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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스님, 메리 크리스마스』

  • 작성일 2013-08-01
  • 조회수 1,647



“시인 박남준의 전 재산은 이백만원이다. 죽고 나서 쓰일 ‘관값’이다.

통장잔액에 그 액수가 넘게 찍혀 있으면?... 기부를 한다.“


박남준, 『스님, 메리 크리스마스』중에서

분홍바늘꽃과 갈퀴덩굴과 솔나물과 진범과 투구꽃과 하늘말나리와 벌노랑이와 장구채와 모싯대꽃과 쥐손이풀과 쇠스랑개비와 뻐꾹채와 으아리와 ······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달린다. 끝없이 푸른 초원 위에는 흰빛과 분홍과 노란 야생화들의 한바탕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중략)

총과 칼을 내려놓아야만 이를 수 있다는 이르쿠츠크 바이칼 앞에 섰다. 저 푸른빛을 무어라 불러야 하나. 신비한 푸른빛 바이칼에 들어가 몸을 담았다. 다리가 시렸다. 그리고 아팠다. 가슴까지 걸어 들어갔다. 바이칼에 몸을 담그면 10년이 젊어진다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하늘과 산과 물빛이 다르지 않은 가깝고 먼 풍경을 바라보았다.

누구는 시베리아 초원에 기계화 영농을 하면 좋을 텐데라고 했다. 누구는 여기에 고속도로를 내면 우리나라에서보다 경비가 엄청나게 적게 들 것이라고 했다. 저 맑고 드넓은 바이칼의 물이 지척인데 왜 이렇게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없냐고 했다. 사람들이 들어와서 개발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바이칼에서 가장 크다는 알혼 섬의 5,6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방갈로촌 방에는 화장실이나 샤워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재래식 공동 화장실과 쫄쫄거리며 나오는 공동 샤워실 두 개가 전부였다. 그나마 세면대와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도 집주인이 아침마다 길어 와서 큰 통에 채워 넣어야 쓸 수 있었다.

아직 지구가 살 만한 것은 광활한 시베리아가 잠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을 함부로 펑펑 쓰면 그 물이 결국 어디로 흘러가겠는가. 바이칼의 물빛이 아직 신비로운 푸른빛인 것은 거기 사는 이들이 바이칼을 소중하게 아끼기 때문이다.

시베리아의 늙은 나무 집에 사는 이들의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얼핏 보았다. 누구는 게으르고 불결하며 가난한 사람들이라 하겠지만 지리산에 사는 너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산다고, 너무 많은 것을 소비하며 살고 있다고, 흰빛에 쌓인 자작나무 숲이 말을 건넸다.


● 작가_ 박남준 – 시인. 1957년 전남 법성포 출생. 지은 책으로 시집『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 『적막』,『그 아저씨 간이 휴게실 아래』, 에세이『박남준 산방 일기』『별의 안부를 묻는다』등이 있음

● 낭독_ 이상구 – 배우. 연극 <리어왕>, <싸리타> <유리알눈>등에 출연.

● 출전_ 『스님 메리크리스마스』(한겨레출판)

● 음악_ signature collection /lite&easy mix2

● 애니메이션_ 이지오

● 프로듀서_ 김태형



배달하며

이 양반, 온갖 식물과 새와 곤충을 전문 학자처럼 두루 꿰고 있습니다. 살아서 걸어다니는 도감(圖鑑)이에요. 예전에 베트남 여행을 같이 갔을 때 봤는데 그곳 사람들에게 거기 나무에 대해 설명을 다 해주더라구요. 반대로 법성포 바닷가 출신이면서 어류 쪽은 엄청 헷갈려합니다. 이번에는 시베리아에서 만난 풀꽃들의 이름을 하나씩 읊었군요. 실력이 어디 가겠어요? 아직 지구가 살 만한 이유가 광활한 시베리아가 잠들어 있기 때문이랍니다. 동의합니다. 제발 거기만이라도 기계화 영농도 고속도로도 들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개발이라뇨. 개발 때문에 얼마나 망가졌는데요. 우리는 당장의 편리 때문에 아름다운 것들을 죽이는 그런 존재들이 되어버렸잖아요.

문학집배원 한창훈




한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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