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이모들의 집

  • 작성일 2019-02-01

[단편소설]



이모들의 집



이경란




빗물이 흘러 복도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었다. 낡아서 틀어진 창틀 때문이었다. 유진은 물이 없는 곳을 골라 디디며 걸었다. 뒷굽에 드러난 쇠못이 타일 바닥을 치는 소리가 빗소리를 날카롭게 끊어냈다.
현관에 들어서던 유진은 멈칫했다. 낯선 신발. 우산꽂이에는 접이식 우산이 활짝 벌어진 채 꽂혀 있었다. 유진이 우산을 들고 망설이는 사이 수건을 든 복례가 다가왔고 그 뒤에 누군가 와 섰다.
"잘 지냈지······요?"
유진은 대답하는 대신 복례를 봤다. 복례가 자기 팔꿈치를 꾹꾹 주무르면서 말했다.
"아까 오후에 왔는데."
유진은 복례가 내민 수건을 받아 어깨와 가방의 물기를 닦고 마지막으로 발을 닦았다. 바닥에 내려놓은 수건을 순영이 냉큼 집어 들었다. 유진이 닫힌 방문으로 눈길을 주자 복례가 얼른 말했다.
"자."
거실 바닥에 장난감이 널려 있었다. 복례가 잊고 있었다는 듯 그것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허둥대는 몸짓과 다르게 동작은 느렸다. 유진의 등에 대고 순영이 작게 말했다.
"자고 가도 되지?"
유진은 순영 대신 복례를 봤다. 복례는 장난감을 하나씩 집어 상자에 담고 있었다. 유진은 답을 기다리는 순영에게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니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아서였다. 더구나 내 집에 찾아온, 나이가 들 만큼 든 사람에게 매몰차게 대하기가 아무래도 쉽지 않았다. 순영은 유진의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한 척 싱긋 웃었다. 거절의 기회를 놓친 유진은 어차피 함께 살던 사람인데 하루쯤이야, 라고 합리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순영이 뭐라고 했기에 복례가 덜컥 문을 열어 주었는지 궁금했다. 잠든 민수를 들여다보고 안방으로 건너오자마자 진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모가 와 있는데 혹시 알고 있었냐고. 옷을 갈아입다가 이전 이모, 라고 한 번 더 보내고 또다시 순영 이모, 네 번째, 라고 보냈다. 답장으로 물음표 세 개가 찍혀 왔다. 순영을 모른다는 뜻인지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뜻인지. 진형의 메시지는 언제나 짧았다.
유진은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웠다. 베었던 베개를 끌어내려 그 위에 발을 올렸다. 종일 힐을 신고 버틴 탓에 다리가 묵직했다. 민수를 낳고 복직하면서 사무실에서 쓰던 슬리퍼를 버렸다. 공연한 짓임을 알았지만 몸보다 마음을 따르기로 했다. 부엌 쪽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났다. 복례가 몇 번을 되물었고 순영이 대답했다. 복례의 청력은 확실히 문제였다. 진작 돌려보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언제나 그랬듯 생각에 그쳤다. 머뭇거리는 사이 이미 몇 달이 훌쩍 지났다. 그사이 민수는 복례에게 익숙해졌고 사람이 또 바뀌는 것보다는 불편을 감수하는 게 낫겠다고 마음먹었었다. 대신 복례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받을 줄 알았다. 웬만한 일들은 문자로 처리할 수 있어 그것은 대단한 장점이었다. 집에서는 달랐다.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해야 했고 입술을 과장되게 움직여야 했으므로 말을 하다 보면 유진은 저도 모르게 화가 났다. 화가 나서 목소리가 더 커졌고 하던 말을 그만두는 일이 많아졌다. 순영의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움찔 놀라면서도 유진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때 옷을 갈아입던 진형이 물었다.
"무슨 말이야? 누가 왔다고?"
"와 있더라고. 전에 있던 이모."
유진은 이모라고 말할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간지러웠고 못마땅했다. 처음 사람을 들이기로 했을 때 유진은 진형에게 키득거리며 물었다. 다들 이모라고 부른대. 왜 이모야, 고모가 아니고. 진형이 한심해하는 눈으로 바라봤고 그 눈빛 때문에 유진은 웃음이 딱 멎었다. 가끔 보이는 그 눈빛은 묘하게도 모멸감을 불러일으켰다. 진형이 되물었다. 고모 분식 있는 거 봤냐. 그때 일이 떠오르자 새삼스럽게 불쾌해졌다.
"왜 왔대?"
진형이 불퉁하게 물었다.
"그러게······."
유진이 감정을 억누르고 말꼬리를 길게 뺐다.
"애 잘 챙겨라."
진형은 누우면서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나 어울릴 법한 어조로 말했다. 유진은 화장을 지우다 말고 거울 속의 진형을 향해 쏘아붙였다.
"챙겨라?"
진형이 이불을 끌어올리며 돌아누웠다. 유진은 침대에 걸터앉아 이불을 들췄다.
"피곤하다."
웅크린 몸을 더 작게 움츠리는 진형을 보고 유진은 체념하듯 중얼거렸다.
"정말 왜 왔을까? 있지, 아까 이모 방 문 옆에 순영 이모 가방 있는 걸 봤거든. 그게 꽤 크더라고."
"나 신경 쓸 거 많은 사람이다. 남의 가방 사이즈까지는 아니지."
"이상해, 아무래도."
진형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유진에게는 원래 이모가 없었는데 최근 이 년 동안 다섯 명이 생겼다. 삼 개월짜리 이모도 있었고 육 개월짜리 이모도 있었다. 한번은 열흘짜리 이모도 왔다 갔다. 지금 이모인 복례는 그럭저럭 오 개월째에 접어들었다. 다른 집 이모들은 몇 년을 간다는데 우리 집 이모들은 왜 이 모양일까. 이모가 그만둘 때마다 유진은 진형에게 투덜거렸다. 유진에게 엄마가 없어서 이모가 붙지 않는다는 논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진형의 것이었다. 진형이 그렇게 말한 적은 없으니 그것은 유진의 짐작에 불과했고 엄밀하게 따지자면 논리는 유진의 것이라고 해야 마땅했지만 진영의 태도를 보면 논리보다 짐작이 정확할 수도 있었다. 다른 많은 경우처럼. 다시 구해야겠네. 진영의 반응은 그게 전부였다. 침착하다고 보기에는 너무 물기가 없는 목소리였다. 이모를 다시 구하는 일은 번번이 유진의 몫이었고 몇 번이나 전화를 해서 날짜를 맞추고 인터뷰를 하는 일은 쉽지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침 부엌에 순영과 복례가 함께 서 있었다. 둘은 싱크대에 나란히 기대어 서 있다가 유진이 다가가자 밥과 국을 퍼서 식탁에 가져다 놓았다. 방문 틈으로 보이는 순영의 가방 옆에 소주병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유진은 한숨을 쉬었다.
"이모."
순영이 얼른 옆으로 다가왔다.
"뭐 줄까?"
순영이 손을 맞비비며 물었다. 유진이 순영의 말을 무시하고 복례를 보자 복례가 순영을 슬쩍 밀치며 다가왔다.
"민수하고 많이 놀아 주세요. 이야기도 좀 많이 하시고요."
유진은 다른 말을 할 듯하다가 그렇게만 말했다. 복례가 응? 응, 하고 대답했다. 유진은 큰 소리로 또박또박 한 번 더 말했다. 복례가 입을 떼는 순간 순영이 대답을 가로챘다.
"걱정 마. 많이 놀아 줄게."
순영이 과장되게 웃으면서 말하자 복례의 표정이 굳었다. 복례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방으로 들어가더니 민수를 안고 나왔다. 민수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유진에게 와서 안겼다.
"우리 민수 잘 잤어요?"
유진이 민수를 어르듯 말하자 민수가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복례가 엄마 밥 먹어야지, 하며 민수에게 팔을 내밀었다. 민수가 유진의 품을 파고들며 흰 셔츠에 얼굴을 비볐다. 유진은 반사적으로 민수를 떼어냈다.


