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 「두번째 강물」
- 작성일 2020-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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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두번째 강물」을 배달하며
때로 나는 내가 강가에 사는 사람 같아. 가벼운 저녁 산책을 나왔다가 흘러가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저토록 성실하게 강물은 흘러가는데 내 얇은 그림자는 흐르지 않지. 그럴 때면 전생이나 후생의 메아리마냥 “나는 같은 강물에 두 번 손을 담글 수 있네” 라고 노래 부르게 되지. 어제 신문을 오늘 오후에 읽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듯이 내일 신문을 오늘 아침에 읽었어.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 늦은 저녁상을 차릴 거야. 식탁 위에 물 글씨를 쓰는데, 이곳은 너무 깊어 아직도 바닥에 닿질 않는구나. 그래도 우리는 저 강물의 시간처럼 바다 쪽으로 계속 흘러가고 있는 걸까. 우리는 그림자처럼 흐르지 않는데. 창밖에는 어둠이 내려 검은 거울이 되는데. 검은 거울은 오늘밤에도 “나의 두번째 얼굴”을 창문밖에 하염없이 세워 두는데.
시인 김행숙
작가 : 이장욱
출전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문학과지성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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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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