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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첫 줄」

  • 작성일 2016-01-11
  • 조회수 2,555


심보선, 「첫 줄」



첫 줄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써진다면
첫눈처럼 기쁠 것이다.
미래의 열광을 상상 임신한
둥근 침묵으로부터
첫 줄은 태어나리라.
연서의 첫줄과
선언문의 첫 줄.
어떤 불로도 녹일 수 없는
얼음의 첫 줄.
그것이 써진다면
첫아이처럼 기쁠 것이다.
그것이 써진다면
죽음의 반만 고심하리라.
나머지 반으로는
어떤 얼음으로도 식힐 수 없는
불의 화환을 엮으리라.

▶시_ 심보선 -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경」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눈앞에 없는 사람』 등이 있다.

▶낭송 - 장인호 - 배우. 영화 〈고지전〉, 〈해결사〉 등에 출연.

배달하며

첫!은 순서가 아니다. 숫자는 더구나 아니다. 첫은 개벽, 처녀림이 내 뿜는 숨결, 미래, 혁명이다.
아직 오지 않은 당신의 첫 줄은 어디로 부터 오고 있을까. 꽃, 별, 묘지, 바퀴, 사랑의 잿더미를 뒤적이는 손에서 오고 있을까.
어떤 불로도 녹일 수 없는 첫줄! 그리고 반은 어떤 얼음으로도 식힐 수 없는 불의 화환을 엮을 수 있는 첫줄을 위해 ‘나뭇가지가 나뭇가지에게 초록색 성호를 그어주고/ 꽃이 꽃에게 은밀한 꽃말을 속삭여 주고/사람이 사람에게 불멸의 어깨를 빌려준다?’ 이윽고 오고야 말 봄날을 기다린다.
눈부신 첫아기를 꿈꾸며 시인들은 올해에도 기쁘고 슬프게 첫줄을 기다리고 또 기다릴 것이다.

문학집배원 문정희


▶ 출전_『눈앞에 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
▶ 음악_ Dynamateur
▶ 애니메이션_ 이지오
▶ 프로듀서_ 김태형

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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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 태 형
  • 201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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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 태 형
  • 201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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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 태 형
  • 201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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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건

  • 김익재10902

    이 시를 읽고 나는 시인이 시의 첫줄을 쓸 때 느끼는 감정과 첫줄을 잘 쓰기 위한 시인의 감정이 미련하게 느껴졌고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처음으로 할 때는 긴장되고 초조하지만 하는 것의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처음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시는 '시작이 반이다 ',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라는 말들을 우리들 마음 속에 새기게 해주었다. 그리고 평소 무언가를 처음 할 때마다 주저하고 망설이느라 시간을 보내는 나에게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시에 나타내면서 일종의 응원을 해주는 것 같아서 웬지 독특하고 미묘한 느낌이 들었다.

    • 2018-05-29 16:00:27
    김익재1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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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호10514

    이 시는 어떤 글의 첫줄을 쓰려고 하는 화자의 상황을 보여준다. 글의 첫줄을 쓰기 위해 고심하는 화자의 모습을 보면 '처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두려움, 셀렘, 기대감 등을 느낄 수 있다. '시작이 반이다 ',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라는 말들도 있듯이 어떤 일을 시작할 때 항상 고민에 빠져 시간을 하염없이 보내는 나의 심정과 화자의 마음이 비슷한 것 같아 공감이 많이 된다. 자신의 글을 잘 쓰기 위해 애간장을 태우는 화자의 경험을 간접적으로라도 경험한 것 같아서 독특한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글은 계속해서 바뀌어가야 하는 것인데 바꿀 가능성이 큰 첫 줄을 쓰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나와 화자의 모습이 미련하게 느켜진다.

    • 2018-05-29 15:01:00
    이성호1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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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엠스타

    마음에 힐링이 됩니다.

    • 2016-01-24 13:12:57
    포엠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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