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상한 영혼을 위하여」
- 작성일 2006-11-06
- 좋아요 0
- 댓글수 2
- 조회수 6,869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 정 희(낭송: 김혜옥)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에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고정희 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 푸른숲
시드는 갈대가 바람에 흔들립니다. 우리도 갈대처럼 흔들립니다. 그러나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합니다. “충분히 흔들리면서 고통에게로 가자”고 시인은 말합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나 개울은 흐르고/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꽃은 피고 새순은 돋을 것입니다. 영원한 눈물이란 없는 것이므로, 캄캄한 밤이라도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을 것이므로.
문학집배원 도종환
추천 콘텐츠
신현락, 「고요의 입구」 개심사 가는 길문득 한 소식 하려는가나무들 서둘러 흰 옷으로 갈아입는다추위를 털면서 숲 속으로 사라지는길도 금세 눈으로 소복하다 여기에 오기까지 길에서 나는몇 번이나 개심(改心)하였을까한 송이 눈이 도달할 수 있는 평심(平心)의 바닥그것을 고요라고 부를까 하다가산문에 서서 다시 생각해 본다 어느 자리, 어느 체위이건 눈은 불평하지 않는다불평(不平)마저 부드러운 곡선이다설경이 고요한 듯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허지만 송송 뚫린 저 오줌구멍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마을의 개구쟁이들이 저지른 저 고요의 영역 표시경계 앞에서도 어쩔 수 없는 방심(放心) 뒤에 진저리치던나의 불평이란 기실 작은 구멍에 불과한 것하물며 개심(開心)이라니! 그 구멍의 뿌리 모두 바닥에 닿아 있으므로길은 불평의 바닥이다불평하지 않으며 길을 다 갈 수는 없다그러니 애써 한 소식 들은 척 하지 말자눈이 내렸을 뿐 나는 아직 고요의 입구에 있는 것이다 ● 시_ 신현락 - 1960년 경기 화성 출생. 시집으로 『따뜻한 물방울』『풍경의 모서리, 혹은 그 옆』과 논저로『한국 현대시와 동양의 자연관』이 있음.● 낭송_ 변진완 - 배우. 연극 <블랙박스>, 뮤지컬 <천상시계> 등에 출연.● 출전_ 『히말라야 독수리』(bookin)●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민경● 프로듀서_ 김태형 ‘문득 한 소식 하려는가’를 ‘문득 한 깨달음 주려는가’로 읽어도 좋을까? 시에 두 개의 개심이 나온다. 개심(開心)과 개심(改心). 앞의 개심은 ‘지혜를 열어 불도(佛道)를 깨우친다’ 즉 ‘마음이 열린다’는 뜻으로 굉장히 높은 경지의 말이고, 뒤의 개심은 ‘마음을 바르게 고친다’는 뜻으로 범상한 우리네 경지의 말이다. 별안간 소낙눈이라지만, 눈이 쏟아지기 전에도 하늘은 끄무레했을 것이다. 개심사를 찾아가는 시인의 마음처럼. 범상한 한 사람인 시인은 깨달음과 번민, 용서와 상처 사이에서 진자처럼 움직이는 마음의 불평에 처해 있다. 울퉁불퉁한 그 마음바닥이 눈경치를 바라보면서 둥글어지는 듯하다. 곡선은 고요하다. 한 송이 한 송이 눈이 내리고 쌓여 이루는 설경은 부드러운 곡선이다. 설경은 그러하나, 나(시인)는? 나는 기실 뾰족뾰족하다. ‘불평하지 않으며 길을 다 갈 수는 없다/그러니 애써 한 소식 들은 척 하지 말자’ 뭐, 눈이 오기에 잠시 취해 있었을 뿐, 호락호락 개심(開心)할 내가 아니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마음의 고요, 평심의 입구 산문에서 그저 설경을 바라볼 뿐이로다. 소박하고 단아한 시인데, 호락호락 깨달은 척하지 않는 총명함이 톡 쏘는 맛을 낸다. 문학집배원 황인숙
- 웹관리자
