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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결초보은』중에서

  • 작성일 2013-12-05
  • 조회수 1,869



‘결초보은(結草報恩)’, 혹시 들어나 보셨는지?


“춘추시대 진(晉) 위무자, 애첩 조희, 위무자의 아들 위과와 관련된 고사성어로 풀을 묶어서 은혜에 보답한다, 죽어서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다는 뜻을 갖고 있음.”


김서령, 『결초보은』중에서


어릴 때 꽤 일찍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몹시 단순했다. 피아노 레슨비는 이만 원이었고 한문 교습은 오천 원이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한문 선생님은 책을 통으로 외게 했다. 그것도 낭랑한 목소리로 리듬을 타면서 말이다. 진도가 넘어갈수록 외야 하는 양이 엄청나지는 거다. 맨 마지막 장을 공부할 때에는 책 한 권을 통째 외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그래서 아직 『계몽편』을 반 권 정도는 욀 수 있다. “상유천 하고 하유지 하니 천지지간에 유인언 하고 유만물언이라, 일월성신자는 천지소계야오, 강해산악자는 지지소재야니······”이렇게 말이다.

그렇게 『계몽편』을 떼고 『동몽선습』을 들어가고 『사자소학』과 『명심보감』, 『통감』과 『논어』 『맹자』를 차례로 배웠다. 열두 살 이전에 『고문진보』까지 읽었으니 제법 오래 공부를 했던 거다.

아홉 살이었는지 열 살이었는지, 나는 그때 한창 책 속 사자성어에 재미를 붙였는데 마침 아빠를 따라 숭어낚시를 갔다. 아빠 친구분들도 서넛 동행한 자리였다. 숭어는 잘 잡히지 않았고 따라온 아이는 나뿐이라 심심했던 나는 강둑에 무성했던 풀들을 손으로 잡아 뭉텅뭉텅 묶었다. 풀을 묶어 은혜를 갚았다는 ‘결초보은(結草報恩)’, 네 글자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한 번 묶고 앉은걸음으로 조금 옮겨가 또 묶고, 또 묶고.

잠시 후부터 여기서 쿵, 저기서 쿵.

아빠는 턱이 깨졌고 한 번 넘어졌던 아빠 친구는 몇 걸음 못가 또 넘어지고.

“너, 아저씨가 이놈! 한다.”

엉덩이도 몇 대 맞았겠지. 나는 울면서 이게 결초보은인데······ 변명을 했다. 어떤 아저씨는 돈 들여 애 공부시키지 말라 했고, 어떤 아저씨는 키워놨더니 보은 한번 멋지게 한다 했다. 아빠와 아저씨들은 그날 강둑을 기어서 올라갔다. 하도 많이 묶어놔서 일일이 찾아 풀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막 해가 지기 시작하던 그 붉은 강둑 풍경이 여태 선연하다. 강 너머로 아빠가 다니던 공장의 굴뚝들이 나붓나붓 서 있었다. 그때 아빠의 나이가 꼭 내 나이쯤이다. 마당에 채송화를 색색깔로 심는다 해도 이제 더 이상은 자지러지게 즐거워해줄 꼬맹이 딸들도 없는데. 요즘은 숭어낚시도 안 다니는 모양이던데.

(부분생략)


출전_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예담)

음악_ backtraxx - corporateindustrial1

애니메이션_ 박지영

프로듀서_ 양연식


작가_ 김서령 – 소설가. 1974년 경북 포항 출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장편소설『티타티타』산문집『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등이 있음.

낭독_ 우미화 – 배우. 연극 <말들의 무덤>,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 <농담> 등에 출연.

이상구 – 배우. 연극 <리어왕>, <싸리타> <유리알눈>등에 출연.


* 배달하며


낚시터의 심심함을 견디다 못해 풀을 묶는 여자아이. 참 귀엽고 웃기는 장면입니다. 그 나이 때 아이들은 자신만의 고민에 빠져있으면서도 이렇게 뜬금없이 재미있고 기발한 생각을 하기 마련이죠. 하지만 요즘 애들은 짜증을 부리거나 아빠 핸드폰으로 게임만 하겠죠.

아빠와 친구들은 그렇다고 치고 무심코 산책 온, 강둑 근처 사는 사람들이나 나중에 찾아 온 다른 낚시꾼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안 봐도 뻔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자꾸 넘어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을 겁니다. 도대체 풀이 왜 이렇게 묶여있는 거야, 궁금했겠죠. 그나저나 이제 숭어낚시 철입니다. 낚으러 가야겠습니다. 흐흐.


문학집배원 한창훈





한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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