도 못 자게 괴롭힌다. 눈을 감으려고만 하면 아빠의 등을 꼬집거나 얼굴에 물을 부었다. 엄마가 나를 뜯어 말렸지만, 아빠는 나를 내치지 않았다. 그렇게 아빠는 밤엔 내가 괴롭혀 한숨도 못 주무시고, 내가 학교를 간 아침에만 설 잠을 잤다.
“잠자면 안돼. 나 놔두고 가면 안 돼 아빠. 눈감으면 안 돼. 안 죽을 거라고 약속했잖아.”
아버지는 철없는 나에게 또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다시하고, 또다시 죄를 짓는다. 열흘, 열흘째 되는 날 아버지는 눈을 감는다. 밤에 조용히 잠든 어린 나 몰래,
이제야 잠 같은 잠을 자겠구나. 눈을 감고 깊게 잠이 든다.
다음날, 통곡소리에 어린 나는 잠을 깬다. 10일째,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겠다고 몰래 혼자만 한 약속을 어린 나도 지키지 못하고 멍하니,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흘리려 눈을 찌른다.
“왜 또 울어요.”
따스한 목소리에 눈을 뜬다. 바보같이, 환자의 침대를 점령하고 있는 내가 있다.
“아.”
벌떡 일어난다. 일어나다 그의 팔에 꽂힌 주사바늘을 건드리고 만다.
“아야.”
엄살이 심한 희선은 팔을 붙잡고 몸을 부들부들 떤다. 엄살을 피우는걸 보니, 한숨 자고 난 그도 꽤나 많이 조아진 모양이다. 잠시 웃다가 침대를 보니 또 흘린 내 눈물자국이 있다.
“아, 또 침 흘렸네.”
말하며 입을 스윽 닦아 보지만, 부은 눈으로 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왜 또 울었어요.”
미스터 조가 주삿바늘을 빼내며 웃어 보인다. 퉁퉁 부은 눈으로 다시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린다.
“아니, 이건 슬퍼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웃으며 말한다. 거울을 보니 왕눈이 여자 친구 같은 내가 있다. 옆으로 미스터 조가 다가 선다. 원래 개구리를 닮은 그는 영락없는 개구리 왕눈이다.
“다음 주에는 중국으로 가야 해요.”
오늘은 금요일, 주말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 그가 곁에 있어야만 우울증을 견딜 수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가 없이도 난 우울증을 극복하고 자신 있게 살아야 한다. 게다가, 나에겐 나밖에 모르는 현진이가 있지 않는가.
“알았어요. 떠나도 아쉬운 마음 없으니 그런 불쌍한 개보듯이 보지 마세요. 나 남자친구 있거든요!”
도도한척 소리쳐 본다. 그의 어께에 내가 만든 자국이 있다.
오후가 되어, 다혜는 링거를 들고 병실의 문을 열어젖힌다.
“이 자식아!”
링거 한방에 그녀도 원기 충전이다.
“너한테 옮은 거야!”
다혜가 미스터 조의 다리를 걷어차고, 미스터 조는 넘어졌다. 간호조무사 들이 들어와 놀란 눈으로 미스터 조에게 달려가고 다음으로 웬일인지 코피를 흘린 수영이가 병실 안으로 들었다. 알고 봤더니 다혜가 수영이의 뒤통수를 때린 탓에 수영이는 약간의 뇌진탕 증세를 보인 모양이었다. 정작 병실에 드러누워야 하는 건 그였다. 다혜의 팔에서 주사바늘을 빼고,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될 때 즈음엔, 내가 흘린 눈물도 다 말라있었다.
토요일, 우리는 다시 포항으로 돌아왔다. 포항에서 다시 고속도로를 타고 부산, 부산에서 일행은 모두 헤어지고 다혜와 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혜는 집으로 돌아와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화장실로 들어가고, 나는 짐을 정리하고 몰래 몇 장 찍어놓은 사진을 정리했다. 집에 도착해서 베란다로 가보니, 그가 남기고 간 곰 인형 세트가 바짝 말라 보송보송해져 있었다.
그렇게 주말이 끝나고 다음 날, 그의 품에 안기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함께 언덕위에서 뛰어 놀았던 추억을 뒤로하고 오늘은 나 혼자 그를 배웅해주기로 했다. 차가 없는 그를 대신에 그가 묵고 있는 호텔 앞까지 가서 그를 태우고 공항까지 바래다주었다.
“진짜 이럴 거 까진 없는데.”
공항 앞, 가슴엔 FREE HUGS피켓을 하고, 커다란 가방을 질질 끌면서 그가 말한다.
“됐거든요. 난 공과 사는 분명한 사람이에요. 분명 미스터 조는 나를 치료해 준 거라고요.
봉사라고는 하지만 난 불우이웃은 아니니까 당연히 사례를 해야죠.”
사실은 작은 돈을 그의 주머니에 넣어줬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정말 몇 푼 되지는 않았다. 돈을 건네는 건 좀 그렇지만, 그래도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거라고는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언제 돌아와요?”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다.
“글쎄요. 중국 변두리 지역이라서 가는데 만도 3일은 걸리거든요. 사회봉사를 하기위해 가는 것이긴 하지만, 이동경비를 코이카에서 모두 지원해주지는 않거든요.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간 다음 대륙횡단 열차를….”
그는 끝까지 말이 많다.
“그만, 그래 언제 돌아오는데요?”
내가 말을 자르자, 그가 잠시간 웃더니 대답했다.
“두달 정도.”
그가 머리를 긁는다. 곰 인형 머리를 씌어주고 싶다.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미스터 조가 말하며 손을 높이 든다. 곰 가죽 옷이 아닌 케쥬얼 복을 입은 그가 이상스럽다. 키가 큰 그가 높이 손을 드니 더더욱 높아 보인다. 키가 크니 존재감도 있다. 그런 그가 사라진다니 익숙하지가 않았다. 아쉬웠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 헤어지는 것이다. 만남은 늘 벅차오르고 이별은 늘 아쉬운 법.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덜하려면 인사를 할 때 마음을 담아 안녕이라고 인사하고 돌아서면 뒤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저기.”
기껏 뒤돌아섰더니 그가 나를 부른다. 흠칫 돌아보니 팔을 벌리고 있다.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하나님의 것처럼 따뜻해 보인다.
“잊고 있었던 게 있어서요."
그의 따뜻한 음성이 내 마음에 울려 퍼진다. 그의 가슴팍에 FREE HUGS 피켓이 나를 부른다. 난 달려간다. 엉덩이는 뒤로 쭉 빼고 엎어질 듯이 머리를 들이밀면서 그의 가슴속으로 돌진한다. 이대로 그의 가슴을 뚫고 나오고 싶다.
안긴다.
나도 안는다. 그의 가슴에 피켓이 구겨지든, 살이 찐 내 엉덩이가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이든 신경 쓰지 않는다. 헤어질 때도 처음처럼, 그리고 다시 만날 때도 이렇게 만나리라.
“돌아오면 제일먼저 나한테 연락해야 해요.”
그에게 말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는지 왜 안 물어 봤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뭔가 물어볼 말이 생각 날 때 즈음 그는 사라졌다. 있지도 않은 것처럼 말이다. 순간 허탈함에 풀썩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품속의 온기를 기억하며 간신이 두 다리로 섰다. 그가 없다고 해서 무너질 내가 아니다.
그래, 다시 생각해보자. 본래부터 나는 원래 혼자다.
-5-
To. 미스터 조.
안녕하세요. 나에요. 벌써 잊은 건 아니겠죠? 난 당신의 환자잖아요. 잘 지내시나요? 네.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당신이 시킨 말 그대로, 난 지금도 열심히 살아 움직이고 있어요. 올 겨울은 분명 그렇게 춥지 않을 거예요. 겨울옷도 미리 많이 사두었고, 아파트의 보일러가 정상인지 확인도 해두었어요. 이렇게 준비를 해두었으니 그 뼛속의 외로움은 분명히 날 찾아오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요.
당신이 가르쳐준 우울증의 치료의 단계를 다시 한 번 적어봤어요.
1. 자신이 외롭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도움을 청하라.
2. 가급적 스킨쉽을 많이 해라. (주의 변태로 오인 받을 수 있음.)
3. 지워지지 않는 부정적인 생각은 입을 통해 배출하라.
4.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라.
맞나요? 맞다면 난 이대로 행동하고 있어요. 최근에는 남자친구와 함께 포항 근가에서 번지점프를 멋지게 성공했거든요! 미스터 조가 봤다면 정말로 감탄 했을텐데 말이에요. 아! 다혜와 수영네도 잘 있어요. 내년에는 아무래도 결혼을 할 모양이에요. 물론, 나도 내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기로 했지만 사실 그렇게 내키진 않아요. 엄마는 무작정 하라고 하기는 하는데, 과연 내가 행복해서 그와 결혼하는 것일까, 아니면 행복하기위해 결혼하는 것인가 조금 헷갈리거든요. 솔직히, 난 아직도 그에게 마음이 모두 가지 않거든요.
겨울이 오고 있어요. 겨울의 차가운 바람은 내 입속 콧속으로 몰래 들어와 내안을 텅텅 비게 만들어 놓곤 했어요. 하지만 이렇게 준비를 했고, 또 미스터 조가 가르쳐준 방법이 있으니 이번만큼은 겨울이 나를 빗겨 갈 거라고 믿어요. 그럼 돌아오면 그땐 꼭 술한잔 해요. 요즘에 술자리가 많아 술이 많이 늘었거든요. 분명 미스터 조보다는 잘 마실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이만.
ps. 미스터 조가 남겨놓고 간 곰 인형 세트는 내가 잘 보관하고 있어요. 세탁하는데 비용이 꽤 들었어요.
from 지혜.
바보같이도, 나는 오지도 않은 편지에 보내지도 않을 답장을 써놓고 말았다. 그가 내 곁을 떠난 지 약 한 달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준비, 계획. 인내. 모든 건 그가 떠나는 동시에 끝났다. 난, 그를 만나기 이전, 가을비가 내렸던 도로에 비를 맞는 그대로였다.
허탈감에 술을 마시곤 했다. 요즘은 술이 많이 늘어서 아무도 없이, 그리고 안주도 없이 반 병은 비워낸다. 중독이 되려고 한다. 그리고 아무래도 약이 필요할 것 같아 또 정신과에 들러 약을 받아왔다. 이전에 받은 약은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한통의 약을 받아, 근처 패스트 푸드점에 들어가 콜라와 함께 여섯 알을 먹었다. 현진과의 기나긴 연애도 끝을 내버렸다. 번지점프를 하러 같이 갔다가 결국은 뛰어내리지 못하고, 그 화풀이를 현진에게 하고 말았다. 하지만 현진은 끝까지 내게 화내지 않았고, 난 그 지긋지긋한 한숨소리를 한 번 더 들었다간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서 쉰 목소리로 “끝내.”라고 말했다.
일주일째, 난 밖을 나가지 않았다. 몸을 씻는 것도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밤에만 씻는다.
살은 10kg정도는 찐 것 같고, 얼굴은 보기 민망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앙리를 대신에 새로 산 애완동물은 영양실조로 비실 대길 래 땅에다 묻어 버릴까 하다가 도로 팔았다. 사실 값을 안 쳐주기에 그냥 버리고 왔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모든 게 귀찮다. 내 머릿속에는 온통 부정적인 상상들로 가득하고 고통스럽다. 마치 내 주위가 공기로 가득 차 있는 게 아니라 물에 잠겨있는 듯 숨을 쉴 수도 없고 물에 잠겨 있는 게 아니라, 땅속에 ANE힌 듯이 꼼작도 할 수가 없다. 자, 이제 커다란 칼을 가지고 와라. 내 가슴을 후벼 파서 뛰지도 않는 심장 속에 썩어 가는 내 검붉은 피를 바닥에 보여 다오.
“언니. 세상에 이게 다 뭐야.”
며칠 동안 연수를 다녀온 다혜가 집안을 들여다보더니 소리쳤다. 일주일 만이다.
이렇게 사람이 우리 집에 온 것이 말이다. 그때서야 주변을 둘러보니 빈 콜라 패트 병과 약을 먹고 버린 쓰레기들, 그리고 애완견용 사료가 바닥에 뿌려지듯 있었다. 내방에는 여러 옷가지들이 널브러져있고, 주방도 거실도 화장실도 엉망이었다.
“언니.”
다혜는 나를 부둥켜안는다.
“진짜 미안해. 겨울에는 곁에 꼭 있어 줘야 되는데 그렇지.”
다혜가 또 그럴싸하지도 않은 연기를 해댄다. 귀찮다.
“뭐 먹을래? 내가 일본 가서 맛있는 음식 사왔지롱.”
다혜가 말하며 후라이 팬을 잡는다. 난 화장실로 들어간다. 문을 잠그고 멍하니 거울을 본다. 거울에다 욕을 해댄다. 내 욕. 현진이 욕. 그리고 다혜에게도 욕을 해댄다. 내가 대체 왜 이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중요한건, 빨리 이 머리를 총살시켜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 눈물이 난다. 욕을 실컷 하고나니 미안해 졌다. 미안하다는 말은 못하고 다혜의 짐을 정리해 준다. 정리하다가 다혜의 가방 속에 든 내 옷이 보이자 또 화가 난다. 비명을 지른다.
“언니 왜 그래.”
다혜가 놀라서 달려왔다.
“미안.”
짧게 말하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잠을 잔다. 내가 문을 잠글 때 까지, 다혜는
요리를 하기위해 집어든 뒤집개를 들고 멍하니 날 보고 있었다.
밤. 그놈의 밤이 또 나를 찾아왔다. 어두컴컴하고 견딜 수 없이 차가움이 구렁이처럼 내안을 파고든다. 여기저기 할 것 없이 구멍이란 구멍 속으로 파고든다. 아무리 입을 닫아도, 그리고 숨을 꼭 참아 봐도 그놈의 구렁이는 목구멍을 타고 내 위장을 조물딱 거리다가 척추뼈 안으로 들어간다.
비명.
또 소리 지른다. 잠을 자다 깬 다혜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언니. 왜 그래. 괜찮아?”
참았던 숨을 터뜨리고 한 움큼의 눈물을 쏟는다.
“가.”
말해놓고, 후회한다.
“언니….”
쾅.
아무거나 잡히는 데로 잡고 던졌더니, 하필이면 그것이 다혜의 얼굴이 있을 만한 부분으로 가 부딪혔다. 뒷걸음질 치는 소리가 들렸다. 난 외로움의 노예. 우울증은 그렇게 이미 내 척추 뼈 안에 알을 까버렸다. 시린 뼈를 안고 그렇게 잠이 든다.
꿈.
또 꿈을 꾼 모양이다. 잠을 깨어보니 끈적거리는 액체 속에서 겨우 숨을 튼 것처럼 온몸이 찝찝하고 이불은 땀에, 배게는 눈물에 젖어있었다. 또 무언가를 찾는 꿈을 꾼 모양이었다. 대체 난 꿈속에서 뭘 찾는 걸까. 너무너무 갑갑하고 견딜 수가 없다. 아직도 새벽 4시. 날이 밝아지려면 2시간은 넘게 기다려야만 한다. 이렇게 찝찝한 기분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쏴아.
보일러를 키고 욕탕으로 들어갔다. 아직 따뜻해지지 않은 물로 샤워를 한다. 추위에 온몸이 떨린다. 털끝, 젖꼭지 끝까지 곤두선다. 추위에 덜덜 떠는 내가 보인다. 한없이 불쌍하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불쌍한 여자로 만드는 것일까. 젖은 몸을 아무렇게 닦고 다혜의 방을 열어보았다.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없었다. 어젯밤, 수영과 함께 있다가 나간 것이다. 아니, 도망간 것이다. 집엔 아무도 없다. 다혜의 방에 있던 물컵을 잡아 바닥에 내팽겨 쳤다.
쨍그랑.
보기 좋게 깨져 버렸다. 이젠 확실하다. 이렇게 시끄러운 소리가 났는데도 없다면, 집안엔 아무도 없는 것이다. 깨진 유리를 밟으며 방안 깊숙이 들어갔다. 유리 파편이 발바닥을 파고들어 난 아픔에 눈물을 흘린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이가 부딪히고, 발바닥이 아파 제대로 걸을 수가 없다. 화장대 위에 알몸의 내 모습이 보이자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그렇게, 옷장 문을 연다.
“난 왜 이렇게 된 거죠. 미스터 조.”
옷장 속에는 곰인형 세트가 있다.
“이해가 되지 않아요. 난 소설가에요. 이유가 없는 과정은 없죠. 하지만 내 우울증엔 이유가 없어요. 좋았던 순간이 한순간에 뒤집히듯이 바뀌어 버리죠. 내가 왜 이렇게 된 거죠. 당신에게 받은 치료의 과정은 모두 생각나요. 그리고 당신과 함께 한 여행도 분명 즐거웠고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하지만 이 꼴을 보세요. 어쩌면 좋아요.”
곰 인형은 가장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움직이지 못한다.
“우울증이란 핑계로 너무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어요. 다혜에게도 현진이 에게도 미안해요. 이러고 싶지 않은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늘 행복했으면 하는데, 내 행동은 생각과 반대로 움직이고 있어요. 어떡하면 좋아요."
난 침대위에 누웠다.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오히려, 나를 좀 더 깊은 수면으로 이끄는 듯도 했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팍실 통을 열어젖히고, 그 안에 담긴 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혀가 마비되듯 삼키기도 어려웠다.
“제발 내말에 대답해요!”
곰 인형에다 대고 말했다. 약은 슬슬 위액에 녹아가는 모양이었다. 눈이 슬슬 감긴다.
“제발 대답해요!”
내목소리가 방안에 메아리쳤다. 곰 인형의 입이 움직이길 기도한다. 제발 이대로 날 혼자 내버려 두지 않기를, 이 공기 속에 든 산소가 모두 타고 나면, 나는 꼭 소처럼 입을 오물거리며 되새김질을 해야한다구요.
이리저리 몸을 뒹굴기를 30분, 약기운이 돌자 슬슬 정신이 몽롱해지며 기가 빠져나가듯 몸에 힘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미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아침에 옥상위로 올라가야겠다. 그리고 거기에서 세상에서 가장 멋진 번지점프를 해야지. 유서는 간결하게, 주위사람들을 힘들게 해서 정말 미안했습니다. 정도로 남겨두어야겠다. 유산은 이민 간 내 동생들에게….
‘외로움이란, 뼛속에 있답니다. 아가씨.’
머릿속에서 그가 내게 해준 말이 내 귀에 들려왔다. 약기운 탓일까. 마치 곰 인형이 내게 말을 한 것처럼 들려온다.
“그래요. 외로움은 내 몸속에 있죠. 그러니 누군가가 곁에 있다고 해서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거든요. 누군가에게 배운 말이긴 하지만 맞는 말이에요. 난 남자친구도 그리고 친구들도 있지만 외로웠어요. 너무 힘이 들어요. 아무것도 하기가 싫고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어요!“
그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내게 말을 건네었던 곰 인형은 아무런 말이 없다.
“왜 말이 없죠? 무슨 말이라도 해보세요.”
그는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하기 싫다. 죽고 싶다. 당신을 힘들게 하는 말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간절한 말이군요.”
그가 말했다.
“무슨 뜻이죠?”
‘나에겐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옷장 속에 걸려서 당신이 나를 찾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릴 뿐, 당신을 찾아 갈수가 없지요. 내안을 열어봐주세요.’
그가 말한다. 지퍼가 달린 그의 가슴을 조심스레 열었다. 텅 비어있었다.
“그래요. 이렇듯 내안은 텅텅 비었지요. 그렇기에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난 의욕이란 게 없습니다. 심장이라는 것이 없어 나는 살아 움직일 수도 없지요. 난 죽어있는 것과 다름없어요. 내안은 한없이 공허하여 행동할 수 없게 만들죠.”
그가 말했다. 왠지 그의 표정이 슬퍼보였다.
“난 반대에요. 난 주위의 공기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어요. 차가운 바람은 나를 떨게 만들어요. 난 주위의 온기가 필요해요. 주위로부터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따뜻한 옷이 필요하거든요.”
