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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광, 『어쩔 도리가 없다』중에서

  • 작성일 2013-10-31
  • 조회수 1,711




이영광, 『어쩔 도리가 없다』중에서

물론 나는 집 떠나 살았던 게 할 수 없이 더 나았다고 생각하지만, 애들은 일찍 내놔서는 안 된다. 쓸쓸하면 병드니까. 내가 몹시 허전한 마음이 되어 밤늦은 퇴근길에서 선술집 문을 이마로 밀고 어둡게 들어갈 때, 안 되는 시를 쓴답시고 동네 '별 다방'에 다친 곰처럼 우두커니 인상 쓰고 앉았을 때, 나는 코흘리개 동생과 자취방 쪽마루에 나앉아 해져서 어두운데 어쩌고 노래하던 생각이 나고, 리어카에 책 보따리, 냄비 등속을 싣고 언덕길을 낑낑대며 둘이 이사하던 생각이 나고, 공납금 못 내서 얻어터졌는데 딱히 하소연할 데가 없던 방과 후의 화장실 담벼락이 생각나고, 담임이라는 자를 욕하면서 손끝이 노래지도록 빨던 '거북선' 생각이 나고, 갈 데 없이 기웃대던 어느 골목 유리창에서 새어나오던 따스한 등빛과 콧속이 알알한 웃음소리가 생각나고, 포장마차에 앉아 소주에 꼼장어를 먹는데도 아무도 건들지 않던 중3 때가 생각나고, 가출해서 헤매던 어느 겨울 밤 추웠던 들길이 생각난다. 애들은 일찍 내놔선 안 된다. 길이, 자꾸 이 철부지들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믿는 게 멀리 있으면 함부로 자란다. 그건 자라지 않는 거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이상한 동네다. 인사 잘 하고 공부 잘 하면 칭찬 듣는 건 조선 팔도가 다 마찬가지겠지만, 이 동네 아이들은 씩씩하고 나서기 좋아하고 반장 되는 거 좋아하고 법대 가야 하고 출세해야 하고 집안 일으켜야 하고 지역 출신 정권에 충성스러운 인간이 되어야 하고 누구나 대통령 꿈쯤은 꾸어야 했다. 남자가 '갑바'가 있어야 한다는 거다. 이것도 다 마찬가진가. 그러나 '갑바' 잘못 키우면 탱크 몰고 양민들에게 총질하는 구국의 또라이가 된다. 아무튼 이러한 외향성, 출세 지향성에 대한 선호의 강도가 좀 세다. 이 동네 사람들은 혹 내면이라는 것도 근육질로 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가끔 든다. 이게 나하고는 잘 안 맞았다. 애가 구슬픈 강아지 눈을 하고 연습장에다가 시라는 걸 끼적거리고 있노라면, 뭐 그런 걸 하고 있냐는 듯한 눈길들이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갔다. 나는 숨기면서 쓰면서 속으로 말했다. 니들은 그냥 니들 집안이나 일으켜라, 존말 할 때.
1984년 2월 나는 아버지와 형이 중도하차한 안동고등학교에서 집안 최초로 졸업장을 받아드는 쾌거를 이루었다. 공납금도 제때 안 주던 아버지가 학교 안 가고 빈둥거리던 날 잡아다놓고. 삼부자가 그놈의 학교 졸업장 하나 못 받으면 무슨 개망신이냐고, 제발 학교 좀 가라고 약한 모습 보이던 생각이 나서 나는 씩 웃었다. 그리고 그 해 드디어 고향 땅을 벗어나 서울 유학길에 올랐다.
(부분생략)




● 작가_ 이영광 -- 시인. 1965년 경북 안동 출생. 199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직선 위에서 떨다』,『그늘과 사귀다』, 『아픈 천국』 『나무는 간다』등이 있음.

● 낭독_ 임형택 -- 연극 '염쟁이 유씨', '만선' 등에 출연. 극단 '작은신화' 단원.

● 출전_ 『불가능한 대화들』(산지니)
● 음악_ The film edge - themes concepts
● 애니메이션_ 김은미
● 프로듀서_ 양연식



배달하며

폼 나는 시인의 이면에는 이렇게 슬프고도 답답했던 환경이 있었군요. 감수성을 지니고 태어나서 남성성 과잉의 교육을 받고 자란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저희 세대는 남자는 참아야 한다, 소리를 자주 들었는데 그 것은 찍소리 말고 시킨 대로 해라, 라는 뜻이었죠. 그것을 이영광 시인의 고향 지역에서는 '갑바'라고 불렀고요.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가출을 하거나 죽어라 참고 공부해서 먼 곳으로 대학을 가거나. 그러고 보니 그 둘도 고달픈 것을 참아내야 하는 짓이기는 합니다만.

문학집배원 한창훈


한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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