복례에게서 문자가 온 것은 사무실에 막 도착해서 커피를 한 잔 내리고 있을 때였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다고 했다. 씨발. 튀어나온 소리가 너무 커서 유진은 깜짝 놀랐다. 혼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넓지 않은 탕비실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유진은 이런 일들이 참기 어려웠다. 월급이 얼만데 이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게 하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직장생활 9년차인 유진은 밥값이나 월급을 들먹이는 타박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잘 알았다. 그런 폭력이 얼마나 즉각적으로 사람을 분노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비참하게 만드는지도. 알아서 하세요, 라고 문자를 찍고 전송 버튼을 누르려다 지웠다. 그건 진형의 대사였다. 알아서 해. 알아서 하라는 대답이 무슨 뜻인지도 유진은 잘 알았다.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까지. 커피를 한 모금 삼키고 답을 했다. 경비실에 물어보라고, 복구가 오래 걸리면 계단으로 가라고.
열 시경에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왔다. 유진은 전화기를 손에 쥐고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칸막이 위에 팀원들의 이마가 걸려 있었고 간간이 마우스가 딸각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전화기를 허벅지 아래로 집어넣었다. 허벅지에서 시작된 스트레스가 몸 전체를 흔들었다. 민수가 오지 않았는데 어디 아픈 거냐고 문자가 바로 왔다. 유진은 빈 회의실을 찾아 들어가 전화를 걸었다.
"엘리베이터가 아직 안 돼······."
"민수 계단 내려갈 수 있어요."
복례가 한 번에 못 알아들을까 봐 손으로 전화기를 감싸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게······ 내가······ 무릎이."
유진의 집은 9층이었다.


표현성 언어 장애. 유진은 하루에 몇 번씩 이 용어를 떠올렸다. 인터넷을 뒤져서 알아낸 증상이었다. 설마하면서도 불안했다. 검사라도 받아 봐야 하지 않겠냐고 조심스레 물었을 때 진형은 유난 떨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다. 민수는 유난히 말이 늦었다. 두 돌이 지날 때까지 '엄마'나 '물' 정도밖에 하지 못했다. 못 알아듣지는 않았지만 의사표현을 할 때는 말을 하는 대신 칭얼거리거나 몸짓을 썼다. 유진이 찾아낸 정보에 의하면 대뇌의 발달지연 때문일 수도 불안이나 스트레스 때문일 수도 있었다.
불안이나 스트레스라는 말이 식도 어딘가에 걸린 느낌이어서 유진은 가슴을 자꾸 쓸어내렸다. 1년 남짓 이어진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기간에는 아무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다. 말을 할 단계가 아니었던 데다 별다른 스트레스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원인은 자연스럽게 유진의 복직으로 귀결되었다. 물론 유진 혼자의 분석일 뿐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어떤 면에서는 아이에게 원인을 돌리는 것보다 그편이 나았다. 유진은 검색창에 표현성 언어 장애라고 입력한 채 출근 때마다 벌어지는 소동을 떠올렸다.
민수는 아침마다 온몸으로 울었다. 이모의 품에 안겨 엘리베이터까지 따라 나온 민수가 버둥거릴 때마다 유진은 닫힘 버튼을 단호하게 눌렀다. 껍데기, 라는 이모의 말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서. 문은 민수의 울음소리를 자르면서 닫혔다. 온종일 나가 있어도 제 껍데기라서 찾는다고 이모(몇 번째 이모였더라)가 말했었다. 이보세요. 껍데기 아니고 껍질이거든요. 그런데 왜 내가 내 아이의 껍데기입니까. 내게는 이제 알맹이가 없다는 소립니까. 나는 나고 아이는 아이라고요. 그리고. 왜 내게만 껍데기라고 합니까. 그만둔다고 할까 봐 그런 말은 속으로만 삭였다. 닫힌 문은 바로 전신거울이 되었다. 유진은 급하게 그리느라 비뚤어진 눈썹을 약지 끝으로 문질러 바로잡고 줄에 매달린 마리오네트처럼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꼿꼿하게 몸을 세웠다. 주차장을 가로지를 때 유진은 집 쪽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한동안은 애틋한 마음으로 몇 번이고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곤 했다. 이모의 품에 안겨 칭얼거리는 민수에게. 언제부턴가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단지를 벗어났다. 돌아보게 될까 봐 걸음 수를 세었고 숫자는 현관에서 아파트 정문까지 정확하게 367이었다.
유진은 엔터 키를 누르지 않고 창을 닫았다.