헐벗은 내가 떨며 그에게 말했다. 새벽의 공기는 한없이 차가웠다.
“내안으로 들어오세요.”
그가 따뜻한 입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난 주저하지 않고 그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몸속은 그 어떤 이불보다 따뜻했고, 또 누구의 품보다 안전했다.
“따뜻하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나를 감싸 안았다.
‘나 역시 한없이 따뜻합니다.’
그렇게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 다시 시작되는 우울증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이전에 만났던 학교 동창들을 만나보는 거였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 간의 접촉을 많이 하는 것이 우울증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저녁 약속장소로 나가서 이전의 친구들을 만났다. 부산 하단의 유명한 곱창 집이였다.
“우와 이게 얼마만이야.”
머리를 길게 길러서 꽁지머리를 한 경식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나를 반겼다. 소설 쓰는 사람 티를 내려는 듯이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이 보인다. 흰 와이셔츠에 양복 마이를 어께에 걸치고 있다. 얼굴을 보니 그에 대한 기억도 난다. 가장 엉뚱한 소설을 쓰던 친구다.
“아. 경식이구나.”
악수를 했다. 손이 생각보다 부드럽다.
“어서 와. 친구들 다 너 기다린다.”
어께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다. 하단의 유명한 술집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나이트클럽과 노래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오히려 정겹게 느껴졌다. 그렇게 술집 안으로 들어가자 모두가 박수를 친다.
“우와! 우리 부산대 문학 동아리 ‘주전부리’의 부회장님인 이지혜아냐!?”
“안녕.”
내가 멋 쩍에 웃으며 인사했다. 여자들도 꽤 있었다. 모두가 나를 반겨주었다. 가슴이 따뜻해 졌다.
“캔디 우리 캔디 왔네.”
혜영이라는 스포츠 신문 기자로 일하는 그녀가 내 어께에 손을 얹었다. 스포츠 기자 티를 내려는 듯이 반팔 셔츠와 단발머리를 했다.
“캔디라니?”
내가 그렇게 묻자 경아라는 여자친구는 기억이 난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웃어댔다. 웃어 대는 건 모두들이였다. 정작 난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왜 기억 안나? 너 캔디만화 주제가만 부르면 눈물을 보였었잖아 안 그래?”
“내가 그랬다고 말도 안 돼!”
나도 술이 들어갔는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여자아이 하나가 노래를 부른다.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슬퍼진다.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눈물이 고였다. 이건 말도 안 돼. 31살이나 먹은 노처녀가 만화주제가 따위로 눈물을 짓다니….
“와하하! 지금도 울먹이고 있어!”
현수가 소리치며 웃어댔다. 모두가 시끄럽게 웃어댈 때, 나만 엉뚱하게 질질 짜고 있었다. 그렇게 만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술안주 삼아 나도 소주 두 잔을 마셨다. 헤롱헤롱 머리가 이리저리 굴러 떨어질 듯이 어지러웠지만, 옛 친구들 앞이니 괜찮았다.
“그래 경아 너는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됐지?”
나이가 벌써 31살이니 결혼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벌써 5년이야! 애가 5살이라고!”
경아라는 친구는 아기 엄마이지만 날씬하고 옷도 잘 입는다. 웨이브 한 머리가 마음에 들었다.
“우와 빠르긴 빠르다.”
스포츠머리를 한 현수는 혀를 내밀었다가 술을 한잔 들이켰다.
“너는 돌 잔치때도 안 왔잖아!”
경아가 소리치며 손가락으로 현수의 이마를 찌른다. 현수가 멋쩍게 웃고 나도 따라 웃었다.
“그래 결혼 안한 건 나뿐인가?”
경식이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안했다.
“그래 너는 준성이랑 결혼 했었지 아마?”
경식이가 말했다. 그는 내 대답을 듣고 술을 들이키려고 술잔을 들고 있었다. 모두가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준성이라니… 그 사람은 누구지?
그렇게 술자리를 끝내고 나왔다. 배웅해주겠다는 경식을 마다하고 나와서는 혼자 비틀거리며 유흥주점의 불빛 속을 걸어가면서, 나는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하나같이 “준성이는?” 이라고 물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경아의 표정. 그녀는 인상이 굳어져서 경식에게 눈치를 주었다. 마치 물어서는 안 되는 말을 꺼내는 것처럼. 하지만 경식은 왜 그러냐는 듯이 나에게 다시 물었다.
“준성이 말이야. 글 쓰는 네가 좋다고 동아리회원으로 가입한 그 준성이… 랑 결혼한다고 학교에 소문이 자자했었잖아?”
글 쓰는 내가 좋아 동아리회원이 되었던 남자는 현진이가 아니었던가? 생각해보면 아닌 것도 같다. 현진은 생각해보니 같은 대학을 다니지도 않았다. 그럼 대체 누구였지. 진짜 준성이라는 이름이었던가? 알 수 없는 미궁으로 사고가 빠져버렸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그럼 현진은 대체 언제 어디서 나타난거지? 그리고 준성이라는 남자는 왜 대체 한 가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거야.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알지도 못한 남자가 기억에서 통째로 사라져버리니 미칠노릇이었다. 대학교시절에 날 따라다닌 건 현진이 아니었나? 그럼 현진이는 대체 언제 만난거지? 사는 곳도 다르고 학교에서 만난 것도 아닌데. 현진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걸까?
집안 거실에 불을 켰다. 갑자기 너무 환해져서 어지러웠다. 여기저기 사물들이 제 위치에 있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 같았다.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한 컵 마셨다. 반은 입속으로, 반은 바닥에 쏟아버렸다. 그렇게 비틀거리며 옷방 겸 서재로 쓰고 있는 방을 열었다. 오랫동안 열지 않아서 그런지 곰팡이 냄새가 났다. 이곳에 잡다한 것들을 모아놓아서, 현진이 내게 보낸 선물들도 여기다 보관하고 있었다. 현진이와 헤어지면서 받은 선물들을 다 도로 갖다 주려고 모아놓은 상자를 열었다.
‘이안에는 현진이가 보낸 것밖에 없어.’
그렇게 내가 내뱉은 내 말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보낸 사람의 이름에는 하나같이 준성이라는 낯선 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말도 안 돼.’
난 깜짝 놀랐다. 입이 다물어 지지 않았다. 편지도 수십 통이 와있는데 그곳에는 하나같이 준성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보낸 년도도 지금으로부터 거의 10년 전에 이른다. 그가 군대에 있을 때도 내가편지를 보내 준모양인지 편지 속에는 빠짐없이 편지를 잘 읽었다는 내용이 가득했다. 이제 슬슬 등골이 오싹해지고 식은땀이 났다. 다음이다. 다음은 그의 얼굴을 보아야겠다. 사진앨범을 꺼내들었다. 현진과 함께 찍은 사진이라고 기억하고 있는 장면들을 떠올려 보았다. 워터파크에 갔던 적. 설악산 등반을 했던 적. 겨울철에 일본여행을 다녀온 기억들을 떠올리며 사진첩을 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대체 내 기억력이 어떻게 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진 속에는 현진이라고 기억했던 사람이 아닌 다른 누군가, 준성이라는 낯선 이의 얼굴로 가득했다. 사진은 조작되었으리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와 함께 밝게 웃는 내 얼굴을 보고 입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더욱 더 경악스러운 한쪽의 종이를 발견하면서 난 정신을 잃을 뻔했다. 누런색의 서류봉투 속에 든 서류들을 꺼내어 보는 순간이었다.
<혼인 신고서>
-6-
다음날, 나는 동사무소에서 진위를 알아보기 위해 이름아침부터 찾았다. 동사무소에서 그가 나와 결혼한 사이라는 사실도 확인 했고, 더군다나 그가 사망한 사실도 알아낼 수 있었다. 급하게 경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식이가 나에게 준성이와 결혼했지 않느냐고 물어왔던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그에게 정확하게 알고 있는 부분을 물어 봐야했다.
“여보세요.”
“나야. 경식아. 어제 내게 했던말 다시 해줄수 있어?”
그의 목소리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목소리 같아 보였다. 난 다급해져서 다짜고짜 물었다.
“아… 그래.”
그는 내 목소리에 놀랐는지 목소리가 커졌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나와 준성과의 관계에 대해 그가 말하기 시작했다.
“준성은, 내가 알기로 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우리 학교의 동창이었어. 과가 다르긴 했지만
우리 동아리에 2학기 때인가 가입을 했었지. 그리고 얼마 안가서 우리 동아리 자체 M.T를 떠났고, 그 M.T에서 깜짝 놀랄 발표가 있었지. 바로 준성과 네가 사귀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어. 그리고 몇 년 뒤에 결혼할거라는 소문이 돌았어. 그 당시 나는 신춘문예준비로 정신이 없었고, 곧바로 해외 어학연수를 가게 되면서 친구들 사이에서 네 소식을 들을 수는 없었어. 그러다 어제 알게 되었지. 준성. 그 녀석 죽었다면서?”
경식이의 말을 듣다가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전화기를 던져버렸다. 다시 주워들었더니 전화는 끊기고 없었다. 갑자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무서워서 집에 돌아왔는데, 혼자 있는게 무서워서 다시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고, 문자 한통이 남겨져 있었다.
<정신과에 볼일이 있어서 진료 받는 중이야.>
생각해보니, 결혼을 했다면 다혜도 아는 부분이 있을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내 대학교 후배이기 때문이였다. 그녀를 기다리려다가 도저히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없어서 그녀를 찾아 나섰다. 그녀는 내가 가는 정신과와 같은 곳을 다닌다. 그녀도 나처럼 경미한 우울증이 있다.
택시 안에서도 난 불안에 떨었다. 처음 보는 택시 아저씨마저, 나를 알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앨범에서 한 장 빼 지갑에 넣어 두었던, 준성이라는 낯선 이의 얼굴을 멍하니 보았다.
그는 나와 결혼했고 더군다나 그는 죽었다. 난 어떤 이유로 그를 잊었다. 대체 왜?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 나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여서일까? 혹시나 싶어 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헤어졌지만, 계속 친구로 남아있겠다고 말한 건 그였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느새 택시에서 내려 서면의 한복판에 섰다.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오직 나만은 어디로 갈지 모르고 방황하고 있었다. 세상이 빙글 빙글 나를 중심으로 돌며 장난을 치듯, 내가 반드시 알아야할 사실들은 그렇게 숨바꼭질을 하듯이 나에게 숨겨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다혜가 있는 정신과 앞에 도착해있다. 녹색의 병원 간판이 보였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을 못간 듯이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혹시, 정신과 원장은 나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지 않을까? 늘 내게 대체 원인이 뭔지 모르겠다며 웃는 얼굴이 보였다. 그는 항상 뭔가 나를 생각하게 유도하고 있었다. 기억이 날 듯 나지 않는다는 식의 말도 잘했다. 혹시, 그것이 내 생각을 떠오르게 유도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결국 참지 못하고,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정신과를 찾고 진료 접수를 하지도 않은 채로 진료실의 문을 열어 젖혔다.
“선생님!”
그렇게 문을 활짝 열었을때, 난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는 뜻밖의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혼자 남아서 쓸쓸한 신혼여행을 보내고 있을 내 기분을 생각해 봤어?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혼자서 당신의 장례식을 마음속에서 치르고 왔단 말이야!>
문을 여니 순간적으로 밝은 빛이 내 망막에 맺힌다. 눈을 몇 번 감았다 뜨니 그곳에는 두 명의 정신과 의사가 있고 한명의 여성 환자가 있었다. 난 놀라 눈을 감았다 떴다.
“이, 이게 대체.”
한명은 내가 익히 알고 있었던 정신과 원장 선생이었다. 그리고 옆에서 마찬가지로 흰색 가운을 입고 노트에 무언가 빠르고 적어가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정신과 원장보다도 훨씬 더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던 사내였다!
“현진아!”
그는 바로 현진. 내가 이렇게 놀랄 수밖에 없는 사실은 바로 그는 며칠 전까지 나의 애인이었던 현진이라는 것이었다.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바로 등을 보이고 있던 여성 환자는 다름아닌 다혜였다! 난 크게 놀라 주저앉고 말았다.
“언니!”
다혜가 달려와 날 부축해 쇼파에 앉혔다. 상황을 이해하려고 아무리 노력 해봐도 답이 나질 않았다. 다혜가 약간의 우울증이 있어서 병원을 찾았다면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저기 흰색 가운을 입은 남자는 틀림없는 현진이다. 현진이가 흰색 가운을 입을 이유가 뭐지? 조명기구 판매를 하는 그가 어째서 여기서 마치 의사처럼 서있을 수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원장의사가 내 맞은편 쇼파에 앉고 현진이 커피를 타서 왔다.
“여기 있습니다 선생님.”
현진이 말하고 원장이 웃으며 그가 건넨 커피를 받았다.
“지혜씨도 한잔 드시겠어요?”
현진이 내게 커피를 건넸다.
“이.. 이게 대체!”
“진정하세요. 모든 사실을 말해줄 테니까요.”
원장이 말하며 커피를 마셨다. 나도 흥분한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커피를 마셨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좀 해주시겠어요?”
내가 물었다. 그들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모든게, 당신의 기억을 찾기 위해 기획된 일이였습니다.”
원장이 웃으며 말했다. 현진은 무표정. 그리고 다혜는 안쓰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이 일은 바로 당신의 정신적 질병을 치료하는 과정이지요.”
현진이 입을 열었다. 그들이 말하는 이야기의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해리성장애. 기억상실증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머리를 다치거나 정신적으로 크게 충격을 받으면 기억 상실이 일어나기도 하죠. 지극히 드문 경우이지만, 다헤씨는 정신적인 충격으로 기억의 일부를 잃고 변형된 상태였어요.”
원장이 입을 열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준성이라는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준성 준성 준성. 현진의 입에서 나온 준성이라는 사내를 떠올려 보려고 해보았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제 사진을 뚫어져라 보았지만 그의 얼굴이 도무지 외워지질 않는다. 준성.. 그는 대체 누구일까?
“기억나지 않아요. 이름조차 생소한걸요.”
“저처럼 키가 크고 수염을 길렀죠. 그리고 말끝을 흐리고 긴 한숨을 내쉬는 버릇이 있다더군요. 그렇죠 다혜씨?”
현진이 말하며 턱을 만졌다. 그러고 보니 현진의 턱에는 덥수룩한 수염이 사라지고 없었다.
혹시.. 현진은 내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연기를 하고 있었던 걸까?
“저는 수원대 정신과 박사학위를 밝고 있는 류현진이라고 합니다. 원장선생님으로 부터 아주 특별한 정신질환자가 있다고 하기에 당신을 사적인 자리에서 만났지요. 물론 이런 모습이 아니였습니다. 사복을 입고 저는 조명기구 판매를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실제도 저희 형님께서 그 일을 하고 계시죠.”
그가 말하는 찰나, 그와 처음 만난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첫 만남에서 간단히 차를 마시고 환자의 상태를 알기위해 몇 가지 질문을 했죠. 보기에도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마치 지각변동을 하고 있는 지구의 모습과도 같다고 해야 할까요? 어딘가 불안했죠.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요. 몇달전 까지만 해도 자신의 모든것이었던 남편이 죽었는데, 자신은 그 남자에 대한 기억을 송두리 채 없애버리려고 하고 있었으니까요. 당연히 자신의 기억의 앞뒤가 맞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였습니다. 당신은 나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계속 무언가 머릿속에서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현진이 말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죠? 제가 뭐 어떻게 하려고 했단 말인가요?”
“그러니까, 당신과 세 번째로 만났을 때는 나는 당신에게 남자친구로 인식이 되어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말했다. 기가 차는 노릇이었다.
“그걸 저보고 믿으란 건가요? 남편이 죽어 충격을 받아 남편이 죽은 사실을 부인하기 위해서 남편 대신에 다른 남자를 내 남자친구로 인식하려 했다는 건가요?”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저는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편향적 기억왜곡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이 정도로 기억이 심각하게 왜곡되는 환자가 있다는 예기는 들은 적도 없으니까요. 당신이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당신의 상태를 살피다가 나도 모르게 한숨을 한번 내쉬었는데 당신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발 그 한숨 소리 좀 어떻게 할 수 없어? 그것 때문에 미치겠어. 넌 처음부터 그랬다고 날 만나던 날부터 말이야.’ 라고 말이죠. 당신은 분명히 나를 당신의 옛 남편이었던 준성이라는 사람과 혼동하고 있었어요. 그와 동시에 당신의 불안함도 사라지고 당신은 꽤나 안정된 모습으로 차츰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남자친구와 결혼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죠.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당신의 남편이 죽지도 않은 거니까요.”
그가 말했다.
“그럼 말해보세요. 그럼 대체 당신이 내 남자친구 행세를 한 목적은 무엇이었죠? 박사학위 취득을 위한 목적이었겠군요?”
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보다 더 큰문제가 있었죠. 여기 있는 다혜양이 사실은 저희에게 당신의 상태를 보아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현진이 말했다. 다혜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날 보았다. 요청을 한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요?”
“잘 들어주세요.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다혜양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저희가 실제로 사실 확인을 거의 끝마쳤으니까요. 당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그대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원장이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기나긴 말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당신은 한 남자와 오랫동안 만났고, 실제로 둘은 몹시도 사랑했습니다. 급기야 결혼하기에 이르렀죠.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까지 떠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신혼여행에서문제가 생겼죠.”
원장이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결혼식이 있고 신혼여행을 가기까지는 이틀이 걸렸어요. 바로 죽은 준성이라는 당신의 남편이 해외에 출장을 가게 된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원장이 말했다.
“거기서 당신은 작은 마음의 상심을 했던 것이 틀림없어요. 결혼식조차 출장을 가는 남편에 대한 작은 원망이 있었겠죠. 알아본 결과 준성이라는 남자는 고아로 자랐어요. 그렇다보니 돈에 대한 열망이 컸고, 한창 휴가기간에 회사의 큰 문제를 해결해서 회사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고 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그는 결혼식 날 저녁에 미국으로 급히 건너가게 되었어요. 거기서 신혼여행지까지 가게 되었죠. 신혼여행지는 사이판이었습니다. 서울에서 는 4시간 반이 걸리지만 미국에서는 8시간 가까이 걸리죠.”
현진이 말했다.
“그래서요?”
다급해져서 내가 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난 납득이 가지 않았다. 말도 안돼는 일이었다.
“2006 7월 30일. 미국에서는 이례적인 비행기 사고가 났습니다. 사이판 행 비행기가 하와이 섬 인근에서 추락사고가 일어났고, 거기에 타고 있었던 승객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원인은 비행기 기기 부품의 결함이었고, 비행기 선체는 비행 도중에 공중에서 폭발했습니다.”
“거기에 내 남편이 타고 있었나요?”
내가 다급해져서 물었다.
“지혜씨. 그날의 기억을 되돌려 보세요. 남편이 오지 않았던 그 날의 밤을 말입니다.”
원장이 말했다.
“신혼여행은 모든 사람들 인생의 최고의 정점에서 맞는 인생 최고의 날입니다. 그날에 혼자 있고, 더군다나 남편을 잃었다면, 그 참담한 심정은 얼마나 암울했을까요?”
그가 말했다. 주위의 시선이 어두워지듯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최면에 걸리는 것 같았다.
“사이판의 주민들과 함께 신혼여행을 온 많은 여행객들은 모두가 수근 거리며 당신의 주위를 지나쳤을 겁니다. 비행기 추락사고로 남편을 잃은 결혼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불쌍한 신부가 있다고 했겠죠. 그때 당신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남편을 잃은 아픔? 그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원망하지 않았을까요? 결혼해놓고 신혼여행도 가지 않은 채, 일에 빠져버린 남편이 원망스러운 것이 더 자연스러운 감정이었을 겁니다.”
“제가 그래서 남편을 잊으려고 했다 이 말인가요? 아무리 그래도, 사랑하는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는데 그런 사실을 부정하고 망각하려 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그렇게 이기적이고 나약한 여자로 보이세요!”
난 분노에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내질렀다.
“모든 게 하나같이 얄궂은 수작이야! 당신들은 미친 거야. 모두가 날 이용해 먹으려는 수작이지!”
