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김사인,「풍경의 깊이」

  • 작성일 2007-04-09
  • 조회수 13,046



풍경의 깊이

 

 

 

김 사 인(낭송: 본인)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6(2006년 3분기 우수문학도서)

풀이 파랗게 돋아나고 있습니다. 키 낮은 풀들이 파르르 떨고 있습니다. 그 가녀린 것들의 외로운 떨림으로 우주의 저녁 한 때가 비로소 저물어 간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풀들의 떨림 사이에 묻어 있는 고요속에서, 고요한 봄볕속에서 곤히 잠들고 싶어 합니다. 나비나 벌이나 벌레의 몸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에서 그대의 눈빛을 발견해 내는 섬세한 마음이 풍경을 깊이 있게 바라보게 합니다. 낮아지고 고요해져서 바라보아야 풍경을 깊이 있게 볼 수 있습니다.

문학집배원 도종환

추천 콘텐츠

신현락, 「고요의 입구」

  신현락, 「고요의 입구」 개심사 가는 길문득 한 소식 하려는가나무들 서둘러 흰 옷으로 갈아입는다추위를 털면서 숲 속으로 사라지는길도 금세 눈으로 소복하다 여기에 오기까지 길에서 나는몇 번이나 개심(改心)하였을까한 송이 눈이 도달할 수 있는 평심(平心)의 바닥그것을 고요라고 부를까 하다가산문에 서서 다시 생각해 본다 어느 자리, 어느 체위이건 눈은 불평하지 않는다불평(不平)마저 부드러운 곡선이다설경이 고요한 듯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허지만 송송 뚫린 저 오줌구멍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마을의 개구쟁이들이 저지른 저 고요의 영역 표시경계 앞에서도 어쩔 수 없는 방심(放心) 뒤에 진저리치던나의 불평이란 기실 작은 구멍에 불과한 것하물며 개심(開心)이라니! 그 구멍의 뿌리 모두 바닥에 닿아 있으므로길은 불평의 바닥이다불평하지 않으며 길을 다 갈 수는 없다그러니 애써 한 소식 들은 척 하지 말자눈이 내렸을 뿐 나는 아직 고요의 입구에 있는 것이다 ● 시_ 신현락 - 1960년 경기 화성 출생. 시집으로 『따뜻한 물방울』『풍경의 모서리, 혹은 그 옆』과 논저로『한국 현대시와 동양의 자연관』이 있음.● 낭송_ 변진완 - 배우. 연극 <블랙박스>, 뮤지컬 <천상시계> 등에 출연.● 출전_ 『히말라야 독수리』(bookin)●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민경● 프로듀서_ 김태형   ‘문득 한 소식 하려는가’를 ‘문득 한 깨달음 주려는가’로 읽어도 좋을까? 시에 두 개의 개심이 나온다. 개심(開心)과 개심(改心). 앞의 개심은 ‘지혜를 열어 불도(佛道)를 깨우친다’ 즉 ‘마음이 열린다’는 뜻으로 굉장히 높은 경지의 말이고, 뒤의 개심은 ‘마음을 바르게 고친다’는 뜻으로 범상한 우리네 경지의 말이다.  별안간 소낙눈이라지만, 눈이 쏟아지기 전에도 하늘은 끄무레했을 것이다. 개심사를 찾아가는 시인의 마음처럼. 범상한 한 사람인 시인은 깨달음과 번민, 용서와 상처 사이에서 진자처럼 움직이는 마음의 불평에 처해 있다. 울퉁불퉁한 그 마음바닥이 눈경치를 바라보면서 둥글어지는 듯하다. 곡선은 고요하다. 한 송이 한 송이 눈이 내리고 쌓여 이루는 설경은 부드러운 곡선이다. 설경은 그러하나, 나(시인)는? 나는 기실 뾰족뾰족하다.  ‘불평하지 않으며 길을 다 갈 수는 없다/그러니 애써 한 소식 들은 척 하지 말자’  뭐, 눈이 오기에 잠시 취해 있었을 뿐, 호락호락 개심(開心)할 내가 아니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마음의 고요, 평심의 입구 산문에서 그저 설경을 바라볼 뿐이로다.   소박하고 단아한 시인데, 호락호락 깨달은 척하지 않는 총명함이 톡 쏘는 맛을 낸다.  문학집배원 황인숙