엘리베이터 밖으로 발을 내딛던 유진은 구두코가 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엘리베이터 바닥이 턱보다 이 센티쯤 낮았다. 복례가 오전에 보내온 문자가 떠올랐다. 어린이집까지 걸어서 민수를 데려다주었다고 했다. 유진은 엄지발가락에 찌르르한 통증을 느끼며 긴 복도를 걸었다. 발을 옮겨 디딜 때마다 쇠못이 타일 바닥을 찍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서쪽으로 난 복도의 창은 모조리 닫혀 있었다. 오후의 햇살을 최후까지 빨아들인 복도는 텁텁한 공기 때문에 황폐한 온실 같았다.
현관문을 열자 볼륨을 한껏 높인 티브이 소리와 민수가 동시에 달려 나왔다. 장난감들로 어수선한 거실을 내버려둔 채 순영과 복례는 소파에 앉아 화면 쪽으로 목을 빼고 있었다. 유진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드라마였다. 두 사람은 유진에게 알은척을 하면서도 티브이 화면으로 자꾸 눈을 돌렸다. 순영이 가지 않은 건 뜻밖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오전 내내 안 됐어. 내가 민수 데려다주고 걸어서 올라왔어."
유진의 눈빛을 읽은 순영이 손바닥으로 무릎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목소리에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순영의 말에 복례가 일어나 입을 꾹 다물고 장난감들을 상자 안에 모아 넣었다. 유진은 복례의 손길을 따라 거실을 둘러보았다. 플라스틱 자전거와 자동차, 산세비에리아 화분, 작은 책장과 조각 매트까지. 빈 공간이 별로 없었다. 낮은 천장, 발코니 창문의 낡은 섀시, 손잡이가 하나 떨어져 나간 싱크대 문짝에까지 시선이 닿자 유진은 갑갑해져 창을 활짝 열어젖혔다.
대출이 전세보증금의 절반이었다. 민수가 생기면서 장만한 전세 아파트는 학군이 좋은 대신 비쌌고 그나마 새 아파트보다는 쌌다. 두 사람은 지출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돈을 모았으나 2년이 지난 후 저축액은 전세금 인상분을 충당하기에 턱없이 모자라 대출금이 더 늘었다. 이모의 월급도 생활비의 절반을 훌쩍 넘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다고 여겨 왔다. 아이가 더 자라면 사정이 나아질 거라고, 이모를 내보내고, 대출금을 갚아 나가고, 언젠가 집을 사고······. 유진은 그런 날이 과연 오기나 할까, 그게 언제쯤일까, 도무지 그려지지가 않았다.
비긋이 열린 방문 틈으로 순영의 가방이 보였다. 아침에 봤던 술병은 없었다. 안방 문 앞에 유진과 진형의 옷이 개켜져 있었다. 유진은 그것들을 들고 방으로 들어와 서랍장 안에 챙겨 넣었다.
"안 갔어."
유진이 밤늦게 온 진형에게 말했다.
"누가?"
진형이 되물었다가 아, 하고 문밖을 내다보는 시늉을 했다.
"왜?"
"모르지.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라 걸어서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왔대."
"잘 됐네."
"그건 그렇지만."
유진은 퇴근길에 발이 걸렸던 엘리베이터를 떠올렸다. 유진이 뭔가 더 말할 듯한 표정을 짓자 진형이 침대에 드러누웠다.
"가겠지. 피곤하다."
유진은 침대에 누워 순영을 어떻게 하나, 복례는 왜 순영을 덜컥 들여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나, 엘리베이터가 불안해서 큰일이야, 그리고 민수는, 민수는 왜 말이 늦을까, 그냥 늦기만 하는 거면 다행이지만 이러다 영영 말을 제대로 못 하는 아이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으로 뒤척였다. 이모들의 방에서 나는 티브이 소리와 사이사이 섞이는 말소리가 안방까지 건너왔다. 유진은 이런 복잡한 일들을 혼자 고민하고 있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어느새 잠든 진형의 등을 노려보다가 이불을 확 잡아당겨 돌아누웠다.


회사일은 오전 내내 화장실도 가기 어려울 정도로 바빴다. 유진은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이를 닦았다. 거울 속의 얼굴이 낯설었다. 창백한 안색과 단단하게 굳은 표정 때문에 유진은 요즘 거울을 보기가 끔찍했다. 주말을 포함해 열흘 넘게 야근을 하고 지난 며칠간은 새벽녘에 퇴근해 칼잠을 자고 다시 출근한 결과였다. 오후에 프레젠테이션이 있을 예정이었다. 유진은 기름종이로 이마와 콧등을 찍어내고 푸석해 보이는 얼굴에 미스트를 뿌렸다.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진한 립스틱을 바르자 그나마 좀 생기가 돌아 보였다. 안면근육을 움직여 긴장을 풀면서 흐트러진 머리칼을 매만지고 나서도 유진은 거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복례는 토요일에 아들 집에 가서 월요일 아침 일찍 오곤 했는데 지난 주말에는 가지 않았다. 순영이 호들갑을 떨면서 자기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며 등을 떠밀었으나 못 들은 척했다. 지난 며칠간 엘리베이터는 탈이 나서 고치기를 반복했다. 민수를 데리고 두 번 더 계단을 오르내린 후로 순영은 더 이상 유진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저러다 순영이 눌러앉는 거 아닐까, 유진이 걱정하자 진형은 한 사람 월급으로 두 사람 쓰는데 뭐가 문제냐고 했다. 진형은 주말에 워크숍이 있다며 지방에 다녀왔다. 남쪽 어디라고 들었으나 유진은 곧 잊었다. 어차피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주말에 집을 비운다는 사실은 그곳이 어디여도 바뀌지 않을 거였으니까. 무엇보다도 유진은 자신의 일만으로도 머리가 꽉 차 진형의 일정에까지 관심을 둘 수 없었다.
프레젠테이션은 그럭저럭 끝났다. 한두 가지 보완할 사항이 생겼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 정도면 나쁜 편도 아니었다. 유진은 오랜만에 민수가 잠들기 전 퇴근했다.