내가 소리치며 가방을 들었다. 다혜도 미워 보인다.
“해리성 정체장애. 보통은 성장시 해리성 장애는 보통 성장 시기에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과거를 가지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아직 정확한 원인은 알지 못합니다. 원인으로는 충격적인 사건이나 질환을 통한 과거 력. 환경이나 외부적인 요소 등이 있죠. 남편을 비록 신혼 첫주 만에 잃었다고는 하나 인생사에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죠. 그 정도로 당신이 기억을 잃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을까요? 더군다나 당신은 성인이었습니다. 남편이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고 해서 정신병이 걸려버리진 않죠.”
이가 떨렸다. 화가 났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사실이라고 해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난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잘 들으십시오. 비행기 사고에서 남편이 죽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습니다. 문제는 남편이 그 비행기에서 죽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원장이 말했다. 죽지 않았다니. 공중에서 폭발한 비행기 폭발사고에서, 내 남편이 어떻게 살아남았다는 말인가. 말이 되지 않는다. 모든 게 지어내고 꾸며낸 일이야.
“뭐라고요? 상공에서 폭발한 비행기 사고에서 내 남편이 살아남았다는 말 인가요!?”
내가 놀라 소리쳤다.
“그게 아니죠. 비행기를 아예 타지도 않았습니다. 알아본 결과 남편은 비행기 표를 예매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공항에서 그 표를 다른 사람과 바꾼 모양입니다. 원래 출발 예정 시간이었던 오전 9시 45분 비행기가 아닌, 오후 3시 15분 비행기 표로 말이죠.”
“기적이죠. 기적적으로 그 비행기 표를 다른 사람과 바꾼 덕분에 남편은 버젓이 살아서 돌아올 지혜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 남편은 어떻게 된 걸까? 너무 긴장이 되서 온몸이 떨렸다.
“그럼 내 남편이 죽은 이유가 뭐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면 끝은 해피앤딩이 돼야 맞는 말아닌가요?”
내가 되물었다.
“사람들은 심리학에 대해 등한시 하는 부분이 많죠. 사람의 심리를 너무 쉽게 생각한답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오면 당연히 기뻐야지. 그건 착각입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지혜양. 당신은 그 신혼여행 덕분에 수도 없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돌로 된 산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유리병과도 같이, 깨지고 또 깨져서는 지상위에 떨어졌을 때는 이미 산산조각 난 상태였단 말이죠.”
“당신은 적어도 세 번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신혼 첫날을 남편이 없이 보내게 되면서 충격. 그리고 자신의 곁에 오기만을 바랬던 남편이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으면서 받은 충격. 그리고 마음에서 죽은 남편에 대한 마음고생을 다하고 돌아왔을 때 버젓이 살아있는 남편을 봤을 때의 충격. 남편에 대한 불신과 배신감은 이미 극에 달한 뒤였겠죠.
남편이 하는 말과 행동들이 모두 거짓과 가식으로 가득 차 보였을 겁니다.”
원장의 말에 현진이 말을 이어 붙였다.
“제발! 그 소설 같은 이야기 좀 그만해주세요! 나 진짜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그래서 내 남편이 어떻게 됐다는 거야. “남편은 건강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축하해주었지만, 오직 한사람만 예외였죠. 준성씨가 살아남아 제일 먼저 보고 싶었던, 자신의 부인인 지혜씨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어요. 지혜양은 그때부터 사실 우울증이 시작된 겁니다.”
“우울증은 자신만 힘들게 하는 질병이 아니죠. 주위에 모든 이들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남편의 사망원인은 추락사. 자살입니다. 죽인 사람은 자신이죠. 그리고 그 죽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다름 아닌 당신입니다.”
원장이 말했다. 난 헛 공기를 집어 삼켰다. 나를 지켜보는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너무 무서웠다. 온몸에 땀이 나고 머릿속에는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렸다. 귀를 막고 싶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도 보았다.
“과거입니다. 모두가 뼈아픈 과거가 있고, 남편의 죽음에 대해 당신은 일말의 책임이 없습니다. 그의 사망에 대한 사건조사는 이미 끝났고 당신은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법적으로 당신의 배우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없어요. 문제는 당신의 양심이죠. 당신의 양심을 끝없이 당신의 머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을 살인자라고 취급을 하듯 죄책감은 끝없이 당신을 에워싸고 괴롭혀 왔습니다.”
원장이 기나긴 말을 끝내듯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분간 나에게 생각할 휴식이 필요한 것을 알듯, 다혜를 빼고 남은 두 의사는 나를 두고 밖으로 나갔다. 쇼파에 늘어지듯 누웠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걸을 힘도 나지 않았다. 내가 남편을 죽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부인하기 위해 남편을 기억에서 지우개를 지우듯이 지웠다. 지우개로 지운 뒤에 기억의 엇갈린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나의 정신질환을 연구하고 싶어 했던 현진을 끼워 넣었고, 현진은 내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남자친구 행세를 했다. 죽은 준성과 비슷한 스타일을 꾸민 것은 물론, 결혼을 일찍 하려 애썼다. 당연하다. 결혼에 대한 생각을 하면 죽은 준성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하지만 지독하다. 이렇게 까지 해서 내 기억을 되살린들 그들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잠깐만!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진료실의 문을 박차고 나가, 접수실의 간호사의 얼굴에다 대고 소리친다.
“현진. 그 망할 류현진 그 자식은 어딨어요!”
간호사는 당황해 했다.
“류현진! 그 남자 어딨냐니까요!”
그렇게 그가 있다는 곳을 알아냈다. 옥상이었다. 옥상에서 그는 담배를 피우고 있다.
담배를 끊겠다느니, 수염을 길렀다느니 이런 것들이 다 하나같이 나를 갖고 놀려는 수작이었단 말이야?
“당신! 대체 어떻게 된 거죠?”
그는 담배를 피우다 말고 나를 곁눈질하며 보았다.
“아. 나의 첫 환자 이 지혜씨. 어때요. 충격적인 사실이 받아들여지세요?”
그가 웃으며 다가 왔다. 뭐야, 그럼 대체 당신이 나를 끌고 안으려고 했던 건 뭐냔 말이야.
“아아. 뭐 걸리는 문제라도 있으신가 보네요?”
“그래요! 당신. 나를 치료해주려는 목적에서 내 기억을 살려주고 싶다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해요. 하지만 당신! 내손을 잡는 다던가 키스를 하려고 했던 건 대체 뭐죠? 치료를 가장하고 날 갖고 논거 아니에요?”
“갖고 논거라니요?”
그가 단숨에 얼굴이 굳어졌다. 너무 당황해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당신 집안에 날 소개한답시고 데려다가 알지도 모르는 당신네 가족에게 인사드린 게 대체 몇 번이죠? 올해만 세 번째예요. 결혼 날짜 잡는다고 큰소리치고, 그건 대체 뭐냔 말이에요!”
그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날 비웃고 있다.
“그건 다 연기였죠. 아아! 물론 집안에는 지혜씨가 내 여자친구라고 말했어요. 사실 그랬잖아요. 내 여자친구 이지혜. 여자친구 맞잖아요? 아님 남자친군가?”
“뭐요? 당신 지금 장난해요? 사람 가지고 놀았잖아요! 누가 누구 여자친구예요!”
목소리 톤이 점점 높아졌다. 그가 양손을 어께까지 들어올렸다.
“왜 흥분하십니까. 진정하세요. 애인행세를 한건 모두 당신의 기억을 살리기 위해서였어요.
그리고 나정도 되는 남자가 당신 남자친구라고 해도, 특별히 손해 보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돈 잘 벌겠다. 키도 크겠다. 뭐가 아쉬워서 내가 미안해해야 하죠?”
그가 말한다. 기가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네. 사실은 나도 당신 같은 여자친구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 연애소설작가로 어느 정도 성공을 해서 돈벌이도 심심치 않은데다가 얼굴도 그 정도면 봐줄만 하니까요. 서로 즐거웠던 추억이라 생각하고 넘어가죠. 정말 소설에 나올 법한 멋진 소재 아닙니까? 그렇게 둘은 서로의 마음을 정리하고 헤어졌다. 음. 베스트셀러 감인데?”
그가 말하며 뒤를 돌아섰다. 너무 당황스러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 이런 녀석이 있지. 슈퍼맨이라도 나타나 이놈 뒤통수나 한방 갈겨줬으면 속이 다 시원 하겠다. 몸이 부글부글 끌었다. 아무리 연기였다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아무렇게나 대할 만큼 나는 쉬운 여자가 아니다. 저 자식 집안의 사람들에게 밑 보인거 생각하면 속이 다 끓는데, 서로 즐거웠던 추억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라니. 아무리 해도 해도 이건 아니잖아.
“보험금 때문에 이렇게 한건가요?”
그에게 물었다. 그는 대답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가 나가고 잠시 뒤에 다혜가 올라왔다. 다혜는 아까부터 안쓰러운 표정으로 날 보고 있다.
“다혜야! 한 가지만 물어볼게. 저들에게 나의 정신치료를 부탁한건 너라고 했었지?”
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혹시나 저들에게 무슨 댓가를 지불하기로 한거야? 얼마나 주기로 했기에 이들이 이렇게까지 내 기억을 되살리게 하려고 한거야?”
그녀에게 물었다. 다혜는 잠시간 눈물을 지으며 안절부절 못하더니, 이내 핸드백에서 작은 서류를 꺼내 보였다. 사망진단서와 함께 여러가지 서류가 눈에 들어왔다. 보험료 미납금액에 대한정보와 함께 가장 눈에 띄는 건 보험이었다. 설마.
“보험금 때문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의사들과 다혜를 떠나 홀로 택시위에 올라탔다. 가슴이 쓸린 듯 아팠다. 모든 이들이 나를 이용하고 있는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현진이 내 보험금의 일부를 받기위해서 다혜와 손을 잡고 내 애인행세를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원장도 늘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이 모든 일을 꾸민 장본인이다. 미스터 조는.. 미스터 조는 그럼 누구지? 나를 만난것도 의도적인 접근이 아니었을까? 그런 거라면.. 그랬다면 정말로 난 그를 용서할 수 없는데..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그가 떠나며 남기고간 연락처였다. 희선. 제발 당신만은 나에게 거짓 없이 대했다고 맹세해주길,
“여보세요.”
“아 지혜씨!”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의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몇 마디 말이 오갔다. 희선은 여기저기서 열심히 일을 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여기저기 망치질을 하는 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 말. 헐떡이는 그의 숨소리. 그의 땀 냄새가 여기까지도 느껴진다.
“아참. 지혜씨는 잘 지내요? 남자친구하고 싸운 건 잘 해결이 되었나요?”
그의 마음이 담긴 안부가 내 심장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다.
“사실, 그 자식있죠.”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누구 말하는거예요?”
“내 애인이라고 하던 현진 말이에요.”
“아 네. 무슨 일 있어요?”
그의 목소리가 다급해지자 마음이 놓인다.
“네. 그자식이 알고 봤더니 내 재산을 노리고 접근한 파렴치한 제비였어요. 이럴 수가 그렇게 해놓구 선 서로 즐거웠으니 좋은 추억으로 삼자는 거 있죠. 나 어떡하면 좋아요.”
“뭐라고요! 그 자식 전화번호 줘봐요.”
희선은 나를 대신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니 전화는 왜요.”
“그 자식 전화해서 이 주둥이로 아주 묵사발을 내버리려고요. 아니 우리 착한 지혜씨를 왜 괴롭힌 거예요! 그 자식은 천벌 받을 자식이에요! 내가 한국 귀국하면 당장에 그 자식 집부터 찾아갈거니 각오 단단히 하라 전하세요!”
그가 소리친다.
“희선씨가 찾아가서 어떡하려고요. 대판 싸움이라도 해보려고요?”
입 꼬리가 슬슬 올라가기 시작했다.
“제가 싸움은 못하는데 때리진 못해도 맞아줄 순 있거든요. 몇 대 얻어맞고 경찰에다 신고를 하는 거죠. 그리고 합의금 안 받고 구치소에서 며칠 썩게 만들고 또 찾아가서는 또 시비 걸고 얻어터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 자식 아주 진상을 만났다고 한숨을 내쉴걸요?”
그가 떠들어 댔다. 다행이다. 그는 내게 거짓이 없는 것 같았다. 그와의 몇 분의 통화가 내 모든 고통을 눈녹 듯 사라지게 해주었다. 전화기를 끊고, 웃으며 숨을 들이 쉰다. 가슴에 맺힌 게 내려갔다. 이제 밥도 잘 들어갈 것이고 일도 잘 풀릴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머리를 잘랐다. 파마를 해보라는 미용사 언니의 권유를 말리고 숱을 고르고 앞머리를 자르고 집에 도착해 몸을 녹였다.
다혜는 저녁 늦게 돌아왔다. 술을 조금 마신 것 같았다. 나는 준성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기억을 하려 애썼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그 말이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여전히 낯설었다. 다혜가 돌아왔다. 울고 들어온 듯이 부은 눈덩이를 하고 내 앞에 퍼질러 앉았다.
“술을 이렇게 많이 먹으면 어떡하니.”
그렇게 말하고 그녀의 상의를 벗겨주었다. 붉은 재킷이었다. 핸드백도 어께에 용케 걸고 온 것을 빼다가 옷걸이에다 걸어주었다.
“언니. 내가 누구라고 생각해?”
다혜가 말했다.
“누구긴, 내가 아끼는 내 배다른 동생 이 다혜아냐.”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에 대한 섭섭함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그것 말고.”
다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내가 누구동생이냐고.”
다혜가 말했다.
“내 동생.”
내가 맞받아 쳤다.
“아니, 나 말이야. 나 누구 동생인지 모르겠어? 나 성이 이씨잖아. 이 준성 이 다혜. 성이 같잖아.”
다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나, 준성이 오빠 동생이야. 내가 언니 집에 왜 들어온 거 같아?”
다혜가 말했다.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물이 집안의 온 사물을 녹아 흐르게 하기 시작했다.
“나 언니 미워했어. 오빠가 죽고 며칠 만에 언니가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고 들리더라? 표정이 안 좋지도 않았대. 평소랑 다름이 없다는 거야. 가봤더니 진짜 그랬어. 어쩜 저럴 수 있지. 오빠 죽은 지 한 달도 안됐는데 벌써부터 저렇게 마음정리를 다한 걸까, 미웠어. 언니가 오빠 죽인 거라고 그렇게 소리치고 다녔다고.”
난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었다. 또 다시 몸이 떨린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언니는 누구보다 아파하고 있었던 거였어. 오죽했으면 아예 잊어먹기까지 했을까. 얼마나 심했으면 우울증에 정신병까지 걸렸을까 이런 생각이 드니까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 내가 바보였던 거야. 언니가 오빠 죽고 보험금 받아서 행복하게 잘살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너무 나빴어. 정말 나는 못됐어.”
다혜가 흐느끼기에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나도 눈물이 나고 인상이 찡그려 졌다. 온몸이 오그라들 듯이 가슴이 작아지고 추워졌다. 부둥켜안고 실컷 울었다. 그렇게 몇 분 울다가 다혜가 가방 속에 보여주었던 서류를 건네었다.
“보험금 신청서류야. 배우자가 오지 않으면 줄수 없데, 그리고 몇 일 후면 만료되어 말소처리 된다고 해서, 사실은 내가 다급해졌어. 내가 받을 돈도 아니지만 서도 그렇게 날려버리기엔 오빠 죽음이 너무 허무해지는 것도 같아서….”
다혜가 말했다. 받아들었다. 하지만 내 돈이 아니다. 난 기억도 못하는 남편죽여서 얻은 돈, 관심 밖이다.
“나 이거 받으려고 정말 많이 뛰어다녔어, 비행기 추락 사고에 대한 정신적인 피해가 받아들여져서 힘들게 힘들게 몇 번을 재판해서 받은 거야. 그런데 정작 받으려고 하니까 못 받겠어. 이거 오빠 죽고 나온 돈이잖아.”
그녀가 고개를 푹 였다.
“이거 찾아다가 너 게.”
“아니야!”
다혜가 당황해 하며 손을 내저었다. 울다가 일어나니 더더욱 불쌍해 보였다.
“아니야. 곧 결혼도 하니까 네가 써. 나보다는 네가 훨씬 준성씨를 아꼈잖아. 난 기억도 안나 내 남편. 이제 슬슬 생각이 나긴하지만 아직, 그리고 난 돈 그렇게 필요 없어. 이 나이에 집도 있고 직업도 있으니까, 그리고 아직 이 언니가 쓸만하잖아.”
내는 웃어 보였다. 다혜는 아직도 내가 안쓰러운지 다시 인상을 찡그리고 울었다. 그렇게 떨어지는 눈물이 아까워 손으로 닦아내 주었다. 이게 웬걸 캔디노래 가사가 생각나더니 나도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준성.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렇게 내가 울 때 가장 내 눈물을 닦아주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7-
그렇게 겨울은 막바지 발악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준성에 대한 기억을 잊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접한 뒤로, 나는 오히려 밝아 졌다. 밝아진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일단은 내 우울증의 원인을 알게 된 것이 컸다. 남편이 나 때문에 죽은 것은 정말 안 된 일이긴 하지만 그를 보내고 난 충분히 고통스러워했고, 그가 내 우울증을 못 견디고 그렇게 된 것처럼 나는 내안의 이 우울증을 떨쳐버려야 하는 거라 생각했다. 난 그렇게 우울해지지 않기 위해 일에 매진했다. 나는 유쾌하고 밝으면서도 감동적인 소설을 쓰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정말 나의 1월은 작업의 1월이었다. 난, 내가 이전에 써서 내보냈지만, 소설이 너무 가볍다는 이유로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한 나의 원고 몇 개를 고쳐서 월간지에 연재하게 되었다. 월간지에 연재를 하면서 꽤나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내 미니홈피는 연일 내 연재소설을 읽고 평가를 내놓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응원 반, 악플 반. 어쨌든 이렇게 뜨거운 성원 덕에 나는 연애소설작가로의 입지를 점점 굳혀 나가고 있었다.
“월간지 <좋은 상상>에서 선정한, 연애소설을 가장 쉽게 쓰는 여류 작가 2위 류진영, 와! 1위가 지혜 언니야 언니!”
다혜는 남에 속은 알지도 못하면서 중얼 댄다.
“그거 칭찬 아니거든. 그리고 너는 아침에 할일 없어?”
내말에 다혜가 배시시 웃었다. 보험금을 받자마자, 그녀는 일하던 출판사를 때려 치고 프리랜서 선언을 했다. 그래서 요즘은 늘 수영이와 놀기 바쁜 그녀다.
“오늘 까지만 쉬고, 내일부터는 나도 바빠져. 결혼 예식장도 알아 봐야 하고, 또 여기저기 청첩장 돌릴거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지끈.”
다혜가 말하며 관자놀이를 짓누른다.
“좋겠다. 난 언제나 결혼 한번 해보나.”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나는 책상 서랍 속에 숨겨둔 그에게 보내는 작은 편지를 움켜쥐었다. 전화 끝에 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머릿속에서 맴돈다.
<2월 14일 오전 10시 비행기로 부산으로 돌아갑니다. 어서 보고 싶네요.>
그렇게 하루하루가 가고 2월도 중순이다. 2월 14일 결전의 날이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씻고 그럴싸한 겨울옷을 내어 입었다. 전날 밤에 다혜와 함께 시켜먹은 피자 한 조각을 데워서 입에 물고 차키를 들고 나왔다.
요즘 운전도 많이 늘었다. 연재소설이 잘 되면서 여기저기 출판사도 얼굴을 보여야 하고 신문기자들과 인터뷰, 그리고 친구들까지 만나게 되면서, 쉴틈 없이 차를 몰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차가 급출발을 하는 일도, 멀쩡한 주차정지 표지판의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밟고 지나가는 일도 없다. 운전도 잘하고 그럴싸한 직업도 있고, 게다가 스타일도 받쳐주니, 그야말로 난 도시의 여자가 된 것이다! 미스터 조를 태워다가 부산 시내를 한 바퀴 돌 심산이다. 태워서 아주 정신을 빼놓을 정도로 난폭운전을 해야지. 오늘 난, 그를 만난다.
