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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민, 「기념」

  • 작성일 2022-05-12
  • 조회수 1,084

 


기념 -이종민

창문에 드는 햇빛에 눈을 뜹니다. 오전 열한시. 집 앞을 유치원생들이 지나갑니다. 옆 사람 손을 꼭 잡고 따라와야 해요.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고요. 간밤에 한번 끓여놓은 미역국을 놓고 늦은 아침을 먹습니다. 잘 지내고 있나요. 숟가락을 들면 묻고 싶습니다. 창밖에 새벽 비가 마르고 있습니다. 회색 콘크리트 바닥 위에는 검고 작은 물 자국이 군데군데 찍혀 있을 거고요. 국물에 마지막 한톨까지 긁어 먹으면 해가 중천입니다. 설거지 마치고 빨래 탁탁 털어 베란다로 가져가면 유치원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보여요. 옆 사람 손을 꼭 잡고 선생님을 따라서. 작은 발자국이 희미합니다. 빨래는 잘 마르는 중입니다. 방에는 아직 개지 않은 이불이 펴져 있고요. 한명도 빠짐없이 아이들이 유치원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작가 : 이종민
출전 : 『오늘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 (창비, 2021)

 

 

이종민 ┃「기념」을 배달하며

 

    작품 속 주인공은 기념일을 맞은 듯합니다. 어젯밤 우르르 끓여두었던 미역국을 먹는 것을 보니 아마도 생일이 되겠지요. 다만 누가 생일을 맞이했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일 수도 있고 혹은 “잘 지내고 있나요. 숟가락을 들면 묻고 싶습니다.”라는 생각이 가닿는 이의 생일일 수도 있지요. 어쩐지 이 기념일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합니다. 늦은 오전 눈을 떴고요. 집 앞으로 유치원생들이 지나가고 새벽에 내린 비는 마르고 있습니다. 미역국 국물에 말은 밥을 한 톨까지 잘 긁어먹고 설거지를 마치고 빨래를 해서 탁탁 털어 널면 벌써 정오를 지납니다. 야외활동을 마친 유치원 아이들이 옆 친구의 손을 꼭 잡고 다시 돌아가는 시간. 특별한 풍경은 아니지만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도 없지요. 기념하고 싶을 만큼.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우리가 주로 생일에 먹는 미역국, 이것처럼 만들기 쉬운 음식도 또 없습니다. 물에 불린 미역과 국거리에 참기름과 간마늘을 넣고 조금 볶다가 물이나 육수를 넣고 끓이면 되는 것이니까요. 소금이든 간장이든 간을 맞추면서. 어쩌면 이렇게 쉬운 음식이기에 먹을 때마다 뭉근한 슬픔이 느껴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시인 박준

 

작가 : 이종민

출전 : 『오늘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 (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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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나음

    미역국 같은 카네이숀 바구니 하나를 발코니에 둔 채, 해는 이미 중천을 훨씬 지나 지고 없는데 활짝 핀 분홍 카네이숀들은 아직 그곳에 그대로 피어 있어요. 드려야 할 분이 있어 미리 준비해 두었는데 여행 중이시라고 해요. 저렇게 멀뚱히 있는 꽃바구니를 들고 달려가 만나고 싶은 은사님도 계시고 마음 속 선생님도 계신데 갈 수가 없어요..해는 지고 받을 분도 없고 드리고 싶은 분은 계신데 꽃바구니가 미역국 한 그릇처럼 있는 오늘 스승의 날이에요.. 그 날을 기념하지도 못한 채 괜히 서글픈 마음으로 있다가 기념이라는 시를 봅니다..참 잘 어울리는 날의 시, 배달해 주신 박준 시인님 고맙습니다.

    • 2022-05-15 22:30:06
    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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