"오!"
민수가 오른손을 번쩍 들면서 활짝 웃었다.
"뭐라고? 민수야, 뭐라고 했어?"
유진이 민수와 눈을 맞추자 민수는 한 번 더 손을 들었다.
"오!"
"얘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오, 라고 한 거 맞아요?"
설거지를 하던 복례는 꼭 물소리가 아니어도 못 알아들었을 테고 분명히 들었을 순영은 대답 없이 방으로 슬그머니 들어갔다. 유진은 낱말 카드를 끌어당겨 하나씩 체크했다. 오렌지가 있었다.
"민수야, 오 뭐? 오렌지?"
유진이 카드를 들고 물었다. 글자는 몰라도 그림으로 알 거라는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민수가 신이 나서 오, 라고 한 번 더 크게 말했다. 유진이 오리 카드를 찾아 들었다.
"이거? 오리?"
유진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배어났다. 민수는 까르륵거리며 오, 오, 라고 소리칠 때마다 손을 번쩍 들었다. 유진이 카드를 바닥에 늘어놓으며 살폈다. 오. 오렌지도 오리도 아니면······ 오빠? 오소리? 오랑우탄? '오'로 시작하는 낱말 카드는 더 이상 없었다.
"우리 민수 여기서 찾을 수 있어요? 한번 찾아볼까요?"
유진이 민수 앞에 카드를 늘어놓고 기도하듯 두 손을 가슴으로 모았다. 민수가 대뜸 한 장을 집어 들고 바닥에 던졌다. 바나나 카드였다. 유진이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민수는 또 한 장을 힘주어 던졌다. 사과였다. 민수가 까르륵 웃으면서 손을 들고 외쳤다.
"오!"
설거지를 하며 민수를 힐끔거리던 복례가 유진과 눈이 마주치자 못 본 척 고개를 돌려 싱크대를 닦기 시작했다. 방 안에 있던 순영은 방문을 조용히 닫았다.


