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체, 「이산(離散)」
- 작성일 201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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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체, 「이산(離散)」
나비의 날개에서 봄이 접힌다. 휘몰아치는 나선계단의 말미에 붉게 빛나는 대문이 있다. 등(燈) 대신 피를 밝혀놓은 문설주, 바닥엔 낮잠을 깨운 기와가 즐비하다. 열린 문틈으로 노랗게 익은 마당이 펼쳐지고, 원근법으로 늘어진 시절이 덩그러니 누워 있다. 지붕 아래 과년한 나무들을 베어 지은 툇마루에 기녀들이 앉아 꽃잎들이 날아가는 쪽으로 눈길을 흘린다. 가장자리에서 가만히 타오르는 무화과나무, 불꽃이 몰래 살고 있는 나무의 후생이 푸르게 타오른다. 태양 대신 점점이 번쩍이는 꽃송이들이 하늘하늘 날아간다. 최후의 종교가 사랑방에서 단잠에 빠져 있다. 기녀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날개 같은 부채를 휘둘러 불꽃을 시들게 한다. 불현듯 별채에서 순례자들이 바람결에 통곡을 반주한다. 서까래가 구불구불 흐르고 있다. 어느 계절, 어느 시절인지 분간할 수 없다. 순례를 가득 진 등짝들이 몰려간다.
● 시·낭송_ 이이체 - 1988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고,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죽은 눈을 위한 송가』가 있다.
● 출전_ 『죽은 눈을 위한 송가』(문학과지성사)
● 음악_ 권재욱
● 애니메이션_ 박지영
● 프로듀서_ 김태형
배달하며
붉게 물든 구름을 등짐 지고 떠돌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의주며 만주로, 영주며 봉화로 떠돌던 때가 있었습니다. 목포나 군산, 통영과 여수가 있었습니다. 만남과 이별이 한몸인 시절이었습니다. 온몸이 터미널인 시절이었습니다. 심장 전체가 종가집이며 기생집인 시절입니다. 꽃과 열매가 한몸인 무화과의 시절입니다.
한바탕 사랑을 나누고 난 후의 지리(地理)가 펼쳐집니다. 몸을 버린 눈(사랑의 행위는 육체를 털썩 내려놓는 일이지요)으로, 혼으로 바라보는 실내외의 풍경입니다. 아이와 어른, 봄과 여름, 정신과 육체, 고대와 현대, 쾌락과 몰락이 ‘원근법’으로 늘어서 있습니다. 그것들은 곧 헤어질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헤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별이 아니라 이산인 모양입니다.
사랑방에서 ‘최후의 종교가 단잠’에 빠져 있는 걸 보니 저 30년대 오장환의 등잔불 속을 보는 듯합니다. 이 몽환의 누각에서 이 방 저 방 둘러보는 기분이 기묘합니다.
문학집배원 장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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