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기, 「心境(심경)12- 허수아비」


心境(심경)12- 허수아비 -이창기

오늘도
온종일
까치 산비둘기와 함께
콩밭에서 살았습니다
늘 고만한 키
생전에 입던 잠바
색 바랜 운동모를 쓰고
먼발치에서 보면
누구라도 
신씨 노인이 이 땡볕에 또 밭에서 일하네
라고 중얼대며 오갔을 겁니다
화투놀이 끝에 격조했던 읍내 사는 친구 한 분은
버스를 타고 마을 회관 앞을 지나다
비탈밭에 수그리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에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지켜보다
끝내
말을
걸고
말았
답니
다

작가 : 이창기
출전 :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문학과지성사, 2005)

 

 

이창기 ┃ 「心境(심경)12- 허수아비」을 배달하며

 

    그를 보았습니다. 달리는 버스 창밖으로 스치듯 바라본 모습이지만 늘 입던 잠바와 자주 쓰던 색 바랜 모자, 그가 분명합니다. 몇 해 전 화투놀이 끝에 사이가 요원해진 친구. 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반가움은 이 서먹하고 먼 마음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버스를 멈춰 세웁니다. 서둘러 내립니다. 조금 전 지나온 길을 되돌아 밭고랑 사이를 건너 친구에게 향합니다.
이 순간 작품 속 인물에게는 무슨 생각들이 스쳐 지났을까요. 어떤 말들을 내려 앉혔다가 다시 날려보냈을까요.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이냐고 운을 뗄까요? 오래 전 격조했던 일을 두고 사과를 할까요. 아니면 이 사람아 왜 이런 땡볕에 일을 하냐고 걱정어린 핀잔부터 꺼낼까요. 드디어 수그리고 있던 친구가 저 앞에 있습니다. “어이 신씨”하고 친구를 부릅니다. 반갑게 부릅니다.

 

시인 박준

 

작가 : 이창기

출전 :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문학과지성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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