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돈,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중에서
- 작성일 2018-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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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돈│『빛은 어디에서나 온다』를 배달하며…
‘어디서 본 장면인데’라고 생각했는데 본 게 아니라 겪은 거였습니다. 오래 전 지하철 3호선 안에서 누군가 저렇게 제 이름을 부른 적이 있으니까요. 그 사람은 하강중인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이제 막 출발하려는 열차 안으로 뛰어든 저희 어머니였습니다. 급한 성격 탓에 자식이 뒤에 오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몸을 날렸다, 뒤늦게 무언가를 깨닫고 비명을 지른 장본인이었지요. 어머니는 서울 시민들로 가득 찬 열차 안에서 큰 소리로 제 이름을 연거푸 불렀습니다. 촌부의 후회와 절박 당혹이 뒤섞인 외침이었지요. 내가 내 이름으로 불린 것뿐인데 저는 왜 얼굴이 확 달아올랐을까요. 그건 아마 우리가 규칙을 깼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익명의 공간에서 나 혼자 고유명사로 불렸다는 사실, 아주 짧은 순간 우리 가족의 개성이 만천하게 드러났다는 자각 때문이었지요. 한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이 장면을 읽다 그때 일이 떠올랐습니다. 시공을 찢고 나온 비명. 신세기랄까 아케이드, 무빙워크 리듬을 단숨에 깨트려버리는 인간의 저 유구한 동물성을 보고요. 훗날 어머니의 호명이 제게 애잔하게 윤색된 것처럼 당대가 첨단이라 믿은 첨단, 미래라 믿은 미래를 택배상자 보듯 오도카니 내려다봅니다. 조금만 떨어져 보면 희극적 색채를 띨 수밖에 없는 당대의 욕망과 전망 때문일까요? 원경과 근경을 동시에 확보한 채 실소와 연민을 자아내는 화자의 목소리가 낯선 듯 친근합니다. 천구백육칠십 년대 인물들이 언젠가 만난 적 있고 곧 다시 조우할 미래의 나처럼 느껴집니다.
소설가 김애란
작품 출처 : 김봉곤 외, 『소설 보다 봄-여름』, 145-146쪽, 문학과지성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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