“엇.”
미스터 조는 나를 보더니 손을 크게 들어 보였다. 손에는 인증카드가 있다. 그놈의 인증카드, 알고 봤더니 한 줄이 늘어난 걸 나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오. 중국 현지인들의 한국어 교육 및 기초공사활동 참여.”
내가 그렇게 말하자 미스터 조는 우쭐했는지 내 어께에 팔을 슬며시 얹었다. 그래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프리허그운동? 스킨쉽. 그딴 건 아무소용도 없었어 이 돌팔아.
그를 태우고 부산의 시내로 나갔다. 가서 찻집에서 조용히 환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생각이었다. 평소에 내가 자주 가는 찻집으로 들어갔다. 자판기 커피 하나를 뽑아다 들고 들어가려다 참고, 이름도 어려운 비싼 커피를 내 돈을 내고 두 잔을 샀다.
“인상이 좋네요.”
미스터 조가 말한다.
“네. 덕분에요.”
난 그냥 습관처럼 나오는 가식적인 말이었는데, 그는 내말을 듣더니 금세 환한 표정이 되었다.
“역시. 내가 치료한 사람은 대부분 완쾌되죠.”
그가 말했다. 실은 번지점프를 하러갔다는 말을 해야만 했다. 번지점프를 하러간 건, 옥상에서 마지막 순간을 멋지게 마무리 짓기 위한 예행연습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야만 했다.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오히려 당신이 떠나간 직후에 외로움은 더 심해졌어요.
하루에도 죽고 싶은 심정이 수 백번도 더 들었으니까요.”
내가 냉정한 표정으로 말하자 미스터 조는 그때서야 진자해진 낯빛으로 커피를 마셨다.
“사실은 죽기위해 옥상위의 위태로운 난간위에 올라간 적도 있었어요. 그리고 남자친구와 크게 다투고 헤어지자고 말하고, 다혜에게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해버렸어요. 예전에 사귄 남자친구에게 맨발로 뛰어가서 커다란 칼로 그를 살해하려고 했고 약국에서 마취제를 사다가 그를 납치해서 감금시킬 생각까지 했었어요.”
나는 내 소설 속에 나오는 헤프닝 들을 잘도 내어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웃기 시작했다.
“왜요. 뭐가 그렇게 웃겨요. 당신의 잘못된 방식 때문에 내 병은 더 심해졌다고요. 어떻게 보상할건가요? 네? 미스터 조.”
내가 도시의 여자처럼 차갑게 쏘아붙였다. 멋진 여성들이 그러는 것처럼 나도 다리를 꼰 채로 말이다. 그러자 그는 다시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요.”
그에게 말하자 그는 슬며시 입을 열었다.
“네. 당연하죠. 스킨쉽을 하거나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분명 기분전환의 도움이 되지만 근본적인 치료는 안 된답니다. 왜냐고요? 말했다 시피 외로움이란 뼛속에 있기 때문이죠.”
그가 그렇게 말했다. 좋다. 당신의 변명을 들어봐 주기로 할까.
“네. 외로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공기와도 같죠. 그것은 당연한 한 가지 사실로부터 출발 한답니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
“그게 뭔데요?”
나도 모르게 그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다.>라는 거죠.”
그가 그렇게 말했다. 순간 당황했다. 그리고 그 말뜻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틀림없었다.
나는 혼자다.
“잘 보세요. 부모는 자기를 알아주는 유일한 가족이랍니다. 하지만 부모는 자신과의 세대 차이가 너무나도 크지요.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그들은 반드시 자신보다 죽음을 맞게 된답니다. 그리고 지혜씨의 경우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죠.”
그가 그렇게 말했다. 맞다. 난 내 아버지가 나보다 먼저 죽는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동생들과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오다 보니, 뚜렷한 개성의 차이를 나타나게 된답니다. 만일에 두 명의 자녀가 있는 집이라면, 한명은 부모님의 말을 잘 듣는 모범생이 되고 한명은 부모님께 말썽을 부리는 개구쟁이가 되죠. 왜냐하면 둘은 다른 방식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위한 무언의 경쟁을 하게 되기 때문이랍니다. 그렇기에, 형제이면서도 서로는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해 내기위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말죠.”
그가 말했을 때에 난, 어머니를 따라 이민을 간 두 남동생을 떠올렸다.
“네. 가족이란, 분명 틀림없이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해주진 못한답니다. 가족이 그런데 친구나 애인은 말할 것도 없죠. 세상에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존재는 분명히 없다는 사실. 그것은 진리랍니다. 세상에 나는 혼자에요. 그렇기에 외로울 수
밖에 없고 심각한 사람은 우울증으로 벼랑 끝에서 마지막 비행을 준비하게 되죠.”
그가 웃으며 말했지만 난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심각해졌다. 왜냐하면, 그의 표정 속에서는 그 외로움을 해결할 열쇠를 가지고 있는 듯이 여유가 넘쳤기 때문이었다.
“좋아요. 당신의 말은 틀림이 없어요. 그렇다면 어디 이야기해보세요. 진짜 당신이 말하는,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을요.”
내 얼굴이 그에게 점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목이 기린처럼 길어지는 느낌이었다.
그가 혹시나 점을 치는 사람이었다면, 난 내 집문서를 가지고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이야기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그렇게 집중하진 마세요. 편안하게 들어주세요. 알겠죠. 지혜씨?”
그가 나에게 웃으며 말한다. 손짓으로 커피한잔을 더 시켜달라는 모습을 보였다. 난 급히 커피를 시켰다. 카라멜이 든 찻집에서 가장 비싼 커피였다.
“음음.”
그는 처음 시킨 커피의 마지막을 맛보았다. 여유가 넘쳤다.
“자, 우선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저는 고아랍니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 영화의 반전처럼 약간의 충격이 있었다.
“네. 하지만 소설속에서처럼 학대를 받으면서 자란 정도는 아니었어요. 성당의 기도원에서
부모님처럼 나를 돌봐주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분명히 나에겐 남들보다 일찍 외로움이라는 존재를 느낄수 있는건 분명했어요. 20살. 저는 지금의 지혜씨처럼 외로움으로 몸부림을 치기 이르게 되었답니다. 가끔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을 배우는 나이많은 형들과의
대화를 제외하고는 나에게는 즐거움이라는 것이 없었어요. 성당안의 갑갑한 공기가 싫다고 소리쳐 본들, 그것은 나를 키워준 부모님과 같은 분들에 대한 배신이었지요.”
그가 그렇게 말하고 새로 주문한 커피의 거품을 후루룩 마셨다. 하트 무늬의 거품이 단번에 사라졌다.
“그래서 전 깊게 사색에 빠졌답니다. 마치 궁궐을 빠져나와 생노병사를 고민하는 부처와도 같았지요. 하하하.”
농담인지 그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난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난 왜 외로운 걸까. 세상에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왜없을까. 하고 말이에요.
그가 그렇게 말했다. 빨리, 빨리 이야기의 끝을내란 말이야.
“그래서요. 그래서 왜 외로운 것이었는데요!”
내가 급기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순간 찻집의 모든 쌍을 이룬 눈들이 나를 보고있는것을느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하하하. 네. 결론은 그거였어요. <난 세상에 혼자다.>라는사실로부터 난 외로운거였어요.”
그가 말했다. 난 허무함에 끓는 물에 살짝 데친 오징어처럼 의자위에 늘어졌다. 겨우 그이야기를 들으려고 내가 이 비싼 커피를 두잔이나 시켜줬다니..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보았답니다.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이 한명만 더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가 힘이 빠진 내게 눈빛을 주며 말했다. 마치 기말고사 문제를 몰래 가르쳐 주는 선생님의 표정 같았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에게 묻자 그가 내손을 덥썩 잡았다.
“자, 잘 생각해보세요. 지혜씨. 세상에 당신이 하나가 아니라는 상상을 해본적이 있나요? 행동 성격 말투. 가치관 철학. 그리고 꽃무늬가 있는 속옷을 좋아하는 취향까지 똑같은 완벽한 또 다른 나!”
그가 소리쳤다. 다시 한번 우주의 눈들이 그를 쏘아보았다.
“그렇다면. 만일 또 다른 내가 있다면, 그는 외로운 나의 마음을 이해할게 틀림없죠. 내가 이렇게 고통 받고, 내가 이런 오해를 받아 나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도 이해를 하겠죠. 가끔 밤에 잠을 자다가 악몽을 꾸고 비명을 질러도 그 비명소리를 듣고 무서움 대신에 자신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그는 지닐 수가 있다는 이야기에요. 자신의 생각.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똑같이 사랑하고, 그 어떤 이야기를 해도 받아주고 이해해줄 수 있죠. 진정한 나 자신은 말이에요!”
급기야 메니져가 주의를 주기에 이르렀다. 난 그를 대신해 사과했다.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지혜씨! 지금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에 또 다른 내가 있다면요.
그 또 다른 나는 한명이 아니라 무수히도 많고, 사실은 대한민국 안에도 적어도 만명은 넘는 내가 있다면요. 그렇다면! 그렇다고 해도 지혜씨는 외로울까요?”그가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았다. 틀림없었다. 내가 외로운 이유는 내가 혼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혼자가 아니라면… 나의 탄생과 동시에 함께 죽는 이가 있다면.. 어쩌면 동 시간대에 죽음을 맞는 모든 이들이 사실은 한명의 영혼이라면… 아니다.
동시에 죽을 필요는 없어. 그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내가 쓴 소설을 똑같이 이해하고 감동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래 그런 또 다른 내가 있다면 분명 난 외롭지 않아. 외롭다는 말은 혼자라는 사실에서 출발하니까….
“네. 이해가 되는군요. 그래요. 당신의 20살의 생각은 틀림없이 대단한 생각이었어요.
위대한 철학자 어느 누구와 견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상상이죠. 하지만 상상은 상상일 뿐이에요. 안 그래요?”
그에게 되묻자 그는 손을 저었다.
“아니요! 난 확신한답니다. 나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은 내가 최초가 아니에요!”
그가 그렇게 소리쳤다. 찻집에 사람들은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결국 메니져에게 떠밀려 우리는 찻값도 내지 않고 거리로 쫒겨 나듯 나왔다. 하지만 열띤 그의 강의는 아직 시작도 안한 듯이 불꽃을 태우는 불꽃이 되어 더더욱 뜨거워졌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사상의 한 여파로 중국의 한 학자가 쓴 글 중에 이런 글이 있다더군요. 다아(多我)론. 이라고 하더군요.”
그가 말했다.
“다아론?”
굉장히 유치해보였다. 분명 생각해내서 지어낸 것이 분명했다.
“세상에 군주가 될 자질을 갖춘 사람을 수도 없이 많기 때문에, 천하가 통일 되지 않아도 된다. 이런 학설을 내걸으신 분이셨어요. 세상에는 비슷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누가 왕이 되어도, 그리고 천하가 통일이 되지 않아도 세상은 태평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다아론, 말 그대로 내가 한명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실은 지구상에 자신은 수 없이 많다는 이야기에요. 물론, 서양에서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분명히 있었죠.”
그가 말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난 영혼이 있다는 사실은 약간 믿지만, 한 개의 영혼은 한 개의 육체에 존재해야한다고 믿어왔었다.
“잘 보세요. 영혼이란 본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에요. 그렇지 못하면 영혼의 절대성이 사라지는 것과도 같죠. 시간을 초월하는 영혼이 동시대에 두 개 이상일 수도 있다는 게 어째서 말이 되지 않다는 걸까요? 옛 시대에 비해 지금의 시대는 거의 기하급수적으로 인구가 늘어나고 있어요. 대체 그것을 무엇으로 다 설명을 할까요?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세계에는 영혼공유현상이라는 현상에 대해 많은 이론을 내놓는 심리학자들도 있죠.”
그가 열변을 토했다.
“그렇다면 20살의 당신은 그 사실을 믿었다는 말이군요.”
그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부산의 시내를 걸으며 열띤 이야기를 해 나갔다.
“네. 그런 사실을 틀림없이 믿었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학자들을 정말로 사랑하고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죠.”
그의 이론이 사실이라면, 난 분명히 외롭지 않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난 한 가지 문제에 부딪혔어요. 왜냐하면, 20살의 인생을 살아왔으면서 왜 나는 그 또 다른 나를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 하는 문제를 만난 거예요.”
그가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어느새 부산의 남포동을 벗어나 다리로 연결된 섬. 영도로 향하고 있었다. 영도다리의 아래는 많은 선박들이 있었고, 선박 주위의 사람들은 한창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다에서 부는 바람이 차가워 옷을 여미게 만들었다.
“그래서요? 왜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날 수가 없죠?”
그의 말은 순 짜 맞추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난 그와 함께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당연한 거였어요! 이 세상에 내가 무수히 많다고 쳐요. 그들은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임이 틀림없죠.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내가 성공해서 빛나는 위인으로써의 업적을 남긴다면 정말로 기쁘고 좋은 일이지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은 서로 다른 환경,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죠. 그리고 그들은 당연히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도록 서로는 서로를 만나지 않게 하기위해 영혼적인 노력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난 평소이해력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다니요?”
그에게 되묻자 그가 손바닥을 때렸다.
“네! 그것은 마치 자석과도 같아요. 같은 극끼리 밀어내는 성질 말이에요. 마치 영토전쟁을 하기위해 방방곳곳으로 멀어지며 땅바닥에 깃발을 꽂는 행위와도 같죠. 깃발끼리의 간격이 멀수록, 무수한 나로 이루어진 총체적인 우리들은 더 많은 영토를 갖게 되는 것과도 같아요. 마치, 아인슈타인조차 풀지 못한 확산의 원리와도 같죠.”
그의 말속에 든, 영토전쟁. 자석의 성질. 그리고 확산의 원리라는 말이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이것은 철학적으로도 당연한 이야기에요. 잘 들어 보세요. A=B라는 등식이 있다고 쳐요. 그리고 B≠C라는 등식이 있다고도 쳐봅시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B≠C라는 등식은 필요하지만 A≠C라는 등식은 필요가 없죠. 왜냐하면A=B라는 식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A와B가 같으니, A와 같은B는 사실상 존재의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A와B는 서로가 같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서로는 멀리 떨어져 있고,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서로 같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게 서로는 서로를 미워하고 거부감을 느끼게 되죠.”
우리는 영도의 다리 아래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그것은 마치 쌍둥이가 서로를 미워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쌍둥이들은 서로 서로가 같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 내기위해 서로 다른 취향의 옷을 입으려 하고 다른 개성을 가진 것을 표출하게 되죠. 자연스레 서로는 서로의 방식을 싫어하고 서로를 미워하며 밀어내려 애쓰는 거랍니다. 거리에 자신과 같은 신발이나 가방을 맨 사람을 보고 불쾌감을 느끼는 심리와도 같죠. 당연한 거랍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를 실제로 만난다면, 둘 중에 힘이 약한
사람은 존재의 이유와 가치를 잃고 말죠. 그것은 자연히 마음에 병이되고 그 병은 결국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암세포가 되어버리는 거랍니다.”
그가 거기까지 말을 마쳤을 때, 우리는 배들이 많은 항구 앞에 와있었다. 거기까지의 설명을 들었을 때 난 혼이 빠진 것과 같이 정신이 몽롱했다. 그의 말은 이해 반. 모름 반이었다.
“어때요. 내 생각.”
그가 조금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대단해 보이지 않느냐고 물어오는 것 같았다.
“글쎄요.”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시선은 나무판자들이 떠있는 바다에게 눈을 집중한 채로 말이다.
“신기하지 않아요?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말이에요.”
그가 그렇게 말했다.
“아니요. 신기하진 않는데요?”
솔직한 마음을 그에게 말했다.
“역시! 역시!”
그러자 그는 더욱 들뜬 표정으로 환호성을 질러댔다.
“왜 그래요?”
당황해서 되묻자 그는 내 팔을 붙잡고 바다위로 뛰어드는 시늉을 해보였다.
“으악!”
난 놀라서 그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그는 다시 내 팔을 붙잡았다. 그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은 나를 결국엔 웃게 만들었다.
“당연해요. 당신은 놀랄 이유가 없죠. 왜냐하면, 당신의 영혼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세상에 또 다른 내가 존재하고 있고. 사실 그들을 만나고 싶어 했기에 그렇게 외로움을 많이 느껴왔던 것이었어요. 부끄러움이 많아 남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가끔 Tv에 자기 얼굴이 나오는 기회가 생겨도 어색해 하고 얼굴을 가리기까지 이르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또 다른 나 자신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분명히 이 사실은 지혜씨가 놀라줘야만 해요!”
그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덩달아 그가 내 팔을 붙잡은 손에도 힘을 주었다. 그 힘은 내 살을 뚫고 내 뼛속에까지 전달되었다.
“무슨 사실요?”
“서로 떨어진 서로는 결코 만날 수가 없는 운명을 깨고, 당신과 나는 만났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가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난 정말 총에 맞은 것처럼 흩어지는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8-
난 한동안 얼빠진 사람처럼 남포동일대의 벤치에 앉아있어야만 했다. 도무지 정리가 되질 않았다. 미스터 조는 내 곁에서 내 등을 두드려주면서 계속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댔다.
정리는 되지 않지만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또 다른 그란 말이었다. 혹은 그는 또 다른 나?
이 무슨 얼토당토 안한 반전인가.
“하하하. 너무 당황스럽죠?”
그가 웃으며 말했다.
“네. 아니 그러니까. 당신과 나는 서로 결코 만날 수 없는 운명을 지닌 같은 영혼을 지닌
사람이란 거예요?”
내 손목을 지압하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네!”
그는 자신 있게 소리쳤다.
“아니 무슨 근거로요?”
따지듯이 묻는다.
“잘 들어보세요. 내가 외국으로 나가 사회봉사 활동을 벌인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또 다른 나를 만나기 위해서였어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공간이라는 게 있습니다. 집, 회사, 학교. 혹은 자주 산책하던 공원이나 산. 그리고 강가, 이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공간은 있기 마련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그런 자신의 공간에 있을 때 비로소 휴식을 취할 수가 있죠. 그리고 바꾸어 말해, 자신의 공간을 넘어 다른 사람의 공간으로 가면 쉽게 피로해진답니다. 그것은 자신의 공간을 벗어났기 때문이에요. 여행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공간을 탈출하는 것이고, 여행의 목적은 바로 또 다른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는 보통의 사람이 하는 사고방식과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난 오랫동안 또 다른 나를 만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 결과, 난 이 세상에 사람들이
그렇게 다양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죠.”
그가 그렇게 말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60억이 넘는 지구인들이 다양하지가 않다니….
“사람은 분명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운명이라고 하죠. 하지만 환경 앞에서도 변하지 않는 스스로의 보편적인 성향은 반드시 존재한답니다. 그런 성향은 많지 않아요. 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머릿속으로 부류라는 것을 나누고, 사실은 비슷한 성격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물론 그 사람들 속에 나와 비슷한 사람은 만날 수가 없었지만요.”
우리들은 다시 앉아 이야기할 수 있는 페스트 푸드 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페스트 푸드 점은 찻집과 다르게 시끌벅적해서 좀 소란스러워도 괜찮아보였다.
“네.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내가 나눈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같은 영혼이라고 확신을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만나는 것을 꺼려하고 공간과 시간적으로 많이 멀어져 만날 수 없는 위치에 있었죠.”
그의 말은 흥미로웠지만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그래서요. 결론이 뭔데요.”
그에게 그렇게 물었다.
“네. 결론은 이겁니다. 난 오랫동안 또 다른 나를 찾아 다녔고, 그 끝에 또 다른 나를 만난 적은 없지만, 어떤 육감적인감각을 가질 수 있게 되었어요. 나를 찾기 위한 끝없는 노력이 나에게 그런 능력을 심어 준 것이지요.”
“그게 뭐 어쨌다고요!”
내가 소리치자 급기야 그 많은 패스트 푸드점에 사람들이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난 놀라 얼굴을 가려버렸다.
“네! 실은 비오는 날 당신을 보고 안아 보았을 때, 당신이 또 다른 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을 무작정 따라 미행을 했고, 그리고 당신을 아파트 앞에서 놓쳤지만, 난 이름만으로 당신의 집을 찾아내었다는 거죠!”
