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찬호, 「눈사람」
- 작성일 202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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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 「눈사람」을 배달하며
한여름 밤, 열차는 자정을 향해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 내 옆자리 창가에는 털모자를 쓰고 목도리까지 두른 겨울 눈사람이 앉아 있었다. 찌는 듯한 여름이었는데, 눈사람은 엄혹한 겨울의 감옥에 갇힌 채 어느 계절로도 흘러가지 않았다. 겨울전쟁에서 패하고 그는 생의 그 어떤 변전(變轉) 가능성도 몽땅 몰수당하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는 겨울의 얼얼한 마비상태에서 도무지 깰 수가 없다. 그는 겨우 견디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지난겨울의 악몽을 깨워 한여름 밤의 현재로 그를 옮겨놓으면, 간신히 붙들고 있는 존재의 형상마저 세계의 커다란 입에 삼켜져 용해되어버릴 것만 같다. 우리는 서로를 지키느라 이 무거운 침묵을 깰 수도 없었다.
밤의 창문에서 나는 이따금 겨울전쟁에서 다친 그 눈사람을 다시 만난다. 검은 거울은 그렇게 그를 내게로 돌려보낸다. 나는 떠올린다. 자정을 향해 끝없이 달리는 생의 열차에서 우리가 나란히 앉아 서로의 옆을 지켰던 어느 한여름 밤의 꿈을…….
시인 김행숙
작가 : 송찬호
출전 :『분홍 나막신』, 문학과지성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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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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