- 2013-01-07
이창기, 「즐거운 소라게」 잘 다듬은 푸성귀를 소쿠리 가득 안은막 시골 아낙이 된 아내가쌀을 안치러 쪽문을 열고 들어간 뒤청솔모 한 마리새로 만든 장독대 옆계수나무 심을 자리까지 내려와고개만 갸웃거리다부리나케 숲으로 되돌아간다 늦도록 장터 한 구석을 지키다한 걸음 앞서 돌아가는 흑염소처럼조금은 당당하게,제집 드나드는 재미에갑자기 즐거워진 소라게처럼조금은 쑥스럽게, 얼마 전에 새로 번지가 생긴 땅에한 채의 집을 지은 나는세 식구의 가장(家長)으로서나의 하늘과별과 구름과시에게 이르노니 너희 마음대로떴다 지고흐르다 멈추고왔다 가거라! ● 시_ 이창기 - 1959년 서울 출생. 시집으로 『꿈에도 별은 찬밥처럼』『李生이 담 안을 엿보다』『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등이 있음.● 낭송_ 노계현 - 성우. 외화 <구름 속의 산책> <보통사람들> 등 다수 출연.● 출전_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문학과지성사)●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강성진● 프로듀서_ 김태형 ‘시골에서 10년 가까이 더 살아 보았다. 여전히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2005년에 발행된 시집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의 자서(自序)다. 그 시골 생활의 초기 풍경을 옮긴 시다. ‘얼마 전에 새로 번지가 생긴 땅에/ 한 채의 집을 지은’ 시인은 ‘푸성귀를 소쿠리 가득 안은/막 시골 아낙이 된 아내’니 ‘새로 만든 장독대’니 ‘계수나무 심을 자리’니, 마당까지 쪼르르 달려와 고개를 갸웃거리다 부리나케 달아나는 청솔모니, 여태 몸담아온 도시와는 완연 달라진 삶의 터전에서 모든 것이 새로워 쑥스럽기까지 하다. 그 낯가림과 불안을 떨치고 시인은 시인 가장으로서의 각오와 기대를 아름답고 서늘하게 펼친다. 내가 처음 본 이창기는 아주 젊은 이십대 청년이었는데, 한참 전에 흘러간 가요였던 배호 노래를 즐겨 부르는 것도 그렇고, 어딘지 아저씨 같은 데가 있었다. 만주에서 태어났다는 그의 말이 믿길 정도로. 그리고 말투나 미소가 어딘지 빈정거리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게 따뜻한 마음과 장난기와 수줍음의 미묘한 배합이었다는 걸 한참 뒤에나 알았다. 그의 시들은 시인을 꼭 닮았다. 인생과 생활을 바닥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깊숙한 시선, 느긋하게 한 발 비껴선 듯 짐짓 한가한 포즈, 때로 이죽거리거나 낄낄거리면서도 놓치지 않는 서정, (세심히 볼수록 증폭되는)뉘앙스 풍부한 진술……. 「즐거운 소라게」를 한 번 더 읽어본다. 둘째 연이 유독 슬프다. 장터에 흑염소가 왜 나가 있었겠는가? ‘늦도록 장터 한 구석을’ 지켰건만 흑염소를 팔지 못한 채 터덜터덜 귀가하는 주인의 심사엔 아랑곳없이 흑염소는, 마치 함께 ‘마실’이라도 다녀오는 양 신나라 앞서 걷는다. 궁둥이를 실룩거리며 당당하게. 귀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고……. 집에 돌아와 주인은 한숨을 쉬며 흑염소에게 저녁밥을
- 웹관리자
- 2012-12-31
유하, 「참새와 함께 걷는 숲길에서」 바람이 낳은 달걀처럼참새떼가 우르르 떨어져 내린탱자나무 숲기세등등 내뻗은 촘촘한 나무 가시 사이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참새들은 무사통과한다 (그 무사통과를 위해참새들은 얼마나 바람의 살결을 닮으려 애쓰는가) 기다란 탱자나무 숲무성한 삶의 가시밭길을 뚫고총총히 걸어가는 참새들의 행렬 (가시에 찔리지 않기 위해참새들은 얼마나 가시의 마음을 닮으려 애쓰는가) ……난 얼마나 생의 무사통과를 열망했는가 ● 시_ 유하 - 전북 고창 출생. 시집으로 『武林일기』『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세상의 모든 저녁』『세운상가 키드의 사랑』『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천일마화』 등이 있음. 