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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통영」

  • 작성일 2022-04-21
  • 조회수 1,231

 


통영 -도종환

보라색 눈물을 뒤집어쓴 한그루 꽃나무*가 햇살에 드러난 투명한 몸을 숨기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궁항이라는 이름을 지닌 바닷가 마을의 언덕에는 한 뙈기 홍화꽃밭**이 있다
눈먼 늙은 쪽물쟁이가 우두커니 서 있던 갯길을 따라 걸어가면 비단으로 가리어진 호수가 나온다

* 멀구슬나무라고 불리며 초여름에 보라색 꽃이 온 나무에 핀다. 꽃이 진 뒤 작은 도토리 같은 열매가 앵두 열듯 열리는데 맛은 없다. 겨울이 되면 잎 진 가지에 황갈색 열매가 남는다. 눈이 온 산야를 덮으면 먹을 것이 없어진 산새들이 비로소 이 나무를 찾아와 열매를 먹는다. 남녘 산새들의 마지막 비상식량이 바로 멀구슬나무 열매다. 깊은 겨울 누군가를 끝내 기다려 식량이 되는 이 나무의 이미지는 사랑할 만한 것이다.
** 삼베나 비단에 분홍빛 염색을 할 때 쓰인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할 때 연분홍의 근원이 바로 이 꽃이다. 김지하 시인은 천연 염색으로 빚어진 한국의 빛들을 꿈결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홍화로 염색한 이 분홍빛이야말로 꿈결 중의 꿈결이라 할 것이다.

작가 : 도종환
출전 :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창비, 2011)

 

 

도종환 ┃「통영」을 배달하며

 

    통영의 풍경을 넓고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작품 속에는 통영을 사랑한 윤이상과 이중섭이 등장하는데요. 통영하면 빼놓을 수 없는 예술가입니다. 백석 시인과 박경리 소설가도 떠오르고요. 아울러 통영에는 제가 미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공예가들이 살았습니다. 갓장이가 만드는 갓, 나전장의 자개장롱, 두석장의 문갑, 소목장의 소반 등등. 통영에서 나고 자란 박경리 선생은 통영의 수공업이 발달한 까닭을 이렇게 설명해낸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바다에 나가서 생선배나 찔러먹고 사는 이 고장의 조야하고 거친 풍토 속에서 그처럼 섬세하고 탐미적인 수공업이 발달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바다 빛이 고운 탓이었는지 모른다. 노오란 유자가 무르익고 타는 듯 붉은 동백꽃이 피는 청명한 기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고 저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내가 눈으로 담아낸 아름다운 것들이 그냥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요. 꽃피고 꽃 지는 이 봄날, 우리는 더 부지런하게 주위를 둘러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시인 박준

 

작가 : 도종환

출전 :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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