그가 소리치는 바람에, 이젠 사람들이 우리 둘의 대화에 모두 집중하고 있었다.
“알겠어요!?”
그가 소리쳤다. 미스터 조. 주변을 봐요. 주변에 사람들이 우리들만 보고 있다고요.
“알긴 뭘 알아요!”
나도 이젠 대놓고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된 이상, 얼굴이 팔려도 그와의 대화에서 승리하려는 생각에서였다.
“당신은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고요!”
그의 일갈 앞에, 패스트 푸드점은 한동안 찻집처럼 고요해 졌다. 결국에 먹던 햄버거는 다 먹지도 못하고 버리고 나왔다. 미스터 조는 자기 것은 다 먹고는 콜라를 들고 거리로 나왔다..
“진짜 동네 창피해서 같이 못 다니겠어요. 대체 목소리가 왜 이렇게 커요?”
나도 먹던 감자 칩을 먹으며 짜증스레 말한다.
“먼저 소리 지른 건 지혜씨에요!”
그가 빨대를 입에 물고 말했다. 난 계속해서 큰소리로 외쳤다. 그 역시 내게 큰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나는 주변의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의 나는 아무것에도 신경이 빼앗기지 않고, 오직 그와의 대화와 그가 한말의 의미를 생각하기 바빴다. 마치 그와 내가 이 환경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어서 대답해보세요. 우린 서로 만날 수 없는 운명을 달고 태어났죠. 서로는 서로가 멀어질수록 서로에게 유리하죠. 그런데 우린 만났어요. 대체 어째서죠? 난 그게 궁금해요. 우린 왜 만난 걸까요? 대답해 봐요. 지혜씨.”
그는 지치지도 않는 듯이 말했다.
“믿을 수 없어요. 인정할 수 없어요. 증거를 대요. 증거를 보여 봐요!”
그의 끝없는 이야기의 끝에 나의 대답은 바로 이거였다. 희선은 내말을 듣고 갑자기 당황해 했다.
“증거를 대라니까요. 성별도 다르고 키 차이도 나고 생긴 것도 다른데 어째서 나랑 당신이 같은 영혼이라는 거죠?”
순간 미스터 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크게 난관에 부딪친 것이었다.
“음.. 음.. 생긴 게 다르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라고 하는 건 모순이죠. 지혜씨 쌍꺼풀 수술한 눈 아니에요?”
미스터 조가 내 눈을 찌를 듯이 손가락을 눈앞에 갖다 대었다. 여간 신경 쓰여서 거칠게 그의 손을 쳐냈다.
“했어요! 왜요!”
기분이 나빠져서 소리쳤다.
“거봐요. 이전과 지금 생긴 게 다른데 같은 지혜씨잖아요!”
미스터 조가 말대답을 했다. 어린것이 어디서 말대답을….
“나참. 그건 경우가 다르죠. 호박에 줄긋는 다고 수박되나?”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미스터 조의 콧구멍을 찌를 듯이 손을 치켜 올렸다. 막 튀어나오는 말이 앞뒤가 맞는지 생각해볼 겨를이 없다.
“호박이 수박이 되진 않죠.”
미스터 조는 내말에 크게 동요하는지 심히 고심에 빠졌다.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적절한 근거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내가 성전환 수술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요!”
내가 소리치자 미스터 조가 깔깔 웃었다. 갑작스레 분위기가 이상해져 버렸다. 철학관에서 곧바로 개그콘서트로 옮겨진 느낌이다.
“좋아요! 증명을 해보이겠어!”
미스터 조는 갑자기 거칠게 내 팔을 잡아다 끌었다. 어디 가는지 물어볼 새도 없었다. 그렇게 이끌려 가보니 영화관 앞이었다.
“여긴 또 왜 온거에요!”
내가 소리쳤다. 난 너 정도 되는 남자랑 영화나 볼만큼 한가한 여자가 아니란 말이야.
“영화를 보자고요!”
“아니 영화는 왜요!”
미스터 조는 실실 웃더니 공짜 영화티켓을 꺼냈다.
“마침 이게 있어요!”
미스터 조가 추리 소설의 반전을 말하듯이 소리쳤다. 한개도 놀랍지 않았다. 이런 거 미리 준비한 티가 난단 말씀!
“봐요! 당신과 내가 똑같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줄 테니까요.”
“어떻게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영화를 보는데,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영화를 보는 거죠. 오늘은 평일이고 사람도 없으니까 분명히 자리도 넓겠죠? 당신과 내가 각자 보고 싶은 영화를 보는데, 같은 영화를 보게 된다면 당신과 나는 비슷한 성격이라는 증거가 되겠죠. 게다가 근처에 보이는 곳에 상대가 앉아있다면 아뿔싸, 둘은 같은 영혼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걸요? 후후후.”
미스터 조가 탐정처럼 웃어댔다. 그리고 표 한 장을 내 손에다가 구겨 넣듯 주더니 유유히 티켓을 판매하는 카운터로 달려갔다. 난 크게 당황해서 이리저리 허둥지둥 엉뚱한 생각을 했다. 미스터 조가 들고 있는 커다란 가방이 보였다. 저 가방을 메고 영화를 볼 셈인가? 집에라도 들렸다가 영화를 보지 않고..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미스터 조가 달리듯 내게 다가와서 소리쳤다.
“지혜씨! 아참 설명하지 않은 게 있었는데요. 시간은 지금이 1시니까 1시에서 2시 사이 영화로 해요. 알겠죠? 그리고 영화 보는 시간까지 서로 떨어져 있는 거예요!”
미스터 조가 웃으며 소리치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페스트 푸드점에서 손가락으로 메뉴판을 가리키며 대도안한 영어로 지껄여 댔다. 자기가 외국인인 것처럼 보이고 싶은 모양이다.
나도 눈치를 살피다가 영화를 고르기 시작했다. 미스터 조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을 것 같은 영화를 고르려다가 공짜티켓이 버려지는 것이 억울하고 보기 싫은 영화를 억지로 보면 좀이 쑤시는 나이기에 평소부터 보고 싶었던 멜로영화를 보기로 했다. <블라인드 blind>라는 영화였다. 그렇게 티켓을 사니, 시간이 아직 30분이 남았다. 나도 모르게 페스트 푸드 점에 들어가고 말았다.
<외국인 30퍼센트 할인>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하지메 마시데 와따시와 니혼노 각세이데스.”
일본여행가게 되면서 몇 번 보면서 익힌 일본어 회화를 들먹이기 시작했다.
“아리가또! 도우조 요루시쿠!”
“곤바우와 곤니찌와!”
알바 생으로 보이는 판매원은 뚫어지듯 그렇게 몇 초간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마치 일본어 회화가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저기 외국인 신분증을 보여주셔야 하거든요.”
“아 그래요?”
습관적으로 내 신분증을 꺼내려다가 깜짝 놀라 멈춘다. 난 조상님 대대로 한국인이었다. 게다가 순 O형으로 혈액형까지 동일하다! 우습게도 이 모습을 미스터 조가 멀리서 보더니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렇게 영화관으로 들어섰다. 미스터 조는 벌써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요즘에 뜨는 로봇들 변신하는 영화인 트랜스젠터 패배자의 연습을 보거나 또라에몽같은 에니메이션을 보러간 게 틀림없다. 지주제에 멜로는 무슨…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아서 돌아보며 확인해 보았다. 그렇게 두리번 거린 것도 몇분, 영화가 시작하면서 슬슬 빠져들기 시작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남자와 얼굴에 온갖 흉터를 가진 못생긴 여자사이의 러브스토리였다. 여자는 남자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을 하기위해 남자를 찾고, 남자와 여자는 사랑에 빠졌다. 남자가 각막이식을 받아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본래 못생긴 여자는 남자의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 도망쳤다. 남자는 애타게 여자를 찾아 다시 만나지만,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했지만 둘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작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여주인공의 대사가 나올 때는 눈물을 조금 흘렸다.
“크허엉!”
뒷편에 웬 개구리 같은 사내가 엉엉울고 있었다. 이게 누군가. 미스터 조가 대체 이런 곳에 왜있지. 바로 내 뒤통수가 있는 곳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었을까? 옆 좌석에 여자가 앉아 있기에 커플끼리 영화보러 온 것 인줄 알았건만….
그는 나를 봤을까? 여기서 그의 이론이 이렇게 쉽게 증명되어버리면 너무 기가 살텐데…. 게다가 사내대장부가 그깟 멜로영화 한편에 눈물콧물 다 tHE아서야 어떻게 큰일을 할까?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멜로영화는 왜보고 자빠진 거지. 그렇게 영화를 보다 딴생각에 빠져버렸다. 영화가 끝나고 그가 나갈 때까지 난 꼼짝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모두가 나간 뒤, 직원들에 떠밀려 영화관을 나섰다. 밖을 보니 미스터 조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 대체 무슨 영화 보길 레 이제 나오는 거예요?”
시간은 4시가 다되어갔다. 슬슬 배가 고팠다. 난 내가 본 영화 티켓을 거세게 구기며 휴지통에 집어 던졌다.
“난 또라에몽 좋아해서 또라에몽 봤는데 왜요?”
그렇게 말하자 그가 손바닥으로 땅을 치며 소리쳤다.
“아이 아깝다. 나도 그거랑 이거랑 보려다가 망설였는데!”
그가 소리쳤다.
“무슨 영화 봤길래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가 손바닥위에 있는 영화티켓을 보였다.
“아유 어울리지 않게 무슨 멜로영화예요.”
“야한 영화인줄 알았죠!”
그가 흥분하며 소리쳤다. 난 너무 우스워서 배를 잡고 웃었다. 그에겐 진지한 게 어울리지 않는다. 같은 영혼이니 뭐니 하는 소리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이렇게 밝고 유쾌한 사람이면 족해.
“자, 당신이 졌으니까 이제 저녁 사세요! 저녁!”
내가 그의 목에 팔을 걸치며 소리쳤다. 그는 키가 큰데도 내 몸무게에 휘청거렸다. 그렇게 우리는 저녁을 먹기로 했다. 저녁을 먹는 와중에도 그 몹쓸 이론 증명은 계속되었다.
“스테이크 집이긴 한데 머 먹을지 고민한 다음 서로 메니져한테 말하는 걸로 하죠! 어때요.”
그의 행동이 우스워 잠시간 웃고 있을 찰나, 그가 종업원을 불러 귓속말로 뭐라고 말했다.
“네 주문받았습니다.”
종업원은 그의 장난을 웃으며 받아주었고, 다음 내 차례의 주문이 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웃고 있는 그 종업원의 얼굴을 메뉴판으로 가렸다. 스테이크 전문점이라서 여기저기 모르는 스테이크 이름들이 많았다. 금액을 보니 2만원이 넘어갔다. 세상에 저녁 한 끼에 2만원은 심했다는 생각이 들고, 둘러보니 저녁세트라고 작은 스테이크와 함께 디저트를 주는 메뉴가 보였다. 가격도 가장 저렴했다.
“이거 할게요.”
그렇게 손가락으로 찍어 가리키자, 종업원이 웃었다.
“네 금방 갖다 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이 가고, 전체음식으로 나온 스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근데 지혜씨 직업이 뭐라고 했었죠?”
그가 물었다.
“나요? 나 글 쓰는 사람이잖아요. 여태 그것도 몰랐어요? 너무 나한테 무관심 하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과장된 행동을 하며 깜짝 놀라했다.
“이럴 수가! 나도 소설 쓰는 취미 있는데!”
나도 그 말이 나오자 너무 깜짝 놀라서 먹던 숟가락을 던지듯 떨어뜨렸다.
“아니 그러니까. 미스터 조가 소설을 쓴다고요?”
“네! 보여드릴 수도 있어요!”
그 말이 떨이지자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같은 음식이었다. 이런 소금쟁이 같으니. 나한테 사는 저녁이 그렇게도 돈이 아까웠나?
“지혜씨가 시킨 건 머에요?”
미스터 조는 자기 것을 먹다 말고 물었다.
“먹을 땐 그냥 음식만 먹는 거예요. 그러다 머 튀기기라도 하면 가만 안둘 줄 알아요!”
얼렁뚱땅 윽박지르기로 대충 넘어갔다.
“음 맛있어.”
난 왠지 고급스러운 음식을 먹는 시늉을 했다. 그랬더니 미스터 조가 군침을 삼키더니 결국 내 스테이크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낼름 넣었다. 말릴 틈이 없었다. 서로 같은 음식을 먹는 게 탄로 나겠구나 했다.
“음. 역시 비싼 건 다르긴 다른가 보다.”
그가 음미를 하더니 내뱉었다. 너무 우스웠다. 그렇게 즐거운 식사까지 마치고, 그는 우리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다혜를 보고 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요즘 다혜 기분도 그렇고 해서 다음으로 미뤄 두었다. 밤이 가까워지니 우리 집 아파트에서 보이는 야경도 볼만했다. 주홍빛의 불빛들이 바다 끝까지 가득했다.
“그런데 진짜 소설을 쓰는 취미가 있긴 한 거예요?”
“그럼요! 얼마나 많이 썼는데요!”
그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의 등에는 아직도 메고 있는 커다란 가방이 있다.
“내일이라도 보여줄 수 있어요!”
그가 소리쳤다. 그렇게 집 앞에서까지 이야기를 하다 그를 보냈다.
집으로 돌아왔다. 다혜는 수영과 결혼준비로 바쁜 모양이었다. 집에서 내가 쓰다만 소설을 꺼내 들었다. 여기저기 맞춤법이 틀림 곳이 보이고 문체가 너무 유치한 것도 눈에 들어왔다. 머리띠를 하고 책상에 앉았다. 워드파일로 저장되어 있는 내 소설을 찾아서 하룻밤 만에라도 고쳐볼 심산이었다. 정말로 그가 나와 같은 영혼을 지녔다면, 내 영혼이 담긴 내 소설을 읽고 이해해주겠지. 슬슬 다시 가슴이 뜀박질했다. 그는 어떤 소설을 썼을까? 기대가 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으니 묘하게 집중력이 생겼다. 글을 쓰고 뒷부분을 많이 고쳐나갔다. 어쩌면 이 소설을 읽고 그가 나처럼 감동받아주진 않을까? 정말로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해가 밝았다. 난 꼬박 밤을 새고 말았다. 그에게 내 소설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아침에 일어나 코끝까지 내려온 다크 서클을 가리기위해서 파우더를 두텁게 뒤덮었다. 이런, 화장을 마치니 분장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괜찮아. 희선은 순진하니까 화장한지도 모를 테니까. 그렇게 화장을 마치고 나니 또한가지 생각이 난다. 그가 놔두고 간 곰 인형 세트!
백에 넣었다가 귀찮아서 다시 꺼냈다. 너무 부피가 커서 들고 가기가 귀찮았다. 차를 타고 가면 되긴 하지만 차를 끌고 나가는 것이 더 귀찮은 일이였다. 서면에서 만날 텐데 차를 주차시킬 공간도 없을 것이다. 결국에 입기로 했다. 입고 나가서 그에게 벗어다 주면 그만이 아닌가? 어떻게 들고 갈지 고민이 되지만 그건 자기 사정이다. 그렇게 약속장소에 나갔더니 웬 흰색 곰 인형 탈을 쓴 개구리 같은 사내가 찻집 앞에 서있었다. 한눈에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미스터 조!”
곰인형 옷을 입은 내가 북극곰 옷을 입은 그를 만났다.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4차원이라고 다들 놀리겠지.
“아아 지혜씨! 역시! 이건 부정할 수 없어!”
그가 흥분하며 난리를 쳤다.
“뭐가 부정할 수 없어요!”
“이거 봐요. 나랑 프리허그 운동하려고 옷 입고 나온거 잖아요!”
“아니거든요? 이거 돌려주려고 갖고 나오려고 했는데 너무 부피가 커서 그냥 입고 나온 거라구요! 자요!”
머리를 얼른 벗었다. 이런! 유리에 비친 내 머리가 사자처럼 붕 떠있었다. 도로 써버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랑 프리 허그 운동이나 같이 하지 않을래요? 많은 사람의 아픔을 나누고, 지혜씨의 대외공포증도 이번 기회에 싸그리 날려버리는 거예요!”
“아니 내가 왜 그런 얄궂은 짓을 해요! 난 보란 듯이 잘사는 여자라고요! 프리허그운동 같은 거 안 해도 나 좋다고 찐득이처럼 달라붙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니 그리고 대낮부터 무슨 프리허그 운동을 한다고 난리예요!”
말은 그렇게 소리쳤지만, 결국에 나도 가슴에 FREE HUGS 피켓을 걸었다. 미스터 조와 손을 잡고 시내 한복판을 돌아다니며 프리허그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웅크리고 다녔다. 바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서 더더욱 바삐 걷는 우리들, 우리들은 그렇게 우리를 마주보고 걸어오는 사람들을 향해 양 팔을 벌렸다. 미스터 조는 안기기 싫다는 사람조차 달려들어 안아주었다. 사람들은 키가 큰 그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사람이 붙는 건 내 쪽이었다. 여기 저기 지나가는 커플들이 수근 거린다. 저 사람은 여자야. 라고 그렇게 수근 대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드디어 첫 허깅! 한 작은 여학생이 내게 조금씩 걸어왔다. 미스터 조는 웃으며 손을 놓아주었고, 난 조금씩 내 팔을 서서히 벌렸다. 그 학생도 조금씩 팔을 벌리며 가슴을 내게 열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낯선 사람에게 안기는 느낌은 대체 어떨까? 심장이 귀 뒤편까지 달려왔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뛴다. 날 이상한사람 취급하면 어떡할까? 내 작은 몸을 안아보고 실망하지는 않을까? 그렇게 긴장하고 여러 가지 물음이 지나가는 찰나, 눈을 감았다! 안겼다. 학생은 나를 꼭 안았다. 그리고 몇 초, 뛰는 심장소리가 들렸다. 이건, 그녀의 심장소리일까? 내 심장소리일까?
그렇게 몇 초가 지나고 그녀와 나는 떨어졌다.
“감, 감사합니다.”
여자아이가 내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왠지 모르는 안도감. 편안함. 뭔가 서로 마음을 나누었다는 상상이 나를 휘감았다. 그 황홀감이 잠시간 나를 걷지 못하게 했다.
드디어 알았다. 사람의 마음을 나눈다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을 울고불고 퍼부어 댄다고 그 사람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감정. 심장. 오로지 마음을 담은 짧은 대화야 말로, 서로의 아픔을 나누는 유일한 수단이 아닐까? 안아준다는 의미가 뭘까? 위로해주고, 이해해준다는 것이 아닌가! 내가 상대방을 위해 팔을 벌린다는 것은 그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안는다는 것은 결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상대를 안고, 상대는 나를 안는 것. 그것이 프리허그가 아닌가?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 주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대등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니 프리허그에는 위아래가 없고, 남녀도 없다. 어른과 아이도 없으니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로 연결되는 고귀한 활동이다!
“슬슬 재미가 들린 모양이네요.”
발걸음이 빨라졌다. 발바닥이 뜨거워지는 통증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정말이었다. 재미가 붙었다. 여기저기 수줍어서 도망치는 사람을 붙잡아다가 안아주었다. 머리가 까진 아저씨. 시장 통 아주머니. 귀여운 여학생들, 여드름이 난 남학생들, 짓궂은 장난을 하는 어린애들까지. 그렇게 내 작은 심장으로 모두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같이 내 귀에다 대고 그렇게 고백하고 갔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 귀에는 그들이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진짜 그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까지 들려주었다.
‘나는 정말 외로웠어요.’
나는 그들의 숨겨진 말속에서 모두가 나처럼 외로웠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가련하고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머리가 까진 아저씨도, 어께 힘을 주고 다니는 저 청년도, 그리고 모델처럼 걸어가는 세련된 아가씨마저, 그들은 한 가지 물음 앞에 눈물을 흘리는 가련한 것들이다.
‘외롭지 않나요?’
그들은 모두 눈물을 흘릴 것이다.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것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다. 세상에서 누구보다 비싸고 잘나가는 자신이지만, 정작 나에겐 아무도 없다는 걸 말이다.
