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희, 「트렁크」
- 작성일 20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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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희 ┃「트렁크」를 배달하며
나는 이따금 은밀하게 이런 꿈을 꾼다. 거대한 가방이 필요한 긴 여행을 떠난다. 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다. 커다랗고 무거운 가방을 끌고 다니느라 나는 점점 지친다. 그러다가 나는 가방의 크기를 줄여나가게 된다. 차츰 몸피가 졸아 들어가던 가방이 마침내 한 점 빛처럼 사라지는 곳에서 나는 과거를 전생처럼 끊고 새로운 내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내가 살아가는 곳을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꿈을 깨면 언제나 거대한 가방은 남아 있다. 커다란 트렁크처럼 “이렇게 질겨빠진, 이렇게 팅팅 불은, 이렇게 무거운” 나는 “수취거부로 반송되어져” 있다. 버려도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이 가방을 나는 어디든 끌고 다녀야 하는 것이다.
시인 김행숙
작가 : 김언희
출전 :『트렁크』(세계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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