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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높은 봄 버스」

  • 작성일 2022-05-26
  • 조회수 1,667

 


높은 봄 버스 -심재휘

계단을 들고 오는 삼월이 있어서 몇걸음 올랐을 뿐인데 버스는 높고 버스는 간다 차창 밖에서 가로수 잎이 돋는 높이 누군가의 마당을 내려다보는 높이 버스가 땀땀이 설 때마다 창밖으로는 봄의 느른한 봉제선이 만져진다 어느 마당에서는 곧 풀려나갈 것 같은 실밥처럼 목련이 진다 다시없는 치수의 옷 하나가 해지고 있다

신호등 앞에 버스가 선 시간은 짧고 꽃이 지는 마당은 넓고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그다음 가사가 생각나지 않아서 휘날리지도 못하고 목련이 진다 빈 마당에 지는 목숨을 뭐라 부를 만한 말이 내게는 없으니 목련은 말없이 지고 나는 누군가에게 줄 수 없도록 높은 봄 버스 하나를 갖게 되었다

작가 : 심재휘
출전 :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창비, 2022)

 

 

심재휘 ┃「높은 봄 버스」을 배달하며

 

    계단 몇 개 오른 것 같은데 벌써 봄이 갑니다. 피어야 할 봄꽃들은 진작 다 피었고 이제 지는 일만 남은 것이지요. 제가 봄 내내 부지런히 입었던 외투의 소매 끝단도 많이 해졌습니다. 사실 처음 이 외투는 제 마음에 꼭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한철을 같이 지나보냈다는 이유로 좋아졌습니다. 다시 계단 몇 개를 내려와야 하는 시간, 저는 외투를 깨끗하게 빨아서 늦은 봄의 햇빛 아래 말린 다음 어두컴컴한 서랍에 넣어둘 것입니다.

    이렇게 마지막 인사와 새날의 기약을 한데 두고 싶습니다.

 

시인 박준

 

작가 : 심재휘

출전 :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창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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