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 「백색 공간」

 

 

 

안희연 ┃「백색 공간」을 배달하며

 

    흰 종이에 글을 쓴다. 이를테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쓴다. 그렇게 쓰면, “눈앞에서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글쓰기의 백색공간에서는 내게 말을 걸고, 항의를 하고, 가시권 밖으로, 이 세계의 극지로 떠나는 사람이 태어난다. 그 사람은 유리창 안쪽에 물러나 있는 나를 깨뜨려 어디로 데려가려는 걸까. 내가 그를 썼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나를 쓴다. 나는 그를 더 많이 더 깊이 읽어야 하는데, 자칫 그를 잃어버릴 것만 같다.
    시는 백색공간을 자기 말로 점령하지 않는다. 시의 언어는 백색공간에 내려앉으면서 또 다른 백색공간을 만든다. 백색공간에서 시가 움트고, 시에서 백색공간이 펼쳐지고 번진다. 시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페이지들을 펄럭이며 읽히길 기다린다. 그러므로 당신이 읽는 시가 당신이 쓰는 새로운 시가 되길. “새로운 옆”에서 당신이 쓴 시가 늘 궁금했다.

 

시인 김행숙

 

작가 : 안희연

출전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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