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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와온(臥溫) 가는 길」

  • 작성일 2022-04-07
  • 조회수 1,576




 와온(臥溫) 가는 길 -곽재구 보라색 눈물을 뒤집어쓴 한그루 꽃나무*가 햇살에 드러난 투명한 몸을 숨기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궁항이라는 이름을 지닌 바닷가 마을의 언덕에는 한 뙈기 홍화꽃밭**이 있다 눈먼 늙은 쪽물쟁이가 우두커니 서 있던 갯길을 따라 걸어가면 비단으로 가리어진 호수가 나온다 * 멀구슬나무라고 불리며 초여름에 보라색 꽃이 온 나무에 핀다. 꽃이 진 뒤 작은 도토리 같은 열매가 앵두 열듯 열리는데 맛은 없다. 겨울이 되면 잎 진 가지에 황갈색 열매가 남는다. 눈이 온 산야를 덮으면 먹을 것이 없어진 산새들이 비로소 이 나무를 찾아와 열매를 먹는다. 남녘 산새들의 마지막 비상식량이 바로 멀구슬나무 열매다. 깊은 겨울 누군가를 끝내 기다려 식량이 되는 이 나무의 이미지는 사랑할 만한 것이다. ** 삼베나 비단에 분홍빛 염색을 할 때 쓰인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할 때 연분홍의 근원이 바로 이 꽃이다. 김지하 시인은 천연 염색으로 빚어진 한국의 빛들을 꿈결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홍화로 염색한 이 분홍빛이야말로 꿈결 중의 꿈결이라 할 것이다. 작가 : 곽재구 출전 : 『와온 바다』 (창비, 2012)



곽재구 ┃「와온(臥溫) 가는 길」을 배달하며


시에 등장하는 와온은 전남 순천에 있습니다. 해질녘에 이곳에 가면 말 그대로 이 세상 따뜻한 것들이 모두 모여 있는 듯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작품에서는 이곳을 “비단으로 가리어진 호수”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바다입니다. 육지 깊숙하게 바다가 들어와 있는 잔잔한 ‘만’이어서 호수라 했겠지요. 그렇다면 시에 등장하는 궁항은 어디일까요. 궁항은 전남 여수에 있습니다. 궁항에서 와온까지 이어지는 길을 두고 요즘 사람들은 남파랑길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하지만 이것이 꼭 도착에만 방점이 찍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시에 등장하는 궁항에서 와온바다까지의 거리는 약 15km, 자동차를 타면 10분 조금 넘는 시간에 닿을 수 있지만 걸어서 가면 네 시간 가까이 걸어야 하는 비교적 먼 길입니다.
하지만 내가 좋아서 선택한 길이고 이 길 위에서 벌어지는 풍경들을 사랑한다면 누구라도 지체하지 않고 걷는 일을 선택할 것입니다. 차근차근 걸어 나가면서 느끼고 발견하게 되는 것들과 보폭을 맞추면서.


시인 박준


작가 : 곽재구

출전 : 『와온 바다』 (창비, 2012)



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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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나음

    반쯤 왔나봅니다..후회는 없지만 잠시 두려움은 느끼고 있을 무렵..시인께서 하신 말씀대로 다시 길을 믿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고마워요 시인님~!

    • 2022-04-07 16:54:34
    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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