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례, 「가물가물 불빛」


 

가물가물 불빛 - 최정례
 
당신과 이젠 끝이다 생각하고 갔어
가물가물 땅속으로 꺼져갔어
왕릉의 문 닫히고
석실 선반 위에 그 불빛
얼마 동안 펄럭였을까
왕이 죽고 왕비가 죽고
나란히 누운 그들
칼을 차고 금신발을 신고
저승 벌판을 헤맬 동안
그 불꽃 혼자 어떻게 떨었을까
당신 나 끝이야
이젠 우리 죽은 거야
 
작가 : 최정례
출전 : 『붉은 발』(창비, 2001)

 

 

최정례 ┃「가물가물 불빛」을 배달하며

 

    사랑은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관계의 죽음이든 육체의 죽음이든 별리(別利)는 그간 나눈 모든 것들을 땅속 깊이 묻는 일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이곳에서도 사랑의 시간은 다른 형태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당신과 이젠 끝이다 생각”한 이후에도 한동안 불빛이 펄럭이는 것처럼. 사위고 쓰러지고 무너지는 것들로 가득한 와중에서도 썩지 않는 어금니 하나가 반짝 빛을 내는 것처럼.
    이 작은 빛은 또 얼마나 유구한 시간을 혼자 헤매게 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하나 분명한 것은 모든 것들 위로 “새풀”이 돋고 “삐죽삐죽 솟고 무성해”지는 때가 분명히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쯤 가면 우리도 “당신 나 잊고 나도 당신 잊고” 하고 말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 박준

 

작가 : 최정례

출전 : 『붉은 발』(창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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