  • 웹관리자
  • 2013-01-07
이창기, 「즐거운 소라게」

이창기, 「즐거운 소라게」 잘 다듬은 푸성귀를 소쿠리 가득 안은막 시골 아낙이 된 아내가쌀을 안치러 쪽문을 열고 들어간 뒤청솔모 한 마리새로 만든 장독대 옆계수나무 심을 자리까지 내려와고개만 갸웃거리다부리나케 숲으로 되돌아간다 늦도록 장터 한 구석을 지키다한 걸음 앞서 돌아가는 흑염소처럼조금은 당당하게,제집 드나드는 재미에갑자기 즐거워진 소라게처럼조금은 쑥스럽게, 얼마 전에 새로 번지가 생긴 땅에한 채의 집을 지은 나는세 식구의 가장(家長)으로서나의 하늘과별과 구름과시에게 이르노니 너희 마음대로떴다 지고흐르다 멈추고왔다 가거라! ● 시_ 이창기 - 1959년 서울 출생. 시집으로 『꿈에도 별은 찬밥처럼』『李生이 담 안을 엿보다』『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등이 있음.● 낭송_ 노계현 - 성우. 외화 <구름 속의 산책> <보통사람들> 등 다수 출연.● 출전_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문학과지성사)●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강성진● 프로듀서_ 김태형   ‘시골에서 10년 가까이 더 살아 보았다. 여전히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2005년에 발행된 시집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의 자서(自序)다. 그 시골 생활의 초기 풍경을 옮긴 시다. ‘얼마 전에 새로 번지가 생긴 땅에/ 한 채의 집을 지은’ 시인은 ‘푸성귀를 소쿠리 가득 안은/막 시골 아낙이 된 아내’니 ‘새로 만든 장독대’니 ‘계수나무 심을 자리’니, 마당까지 쪼르르 달려와 고개를 갸웃거리다 부리나케 달아나는 청솔모니, 여태 몸담아온 도시와는 완연 달라진 삶의 터전에서 모든 것이 새로워 쑥스럽기까지 하다. 그 낯가림과 불안을 떨치고 시인은 시인 가장으로서의 각오와 기대를 아름답고 서늘하게 펼친다.  내가 처음 본 이창기는 아주 젊은 이십대 청년이었는데, 한참 전에 흘러간 가요였던 배호 노래를 즐겨 부르는 것도 그렇고, 어딘지 아저씨 같은 데가 있었다. 만주에서 태어났다는 그의 말이 믿길 정도로. 그리고 말투나 미소가 어딘지 빈정거리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게 따뜻한 마음과 장난기와 수줍음의 미묘한 배합이었다는 걸 한참 뒤에나 알았다. 그의 시들은 시인을 꼭 닮았다. 인생과 생활을 바닥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깊숙한 시선, 느긋하게 한 발 비껴선 듯 짐짓 한가한 포즈, 때로 이죽거리거나 낄낄거리면서도 놓치지 않는 서정, (세심히 볼수록 증폭되는)뉘앙스 풍부한 진술…….  「즐거운 소라게」를 한 번 더 읽어본다. 둘째 연이 유독 슬프다. 장터에 흑염소가 왜 나가 있었겠는가? ‘늦도록 장터 한 구석을’ 지켰건만 흑염소를 팔지 못한 채 터덜터덜 귀가하는 주인의 심사엔 아랑곳없이 흑염소는, 마치 함께 ‘마실’이라도 다녀오는 양 신나라 앞서 걷는다. 궁둥이를 실룩거리며 당당하게. 귀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고……. 집에 돌아와 주인은 한숨을 쉬며 흑염소에게 저녁밥을