"글쎄, 그러더라고."
자정 무렵 들어온 진형에게 유진이 저녁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오렌지나 오리 아니면 뭘까? 카드에는 없던데······."
유진은 궁금하지도 않으냐며 일어나 앉았다.
"난 또."
진형이 이불을 끌어올리며 눈을 감았다.
"뭐? 난 또? 민수가 낱말 카드 보고 말문이 트일 수도 있는데. 이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거야?"
유진은 진형이 끌어올린 이불을 다시 젖히며 바싹 다가앉았다. 진형이 이불을 낚아채면서 말했다.
"또 유난 떤다. 오렌지, 오리, 오줌, 오르막, 오늘, 나중에 다 할 테니까 좀. 아, 오스트리아로 여행이나 가고 싶다. 오만이 나을까."
"그치? 다 하겠지? 곧 잘하게 되겠지?"
유진이 다시 이불을 젖히자 진형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인상을 썼다.
"내일 출근 안 하냐?"
그럼 언제 말하느냐고, 하루도 일찍 들어오는 날이 없고, 나도 얼마 만에 일찍 들어온 건지 모르겠는데 언제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 너한테는 이게 아무 일도 아니냐고, 민수는 나 혼자 낳았냐고 소리를 빽 지른 유진은 베개를 들고 방을 나와 버렸다. 순영인지 복례인지 코 고는 소리가 거실까지 들렸다. 유진은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민수 방으로 갔다. 잠든 민수를 꼭 안고 누운 유진은 민수의 머리칼을 가만히 만지면서 남들도 이렇게 사는지 궁금해졌다.
민수가 아직 아빠, 라고 한 번도 부르지 않았는데 걱정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진형이 그랬다. 때가 안 된 것뿐이라고. 자신도 말이 늦된 아이였으니 유난 떨지 말라고. 그걸로 끝이었다. 진형은 유진과 달리 민수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유진은 화가 치밀다가도 어쩌면 진형이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유진은 어렸을 때 말이 빠른 아이였는지 늦된 아이였는지 들은 바가 없었다. 엄마의 얼굴이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건 아마도 사진 때문일 테고 다른 기억들은 거의 없었다. 자신이 민수만 한 아이였을 때 엄마가 이렇게 품에 안고 머리칼을 쓸어 주기도 했는지, 낱말 카드 같은 것을 갖고 놀아 주기도 했는지 그런 사소한 것이 궁금했지만 그런 것들을 아버지에게 물어보는 일은 쉽지 않았고 아버지는 유진에게 엄마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눈치껏 엿들은 어른들의 대화에서 뽑아낸 정보를 조합해 엄마가 오랜 투병 끝에 스스로 삶을 포기했다는 결론을 내린 다음에는 더욱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새벽에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났다가 유진은 흠칫 놀랐다. 거실 가운데 희끄무레한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유진은 낮게 비명을 터뜨리다 가까스로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순영이었다. 순영은 유진보다 키가 뼘은 작았고 뚱뚱한 편도 아니었는데 거실이 꽉 찬 느낌이어서 유진은 숨이 턱 막혔다. 왜 여기에 쓰러져 있나, 하고 다시 보니 쓰러진 게 아니라 자고 있는 거였다. 화장실을 다녀온 유진은 자려고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순영이 덮고 있던 이불. 설마. 어스름한 새벽빛이었지만 잘못 봤을 리 없었다. 유진은 이불장을 활짝 열고 살폈다. 신혼여행지인 뉴질랜드에서 사온 양모 이불이 보이지 않았다. 커버도 씌우지 않은 새것이었다. 기능성 베개에 밀려 장 안에 들어간 푹신한 솜 베개도 짝이 맞지 않았다. 유진은 다시 문을 열고 내다봤다. 확실했다. 언제부터, 왜, 순영은 거실에 나와서 자고 있었나. 왜 허락도 없이 우리 이불을. 어떻게 그런 일을. 유진은 침대 머리에 기대 앉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왜 재혼을 안 하셨을까?"
아버지를 처음 만난 날 진형이 물었다. 유진은 답을 알고 있음에도 글쎄, 라고 말을 흐렸다. 아버지가 다 잘 해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유진이 불편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가 깨워서 일어나 보면 식탁에 아침이 차려져 있었고 말끔하게 다려진 교복이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첫 생리를 시작하기도 전에 생리대를 사이즈별로 사다 욕실 장에 채워 두기까지 했다. 유진은 엄마 외에는 자신의 인생에 부족함이 없다고 확신했다. 결혼 준비를 하기 전까지는. 하얀 코렐 식기 대신 단아한 자기 그릇을, 커다란 머그컵 대신 유럽산 티 세트를, 맑은 소리가 나는 와인 잔과 화려한 샐러드 볼을 사면서 유진은 생존과 생활의 차이를 실감했다. 통째로 세탁하는 차렵이불로 사계절을 나던 아버지와의 시간은 누리는 삶이 아니라 버티는 삶이었음도.
설핏 잠이 들었다 깼을 때는 아침이었다.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유진은 진형에게 간밤의 일을 말할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유진이 양모 이불을 사자고 했을 때 진형은 짜증을 냈다. 신혼여행 와서 이불 사는 신부는 너밖에 없을걸. 이걸 꼭 사야 해? 네가 들고 갈 거야? 이건 인터넷 쇼핑몰 같은 데서 파는 거와 달라. 좋은 거야. 가격은 반값이고. 압축해 준다니 부피는 얼마 안 나갈 거야. 유진이 그렇게 말하자 진형은 무게도 압축해 준대? 라며 팔짱을 꼈다. 들어달라고 안 해. 유진이 셈을 치르고 압축된 이불을 받아들자 진형은 거칠게 낚아채서 어깨에 걸쳤다. 유진은 성큼성큼 쇼핑몰 밖으로 나가는 진형의 뒤를 종종거리면서 쫓았다. 내가 든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자신의 것과 똑같은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진형을 쫓아가며 유진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쇼핑몰에는 커플 룩을 입은 사람들이 간간이 지나쳐 갔는데 그들은 모두 웃고 있거나 손을 잡고 있었다. 호기심과 동정이 섞인 눈길이 집요하게 따라붙는 게 싫어서 유진은 신경질적으로 셔츠를 벗어 가방에 넣었다. 몇 걸음 걷기도 전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유진은 손바닥으로 양팔을 문질렀다. 양모 이불에 관해서라면 어떻게 말해도 진형에게 싫은 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게다가 순영이 허락도 없이 그것을 꺼내 사용한 일이 마치 자신의 불찰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아무 말 않기로 했다. 그러나 뭘 어떻게 조심해야 했는지. 안방 이불장에서 내 이불 꺼내 쓰지 마세요, 라고 미리 말해야 했나. 어느 날 불쑥 들이닥친 순영에게 새 이부자리를 한 채 마련해 주어야 했나. 아끼던 양모 이불을 안방 침대에서 사용하지 않으리라는 사실만이 분명해졌다.
유진이 안방에서 나가자 복례가 밥을, 순영이 국을 떠서 식탁에 놓았다. 거실은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방문이 조금 열려 있었으나 그 틈으로는 이불이 보이지 않았다. 순영과 복례의 표정이나 행동이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서 유진은 새벽에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니었을까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그날 밤 진형이 오자마자 유진은 계속 미루어 왔던 말을 했다.
"또 뭐가?"
진형이 옷을 갈아입으며 성가셔하는 음성으로 물었다.
"순영 이모 말야. 언제까지 이대로 두냐고. 점점 불편하지 않아?"
진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난 별로. 갈 때 되면 가겠지, 뭐."
남의 일인 것처럼 말하고 진형은 드러누워 스마트폰에 열중했다. 유진은 자신이 예민한 사람은 아니라고 여겨 왔으나 진형의 무심한 태도를 대하자 혼란스러워졌다. 정말 진형의 말이 맞는 걸까. 한 사람 월급으로 두 사람 쓰는 셈이니까. 그러나 복례만으로도 이미 집은 비좁아졌고 민수를 돌보는 일은 복례 한 사람으로 충분한데. 무엇보다 복례만으로도 가족의 온전하고 내밀한 사생활을 포기한 셈인데 어디까지 감수해야 하는지 유진은 답답했다.
"그리고 말야."
진형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민수를 보면 그렇잖아. 할머니가 둘이면 아무래도 말을 좀 더 쉽게 배울 것 같지 않아? 종일 혼자 있는 사람을 다 믿기는 어려운 일이고. 이상한 일들이 많다는데. 어쨌든 어른 하나 더 있는 게 민수에게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순영이 온 뒤로 진형이 한 말 중에 가장 쓸모 있는 말이어서 유진은 조금 놀라웠다.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유진이 애써 유지하고자 하던 질서는 이런 게 아니었다.
이모들의 방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진형은 어느새 잠이 들었고 유진은 오래 뒤척였다. 방문을 여닫는 소리, 변기 물을 내리는 소리, 코고는 소리, 그리고 거실에서 나는 인기척. 유진은 마치 자신이 안방에 갇힌 듯한 느낌에 혀가 말라 왔다.