김수영문학상 수상.● 낭송_ 김민성 - 성우. <격동50년> <내셔널지오그래픽> 등에 출연.● 출전_ 『세상의 모든 저녁』(민음사)●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김은미● 프로듀서_ 김태형 이 시가 실린 시집 『세상의 모든 저녁』에서 「세상의 모든 저녁3」을 읽다가, 무릎을 치는 대신, 나는 얼른 옮겨 적었다. ‘헤비메탈을 부르다 뽕짝으로 창법을 바꾸는/그런 삶은 살지 않으리라’ 시집이 나온 당시, 내 뜨악했던 감상 원인을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헤비메탈 쪽인 줄만 알던 가수가 ‘뽕짝’을 부르는 걸 볼 때, 재밌기도 하지만 어쩐지 ‘손이 오글거리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 전의 유하는 세련된 솜씨로 시대를 찌르고 휘저으며 요리하던, 영악해 보일 정도로 재기 넘치는 도시 시인이었던 것이다. 긴 세월이 흐른 이제 내게도 그때는 없었던 미감(美感)이 생긴 것 같다. 구성진 ‘뽕짝’의 눅눅한 아름다움을 능히 알만한 나이가 돼 버린 것이다.(유하 시들이 ‘뽕짝’이었다는 말은 결단코 아니다!). 다른 시집들에서 유하가 옹호하고, 의도적으로 표방했던 ‘키치’의 발랄함 대신 시집 『세상의 모든 저녁』을 채우고 있는 건 진솔함이랄지 어떤 진득함이다. 시골 풍경이나 기후에 기대어 삶에 대한 성찰과 슬프고 여린 마음을 출중한 언어 감각으로 조리한, 그 깊은 맛! 그 전의 유하 색깔이 바이올렛이라면, 『세상의 모든 저녁』은 퍼플이라고 할까. ‘난 얼마나 생의 무사통과를 열망했는가’나도 그렇다! 그러나 무사하지 않아서 시를 잉태했고, 무사하지 않아도, 무사하지 않은 채, 우리는 생을 통과한다. ‘탱자 가시 울창한 삶의 목구멍이여,’ (「저녁 숲으로 가는 길 2」에서) 유하는 이제 시 안 쓰나? 유하도 보고 싶고, 그의 새로운 시도 보고 싶다. 문학집배원 황인숙
- 웹관리자
- 2012-12-24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2건
상한 갈대, 밑둥 잘린 나무,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 등 어찌 보면 생존에 매우 불리하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들도 희망을 갖고 살아남는다고 합니다. 이 시는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담담히 고통을 받아들이면서 고난 속에서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를 읽고 평소 힘든 일이 있으면 지레 포기해 버리고 열심히 하지 않던 저의 모습이 생각나 부끄러웠습니다. 더욱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라는 구절에서 의지를 가지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무슨 일이든 의지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임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영원한 눈물과 비탄은 없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다는 내용에서는 아무리 절망적 상황에서도 언제나 희망은 있다는 화자의 생각을 통해 저도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직 시의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 했지만 얕은 지식으로 시의 내용을 말해보자면 이 시는 세상의 이치를 말하는 것 같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두려움과 외로움 등의 감정 때문에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이 시가 나를 위로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