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우, 「가시」
- 작성일 2019-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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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우 | 「가시」를 배달하며…
아침에 일어나 얼굴을 씻는다. 살 속에 묻힌 뼈가 섬뜩하게 손끝에 와 닿는다. 내 안의 폐허다. 도리질하듯 다시 물을 뿌린다.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폐허는 이내 잊힌다. '다소곳이', '우아하게' 단장을 하고 출근 준비를 한다. 망각은 오늘도 평안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 시는 그러나 '한시도 쉬지 않고 저를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를 직면하는 것이야말로 감추어진 존재의 비밀을 마주하는 일이라고 노래한다. 가시가 버려질 때 버려지는 것은 나의 삶이다. 가시는 만지면 아프지만 폐허를 밀어내고 무시하기에 바쁜 삶이 가식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각성하는 경험을 선물한다. 죽음을 은폐함으로써 소외된 삶을 '선연히 드러내는' 가시의 통증이 얼마나 눈부신가. 가시도 잎이다. 겨울나무들이 가시처럼 하늘로 뻗어가고 있다.
시인 손택수
작가 : 남진우
출전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문학과지성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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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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