유진은 구두를 찾기 위해 신발장을 열었다. 밑창을 아직도 갈지 못했다. 오래된 아파트의 신발장은 수납공간이 넉넉하지 않았고 유진은 진작 용량을 초과한 신발을 빼곡하게 이중으로 정리해 두고 지냈다. 찾는 것은 베이지색 구두였다. 두 번째 칸에 있어야 할 그것은 맨 아래 칸에 눕혀 둔 검정 부츠 위에 거꾸로 포개져 있었다. 구두와 선반 사이에 억지로 쑤셔 넣은 듯 찌그러진 진형의 운동화 아래에. 그러고 보니 신발장은 평소보다 무질서해 보였고 신발들의 위치도 조금씩 바뀌어 있었다. 베이지색 구두는 새것이어서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따로 두었었는데. 운동화와 함께 빼낸 구두는 코가 납작 눌린 데다 시커멓고 긴 흠집이 나 있었다. 유진은 구두를 든 채로 뒤돌아봤다. 복례와 순영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아침 드라마에 빠져 있었다. 발을 앞으로 쭉 뻗고 편안하게 등을 기댄 자세였다. 구두를 도로 집어넣으려고 신발장을 훑다가 유진은 의외의 것들을 발견했다. 맨 위 칸에 나란히 놓인 낯선 신발들. 뒷굽이 뭉툭한 구두와 반짝이가 잔뜩 달린 슬리퍼, 요란한 색상의 꽃무늬 운동화, 검정색 앵클부츠. 그것들은 이중으로 포개져 있지도 않았고 특별한 존재라도 된다는 듯 여유롭게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유진은 베이지색 구두를 바닥에 내려놓고 전날 신었던 구두를 신었다.


냉동실에 있는 거 아니냐며 티브이 리모컨을 찾던 진형이 빈정거렸다. 유진은 설마, 하면서도 냉동실과 냉장실을 열고 확인했다. 모처럼 함께 쉬는 휴일이었다. 복례와 순영은 어쩐 일인지 밤늦게나 다음날 돌아올 거라 말하고 아침 일찍 나갔다. 순영이 온 이후로 처음 맞은 가족만의 휴일이었다. 순영이 있거나, 복례가 있거나, 혹은 진형이 없거나 하는 일로 그동안 온전한 주말을 보낸 적이 없었다. 모처럼 맛보게 된 편안함에 유진은 어떤 해방감마저 들었다. 진형도 그랬는지 유진이 리모컨을 찾느라 여기저기 뒤지는 사이 민수를 데리고 숨바꼭질하듯 집 안을 들쑤셨다. 유진은 그간 엉켜 있던 마음의 타래가 스르르 풀리는 느낌이었다. 리모컨 같은 건 없어도 그만이었다. 세 식구가 꼭 티브이를 봐야 할 이유도 없었고. 유진은 나른한 표정으로 진형과 민수가 장난감 상자를 뒤엎어 엉망이 된 거실 한쪽에 앉았다. 관절마다 박혀 있던 긴장이 녹고 달콤한 피로가 그 자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유진은 그대로 누우려다 몸을 일으켰다. 오므라이스라도 해먹을까, 하며 부엌으로 갔다. 프라이팬을 찾을 수 없었다. 프라이팬은 항상 개수대 아래에 넣어 두었는데 거기에는 라면이 잔뜩 들어 있었다. 유진은 싱크대 문을 죄다 열어 보았다. 냄비와 그릇과 컵 들이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 엉뚱한 자리에 들어 있었다. 프라이팬은 찾지 못했고 아끼던 샐러드 볼도 보이지 않았다. 수저통이 든 서랍에서 리모컨을 발견한 유진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오!"
민수가 소리 지르며 팔을 번쩍 들었다.
"오? 오렌지?"
진형의 말에 민수가 다시 오! 라고 외치며 팔을 들었다.
"코? 코끼리? 자아, 우리 코끼리 만들자!"
진형이 한 손으로 코를 잡고 팔 사이로 손을 길게 내밀어 빙빙 돌다가 소파 위로 넘어졌다. 진형을 따라하던 민수가 넘어지는 동작까지 흉내 내더니 진형의 다리 사이에 엎드려 소파 밑으로 손을 넣었다. 뭘 꺼내려는지 민수는 바닥에 얼굴을 바짝 대고 낑낑거렸다.
"아빠가 꺼내 줄게."
진형이 소파 밑에서 끌어낸 물건은 민수의 겨울 담요였다. 담요는 길게 두 번 접혀 있었다. 이게 왜 여기 있느냐는 눈빛으로 진형이 유진을 쳐다봤다. 유진도 모르는 일이었다. 진형이 끌어낸 담요 앞에서 무릎과 허리를 한껏 접으며 한바탕 웃고 난 민수가 귀퉁이를 들어 올리자 갈피짬에서 작은 플라스틱 조각이 주르르 쏟아졌다. 민수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조각 하나를 집어 들고 오! 라고 외친 민수가 그것을 이마에 붙이고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채 거실을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살짝 땀이 밴 이마에 고불고불한 머리칼과 화투장이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 집안에 드디어 갬블러 하나 나오겠구나!"
진형이 찡그린 미간을 풀더니 갑자기 껄껄 웃었다.