그들에겐 성공도 승리도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자신을 이해해 주는 또 다른 자신 뿐.
“지, 지혜씨!”
미스터 조가 나를 불러 세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슬슬 해가 지고 있었다. 정신없이 돌아다닌 것이다.
“응?”
뒤를 돌아보니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흰 북극곰 한 마리가 땅바닥에 쓰러져있었다.
“남자가 그렇게 하체 힘이 부실해서야 어디 써먹어요! 언능 일어나지 못해요?”
내가 호통을 쳤다. 재미가 들려서 자꾸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안아주고 싶었다. 마치 내가 영혼의 치유사가 된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네. 하지만 지혜씨! 우리 벌써 6시간째 걷고 있다고요!”
미스터 조가 투덜거렸다. 내가 가서 손을 내밀었다. 그가 손을 잡고 일어나더니 다시 나를 안았다. 이제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 내가 그를 안고 그가 나를 안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심장소리로 서로가 살아있는 것을 느끼고,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 없음을 확인한다.
꼬르륵.
그의 위장도 거짓이 없었다.
그렇게 곰 인형 탈을 옆자리에 두고, 우리는 포장마차에서 우동 한 그릇을 먹었다. 뒤로 야무지게 머리를 묶어도 세어 나오는 옆머리가 우동국물에 담길랑 말랑 했지만, 내 입속으로 들어가는 속도는 더욱 빨랐다. 그렇게 우동을 뚝딱 먹어 치우고, 털옷에 입을 닦고 그리고 일어났다.
“자! 다시 시작해 볼까!”
내가 소리친다. 미스터 조가 내 팔을 붙잡고 말렸다.
“아니 왜요! 우리는 사회평화에 이바지하는 뜻 깊은 하는 젊은이라고요! 이거 놔요! 우리의 작은 가슴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도천에 깔렸다고요!”
내가 소리쳤다. 내 가슴은 의지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을 안아주리라. 어쩌면 누군가는 나로 인해 감동받을 지도 모른다. 정말로! 누군가의 외로움을 가시게 해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털썩!
어라, 이게 웬일인가? 나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일어나려 하다가 또 쓰러졌다. 종아리에 아무리 힘을 주어 일어나려 해도 발목이 끊긴 듯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리가 고장 난 모양이었다.
“지혜씨 왜 그래요!”
그가 얼른 내 곰 인형 옷을 벗겼다. 다리가 코끼리 다리처럼 부어있었다.
“이런 다리 삔 거잖아요!”
그러고 보니 아까 삐끗하긴 했다. 키가 큰아저씨를 안아주려고 점프하다 헛디딘 모양이다.
“멍청이! 아무리 의욕이 넘쳐 나도 그렇지 자기 몸도 안 돌보는 사람이 어딨어요!”
미스터 조가 인상을 찡그리며 내 신발을 벗겼다. 그러더니 내 발목을 잡고 한 바퀴 휭 돌렸다.
“아야!”
소리를 연신 질러댔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인대가 나간건가.”
“아야야야!”
서면 한복판이 떠나가랴 소리를 지러댔다. 시내 한복판에서 쇼를 하고 눈을 감고 아픔에 비명을 지르고 나니, 이젠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저녁이 되어 있었다. 슬슬 붐비는 행인들은 하나 둘씩 술에 취한 듯이 비틀 거렸다. 발목을 다친 나도 비틀, 나를 부축해 주는 그도 비틀.
세상은 술에 취한 듯이 비틀비틀 이였다. 그렇게 결국 택시를 타고 우리 동네에서 내렸다. 그리고 싫다는 데도 나를 업고 우리 집까지 갔다. 집 앞에 그가 연달아 두 번째로 찾아온 것이다.
“됐다니까! 나 이제 걸을 수 있다니까 그러네.”
업힌 채로 발을 동동 굴러보았다. 발에 신은 구두가 발끝에서 떨어질랑 말랑 아슬아슬하다.
“여자들은 이래서 문제야. 아니 굽 높은 신발은 대체 왜 신는 거야!”
그가 소리쳤다.
“아니 키가 좀 커 보이려고 그러죠. 그리고 저런 신발을 신어야 걷는 게 폼도 나고.”
“폼은 무슨 뒷굼치가 들리니까 무릎이 굽혀지는 건 모르지! 그러면 몸에 얼마나 안 좋다고요. 허리에도 무리가 가고….”
그가 이렇다 저렇다 말을 했다. 그의 등에 안긴 채 반쯤은 잠이 들어 정확히 머라고 중얼대는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자! 이제 걸어갈 수 있겠죠?”
미스터 조는 어느새 우리 집 아파트 현관까지 날 데리고 와서 날 내려주었다.
“네. 뭐 이정도야 식은 죽 먹…아야….”
접지른 발이 땅에 닿자 신경이 놀랐는지 아팠다.
“괜찮아요?”
미스터조가 놀라서 내 다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다시 발목운동을 시켜주었다.
“이정도면 됐으려나?”
그가 놓아주자 땅에 다시 발을 놓아보았다. 이제 좀 견딜 만 했다.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신경써줘서 고마워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에게 여간 고마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예. 그럼 이만.”
그가 손을 흔들고 주고 뒤를 돌았다. 그는 역시 키가 컸다. 걸어가는 것도 성큼성큼. 흰색 곰 인형이 그렇게 잘어울릴 수가 없다.
“아! 잠깐 소설 쓴 거 보여주기로 했잖아요!”
내가 그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그가 머리를 크게 뒤로 젖히더니 성큼성큼 내게 달려왔다.
나도 내 가방속에 내가 쓴 원고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도 곰 인형 지퍼를 열더니 가슴팍에서 케케묵은 공책한권을 내게 주었다.
“서로 읽고 감상문 써서 주기로 할까요?”
그가 내게 먼저 제안했다.
“아 좋아요! 대충대충 읽었는지 아니면 열심히 읽었는지 다 검사 할테니 알아서 하세요!”
그에게 소리치자 그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렇게 또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몇 마디 말이 오고 갔다. 밤에 고요함에 슬슬 분위기가 무르익어 간다.
“나 며칠 뒤면 또다시 외국으로 가요.”
그가 마지못해 말을 꺼냈다.
“또 왜요!”
“동남아시아에는 아직도 개발도상국들이 많아요. 그들은 늘 우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해요.”
“아니 그말이 아니라! 왜 오랫동안 머물지 않고 바로바로 가냐고요! 친해지려고 하면 떠나가고 친해지려고 하면 떠나가고 대체 왜 그러는데요!”
섭섭해서 나도 모르게 소리 지르고 말았다. 제발 세일러 문을 애타게 하지 말란 말이야. 턱시도 가면.
“….”
그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봉사활동은 국내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당신은 할 만큼 했어요. 더 이상 하는 것도 사치스러운 거라고요!”
그는 내말을 잠자코 들었다.
“이게다 지혜씨를 위한 거예요.”
그가 말했다.
“나를 위한다니요? 이게 나를 위하는 거예요?”
“네! 비슷한 사람은 같이 있을수록 서로에게 좋지 않아요. 서로의 생명을 위협하게 된다고요!”
그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바보 같은 소릴! 또 그 얼토당토 안하는 이론 이야기로군요. 그런 이상한 예기 좀 그만해요! 위험해지긴 뭐가 위험해져요.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친대요? 그러지 말고 나랑 함께 프리허그 운동이나 같이해요. 그것도 봉사활동이잖아요!”
그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안돼요. 난 떠나야 해요.”
“아니 왜요!”
“당신은 나와 같은 영혼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당신과 나는 붙어 있으면 한쪽이 죽는다고요! 그 울릉도 섬에서 내가 쓰러진 것도, 오늘처럼 프리허그 운동을 하다가 다리가 다친 것도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정말로 함께 있으면 이렇게 안 좋은 일이 생기잖아요!”
“말도 안 돼! 말이 하나도 안 돼! 당신은 그냥 날 떠나려고 말을 지어내는 것뿐이에요! 같은 영혼? 그런 게 어딨어요! 같은 영혼 같은 게 세상에 어딨냐고요! 당신은 내가 당신과 똑같아 보여요?”
내말에 미스터 조는 뒤돌아섰다. 그도 속이 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애가 타는 건 나였다.
“당신의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겠어요! 당신과 내가 같기는커녕,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슷한 부분은 하나도 없다는 걸요! 자!”
난 뒤돌아 선 그의 손을 낚아챘다.
“이렇게 손을 잡아도 아무런 느낌도 없느냐고요! 자기 손을 붙잡은 것처럼 그냥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럼 손바닥에 땀은 왜 나는 건데요!”
맞잡은 두 손에서는 하늘의 조화가 일어나듯 슬슬 땀이 차기 시작한다. 그의 팔을 몸 쪽으로 끌어당겨 나머지 팔로 낚아채듯 걸어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이렇게 팔짱을 껴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까처럼 서로 안아줘도 아무렇지도 않나요?
그냥 물속에 들어앉은 그런 기분일 뿐이냐고요! 네? 말을 해보세요!“
내가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는 나를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화가 났다. 눈이 뜨거워 졌다. 키가 큰 그의 양 어께를 붙잡고 몸 쪽으로 세게 잡아당겼다. 얼굴과 얼굴이 박치기를 하듯이 입술이 그의 얼굴 어딘가에 부딪혔다.
“이래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래두요? 이래도 그냥 내가 내 팔에 입을 맞추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냐고요!”
한밤중에 내 목소리가 울려 펴졌다. 하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뒤돌아서있을 뿐이었다. 안겨보기도 하고, 입을 맞추어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가 점점 커다랗게 느껴졌다. 정말로 난 아무런 느낌도 없는 걸까? 바람이 그를 지나 내게로 왔다. 머리가 이리저리 날렸다. 그는 내 몸부림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손을 조금씩 뻗었다. 눈을 감고 손을 뻗는 내 손끝에 그가 닿았으면….
“미안해요.”
그의 말이 머나먼 곳에서 부터 오는 바람처럼 그렇게 멀게 느껴졌다. 아무리 다가간들, 그는 손에 잡히지 않는 곳에 있었다.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됐어요. 가세요. 당신 같은 사람 필요도 없어요. 이것도 가져가요. 이런 것도 필요 없어요.난 혼자예요. 당신이 뭐라고 말한들 그건 변함이 없어요. 난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고, 지금도 혼자예요. 당신도 나를 치료해줘서 즐거움을 얻으려고 하는 한낱 의사나부랭이일 뿐이에요.
가세요. 나도 이제는 다시는 당신 안볼 테니까!”
마지막 승부수였다. 다시는 보지 않는다. 진심이다. 나를 버리고 간 사람에게 울고불고 매달리는 바보가 되지 않겠다. 그는 내말을 들으면서 천천히 걸어 움직였다. 내게서 멀어가기 시작한다. 그가 작아져 간다. 이렇게 내 마음을 가지고 그는 내 곁을 떠나 멀리 사라져 갔다. 난 허탈감에 주저앉아 울었다. 손바닥으로 내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게 막아도 보았다. 하지만 내 눈물은 내 손바닥 사이로, 내 얼굴사이로 목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는 떠났다. 다시 돌아 와도, 날 봐주지 않겠지. 이렇게 애가 타는 내가 부담스러울 테니까….
그렇게 실컷 울다보니 내가 던진 공책이 보였다. 그가 쓴 소설이리라, 그냥 두고 집으로 돌아가려다 주워들었다. 나도 소설을 쓰는 사람이다. 우리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질책보다도 더한 무관심이니까, 사람의 땀이 베인 것을 소홀히 하진 않는다.
-9-
집으로 돌아와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베개를 안고 이불을 덮어쓰고 한참을 울었다.
슬픔은 진정이 될 생각을 안고 눈물은 흐르고 흘러, 베개를 뒤집고도 또 적시였다. 그렇게 몇시간이 가고, 또 몇 시간이 가고, 대체 시간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는 깊은 어둠이 찾아왔을 때, 어디선가 열린 곳에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날 웅크리게 하고, 이불은 점점 얇아져 갔다.
“아..아”
어디가 그렇게 아픈지, 바람이 들 때마다 아파와 난 흐느끼고 신음했다. 그렇게 어둠속에서 눈을 감고 있는 것조차 힘이 들어 눈을 뜬 채로 밤을 지새웠다. 추위는 점점 심해진다. 몸부림 치다보니 손끝에 무언가 닿는 게 느껴졌다. 곰 인형이었다. 그때처럼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울지 마세요.’
곰 인형이 다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슬퍼요. 이렇게 다시 버려져버리고 말았어요. 그 만큼은 정말로 나를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할거라 생각했는데….”
‘세상에 모든 문제들은 바로 대화의 부족에서 나오는 거랍니다. 적도에서 생긴 뜨거운 열들이 극지방까지 제대로 전달이 되지 못해, 무시무시한 태풍이 생겨나 수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하죠. 전쟁도, 이념의 대립도, 수많은 자연 재해들도 그렇듯 대화의 부족에서 생겨나는 문제랍니다. 그와 당신과의 문제 역시 바로 그 대화의 부족에서 나오는 것이죠.’
“그는 떠나가요. 나는 그가 필요한데, 나는 그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에요. 한순간에 만나고 헤어지는 그런 단순한 관계의 사람일뿐, 그렇게 나를 떠나면 그는 며칠도 지나지 않아 나를 잊을 거예요.”
‘지혜씨 나는 당신이 오기만을 기다린답니다. 당신이 내안에서 숨을 쉬지 않으면, 난 언제까지나 죽어지내죠. 이렇게 당신이 내안을 가득 채우는 지금 이순간만이, 나의 삶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순간이죠. 당신의 심장소리가 내 몸속에서 울릴 때, 난 드디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나에겐 당신이 한없이 소중합니다. 하지만 당신을 이렇게 내안에서 가둬둘 수는 없어요. 난 솜으로 만들어진 보잘 것 없는 인형일 뿐이니까요.’
그가 말했다. 왠지 모르게 그가 불쌍해졌다. 난 다시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당신으로 인해 행복합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을 수 있는 순간이 언젠가 다시 한 번 있을 것이라는 무한한 희망을 주기 때문이지요. 나를 위해 아까운 눈물을 흘리지 말아주세요. 내가 이렇듯 웃을 수 있는 것 역시, 당신이 존재한다는 그 사실 한 가지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그가 나를 세게 안았다. 온몸이 꼼작도 없이 움직이지 못하듯 위태롭지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힘들 때면 나를 찾아주세요. 나는 당신을 위해 지금처럼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나는 행복한 하루하루에, 다시 오늘의 하루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끝으로 난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기분이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방청소를 시작했다. 여기저기 구석구석 우울증을 핑계로 주눅이 들어 살았던 날 탓에 여기저기가 지저분했다. 이런 방을 누가 여자들 사는 집이라고 할까? 설거지도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세탁기에는 며칠이 되었는지도 모르는 빨랫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욕조에 낀 물때들도 싹싹 문질러 깨끗이 씻고, 여기저기 구석구석 엎드려서는 닦아내었다. 그리고 책상정리! 여태 글을 쓴다는 핑계로 여기저기에서 빌려가지고 온 연체된 도서자료들도 자료들이고, 여기저기 낙서처럼 써 놓구선 알아보지 못하게 된 메모지들도 깔끔히 정리에서 파일처리를 해주었다. 그렇게 해놓으니 이젠 좀 자료 같아 보였다. 그렇게 땀을 흘리며 청소를 하고 한바탕 샤워를 끝마치고, 그리고 이제는 책상위에 고이 모셔둔 미스터 조의 노트를 읽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잘난 조희선씨. 어디 소설은 얼마나 썼는지 볼까?”
날 떠나든 다시 만나든, 중요한 사실은 그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아니던가?
그렇게 집중해서 소설을 읽어 내려갔다.
<또다. 또 악몽에 시달리다 잠에서 깼다. 이렇게 알 수 없이 무언가를 쫒는 꿈을 꾸는 것도 수십 번, 대체 내가 뭘 찾아 헤매어 왔는지 나는 내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난 내 자신이 무엇을 찾는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유일한 혈육 이었던 누나, 예진이 누나다. 나는 고아로 태어났다. 성당의 기도원에서 신부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으며 자랐다. 난 태어나면서 부터 혼자였다. 부모도 형제도 없었고 나와 함께 수업을 받는 친구들은 나를 미워했다. 그렇게 나를 미워하는 녀석들을 난 하나같이 깨부수었다. 기억력이 좋아 신부님의 총애를 받는다는 나의 무기로, 나의 동료들을 이간질해서 그들을 바보로 만들었다.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는 힘으로, 그리고 힘으로 할 수 없는 상대는 머리로, 그렇게 나의 적들을 처참히 망가뜨리며 나는 자랐다.>
“고아로 태어났다.. 희선씨도 고아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난 그렇게 중얼거리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자신이 살았던 성당의 풍경들에 대한 묘사, 그리고 자신과 늘 다투던 친구들에 대한 에피소드들이 나왔다. 그의 성장 속에서 배웠던 것들과 부모 없이 자라는 것에 대한 어려움들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아주 간결하면서도 솔직한 문체였다. 슬슬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날씨가 우중충 해서 거실로 가서 커텐을 쳤다. 그리고 거실 쇼파에 앉아 불을 킨 채, 그의 소설에 빠지듯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20살, 난 여전히 외로웠다. 그리고 난 내가 신부가 될 만한 품성이 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라는 인간은 천성이 간사하고 교활한 놈이다. 신부님은 평소에 내가 꾸며왔던 일들을 조금씩 눈치 채고 있었다. 신부님의 입에서 나가라는 말을 듣기 직전, 결국 나는 성당을 떠나야만 했다. 성당을 떠나 여기저기에서 잡일을 했다. 대부분이 공사판이었고, 헐값의 일당을 받으면서도, 나는 밥 한 끼 내 돈을 내고 먹지 않고 그렇게 돈을 모았다. 그렇게 1년, 나는 외국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졌다. 여행을 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해외봉사활동이었다. 봉사도 하고 외국을 여행도 하면서 작은 돈까지 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렇게 시작해서 난 수년 동안 외국을 돌아다녔다. 동남아 유럽 하와이를 비롯한 여러 섬들, 호주, 심지어는 미국에까지 가서 해외봉사를 했다. 아무리 잘사는 나라라도 거지들과 불행한 사람들은 있으며, 그런 불행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도움을 바라지만 이웃들은 그들을 미워했다. 그랬다. 미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그들은 바로 나의 형제들이였다.>
난 글을 읽으며 이것이 소설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과정을 적어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본격적으로 그가 봉사활동을 한곳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베트남에서 상수도를 설치했던 이야기. 중국 외지의 소수민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고려인 3세를 만나 그들의 선조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장면과 곳곳을 여행하며 인상 깊게 봤던 여행지에 대한 묘사들이 이어져 나왔다.
<난 사회봉사를 하면서 여러 가지를 얻을 수 있었다. 5개 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게 되었고 의학적인 지식, 건설 지식, 여러 가지 경험을 토대로 세운 사람을 다루는 능력, 구호활동을 하면서 배운 수영능력이나 구조 능력등, 평범한 젊은 남자가 가질 수 없는 능력들을 갖춰나갔다. 그렇게 3년이 다되어갔을 때 나는 이미 해외봉사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3년 만에 유네스코 동아시아 위원회의 간부가 되었다.>
자신감에 가득 차있는 모습이었다. 황무지에 떨어뜨려 놓아도 그는 우물을 파고 농사를 지을 만큼 강인해 보였다. 그에게 안겼을 때 내 몸을 에워싸던 그의 단단한 몸이 떠오른다.
