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배, 「굴욕은 아름답다」
- 작성일 2011-02-21
- 좋아요 0
- 댓글수 4
추천 콘텐츠
멍 임솔아 더러워졌다. 물병에 낀 물때를 물로 씻었다. 투명한 공기는 어떤 식으로 바나나를 만지는가. 멍들게 하는가. 멍이 들면 바나나는 맛있어지겠지. 창문을 씻어주던 어제의 빗물은 뚜렷한 얼룩을 오늘의 창문에 남긴다. 언젠가부터 어린 내가 스토커처럼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닌다. 꺼지라고 병신아, 아이는 물컹하게 운다. 보란 듯이 내 앞에서 멍든 얼굴을 구긴다. 구겨진 아이가 내 앞에 있고는 한다. 사랑받고 싶은 날에는 사람들에게 그 어린 나를 내세운다. 사람들은 나를 안아준다. 구겨진 신문지로 간신히 창문의 얼룩을 지웠다. 창밖을 내다보다 멍든 바나나를 먹었다. -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문학과지성사, 2017)
- 2025-05-08
움직이지 않고 달아나기 멈추지 않고 그 자리에 있기 임유영 시험이 끝나고 너와 같이 걸었다 옛날처럼 손잡고 다정하게 여기서 만날 줄은 정말 몰랐네 그렇지 개구리 군복을 입은 넌 중앙도서관에서 내려왔고 나는 종로 어디 구석진 찻집에서 대추차랑 약과를 먹고 있었는데 통유리창 밖에서 네가 손 번쩍 들고 인사했지 우리 그때 눈이 마주쳐서 웃었지 네 코에 걸쳐진 잠자리 안경 밑에 (넌 가끔 안경을 꼈지) 하얀색 마스크 속에 (너도 요즘 마스크를 쓰고 있겠지) 너의 입술이 천천히 그리는 반달 우리는 천천히 산책을 했지 아무래도 쫓기는 마음으로 이제 곧 경찰이 들이닥치고 나의 친구들은 모두 맞아서 다칠 텐데 하지만 내가 대오를 벗어나는 선택을 한번 해본 것인데 경멸 없이 너를 만나보고 대추차도 먹어보고 허름한 찻집에도 들어가보고 불친절한 주인 남자에게 화내지도 않고 담배 피우지 않고 술 마시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우울하지도 않고 한 번쯤 그래보고 싶었어 다르게도 살아보고 싶어 그날 내가 본 것 그날 내가 겪은 것 모두 새로 기입하는 이 흐린 저녁 그 가로등 아래서 다시 만나자 다시 만나자 - 시집 『오믈렛』(문학동네, 2023)
- 2025-04-05
세컨드핸드 조용우 시장에서 오래된 코트를 사 입었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자 다른 나라 말이 적힌 쪽지가 나왔다 누런 종이에 검고 반듯한 글씨가 여전히 선명했고 양파 다섯, 감자 작은 것으로, 밀가루, 오일(가장 싼 것), 달걀 한 판, 사과주스, 요 거트, 구름, 구름들 이라고 친구는 읽어 줬다 코트가 죽은 이의 것일지도 모른다며 모르는 사람의 옷은 꺼림칙하다고도 했다 먹고사는 일은 어디든 비슷하구나 하고 웃으며 구름은 무슨 뜻인지 물었다 구름은 그냥 구름이라고 친구는 답했다 돌아가는 길에 모르는 사람이 오래전에 사려고 했던 것들을 입으로 외워 가면서 어디로 간 것일까 그는 여전히 조용하고 따뜻한 코트를 버려두고 이 모든 것을 살뜰히 접어 여기 안쪽에 넣어 두고 왜 나는 모르는 사람이 아닌 것일까 같은 말들이 반복해서 시장을 통과할 때 상점으로 들어가 그것들을 하나씩 바구니에 담아 넣을 수 있다 부엌 식탁에 앉아 시큼하기만 한 요거트를 맛있게 떠먹을 수도 있다 오늘 저녁식사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리면서 놀라운 것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끼면서 구름들 바깥에서 이곳을 무르게 둘러싸고서 매일 단지 다른 구름으로 떠오는 그러한 것들을 이미 일어난 일처럼 지나쳐 걷는다 주머니 속에 남아 있는 이름들을 하나씩 만지작거리면서 나는 오고 있다 - 시집 『세컨드핸드』(민음사, 2023)
- 2025-03-06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4건
나는 이 시를 읽고 아우가 너무 힘들고 고통을 받고 있고 연민을 느꼈습니다.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순경인 화자의 아우는 그의 윗사람 상사에게 모멸과 질타의 말을 듣고 또한 협박과 회유를 받았기 때문에 나는 아우에게 연민과 슬프게 느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지금 화자의 아우 처지는 담석증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서 수술을 받고 있는 처지이고 그 처지 때문에 아우는 고통을 겪고 있으며 아우가 고통을 겪는 처지 때문에 연민을 느꼈습니다. 제 생각에는 모멸, 질타, 협박과 돌은 화자의 아우가 겪게되는 고통을 뜻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시의 화자의 아우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만년 순경인 아우에게 가해졌던 모진 모멸과 질타의 말, 협박과 회요의 말, 하지만 아우의 몸 속에는 그 어떠한 말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이 시는 한 사람이 견뎌야 하는 삶의 무게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살면서 많이 들을 수 밖에 없는 날카로운 말들 아마 그 말들 하나하나가 쌓여서 단단한 돌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아우의 담낭 속에서 발견된 수많은 돌조각들, 아마 그것은 아우가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고, 느꼈던 어쩌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나름대로의 돌조각들이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시의 제목과 같이 "이런 돌들이 있기에 인간은 더욱 나아가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달든 쓰든 그 많은 기억이 인생을 만들고 우리를 성장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 또한 외면하고 싶은 기억이 있는지, 그 기억이 있다면 그 기억을 통해 어떻게 달라졌는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이 시에서 아우가 경찰일을 하면서 상사의 압박과 피의자를 심문하느라 험한 말을 듣거나 했는데도 아우의 내장의 모습에는 이러한 말들이 보이지 않고 아름답다고 표현한것이 나의 내심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어디 한 구석에 숨은 험한 말들이 쌓이고 쌓여서 고통이 되고 담낭에서 나온 돌들은 지금까지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위해 견디면서 열심히 살아왔다는 증거인것 같다.
나도 마음이 찾을수 있는 존재이길 빈 적이 있었는데. 너무 만나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