"민수 안녕?"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민수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하는 사람에게 뻣뻣하게 굴 수 없어 유진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진형도 예의바르게 웃어 보였다.
"어른들은 어디 가셨나 봐요?"
여자가 웃으면서 묻고는 민수의 손을 쥐었다 놓았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진형을 봤다. 진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추자 유진은 바닥을 살피며 민수의 손을 잡고 내렸다.
"잘해 드려요. 요즘 누가 애 봐줘."
여자가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나무라듯 말한 뒤 반대 방향으로 멀어졌다. 유진은 말없이 여자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진형은 거 참, 이라고 작게 말하곤 씁쓸하게 웃었다.
식당에서 민수는 좀 흥분한 상태였다.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자꾸 의자에서 내려오려고도 했다. 유진은 엘리베이터 여자의 말이 계속 신경 쓰여 민수를 돌보는 데에 소홀했다. 옆 테이블의 젊은 커플이 조용히, 그러나 알아챌 수는 있을 정도로 불만스런 표정과 몸짓을 보였다. 노 키즈 존, 이라는 말을 언뜻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진형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밥을 먹고 간혹 민수에게 떠먹이기도 했다.
"어른들? 잘해 드려? 대체 뭐라고 했길래······ 어이없어서, 정말."
유진은 결국 수저를 놓고 머릿속을 줄곧 헤집고 다니던 말을 쏟아 놓았다.
"너무 그러지 마라. 쪽팔렸겠지."
"뭐가? 뭐가 쪽팔려. 내 월급의 반도 넘게 가져가는 사람이."
유진의 가시 돋친 말투에 민수가 갑자기 까르르 웃었다. 민수가 손가락으로 유진을 가리키며 음마 새이, 라고 했다. 진형과 유진의 시선이 마주쳤다. 민수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한 번 더 까르르 웃더니 진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음빠 새이. 민수는 '이'를 발음할 때 성대를 잔뜩 긴장시켜 힘을 주었다. 옆 테이블의 남녀가 키득거렸다. 유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른 때 같으면 다시 말해 보라고 부추겼을 텐데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불분명한 발음으로도 유진과 진형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꽤 늦은 시각이었다. 토이저러스에서 장난감을 사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놀이터에서 민수와 놀아 준 다음이었다. 민수는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현관문을 열자 오싹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민수를 안은 채 신발을 벗고 들어서던 진형이 흠칫했다. 뒤따라 들어선 유진은 집이 왜 이렇게 추우냐고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볼륨을 한껏 올린 티브이에서 흘러나온 빛이 거실에 펼쳐진 이불을 비췄다. 이불 양쪽이 번갈아 오르내렸고 그 리듬은 아주 규칙적이었다. 진형과 유진은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움직이지 못했지만 잠깐에 불과했다. 진형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민수를 침대에 누였고 유진은 신을 벗고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갔다. 식탁 위에 유진이 혼수로 해온 서브마린 파리스 클래식 잔이 세 개 놓여 있었다. 집들이 이후로 꺼내 쓴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유진은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들고 개수대로 가져다 놓았다. 잔 하나는 이가 빠져 있었다. 민수의 방문 앞에 선 진형과 싱크대 앞에 선 유진이 동시에 양모 이불 발치로 다가갔다. 두 사람의 눈이 잠깐 마주쳤고 또 동시에 눈길이 이불 쪽으로 옮아갔다. 잠든 이모들은 어쩌면 저토록 평화로울 수 있을까 싶은 표정이었다. 진형이 에어컨을, 유진이 티브이를 껐다. 두 사람은 가만한 몸짓으로 안방으로 들어간 다음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작가소개 / 이경란

대구 출생.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8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오늘의 루프 탑」이 당선되어 등단.


《문장웹진 2019년 02월호》


추천 콘텐츠

바이킹을 타자

바이킹을 타자 윤성희 1 나는 혼자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겁이 많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버스나 기차를 타고 먼 곳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토요일이면 걸어서 삼십 분 거리에 있는 호숫가의 트럭 카페에 가서 삼천 원짜리 커피를 사 먹거나, 퇴근길에 내가 좋아하는 정자에 가서 가끔 맥주 한잔을 마셨다. 그게 나에겐 여행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최근에 그 장소들을 잃어버렸다. 먼저 정자에 불이 났다. 정자는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교문 옆에 있었다. 학교는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야 해서 늘 숨을 헐떡이며 등교를 해야 했다. 여름에는 교복 겨드랑이가 땀에 젖곤 했다. 교문 옆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고 거기에는 운동기구와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자가 있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는 거기서 매일 철봉을 하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늘 철봉을 했다. 그리고 지각을 하는 학생들에게 잔소리를 했다. 지금은 조금 늦는 거지만 나중에는 아주 많이 늦게 된다고. 이제 운동기구는 없어졌고, 아마 할아버지도 돌아가셨겠지만, 정자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혼자 술을 마시고 싶은 날이면 나는 그곳에 갔다. 가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 닭 다리 모양의 과자와 맥주 한 캔을 샀다. 맥주는 텀블러에 옮겨 담았다. 너네는 공부해라. 나는 맥주나 마시지. 하교하는 아이들을 보며 몰래 맥주를 마시면 기분이 좋아졌다. 텀블러 안에 술이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통쾌했다. 바람까지 불어 주면 근심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정자에 불을 낸 사람은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시험을 망쳐 기분이 우울한데 정자에서 사람들이 웃고 있는 걸 보니 화가 나서 그랬다고 뉴스에서 아이는 말했다. 나는 불에 탄 정자 사진을 찍어 민정에게 보냈다. ‘헉, 낙서도 사라졌어?’ 민정이 물어서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정자 기둥에는 연경의 낙서가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는 거기서 치킨을 시켜 먹은 적이 있었다. 그 시절에 우리 학교는 점심시간에 몰래 나가 치킨이나 떡볶이를 배달시켜 먹는 게 유행이었다. 그날 연경은 닭 다리를 우리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정자 기둥에 이런 낙서를 남겼다. ‘닭 다리 양보한 사람은 평생 복 받을 것!’ 연경은 프라이드치킨을 좋아했다. 나는 편의점에서 닭 다리 과자를 살 때 꼭 프라이드맛만 샀다. 핫숯불바베큐맛은 절대 먹지 않았다. 민정에게 새로 정자가 지어지면 같은 자리에 같은 낙서를 하자고 말했다. 민정이 꼭 그러자고 답을 보냈다. 그날 밤에 나는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훌라후프를 하는 꿈을 꾸었다. 땀에 젖은 겨드랑이를 보며 서로 웃었다. 삼 년 전, 나는 엄마의 병간호를 핑계로 고향에 왔다. 그 전에 나는 서울의 한 무역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상사인 경리실장이 횡령을 하고 잠적하는 일이 생겼다. 동료 직원과 함께. 퇴근 후 우리 셋은 자주 어울렸다. 우리는 같은 먹방 유튜버를 좋아했다. 그래서 새 영상이 올라오면