<그렇게 해외봉사를 내 모든 삶처럼 여기며 살아갔지만, 내 뼛속의 외로움은 커져만 갔다. 여러 여자들을 만나 봐도 그들은 하나같이 봉사활동으로 다져진 나의 근육들을 사랑할 뿐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과 생각들을 들어주고 이해해주진 못했다. 난 점점 고립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가 왔다. 동료중의 한명이 오스트리아에서 봉사활동을 하다 우연히 한국인을 만났는데, 고아로 태어나 외국으로 입양이 되었고 조 희선이라는 한국인 동생을 찾고 있다는 것이였다! 이름도 내 친누나의 이름과 같은 이름이었다! 난 너무 기뻤다. 이 세상에 내 몸에 흐르는 피와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자, 난 정말 온몸이 불에 타듯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의 열망은 정말 커졌다. 부정했던 신에게 나도 모르게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물어물어 전화번호를 얻어내어 전화를 걸었다. 행복했다! 여성스러우면서도 뚜렷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나를 반가워했다. 그녀 역시 기뻐했다. 남동생이 살아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뿐더러 이렇게 전화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로 그녀 역시 너무나 기뻐했다! 나는 울었다. 엄마 이름이 뭐였는지 묻기에 소리쳤다. 아버지 얼굴이 기억이 나느냐는 누나의 물음에, 나는 울부짖으며 기억나지 않는다고 소리쳤다!
“아버지는 정말 자상한 분이셨다. 너를 만나면 세상에 오직 한 장뿐인 네 아버지의 사진을 네게 줄게.”
너무 기뻐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고 싶었다. 그녀가 결혼해서 낳았다는 나의 귀여운 조카들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사이판. 그리고 오스트리아로 가는 비자가 나오기에는 적어도 한 달이 걸렸다.>
그의 기쁨이 나에게도 전해지듯이 나 역시 그에게 혈육이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리고 그가 그의 누나를 만나기를 나도 모르게 기대하고 있었다.
<과연 누나는 어떤 모습일까? 키가 클까? 얼굴은 예쁠까? 그렇게 그녀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때, 너무나도 기쁜 소식이 왔다. 누나는 일 문제로 미국으로 잠시 출장을 가는데, 잘하면 하루정도 여유를 내어 사이판에 들렸다가 갈수도 있겠다고 했다! 나는 기뻤다. 내 상상에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난 신에게 감사했다. 머릿속에서는 어릴 때 배우던 성경의 구절들이 되살아나 빛나는 것처럼, 나는 점차 행복해졌고 하늘위로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임시로 머물게 된 호텔에는 그녀가 오면 함께 나누어 마실 좋은 와인과, 간식거리들, 그리고 조카들에게 선물할 외제 장난감들과 쿠키들을 준비해두며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불길한 끝 문장으로 소설이 끝났다. 여기저기 넘겨보았다. 낙서들과 쓸데없는 내용의 메모들이 보였다. 난 다급해 졌다. 대체 무슨 일이 생겨난 것일까?
<"문제가 생겼어 희선아. 성수기가 돼서 비행기가 거의 매진이야. 오후에 가는 비행기 표를 예매하긴 했는데 취소해야 할 것 같아. 오후 비행기를 타면 너무 늦어. 갈수가 없게 됐어. 아쉽게 되었구나.”
전화를 받고 난 좌절에 빠졌다. 살아가며 그렇게 절망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사라져 버리는 것도 아닌데,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너무나도 힘들게 했다. 그렇게 절망적인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세상에 나의 혈육이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않았다.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보아야만 했다. 세상에 나와 같은 슬픈 눈빛을 한 사람이 또 하나 있다고 말이다!
“됐어! 됐어 희선아! 비행기 표를 구했어!”
들뜬 목소리로 누나가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이곳에 한국 동포 분을 만났어. 신혼여행으로 사이판으로 가게 됐데. 그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와 너무나도 닮은 점이 많은 거야. 그분도 고아로 태어났데, 그리고 사이판에는 자기의 부인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난 그분의 삶을 축복해주었어. 그리고 내 사정을 이야기했지. 정말 뜻밖에도 그분께서 비행기 표를 양보해 주셨어! 오 하느님! 그분은 정말로 마음이 넓으신 분이야. 부인이 실망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괜찮데, 자기의 연인은 이런 일조차 이해해주는 마음이 넓은 사람 이래!”
난 누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너무 기뻤다. 이것이 모두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만남을 축복해 준 것이리라!
“너도 그분의 이름을 기억해줘. 너도 한국인이니까. 그분은 한국의 유명한 기업에서 대리로 일하신데, 이름은 이 준성이라고 하더라. 분명히 너도 그분께 답례를 해드려야만 해!”
이 준성. 그 남자에게 꼭 답례를 해주리라. 그렇게 그녀와 만날 다음날을 기약하며, 나는 잠에 빠졌다.>
난 조금씩 당황해 하기 시작했다. 사이판이라는 장소가 마음에 걸린 것이다. 사이판… 그곳은 어떤 곳이었나? 내 남편을 잃은 내 마음의 병의 근원지가 아니던가? 준성… 준성이는 내가 아는 그 준성이인가?
<그렇게 다음날, 나는 아침부터 비행기가 보이는 바닷가에 홀로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머릿속엔 온통 그 여자에 대한 상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잊지 못할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녀가 타고 오는 비행기가 사고가 났다. 난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개를 저어 봐도,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사상 최악의 비행기 사고… 기체 폭발로 인한 승객과 승무원 전원 사망. 유래가 없는 최악의 불상사가 하필이면 오늘… 그것도 나의 사랑하는 유일한 혈육인 누나가 타고 있는 비행기라니… 인정할 수 없지만 부인할 수도 없었다. 나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그녀는 나를 만나기 위해 오다, 그렇게 죽었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난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이야기가 점점 나와 관련이 깊어지고 있었다. 혹시나 그가 나를 이용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 일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정황이 너무 맞아 떨어졌다. 준성. 그라면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의 사정을 들어주었으리라. 그러니까 희선의 누나는 준성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준성은 그렇게 비행기 표를 바꾸는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반드시 해주어야만 한다. 그때 자신의 누나와 비행기 표를 바꾼 사람이 바로 나의 남편이었고, 결국에 그도 죽고 말았다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그와는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이판에서 그와 내가 함께 있었다는 것일까! 희선이 나를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고 말한 건 설마, 그 사이판 섬에서 나를 만난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이 스치는 찰나 머릿속에서 한편의 기억이 떠올랐다.
사이판. 그곳에서 남편을 잃고 잠이 드는 날, 나는 온 세상 사람들을 저주했다. 그들은 나를 비웃었다. 남편을 신혼 첫날에 잃은 불쌍한 여인이라고 나를 보면서도, 속으로는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 난 그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바보 같은 여자라고 불렀다. 신혼여행을 따로 오는 멍청한 부부가 어딨냐고 손가락질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처량한 시선. 조롱하는 시선을 느낄 때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난 내 자신에게, 그리고 나를 두고 간 나의 남편 준성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할수록 난 고립되어 갔다. 비행기 사고로 어려워진 공항사정과 여건 탓에 나는 사이판에 몇날 며칠을 갇혀 있어야 했다. 그런 공간 속에서 난 늘 홀로 커다란 어둠을 맞아야 했다. 내게는 모든 것이 거대했다. 내게 불어오는 바람도, 어둠도, 심지어는 내가 지내는 방도 너무 거대했다. 더블 침대, 커플 욕조, 심지어 부부를 위해 준비한 작은 이벤트까지도, 그것들은 너무 거대해서 나는 손조차 댈 수 없었다. 그렇게 내 주위에는 어둠이 도사리고 있고, 그 어둠들은 점점 나를 찾아왔다. 준성. 그가 없이 보내는 신혼의 나날들이 나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는지, 누가 알아줄까?
똑똑.
그런데 내 방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문을 여니 웬 개구리 같은 남자가 서있었다.
“지갑 잃어버리셨죠?”
나는 너무나도 놀랐다. 그때 나는 어떻게 그를 대했었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둘러 다시 그의 소설을 읽어 내려갔다.
<내 탓이다. 모든 게 다 내 탓이다. 내가 그녀를 만나자고 보채지만 않았어도… 그녀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그 사실만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았는데… 그녀를 보고 싶고 만나보고 싶어 했던 내 사치스러운 욕망 때문에 그녀는 죽었다. 고통스러웠다. 비통했다. 하늘이 나를 가지고 장난을 하는 것 같았다. 하늘은 끝내 나를 홀로 남겨두려고 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방탕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사이판에서 간부로서의 나의 책임은 잊고 홀로 술을 마시며 폐인의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녀가 없이 꼬박 20년을 넘게 살았다. 그리고 그녀가 있다는 사실을 안건 고작 열흘 남짓. 하지만 나에게는 지금의 고통은 그 이전의 20년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 고통스러웠다. 우울했다. 모든 것이 의미가 없고 허무했다. 신이 나를 미워 하는 것이리라. 난 그렇게 생각하고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묵고 있던 호텔의 주인이 내게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정말 안 됐군 친구, 하지만 자네보다 불쌍한 여자가 이 호텔에 묵고 있지. 자네와 같은 동양인이야. 내가 듣기로 한국인이라고 하더군, 그녀는 자네보다 불쌍해. 자네는 얼굴도 모르는 자네의 혈육이 그렇게 불의의 사고를 당했지만, 그 여자는 전날 밤까지 함께 사랑을 맹세했던 자신의 남편을 잃었지. 더군다나 신혼 첫날에 말이야.”
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직감했다. 세상에 나처럼 불행한 이가 또 있다고 말이다. 난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우연찮게 그녀가 잃어버린 지갑을 호텔주인에게 받았다. 그리고 난 그 지갑을 돌려주기 위해 그녀의 방을 찾았다.
“누구세요?”
“저기 지갑 잃어버리셨죠?”
그녀의 목소리는 내 누나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하지만 기운이 없어 보였다. 불쌍한 여자. 신혼 첫날에 남편을 잃다니… 가능하다면 나와 대화를 오래 나누어 보았으면.. 당신처럼 나 역시 내 유일한 혈육이었던 누나를 비행기 사고로 잃었다고 고백할 텐데..
문이 열렸다.
“이거 당신 것 맞죠?”
오래 울었던 모양인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도 눈물을 흘린 모양이었다. 눈 안에 옥구슬 같은 눈물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았다.
“난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혹시나 여유가 되신다면 저와 대화를 나누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내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문은 닫혔다. 내가 실망한 사이, 방안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요. 저는 이렇게 매정한 사람은 아니지만 사실은 지금 제가 누구와 대화를 나눌 상태가 못 되요. 한국인이시죠? 연락처를 준다면 마음의 정리가 됐을 때 꼭 사례를 해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당신처럼 소중한 사람을 비행기 사고로 잃었어요!’
난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당신과 나는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쓸쓸한 그녀의 마음이 느껴졌다. 닫힌 나무문에 기댄 채 흐느끼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물 탓에 바닥조차, 대리석으로 만든 기둥조차 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도와주고 싶었다. 치료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참았다. 다시 만나려고 하면 그녀조차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서둘러 주머니에 작은 메모지에 내 연락처와 간단한 내 소개를 적어 문틈으로 집어넣었다.
“조 희선이라고 합니다. 외국에서 봉사활동을 오랫동안 해서 한국으로 가기엔 어렵겠지만
언젠가 전화라도 한번 주세요. 저는 심리치료사입니다.”
결국에 거짓말을 했다. 심리치료사라는 말은 지어낸 말이었다. 하지만 난 그녀의 아픔을 치료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내말을 듣는지 안 듣는지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아쉬웠다. 그런데 그때,
“거기있죠?”
그녀의 목소리. 나무 문틈사이로 공기 속에 수분과도 같은 목소리가 내 귀안으로 스며들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로, 진짜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죽은 내 누이의 목소리였다. 바보스럽게 울었다. 그렇게 울었다. 당신이 내 누나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이 열렸다.
그녀가 울다만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그녀를 본 순간, 내 안의 외로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난 그때 직감했다. 방금 내가 본 슬픈 눈동자를 지닌 그녀는, 나와 같은 운명을 지닌, 또 다른 나 자신이라고…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난 이곳까지 온 것이라고.
그리고 또한가지 난 다짐했다. 다음에 만났을 때, 그때는 당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겠다고 말이다. 난 그렇게 맹세하고 또 그녀의 앞길을 기도해 주었다. 나에게 아직도 어릴 때의 순수했던 신앙심이 있다면, 나의 모든 신앙을 그녀에게 바치리… 그렇게 나의 사이판 봉사활동은 끝이 났다. 그리고 기약했다. 우연히 다시 한번 만났을 때, 그때는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하리라고, 당신과 나는 운명이라고 말이다.>
책을 덮었다.
“휴.”
이제 그의 생각이 이해가 갔다. 나를 떠나려는 이유도 알았다. 날 떠나려고 하는 것은 정말로 나를 위해서였다. 그것이 아니라면 나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나처럼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나는 충격을 받아 내 기억을 지우고 현실을 회피했고, 그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준비한 것이다. 똑같은 운명을 지닌 사람을 만나서는 안 된다는 그의 이론은 틀림없이 만나고 싶어 했던 그의 누이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을 때 느낀 것 이리라. 그리고 사이판에서 나를 만나고 싶어 했지만 만나지 않은 것도, 또다시 우연적으로 만나기를 기약한 그의 마음이었다. 책을 덮고 엎드린 채 눈을 감았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나를 아끼고 있다. 나를 더없이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떠나야만 한다. 함께 있으면 또 다시 그런 불안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아울러 나는 큰 사실을 느꼈다. ‘아무도 내 외로움을 이해하지 못해!’라고 소리쳐왔지만 정작 나는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같은 영혼을 지닌 사람은 서로 만나선 안 된다고 외치는 그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랑하는 누나를 눈앞에서 잃었을 때의 그 충격으로, 그 어떤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고, 그리고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을 위해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희선. 나는 정말로 그를 조금이라고 생각한 걸까?
그가 남긴 명함 속에 전화번호를 중얼거렸다. 전화를 걸고 싶었다. 전화를 걸어서 말하고 싶었다. 그가 나의 우울증을 치료해준 것처럼 나 역시 그의 불안한 마음을 고쳐주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그의 생각을 존중해 주고도 싶었다. 그가 떠나는 날, 그를 배웅해 주리라. 그리고 희선의 소설은, 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해피앤딩으로 끝나게 해주겠다고 맹세했다.
‘당신을 고쳐주고 싶어요!’
눈을 감고 기도했다. 어릴 때 엄마 손을 잡고 따라간 성당 앞에서 보았던, 아기를 안고 있던 마리아님을 떠올렸다.
그렇게 기도하는 순간, 진동이 느껴졌다. 온몸이 떨릴 만큼 놀라웠다. 난 나의 전화기를 누가 울리게 했는지 궁금했다. 누굴까, 그리고 그것보다는 믿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이 그에게 통해서 그가 나에게 전화를 건 것이라고!
“여보세요.”
제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를.. 난 숨소리를 죽이며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아. 지혜씨!”
그의 목소리였다! 짜릿한 쾌감이 밀려왔다. 그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날 점점 들뜨게 했다.
“아! 희선씨!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이런 밤중에!”
내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밤이라뇨. 지금은 대낮이에요! 그리고 그것보다도 지금 밖을 보고 있나요?”
“밖이요?”
난 그의 목소리를 가슴속에 새기며 천천히 거실을 향해 걸어 나갔다.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콩닥거렸다.
“밖에 눈이 내린다고요! 부산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는 눈이 내려요!”
그의 말고 함께 커텐을 열어 젖혔다.
“와!”
정말로 눈이 내렸다. 온 세상은 이미 하얗게 변해 있었고, 눈만 오면 동심의 세계로 빠지는 부산의 사람들은 하나둘씩 거리로 나왔다. 2월 마지막 주에 보란 듯이 내리는 눈에 모두가 기뻐하고 있었다.
“예뻐요! 미스터 조. 이런 날 진짜 집에 틀어박혀 있을 순 없죠?”
“맞는 말이에요. 어디 드라이브나 갈까요. 아니다. 뭘 하지….”
그가 중얼 거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오직 희선, 너만 곁에 있다면 그걸로 족해.
“내가 그리로 갈게요!”
“내가 그리로 갈게요!”
동시에 그와 함께 말이 터지듯 나오고, 나는 웃으며 전화기를 든 채로 밖으로 나갔다.
-10-
붉은 털모자에 베이지색 코트, 그리고 길어서 목에 몇 번을 감아도 허리까지 내려오는 분홍색 목도리를 했다. 그리고 장갑을 끼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약속장소로 천천히 걸어갔다.
“전화 내 눈앞에 보일 때까지 끊으면 안돼요. 알았죠?”
택시를 타고 바다가 보이는 남포동을 지나는 영도다리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려는 연애작가의 본성 탓인지 영도다리를 지나서도 한참을 멀리까지 간 뒤에 내렸다. 아마 이쯤에서 내리면 다리의 한중간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영도다리 앞에서 만나기로 해요. 알았죠? 만나서 남포동에 가던지 아니면 그냥 어디론가 산책을 하던지 그렇게 놀아요. 알았죠? 알았죠?”
그의 대답을 재촉하려 말은 점점 빨라지고, 그가 “네.”라고 대답했다.
“희선씨. 내 소설은 다 읽었어요?”
그에게 물었다.
“네! 어제 얼마나 울었는데요. 정말로 너무 끝부분이 슬픈 거 아니예요? 대체 착하디착한 수빈이는 왜 죽였어요!”
그가 내 소설 속에 여주인공이 죽은 이야기를 꺼내니 너무나 웃겼다.
“수빈이가 아니라 수민이에요!”
내가 소리쳤다. 그가 당황해 했다.
“주인공이 죽는 건 작가 때문이 아니에요. 희선씨. 주인공은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한 거라고요. 작가는 오직 환경을 만들어줄 뿐이에요. 로미오와 쥴리엣을 죽인 건 세익스피어인가요? 로미오는 쥴리엣을 사랑했기에 죽음을 택한 거예요. 잠에서 깨어난 쥴리엣은 자신을 위해 죽은 로미오를 사랑했기에 비수로 자신의 가슴을 찔렀어요. 세상 사람들에게 로미오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수민이가 자신의 삶을 포기한 것 역시. 자신을 끝까지 믿고 사랑해준 지호를 위한 것이란 걸 모르겠어요?”
희선은 내 말에 대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다 와가나요?”
그에게 물었다. 핸드폰과 내 볼 사이의 간격이 더더욱 가까워진다.
“네! 이제 택시에서 내렸어요. 어디쯤이에요? 어디로 가면 되나요?”
그가 물었다. 전화기 안에서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다리 중앙으로 오세요. 저는 다리 중앙에 거의 다 왔어요.”
그에게 말했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다시 불안해 졌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들은 바다로 하염없이 내렸다. 바다는 올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리는 아름다운 눈을 매정하게 녹여 삼켰다. 바다는 이렇게 부산의 시민들을 들뜨게 하는 눈송이의 소중함을 정작 모르는 걸까?
“그런데 희선씨가 보낸 원고 말이에요. 정말로 소설인가요?”
조심스레 물었다. 고백하리라. 모든 것을 다이야기하고 그가 화를 낸다면 용서를 구하리라.
“네! 멋진 스토리 아닌가요? 사이판 비행기 사고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죠!”
그의 단호한 목소리를 듣고 다시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혹시, 혹시나 그도 나처럼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자신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소설이라고 짜 맞추어 낸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렇다면 난 정말 그에게 실낱같은 상처하나 없이 그를 치료 해 줄텐데….
“그런데 어디예요 미스터 조. 난 도착했어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난 이미 도착해 있다고요!”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 거려봤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서는 끝없는 눈들이 내리고, 바다에서는 시작을 알 수도 없는 바람이 몰아쳐 내렸다. 눈은 내 옷깃 사이로, 핸드폰을 쥔 손가락 사이로, 그리고 내 두 눈과 입술사이로 들어왔다.
“영도다리가 있는 곳이 맞아요? 다리 색깔이 무슨 색이에요!”
순간 바람이 너무 심해져서 난 고개를 숙였다. 차가 이리저리 나를 지나쳐갔다.
“빨간 색요.”
그가 너무 당연스럽게 외쳐서 난 웃고 말았다. 부산에 사는 사람이 아니니 헷갈릴 수도 있지. 영도를 통과하는 다리는 두 개라는 사실. 영도다리와 부산대교. 그래 당신이라면 그럴 수도 있어.
“거기가 아니잖아요! 저기 반대편에 다리 보이나요?”
난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올라선 난간 아래로 보이는 짙푸른 바다는 수많은 눈송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대체가 여자의 로망을 모르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다리중앙에서 만나야 키스신을 넣든 뭘 넣든 그림이 나올 거 아닌가.
