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기, 「즐거운 소라게」
- 작성일 2012-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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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시골 아낙이 된 아내가
쌀을 안치러 쪽문을 열고 들어간 뒤
청솔모 한 마리
새로 만든 장독대 옆
계수나무 심을 자리까지 내려와
고개만 갸웃거리다
부리나케 숲으로 되돌아간다
한 걸음 앞서 돌아가는 흑염소처럼
조금은 당당하게,
제집 드나드는 재미에
갑자기 즐거워진 소라게처럼
조금은 쑥스럽게,
한 채의 집을 지은 나는
세 식구의 가장(家長)으로서
나의 하늘과
별과
구름과
시에게 이르노니
떴다 지고
흐르다 멈추고
왔다 가거라!
2005년에 발행된 시집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의 자서(自序)다. 그 시골 생활의 초기 풍경을 옮긴 시다. ‘얼마 전에 새로 번지가 생긴 땅에/ 한 채의 집을 지은’ 시인은 ‘푸성귀를 소쿠리 가득 안은/막 시골 아낙이 된 아내’니 ‘새로 만든 장독대’니 ‘계수나무 심을 자리’니, 마당까지 쪼르르 달려와 고개를 갸웃거리다 부리나케 달아나는 청솔모니, 여태 몸담아온 도시와는 완연 달라진 삶의 터전에서 모든 것이 새로워 쑥스럽기까지 하다. 그 낯가림과 불안을 떨치고 시인은 시인 가장으로서의 각오와 기대를 아름답고 서늘하게 펼친다.
내가 처음 본 이창기는 아주 젊은 이십대 청년이었는데, 한참 전에 흘러간 가요였던 배호 노래를 즐겨 부르는 것도 그렇고, 어딘지 아저씨 같은 데가 있었다. 만주에서 태어났다는 그의 말이 믿길 정도로. 그리고 말투나 미소가 어딘지 빈정거리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게 따뜻한 마음과 장난기와 수줍음의 미묘한 배합이었다는 걸 한참 뒤에나 알았다. 그의 시들은 시인을 꼭 닮았다. 인생과 생활을 바닥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깊숙한 시선, 느긋하게 한 발 비껴선 듯 짐짓 한가한 포즈, 때로 이죽거리거나 낄낄거리면서도 놓치지 않는 서정, (세심히 볼수록 증폭되는)뉘앙스 풍부한 진술…….
「즐거운 소라게」를 한 번 더 읽어본다. 둘째 연이 유독 슬프다. 장터에 흑염소가 왜 나가 있었겠는가? ‘늦도록 장터 한 구석을’ 지켰건만 흑염소를 팔지 못한 채 터덜터덜 귀가하는 주인의 심사엔 아랑곳없이 흑염소는, 마치 함께 ‘마실’이라도 다녀오는 양 신나라 앞서 걷는다. 궁둥이를 실룩거리며 당당하게. 귀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고……. 집에 돌아와 주인은 한숨을 쉬며 흑염소에게 저녁밥을 주었겠지. 그 주인도 흑염소도 시인의 감정에 맺혀 이렇듯 시의 무늬로 한 자리 차지했다.
이창기는 깊이와 발랄함, 페이소스와 웃음을 함께 엮는 시인이다. 마치 고둥껍질을 업은 소라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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