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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인, 「종이 상자」

  • 작성일 2018-10-11
  • 조회수 7,286


[caption id="attachment_273042" align="alignnone" width="640" class="center"]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caption]




김경인|「종이 상자」를 배달하며…



제가 존경하는 철학자 한 분은 부엉이 목각인형들을 모으는 취미가 있으세요. 부엉이는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어깨 위에 앉아있는 새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의 새로 알려져 있지요. 선생님 서재에서 여러 나라의 예쁜 부엉이들을 구경하고 있으면, 에세이스트 데이비드 실즈의 말이 떠오릅니다. “지혜는 없다. 많은 지혜들이 있을 뿐이다. 아름답고 망상적인…”*
여행 중인 지인분들이 이국의 작은 골목 가게에서 부엉이 인형을 발견할 때면 당신 생각이 난다며 꼭 사들고 오신대요. 선생님은 부엉이도 좋지만 먼 곳에서 당신을 떠올리며 가져온 그 마음이 더 좋으시다고.
한 사람을 위해 먼 곳에서부터 긴 시간을 달려온 마음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잔디밭에 풀이 있는 여름을 지나, 그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가을을 지나, 무수한 모양으로 구름들이 흩어지는 모든 계절을 지나 당신을 찾아온 마음이 있어요. 종이 상자처럼 찢기기 쉬운 것을 오래도록 들고 온 마음. 그런 내 마음을 당신도 알지요?

* 데이비드 실즈,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김명남 옮김, 책세상, 2014.

시인 진은영


작품 출처 : 김경인 시집, 『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 민음사. 2012.



문학집배원 시배달 진은영

▪ 1970년 대전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
▪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상담 교수
▪ 2000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저서 『시시하다』,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 사회적 트라우마의 치유를 향하여』, 『문학의 아포토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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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2건

  • 눈물이

    십 년동안, 혹은 십 년전부터 누군가를 줄 상자를 만든다.금방 찢어질 것 같은, 찢겨질 것 같은 종이로. 희망을 지을 뿐 이룰 수 없다고 미리 마음 먹고 시작한 일인듯하다. 그렇다고 희망을 저버릴 수도 없다. 계속 차오르는 기억과 슬픔과 희망을 외면할 수 없어 시찌프스처럼 계속 상자를 만든다. 어딘가에 여기저기 상자를 놓아보지만 희망을 둘 데가 없어보인다. 무기력함과 동시에 낭떠러지에서 나무줄기 한가닥을 온 힘을 다해 붙들고 있는 시인의 마음이 느껴진다. 종이 상자를 만드는 손을 말없이 잡아주고 싶다. 그리고 옆에서 종이 상자를 같이 만들고 싶다.

    • 2019-06-09 06:25:55
    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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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ara

    당신에게 줄 상자를 만든다는 시인.. 나는 웬지 자신에게 줄 상자를 만들고 있다고 들린다 자신에게 무엇을 선물하고 싶은걸까? 상자는 말이 없지만 다 알고 있을 거라고 한다. 오랜 시간, 삶을 지나오며 만든 마음의 궤적들을 담고있는 상자라면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이 詩를 읽으면서 데미안의 답장이 오버랩 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애 한다" 매일의 삶을 생생히 살아내며서 오직 당신을 위해 찢길 상자 하나를 정성스레 만들고 있는 시인의 손길을 상상해본다.

    • 2019-05-08 10:57:25
    h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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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깃털

    당신에게 주려고 만든 종이상자, 십년동안 풀었다 닫았다.. 수없이 상대를 또 때론 자신을 생각하며 이곳이 저곳이 좋을지 .. 오고가는 변덕스런 날씨같은 마음을 바라보고는 갑자기 모두 부질없어져 슬퍼지기도 했겠지.. 그래도 십년전, 또 십년후에도 한곳을 향해 나가는 마음,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흔들어 떨쳐내려해도 다시 피어오르는 연기같은 그 마음. 누군가 사랑이 많은 한사람이 내게 그런 상자를 만든다면 난 무척 아플것같다

    • 2019-05-08 07:10:23
    깃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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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산I

    종이로 상자를 십년이나 만든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왜 하필 종이일까? 라는 의문부터 안에 담긴 것들은 왜 계속 바뀌고 빨강 리본은 왜 그리워하는 걸까? 여러가지가 궁금했다. 이것이 누군가를 위해 찢기기 쉬운 것을 오래도록 들고 온 마음이라는 걸 참고로 읽은 후 생각해보았다. 그래도 이해되지 않는 게 십년이나? 라는 것이다. 나는 십년이나 무언가를 만들어서 남에게 줄 수 있을까? 나를 위해 십년 공부를 할 순 있을 것이다. 이건 내가 지금까지 너무 까다롭고 냉철하게 사랑에 대해 생각하며 살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내가 추구하는 대상은 있고, 매해 조금씩 바뀐다. 그런 이를 향해서는 언제나 종이상자를 만들 수 있단 마음이 있는데 그런 이가 나타나도 나는 상대가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따져 볼 것 같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너무나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노끈 아래의 물고기 시체를 받든 말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지만...왜 우는 게 상대방인 걸까? 근데 생각을 하다보니 내가 이 시에 꼭 절절하게 공감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다. 왜냐하면 이 시를 쓴 시인의 정서와 나의 정서는 다를 수 있고 시인이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니까. 나는 누가 나를 위해서만 십년이나 상자만 만들었다? 난감한 표정...이 될 것 같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심지어 지금 만족하는 것도 아닌 리본을 그리워하는 상자만 만든다? 그냥 더이상 말을 할 수 없다. 물체가 아닌 살아 있는 존재로, 가변성 있는 실체 대 실체로 만나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 십년 동안 만든 상자가 있다고 해도 나를 만나면서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치운 후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자신감 있어 진 후 얘기해 준다면, 오히려 그게 더 고마울 것이다.

    • 2019-05-08 02:17:23
    한산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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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바토디

    아름다운 잔디밭은 이제 없고, 모두들 자러 갈 법한 이 시간. 내가 당신을 위해 준비했던, 당신만을 위해 만들었던 상자는 세월을 담아 너덜너덜 찢겨질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고... 이젠 무성한 포도넝쿨도, 어여쁜 빨강 리본도 변질되어 싸구려 노끈과 상자를 적시는 물고기 시체 뿐이더라도. 다시 십 년 후의 당신을 그리며, 내가 준비한 상자를 언젠가는 찢어 줄 당신을 그리며 또 종이 상자를 만드는 사람의 마음. 이런 밝은 5월에, 모두들 즐거워 보이고 공기마저 산뜻한 계절에 외따로 떨어져 음울한 상상에 빠져있던 내가 찾아 헤매던 시.

    • 2019-05-07 22:40:42
    쿠바토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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