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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후명「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 작성일 2008-04-10
  • 조회수 12,140



윤후명「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다음 과제는 그림 보고 느낌 말하기였다. 의사는 가방 속에서 다른 책자를 꺼내 이쪽저쪽 펼쳐보였다. 그것은 아무런 구체적 형상도 아닌 부정형의 형상으로서, 말하자면 제멋대로 된, 그림 아닌 그림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것이었다. 의사 역시 이건 정답은 없는 거라고 안심을 주기도 했던 것이다.
  “박쥐……나비……골반……바다 속……사원…….”
  나는 그야말로 느낌을 말하려고 애썼다. 정답이 없다고 했어도, 아니 정답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은 더 어려운 문제였다. 정답이 있었다면 모른다고 해도 그만일 텐데 어쨌든 무엇인가 자신의 견해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임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런데도 내가 하나하나 말할 때마다 의사는 무엇인가 차트에 꼬박꼬박 적어넣는 것이었다. 의사가 적어넣는 것을 보며 나는 그가 내 존재의 비밀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리라는 기분 나쁜 느낌에 사로잡히기까지 했다. 끔찍한 일이었다.
  몇 개의 그림을 그리고 생각을 말하고 하는 동안 나는 마치 산 채로 회를 떠 살이 다 발라내지고 앙상한 뼈만 남은 생선 꼴이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언젠가 거제도에 갔을 때 낚시꾼 사내가 갓 잡은 물고기를 회를 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살은 말끔히 발라내고 머리와 꼬리와 뼈만 남은 것을 사내는 바위 밑 바닷물에 휙 던져버렸다. 거기까지는 나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재미있게 보았었다. 그와 함께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 뼈만 남은 물고기가 꼬리지느러미만을 부지런히 양옆으로 움직여 저쪽 물 가운데로 도망쳐 가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낚시꾼 사내도 어 저 놈 봐라 하면서, 허허허 어이없는 웃음을 내게로 날렸다. 나는 마지못해 따라 웃기는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기어코 내가 못 볼 것을 보았구나 하고 낙담하고 있는 모습을 그에게 보이기 싫어서 웃어준 웃음이었다.

 

 

● 출전 :『현대문학상 수상작품집 1990~1996』, 현대문학사 2008 

 

 

● 작가 - 윤후명 : 1946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1967년 경향신문신춘문예에 시가, 1979년 한국일보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 작품으로「둔황의 사랑」「부활하는 새」「여우 사냥」「약속 없는 세대「삼국유사 읽는 호텔」등이 있으며, 녹원문학상, 소설문학작품상,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이수문학상 등을 수상함.

● 낭독- 이영석: 연극배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유령> <달빛 멜로디>, 영화 <라디오스타> <선생 김봉두> <시간> 등에 출연.

뼈만 남은 물고기는 어디로 갔을까요? 혹시 친구들이 알아봐 주었을까요? 친구들은 동정을 했을까요, 낙담을 숨겼을까요, 어이없어 했을까요, 웃었을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정답이 없기 때문에 더 어려운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이 내게 무슨 상관이냐, 라는 말을 한 마디로 하자면?
…………………………
이 소설의 앞부분에 정답이 있습니다. 집어쳐!

 

2008. 4. 10 문학집배원 성석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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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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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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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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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6건

  • 익명

    멋있네요. 꼬리지느러미로 헤엄쳐 간다니. 정말로 헤엄쳐 갔던걸까요 아니면 물에 흔들려 떠내려간걸 보고 그렇게 생각했던걸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헤엄쳐 갔기를 바랍니다.

    • 2009-08-17 19:36:3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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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중대부중 3학년 - 한상완윤후명 시인은 시를 일일히 쓰면서도 운율이 제대로 느껴집니다!

    • 2008-07-16 16:27:58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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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중대부중 3학년 - 제갈도영좋은 글이었습니다.

    • 2008-07-16 16:25:5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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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중대부중 3학년 - 허희정앙상한 가시만 남은 생선이 헤엄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는 없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 2008-07-16 16:23:1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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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중대부중 3학년 - 변수경정답 없는 정답이 가장 어렵다는 말에 진심으로 공감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 2008-07-16 16:20:3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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