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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디아르그, 『오토바이』

  • 작성일 2016-08-18
  • 조회수 1,305

“내 몸은 보드라운 커버를 한 케이스 속의 바이올린 같애”
자기 자신을 단 하나의 명기에 비교하는 여자.


망디아르그, 『오토바이』


그녀가 속도를 높이고 낮추고 할 시간을 가질 사이가 없을 정도로 좁은 간격을 두고 위치한 마을이 하나 둘 셋, 눈앞에 나타났다가 뒤이어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한 마을을 지날 때마다, 마치 스로틀 핸들을 돌려 그녀 자신이 그 마을을 자의로 지워 없애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기를 싣고 굴러가고 있는 오토바이바퀴 타이어의 고무가 화가의 지우개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스피드를 내어 운전하고 가는 대부분의 남녀들이 다소간 체험하는, 지워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주위의 공간에 어떤 우연적인 풍경도 허용하려 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엄격성, 혹은 금욕주의라고나 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수탉이 올라가 있는 저 종루들, 저 공공건물들, 조각된 발코니를 가진 저 집들, 원형의 벤치에 둘러싸인 저 나무들, 저 오래 된 벽들, 여인숙의 벽들에 붙은 저 간판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성화상(聖畵像) 파괴주의자들과도 같은 열광을 가지고 무(無) 가운데로 내던져지는 것이었다. 뒤로 물러나는 풍경이 진짜로 그녀의 소원대로 되었다면, 그것은 강한 부식성의 소다나 가성칼리로 된 세탁제로 문질러버린 화면 같은 것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젤츠라는 조그만 시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홈이 파진 곳에서만 잠시 브레이크를 걸었을 뿐 거리로 들어갔다. 거리는 다행히도 비어 있었지만 음울한 재화(災禍)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것은 그렇게 대뜸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그 인간적인 배경이 갑자기 미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뒤이어 속도를 늦춘 것은, 거리의 건물들이 단단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혹은 자신의 파괴력이 경감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중심가도에서는, 조금 전에 그녀가 본 것과 같은 호프 대를 가득 실은 몇 대의 짐수레가 열 지어 굴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쯤 학교에 가 있어야 할 아이들이 그 호프 대의 끝에 매달려 뛰어가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마치 레베카의 손에 잡고 있는 것이 오토바이의 핸들이 아니라, 무슨 검(劍)이기라도 한 것처럼, 지체 없이 지워져 없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수레 하나씩을 지나칠 때마다 매번 약한 바람이 뺨을 갈기고, 그림자에서 빠져나와 햇빛이 고글 선글래스를 다시 비추게 되는 순간 갑작스런 번쩍임이 그녀의 눈을 멀게 했다. 짐수레꾼들이 그녀의 뒤에서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와 그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욕설을 외쳐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략)
그날 프랑스 쪽 세관 앞에는 아무 차도 서 있지 않았다. 레베카는 세관원들과 비교해서 자기가 말 탄 여자와 같은 자랑스러움으로 느껴졌지만, 그들을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배기관을 약간, 그것도 반향의 한계보다 훨씬 낮은 소리로 부르릉대게 함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알리는 것으로 그쳤다. 그제서야 문이 열리고, 서인도제도인에 틀림없는 세관원 한 사람이 담배색의 바바리코트에 펠트모를 쓴 남자 한 사람과 함께 나타났다. 펠트모를 쓴 남자가 레베카에게 여권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더니, 그것을 살펴본 후 그녀를, 한층 가까이 다가와 다소 놀라움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어허, 부인이야.』 하고 그는 흑인 세관원을 향해 말했다. 『젊은 부인.』
『하지만 젊은 악마일 수도 있지.』 세관원이 말했다.


▶ 작가_ A. P. 망디아르그 - 소설가. 1909년 파리에서 출생. 탐미와 구원을 추구하는 작가. 환상적이고 초현실주의적 색채가 짙은 작품임에도 묘사가 구체적이고 세밀하다. 세부묘사를 위해 작가는 오브제를 자세히 관찰하고 직접 실험해본다고 한다. 1967년 공쿠르상 수상작가로 발표되었을 때 저널들은 그의 수상이 뒤늦었다고 입을 모았다.

▶ 낭독 - 장인호 – 배우. 영화 ‘고지전’, ‘하울링’ 등에 출연.

배달하며

젊음에게 욕망은 절대를 실현하는 창조적 에너지이다.
타협을 거부하는 이 순결하고도 엄격한 에너지는
가솔린이 가득 찬 오토바이를 열렬한 심장처럼 올라타고,
구태의연해진 세상을 무로 만들며 아찔하도록 질주하는
수 백 킬로의 길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세상을
자신과 함께 연인의 발아래 헌정한다.
하이델베르그 네카아르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망루 같은 집,
나이든 연인은, 검은 컴비네이션에 달린 긴 자크를 아래로 주욱
끌어내릴 때 제왕이 된다. 철저함은 한 치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것일까.
이 오토바이는 연인에게 이르기 전에 사고로 공중에서 산화한다.

문학집배원 서영은

▶ 출전-『현대세계문학전집2』(신구문화사)
▶ 음악_ hollywood-acoustic1 중에서
▶ 애니메이션_ 김은미
▶ 프로듀서_ 김태형

서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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