“네! 아. 빨간 모자 쓴 여자가 지혜씨죠?”
그가 소리쳤다. 그가 보였다. 붉은 다리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그가 보였다. 멀리서도 뚜렷하게 보이는 붉은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로 가야 제일 지름길일까. 이대로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쳐 갈까. 바다에 뛰어들면 모세의 기적처럼 바다가 갈라져 커다란 가리비가 열리고 그와의 보금자리가 만들어지지는 않을까?
그런 환상에 나를 바람처럼 가볍게 했는지, 춤을 추며 눈송이들을 맞고 있을 때, 그는 어디선가 등 뒤에서 나를 안고 있었다.
겹겹이 입은 옷을 뚫고 그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에게 숨긴 나의 비밀은 비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미망인이는 말을 꺼냈다가는 이쪽에서 본전도 못 건질 테니까.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이 어울리는 사내다. 진지한 이야기는 그의 표정 어디에도 어울리질 않는다.
“아 손 시려.”
두 손에 입김을 분다. 그러자 그가 손을 잡았다. 웃음이 나왔다. 낯설고 어색한 순간만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미리 준비를 하고 있어도 얼마든지 낭만은 있다. 대체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손을 잡고 여기저기에서 장난을 쳤다. 모든 것이 신기했다. 아무도 지나지 않은 새하얀 길에 둘의 발자국을 남기는 것만으로도, 세상 누구 못지않은 행복한 데이트였다. 그리고 내일 출국을 하게 될 그를 위해 양복 한 벌을 사 입혔다. 깃이 날카롭게 선 와이셔츠와 반짝이는 넥타이까지 선물했다. 그도 나에게 선물했다. 겨울에는 도저히 못 입을 바람처럼 가벼운 하늘색 원피스였다. 그렇게 서로를 기억할 옷 한 벌을 사고, 맛있는 저녁을 먹고, 그리고 서로에 대한 기억을 남기기 위해서 사진을 찍었다. 저녁에는 함께 술을 마셨다.
나는 고작 맥주 반잔을 마셔놓고는 술에 취한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사라질 그를 조금이라도 오래 붙잡아 두고 싶었다.
“지혜씨 정신 좀 차려 봐요!”
“야. 니 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나의 술주정 연기는 맥주 두 잔을 먹었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목소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커져갔다. 그는 당황해 했다. 하지만 난 잘 안다. 그는 나를 버려두고 가는 남자가 아니다. 비틀거리며 그의 목에 걸려있던 붉은 목도리를 잡고 늘어졌다. 제발 오늘 밤은 같이 있어주기를….
그런 나의 기도가 먹혀들었는지, 택시를 타고 일어났을 때는 그의 호텔에 도착해 있었다. 그렇게 도착해서도 나의 연기는 점점 물이 올라서인지, 그는 나를 업고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등에 업혀서 그의 온기를 느끼는 것도 행복했다.
다음, 그렇게 겨우 도착해서는 그는 많이 더운 모양인지 샤워를 하는 모양이었다. 다음, 그가 다른 방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을 사이 나는 침대위에 누웠다. 그리고 다음에는 그 다음과 다음과 다음을 생각 하는 사이, 나는 내 신들린 취객 연기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다음날, 허탈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짐을 챙기느라 분주한 모양이었다.
“아 지혜씨 일어났네요. 어제 술 조금 했다고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잠결이었는지 집에 가기 싫다고 중얼거리고….”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웃었다.
“결코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오해 말아요. 난 쇼파에서 잤거든요?”
그의 말에 난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웃으며 침대 속에 파묻혀 있다가 벌떡 일어난다. 아침이야 말로, 여자로서 실력 발휘를 할 기회니까.
김밥 도시락에 딸려 올 법한 노란 고무줄 두 개를 집어다 머리를 야무지게 묶었다. 겉옷과 내복을 어께까지 끌어올린다. 아침밥을 해야지. 그리고 넥타이를 매어 주어야지. 그리고 뭘 해주지. 날 잊지 못하게 감동적인 뭔가를 해주고 싶은데 달그락 달그락. 머리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난다.
“뭐하려고요!?”
세면장에서 그가 소리쳤다. 얼굴에는 잔뜩 면도 크림을 바른 채로 얼굴을 내밀었다.
“잠자코 있어요. 아침 할 거니까 양치질은 밥 먹고 하세요.”
그에게 소리쳤다. 밥통을 연다. 이런 제길! 밥이 없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것저것 쓸 만한 재료들이 눈에 보였다. 나이스! 베이컨이라고 우겨도 될 만한 삼겹살이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위에 산지 하루밖에 안 지난 식빵도 있었다! 반 토막 난 당근과 양파도 있고, 양배추도 있다! 그와의 첫 번째 맛있는 아침식사가, 내 손끝에서 만들어져 간다!
나는 야채를 썰고 그는 면도를 한다. 하지만 내가 들고 있는 것이 칼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도 세면장 안에서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도저히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헤피앤딩.
“아니 아침부터 무슨 삼겹살이에요!”
세수를 마친 그의 팔을 잡고 끌어다가 식탁위에 앉혔다.
“시끄러워요. 베이컨이라고 하는 거거든요? 서양에서는 아침에 이 베이컨을 먹는다잖아요.
맛만 좋을 테니 잠자코 먹어요! 배타고 가면 울렁증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 먹을거 아니에요!”
31 노처녀 인생. 뱃장 빼면 시체다. 내가 베이컨이라고 말하면 베이컨이고, 오뚝이라면 오뚝이다. 그에게 소리치고 나는 내가 만든 토스트를 입을 개구리처럼 벌리고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과하다 싶은 버터와 케찹이 빵에서 튀어나왔다.
“하하하.”
“하하하.”
둘이서 먹던 음식을 테이블 가득 뿌리고 말았다.
그렇게 밥을 먹고 그는 내가 사준 양복을 꺼내 입었다. 키가 커서 뒷모습은 정말 예술이었다. 그는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매는데 그것조차 쉬워 보이지 않았다. 내가 메어주려고 생각해봤지만 메는 법을 모른다.
“가면 또 언제 돌아올 건데요!”
내가 그렇게 소리친다.
“아, 길면 3년. 짧으면 1년 정도?”
그가 넥타이를 매다 말고 뒤돌아보았다.
“그렇게나 길게요?!!”
내가 놀라 소리치자 그는 깔깔거리며 웃는다.
“왜요. 내가 보고 싶어요? 보고 싶으면 같이 가던가.”
그가 그렇게 말했다.
“싫어요. 내가 왜.”퉁명스럽게 말하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간다. 화장실에 물을 틀어 놓고 혼자 또 우울증에 빠졌다. 그가 나를 떠난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내가 그를 이해한다면 그를 보내줘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괜찮아 졌다. 거울을 본다. 눈시울이 붉어진 내가 보였다.
“개구리 뒷다리!”
미소가 예뻐진다는 마법의 주문을 외우고, 또 웃어 댄다. 그렇게 변비공주가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희선은 이미 양복도 다 입고 가방까지 다 싼 뒤였다. 나도 얼른 그가 사준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1년 동안 보지 못할 그와의 마지막. 난 그를 배웅해주기 위해 중앙동 국제여객선터미널로 나왔다. 선 플라호를 닮은 흰색 여객선이 있고 그와의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우울증은 뼛속에 있죠. 외로움은 사실 세상에 내가 혼자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답니다.”
“나도 알거든요.”
“하하하하. 이제 알겠죠? 세상엔 내가 혼자가 아니에요. 또 다른 내가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죠.”
그의 말에 대꾸도 않고 난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 이만.”
키가 큰 그가 멋들어지게 인사를 하고 배위에 오른다. 흰 배에 깡충 뛰어올라서 가장 높은 갑판위로 걸어올라 갔다. 갈색 양복에 검은 가방을 들고 있으니, 정말 어디 출장 가는 남편을 배웅하는 느낌이다.
우울한 기분이 들려고 해서 하늘을 보고 눈물을 도로 집어넣었다. 다시 배위를 보니 어느새 그가 갑판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배 갑판 위로 올라가면 안 되는데… 배는 출항을 시작한 모양인지 물살이 진동을 하기 시작했고, 그는 내가 손을 흔들어줄 때까지 그렇게 손을 흔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스터 조!”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른다.
“네!”
그의 입모양이 들려온다.
“1년보다 조금만 일찍 오면 안돼요?”
“네?”
그는 내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배는 점점 멀어졌다.
“조금만 빨리 돌아 와줘요!”
그가 없는 1년을 버티기는 너무 힘들지도 모른다.
“네? 뭐라고요!?”
그는 내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또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하지만 눈물을 삼키려고 하늘을 보았다간, 그에게 더 이상 내 입모양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정말 고마워요. 나와 같은 당신이 이 세상에 분명히 살아 숨 쉬고 있으니, 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에요. 또 다른 당신이 그렇게 멋진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니까요. 난 더 이상 외롭지 않아요!”
그는 내말이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조차 멀어져서 보이질 않는다. 제발, 시간아 멈추어 다오.
“미스터 조!”
“미스터 조!”
그를 불러본다. 바람이 파도를 또 때리어 작은 물방울 들이 내 피부에 와 닿는 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들의 연인과 또 가족을 배웅하기위해 손을 흔드느라 바쁜데, 난 손을 흔들 수가 없다. 그렇게 그와 작별을 할 수가 없다. 이 바다를 얼려 놓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미스터 조. 난 울고 있어요. 난 이제 외롭지 않은데, 눈물은 계속 나요. 당신이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갈 용기가 없어요!”
입을 있는 데로 크게 벌리며 소리를 지른다. 목이 따끔따금 하고 눈물이 입을 타고 흘러 들어간다.
“나에겐 온기가 필요해요. 겨울이 갔지만, 아직도 내겐 따뜻한 옷이 필요하거든요. 난 이렇게 약해 빠졌어요!”
“가지마세요. 나에겐 당신이 필요해요. 외롭지는 않은데도 당신은 필요하다고요!”
그는 이제 웃고 있는 미소조차 보이질 않게끔 멀어져 있었다. 애가 타기 시작했다. 헤어진 지 고작 1분 만에 그의 얼굴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눈을 감고 떠올려 봐도 그의 미소가 기억나지 않았다. 제발 한번만 더 볼 수만 있다면….
“제발, 내 곁에서 함께 살아있어 달라고요!”
눈을 찌푸리자 또 한 움큼의 눈물이 쏟아졌다. 이런 눈물들이 모두 모여, 이렇게 바다가 되는 걸까?
풍덩!
그에게 소리치는 그 순간, 그가 갑판위에서 손을 흔들다 균형을 잃고 바다위로 빠졌다.
“어칵 어칵!”
그가 물을 집어 삼키는 소리가 들리고, 항구에서 벌써 구조대가 출동했다. 나처럼 그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불안한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난 어떡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른다. 내가 사준 양복이 너무 몸에 꽉 맞았는지, 바다 위에서 헤엄도 치기가 힘이 든 모양이다. 하지만 이게 웬일일까? 난 어느새 웃고 있다. 그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서는 뱃속 가득 집어 삼킨 바닷물을 토해내고, 빨간 눈을 들어 날 보겠지. 그리고 바보처럼 나에게 팔을 벌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직업이 직업인 지라. 온몸이 비에 젖은 그때처럼 난 그를 안아주어야지. 그리고 부둥켜안고 흙바닥 위를 데굴데굴 구르리라. 그리고 강아지 목줄을 목에 걸고 그렇게 우리 집에 끌고 가서는, 방 한 켠에다가 잘 묶어두고 그렇게 그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가, 육지위로 기어 올라왔다. 눈이 시뻘개져서는 나를 보고 울먹였다. 손을 내민다. 그가 내게 손을 뻗는다!
“미스터 조! 어서어서!”
입 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쿨럭 거리던 희선은 내가 사준 따뜻한 캔 커피 하나를 마시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높은 곳에서 바다에 떨어졌고, 더군다나 타이타닉호가 침몰했던 2월의 겨울 바다에 빠졌으니, 몸을 벌벌 떠는 것도 이해가 갔다. 구조대가 전해준 큰 담요를 마치 자기 피부 가죽이라도 되는 것 마냥 꼭 껴안고는 깡통 불을 쬐는 그가 처량해 보였다.
“어떡해요. 이번 배 못타면 언제 다시 배를 타는 건데요?”
“그러게요. 큰일이네요. 배 값도 없는데. 그리고 불법으로 선박 갑판위로 올라갔다고 벌금까지 먹인데요.”
그가 말했다. 그의 몸은 아직도 떨린다. 그의 넓은 등을 내 작은 가슴으로 안아주었다.
“혹시. 내가 뭐라고 외치는지 들렸어요?”
내가 조심스레 묻는다.
“아니요. 안 들려서 들으려고 고개를 난간 밖으로 내밀었다가 중심을 잃고 떨어진 거예요.”
그가 말했다. 난 웃는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오른다.
“희선씨. 그 소설 아직 결말이 안 났다고 했죠?”
그에게 말하자 그가 뜨끔 놀랐는지 캔 커피를 땅바닥에 흘렸다.
“네? 네.”
“그럼 그 소설이 결말이 어떻게 나는데요?”
그가 당황해 한다.
“음, 남자주인공이 우연히 그 여자를 만나는데..”
“만나는데? 그 여자주인공은 이름이 머예요?”
“혜..혜지라고 하는데. 어쨌든 둘이 만나서 해피앤딩으로 끝나요.”
“만나서 뭘 어떻게 하길 래 해피앤딩인데요? 만나서 결혼해요? 둘이 사귀나요?”
결혼이라는 말에 몸을 들썩인다.
“결혼까진 좀… 그렇고 일단 사귀는 방향으로 가면서….”
“가면서 어떻게 되는데요!”
“아 그냥 가면서 좋게 좋게 끝나요! 휴우….”
그가 숨을 몰아쉬었다. 재밌지만 이정도로 해두겠다. 아직까지 그는 글을 쓰는 재주가 미약하다. 내가 나서서 마무리를 지어주지 않으면 내용이 질질 끌어 보기 싫다. 재미있는 결말이 떠오른다!
“희선씨. 가장 좋아하는 색깔이 뭔지 동시에 말해보기로 해요. 하나 둘 셋 하면 말하는 거예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말한다. 희선이 크게 당황한 듯이 에? 라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하나 둘 셋!”
난 외치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파랑!”
“빠.빠아랑!”
희선이 내 말에 뒤는 게 소리쳤다. 이걸 보라. 똑같은 영혼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이걸 봐요! 우린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리고 머릿속도 전혀 다르다고요!”
“다, 다시 한 번 기회를..”희선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가 앉은 자리에는, 물이 뚝뚝 떨어져 재미있는 그림을 만들어 냈다.
“좋아요.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는 하나 둘 셋!”
내가 소리치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른다.
“이프온리!”
“쇼..쇼생크 온리!...”
그가 소리쳤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제 미스터 조 말은 틀린 거죠? 똑같은 영혼이라면 좋아하는 것도 같았겠죠. 혹시 유명 하디 유명한 이프 온리라는 영화를 못 봤다고 하진 않겠죠? 그렇죠?”
내말에 그는 풀이 죽은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랬다. 그와 나는 달랐다. 그리고 이 세상 그 누구도 나와 같을 수는 없다.
“한 번만 더 기회를..”
희선이 죽어가는 사람처럼 말한다. 난 웃어댔다. 너무 행복했다. 이렇게 조물락 조물락 할 수 있는 남자가 세상에 어딨는가? 이 남자를 보라. 우리가 서로 같을 필요는 사실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내 소설을 감명 깊게 읽었다는 거짓말도 필요 없고, 내가 죽으면 함께 죽어줄 이가 필요 한 것도 아니다.
“음… 좋아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예요.”
희선이 내 옆에 섰다. 저기 국제 여객선터미널에 들어오는 커다란 배가 그의 곁을 지난다.
“잘 듣고 생각나는 대로 답하세요.”
그의 코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희선이 긴장한 듯이 두 손을 모았다.
“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소리친다. 희선이 크게 당황한 듯이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난 달리기 시작했다. 나풀나풀 거리는 나의 푸른 원피스가 그의 눈에는 한 마리 나비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희선은 담요가 날아가기에 뒤집어쓰고 내 뒤를 쫒아온다. 오늘도 흐린 게 눈이 내려도 나쁘지 않을 날씨다. 이런 해피앤딩에는 난데없는 눈이 내려줘야 그림이 산다.
“지혜씨! 지혜씨 내 대답 들었어요?”
“못 들었는데요!”
“지혜씨!”
“왜요!”
“내 대답 들었어요!?”
그렇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 그러기에 서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그리고 대화가 필요하다. 나를 알아주는 이 없다 불평마라. 그 보다 남을 이해해 주고, 남의 상처를 치료해 주려고 노력해라. 그러다보면 상대는 자신에게 의지하리. 그리고 끝없는 대화가 끝이 날 무렵에,
서로에 대한 비밀 하나 하나를 모두 털어놓으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의지하는 그때 그 무렵엔, 서로는 서로가 너무나도 필요로 하는 자신의 거울과 같은 반쪽이 되어 있을 것이다.
“희선씨. 자. 내가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해요? 원하는 뭐든 되어줄게요.”
우리 집으로 가는 길. 어느새 나는 그의 등에 업혀있다. 접 지른 다리가 아직도 아프다는 핑계를 댔다.
“진짜요!?”
그가 놀라며 고개를 들어 올리는 바람에, 내 앞니가 그의 뒤통수와 부딪혔다.
“으윽!”
신음이 튀어나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네. 뭐든 되어줄게요.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주길 바라나요?”
그에게 물었다. 그리고 양팔에 힘을 가득실어 그를 안는다. 눈이 스르륵 감긴다.
“음. 엄마! 엄마해주세요!”
그가 말한다.
“에?”
아무리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하지만, 엄마는 너무하다. 이 나이에 남편이 없는 것도 서러운 일이지만, 미스터 조 만한 커다란 아들이 내 뱃속에서 나왔다는 것도 조금 곤란한 일이다.
“미스터 조. 그건 좀.”
“왜요! 나 엄마를 한 번도 못보고 살았어요. 그러니까 엄마 해 주세요! 엄마!”
그가 날 들쳐 엎고 성한 길을 두고 겨울의 잔디밭 위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못가 허벅지에 힘이 풀렸는지 그와 함께 잔디 언덕에 굴러 떨어졌다.
“아야!”
잔디 위에 엉덩이를 찍고 눈을 뜨니, 그가 갑자기 나를 뒤덮듯 내 위로 쓰러진다.
“엄마!”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엄마!”
그러자 그도 나를 따라 외쳤다. 급기야 그는 내 위에 쓰러지고, 발길이 닿지 않는지 허둥지둥 댄다. 나는 이런 상황이 너무 재밌고, 또 아름다워서 웃으며 눈을 감고 있는데, 뺨에서 차가운 감각이 느껴졌다. 눈을 떠보니 아직 형태가 살아있는 큼지막한 눈한송이가 내 뺨 위에서 사르륵 녹아가고 있었다. 이마에도, 발끝에도 그를 안은 손끝에도 그 신비로운 감각이 느껴진다. 혀를 내밀고 차가운 눈송이가 내 혀끝에 내려앉기를 기다린다. 눈이 내리는 걸 그도 아는지 꿈틀 대지 않고 내 품에 가만히 안겨 있는다. 세상이 갑자기 사뿐 내려앉는 눈송이처럼 차분해 진다. 그리고 내 몸에 닿아 녹는 눈송이처럼 내 눈도 사르륵 감긴다. 혀끝에 무언가 닿는 게 느껴진다. 입 꼬리가 올라간다. 이제 하늘은 그와 나를 맛있는 눈송이로 감싸 숨겨 줄 것이다.
그 안에서 나는 그와 아무도 모르는 사랑을 해야지.
그리고 그와 함께 수영연습을, 그리고 번지점프를, 그리고 외딴섬에서의 데이트를, 그리고 프리허그를 함께 시작할 테다.
나에게 나의 사랑이 유치하다고 말하지 마라.
난 연애작가다.
나의 소설이 3류라고 말하지 마라.
연애는 원래부터가 3류니까.
-끝-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