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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진, 「장식과 무게」 중에서

  • 작성일 2022-03-17
  • 조회수 737


장식과 무게 중에서 - 이민진

정우신은 어떤 사람이었나. 
이모의 실종 후 이모와 알고 지낸 사람들은 실종이라는 사건에 포함된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저마다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사라진 사람은 누구인가. 왜 그리고 어떻게 사라졌나. 이에 사람들은 뭐라 답했던가. 외삼촌은 불시에 기습한 적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는 군인처럼 나를 빤히 응시했다. “아가씨가 제 속을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었잖아.” 외숙모의 대답은 이모에 관해서 잘 모르는 건 제 탓이 아니라는 변명처럼 들렸다. 어떻게든 이해하려 했던 그간의 노력이 실은 방관이 아니었는지,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최선이 아니었던 건 아닌지, 지난 시간을 되짚던 어머니의 마음에 솟아난 건 당신을 향한 의구심이었다. “좋은 사람이었지.” 이모의 대학 동문이자 번역 회사 이사인 규호 아저씨의 대답은 모호하기 그지없었다. 반면, 모호하지만 선명한 말도 있었다. “다들 집으로 돌아간 저녁에 혼자 공원에 남아 보물찾기를 하는 소녀 같았습니다.” 리하르트는 직접 만들었다는 밤나무 의자에 앉아 이모와 알고 지낸 9년을 회상했다. 말을 마친 뒤에도 리하르트의 시선은 덫에 붙잡힌 것처럼 한참을 가시덤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나는 그런 그를 따라 가시덤불을 살폈으나 정확히 무엇이 그의 시선을 붙잡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처럼 한 사람에 관한 진술이 저마다 다른 것은 그 판단의 전제가 되는 일화들이 각자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유년에 이모는 골판지 상자로 등장했다. 그 상자는 언제나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듣던 이모의 존재를 증명하는 지표였다. 이모가 독일에서 보낸 상자는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에 걸쳐 내게 도착했다. 운송장과 테이프, 스티커로 도배된 상자는 꼭 어느 한 곳이 찌그러져 있었는데 상자가 거친 긴 여정이 피로를 표상하는 듯했다. 내게는 상자를 개봉하기 전에 치르는 의식이 있었다. 양손을 저울 삼아 상자의 무게를 가늠하는 것이었다. 상자가 크고 무거울수록 기대치도 상승했다 .이윽고 문구용 칼로 상자를 가르면 그림책과 시리얼, 비타민, 감기약, 옷, 이불, 헤드폰 같은 물건들이 나왔다. 지금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아직도 사용 중인 펠리칸 만년필이 아니라 그 물건들을 감싸고 있던 골판지 상자다. 볼품없는 그 상자야말로 지금 생각하면 가장 신비로운 물건이었다. 얼마 안 가 밝혀질 상자의 시시한 수수께끼는 언제나 어린 내게서 비합리적인 기대를 끌어냈고 상자에 들은 물건들의 가치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추측하는 동안 제일 높았다. 이내 그것은 기쁨과 실망으로 바뀌었고 확인과 동시에 상자는 버려졌다. 
실종 신고 당시, 그런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경사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어머니의 말을 잘랐다. 그도 그럴 게 이모와 관련된 기억 대부분은 너무 먼 옛날에 머물렀다. 우리가 경찰에게 건넨 증명사진은 이모의 책상 서랍에서 찾은 하늘색 사진관 봉투에 들어 있던 것이다. 이모의 실종이 길어지면서 나는 그 사진으로 인해 이모를 찾지 못한 게 아닌지 의문을 품었다. 증명 사진은 분명 사실적이었으나 내가 기억하는 이모의 모습과는 달랐다. 단정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 속 이모는 건물의 파사드와 같이 바깥에서 어떻게 보일지 치밀하게 계산된 결과물 같았다. 그 사진은 거울과 같은 불투명한 속성을 품고 있었다. 로비 안쪽을 보려는 내 모습만 비추던 광화문 고층 빌딩의 유리창처럼 자신을 완전히 드러낸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 관해선 아무것도 내보이지 않았다. 


작가 : 이민진
출전 : 『장식과 무게』 (문학과지성사, 2021)  p.51-p.53

 

 

이민진 ┃「장식과 무게」을 배달하며

 

    정우신은 어떤 사람일까요.
여러 사람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정우신은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좋은 사람이면서 보물찾기를 하는 소녀 같은 면모를 지닌 사람이기도 합니다. 골판지 상자 같은 사람이기도 하고요. 이런 다양한 진술을 통해서 ‘정우신’이 실제로 어떤 존재인지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보다는 정우신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조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형으로 친다면 사람은 종이인형처럼 앞과 뒤가 납작한 존재가 아니라, 뜨개로 짜서 솜을 잔뜩 넣은 편물 인형에 가깝습니다. 앞에서 보는 모습과 뒷모습, 옆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제각기 다르게 보이는 존재이지요. 그처럼 사람은 보는 위치와 그간의 관계, 함께 나눈 경험에 따라 다른 면모로 기억되기 마련입니다. 내게는 좋은 사람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고, 내게는 몹시 서툰 사람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섬세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증명 사진’이라는 말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규격화된 사진을 보통 증명 사진이라 칭하는데, 아무리 잘 아는 사람도 반듯한 증명 사진을 통해서 보면 낯선 사람처럼 어색해 보이기 마련입니다. 한 존재를 증명하는 일은 정해진 규격이 아니라 그 사람과 나눠 가진 경험과 기억, 추억으로 할 수 있는 일이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소설가 편혜영

 

작가 : 이민진

출전 : 『장식과 무게』 (문학과지성사, 2021) p.51-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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