  • 웹관리자
  • 2012-12-31
유하, 「참새와 함께 걷는 숲길에서」

유하, 「참새와 함께 걷는 숲길에서」 바람이 낳은 달걀처럼참새떼가 우르르 떨어져 내린탱자나무 숲기세등등 내뻗은 촘촘한 나무 가시 사이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참새들은 무사통과한다 (그 무사통과를 위해참새들은 얼마나 바람의 살결을 닮으려 애쓰는가) 기다란 탱자나무 숲무성한 삶의 가시밭길을 뚫고총총히 걸어가는 참새들의 행렬 (가시에 찔리지 않기 위해참새들은 얼마나 가시의 마음을 닮으려 애쓰는가) ……난 얼마나 생의 무사통과를 열망했는가  ● 시_ 유하 -  전북 고창 출생. 시집으로 『武林일기』『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세상의 모든 저녁』『세운상가 키드의 사랑』『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천일마화』 등이 있음. 김수영문학상 수상.● 낭송_ 김민성 - 성우. <격동50년> <내셔널지오그래픽> 등에 출연.● 출전_ 『세상의 모든 저녁』(민음사)●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김은미● 프로듀서_ 김태형   이 시가 실린 시집 『세상의 모든 저녁』에서 「세상의 모든 저녁3」을 읽다가, 무릎을 치는 대신, 나는 얼른 옮겨 적었다. ‘헤비메탈을 부르다 뽕짝으로 창법을 바꾸는/그런 삶은 살지 않으리라’  시집이 나온 당시, 내 뜨악했던 감상 원인을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헤비메탈 쪽인 줄만 알던 가수가 ‘뽕짝’을 부르는 걸 볼 때, 재밌기도 하지만 어쩐지 ‘손이 오글거리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 전의 유하는 세련된 솜씨로 시대를 찌르고 휘저으며 요리하던, 영악해 보일 정도로 재기 넘치는 도시 시인이었던 것이다.   긴 세월이 흐른 이제 내게도 그때는 없었던 미감(美感)이 생긴 것 같다. 구성진 ‘뽕짝’의 눅눅한 아름다움을 능히 알만한 나이가 돼 버린 것이다.(유하 시들이 ‘뽕짝’이었다는 말은 결단코 아니다!). 다른 시집들에서 유하가 옹호하고, 의도적으로 표방했던 ‘키치’의 발랄함 대신 시집 『세상의 모든 저녁』을 채우고 있는 건 진솔함이랄지 어떤 진득함이다. 시골 풍경이나 기후에 기대어 삶에 대한 성찰과 슬프고 여린 마음을 출중한 언어 감각으로 조리한, 그 깊은 맛! 그 전의 유하 색깔이 바이올렛이라면, 『세상의 모든 저녁』은 퍼플이라고 할까.   ‘난 얼마나 생의 무사통과를 열망했는가’나도 그렇다! 그러나 무사하지 않아서 시를 잉태했고, 무사하지 않아도, 무사하지 않은 채, 우리는 생을 통과한다. ‘탱자 가시 울창한 삶의 목구멍이여,’ (「저녁 숲으로 가는 길 2」에서)  유하는 이제 시 안 쓰나? 유하도 보고 싶고, 그의 새로운 시도 보고 싶다. 문학집배원 황인숙

  • 웹관리자
  • 2012-12-24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3건

  • 이겸희10411

    이 시인의 풍경의 깊이라는 시는 저에게 호기심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제목이 풍경의 아름다움, 풍경의 멋짐도 아니라 깊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풍경이라는 평범한 단어를 장엄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이 시의 내용은 우리가 무시하기 쉽고 오래 쳐다보지도 않는 낮은 풀들, 우리에게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바람, 나의 손바닥 보다 작은 존재들을 엄청난 의미를 갖고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것들이 갖고있는 것들은 우리가 잘 모르지만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고요해져야 비로소 알 수 있다는 말이 쉽게 이해됬다. 왜냐하면 그 풀들의 작은 떨림을 우리는 눈높이를 낮게 하고 조용해지지 않으면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 2018-11-05 10:14:11
    이겸희10411
    0 / 1500
    • 0 / 1500
  • 익명

    낮고 작고 미천한 것들이 깊이있는 풍경이고 우주라고 그대라고......소소한 생명의 위대함, 그것을 발견해내는 작가의 관심과 명찰이 깊이있다.

    • 2010-02-28 11:47:19
    익명
    0 / 1500
    • 0 / 1500
  • 익명

    새싹이 연생돼요. 깊은땅속에서 겨울내 잠자고있다가 갑자기 햇님을 대하니 쑥쓰러웠나봐요 조금지나면 벌이나 나비 벌레들이 몰려와 친구하자고 조를텐데......,

    • 2007-06-26 14:29:50
    익명
    0 / 1500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