  • 관리자
  • 2025-09-01
법의 아름다움

법의 아름다움 길란 출근 시간이 되기 20분 전에 부속실에 도착했다. 우선 판사님들의 책상을 청소했다. 강 판사님의 책상 위에 올려진 커피잔도 치우고, 정 판사님 책상 위에 있는 사도신경이 새겨진 크리스털도 지문 자국 하나 남지 않게 조심히 닦았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교회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지만 사도신경의 내용만큼은 다 외워 버렸다. 크리스털을 닦고는 재판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해 정 판사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판사님께서 읽으시기 편하게 글씨 크기를 키워서 출력한 자료도 옆에 두었다. 남들은 나보고 오버한다고들 하지만, 엄마는 이런 게 다 업무 능력이라고 했다. 판사님들께서 안 보는 척하면서 다 보고 있을 거라고. 책상 청소를 마치고 책장과 벽에 걸린 십자가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을 때 정 판사님께서 부속실에 들어오셨다. “권 기사, 좋은 아침이에요.” “안녕하세요 판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그럼 좋지.” 그렇게 말하며 판사님은 책상에 앉으셨다. “매번 고마워요. 따로 뽑기 힘들 텐데.” 판사님이 큰 글씨로 뽑은 자료를 들어 보이셨다. “아니에요. 제가 판사님 업무 도와드리는 거로 돈 받는 거잖아요.” 최대한 사교성을 끌어올려 너스레를 떨었다. “내년에 부서 바뀌면 어떡하나. 권 기사가 아주 내 버릇을 나쁘게 들여놨어.” 판사님이 웃으며 말하셨다. 머신으로 커피를 내리고 있으니 강 판사님과 이 판사님께서도 부속실에 들어오셨다. 강 판사님과 이 판사님께도 인사를 하고 커피를 드렸다. 판사님들께서는 고맙다고 하시고는 안에서 편하게 일하고 있으라고 말해 주셨다. 나는 판사님들께 인사를 하고 부속실 안에 있는 속기실에 들어왔다. 판사님들과 분리된 나만의 공간이었다. 법원에서 일하기 전에는 판사들이 권위적인 사람들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실제로 겪어 본 판사님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점심을 먹고 나니 어느덧 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속기용 키보드와 공판 자료들을 챙겨 법정에 들어왔다. 대기석에는 사람이 스무 명 정도 앉아 있었다. 속기사석에 앉아 그들을 둘러보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부터 60대 남성까지 성별과 나이가 다양했다. 눈에 띄는 것은 단연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었다. 곧 검사분들이 재판장에 들어와 검사석에 자리를 잡았다. 정 판사님께서도 공판 시간에 맞춰 입정하셨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판사님께서 첫 번째 사건의 번호를 부르고, 피고인의 이름을 부르고, 인적 사항을 확인했다. 검사가 기소의 이유를 밝혔다. 횡령죄였다. 나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법정 안에서 발화되는 모든

  • 관리자
  • 2025-09-01
모든 공원에는 이름이 있다

모든 공원에는 이름이 있다 조재윤 그녀는 공원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그녀의 퇴근길이 비탈이 될 즈음, 공원은 나타난다. 사 차선 도로와 맞닿아 있는 공원은 아스팔트의 바깥이 아닌 일부처럼 보인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너비의 내부엔 몇 개의 운동기구와 나무 벤치밖에 없다. 옅은 주황색 가로등 불빛 아래 놓여 있는 나무 벤치에 앉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느 공원에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흐느적거리며 산책하는 사람 또한 없다. 그녀는 자정에 가까운 퇴근길의 경로를 공원 입구로 바꾼 적이 없다. 공원 뒤편 아파트 단지가 있지만 단지 내에 이미 공원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주민 또한 없다. 과자 부스러기를 뿌려 주는 주민이 없기 때문에 비둘기 또한 없다. 공원엔 나무도 없다. 나무가 없기 때문에 참새 또한 없다. 그녀는 공원 앞에 놓여 있는 낡은 표지판을 들여다본다. 공원의 이름은, 무슨무슨 혹은 땡땡 공원이다. 무슨무슨 혹은 땡땡에 적혀 있던 글자는 칠이 벗겨져 알아볼 수 없다. 없는 게 너무 많은 공원은 이름 또한 없다. 그녀의 원룸 창문을 열면 또, 공원이 나타난다. 언덕 위 원룸에서 보는 공원은 더 작고 조악해서 뭉쳐 놓은 모래 더미 같다. 그녀는 공원의 이름을 유추해 본다. 본래의 이름. 무슨무슨에 들어갔던 글자들. 하지만 머릿속엔 텅 빈 공원이나 길옆 공원 같은 공원의 민낯을 드러내는 이름만 떠오른다. 그녀는 공원의 이름을 아무것도 없는 공원으로 지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그런 이름을 지어 주기엔 공원이 가엾게 느껴져 머릿속에서 지운다. 시간은 밤 열두 시를 향하고 있다. 그녀는 힘겹게 나무 벤치를 비추고 있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락을 떠올린다. 락에게 공원의 이름짓기를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락이 오는 시간은 아직 멀고 멀었다. 오후 한 시. 한낮의 해가 지구의 정수리에 오도카니 설 때, 락은 온다. 따르릉 따르릉 소리를 내며. 따르릉 따르릉. 그녀는 방 안을 울리는 소리를 따라 해본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보다는 자전거의 경적 같다고 생각하지만 따르릉만큼 자신의 벨 소리를 정확하게 표현할 단어는 없다고 수긍하며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흥얼거린다. 전화를 받자 락이 인사한다. 안녕. 오늘은 그늘이 많은 날이야. 그녀도 인사한다. 안녕. 오늘은 햇볕이 따뜻한 날이야. 근데 따뜻하다는 말은 여름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 같아. 락이 웃으며 말한다. 그늘이 필요한 날이었는데 딱 좋네. 서늘해. 그녀가 답한다. 바깥에 까마귀가 많아. 까마귀가 전깃줄에 줄지어 앉아 있으면 글씨 위를 까맣게 그은 밑줄 같아. 락이 잠시 뜸 들이다 말한다. 오늘 점심은 소고기뭇국이었어. 나는 무보다 소고기가 더 많이 들어 있길 바라지만 언제나 무가 더 많아. 그래서 소고기뭇국의 이름은 소고깃국이 아니라 뭇국이지. 락의 말이 끝나자 그녀가 이어 말한다. 해가 따뜻할 땐 이불을 널어야 하는데. 그러고 보면 여름은 언제나 이불을 널어놓기가 좋은

  • 관리자
  • 2025-09-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